침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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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백제의 제15대 군주이자 건길지. 선왕 근구수왕의 장남이다.
2. 생애[편집]
침류왕의 업적으로 거의 유일하면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으로 백제가 드디어 불교를 공인한 기록이다. 384년 동진을 거쳐 온 인도 출신 승려인 마라난타를 대접하여 불교를 수입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때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지만 그 전에도 고구려 승려들을 통해 불교가 전래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385년 2월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두었다.
한편 385년 11월 갑작스레 승하했는데 아들로 훗날 왕이 되는 부여아신이 있었지만 어려서 동생 부여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이 2년밖에 안되기 때문에 업적 자체가 미미한 편.
그런데 꽤 젊은 나이에 승하했을 것으로 추측되기에 정쟁에 휘말려 시해당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불교 수입으로 인해 토속신앙을 기반으로 한 보수 세력에게 반발을 사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는데 신라나 왜국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공인하는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 사건과 같은 토속 신앙 세력과 있었던 갈등이 백제에도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당시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동진의 부탁으로 요서 지방으로 직접 출병하여 싸우다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침류왕 사망 후 일본이 이전까지 백제가 우위를 점해오던 대일관계를 뒤집으려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순전히 《일본서기》에 의하면 할아버지인 근초고왕이 손자인 침류왕에게 칠지도를 보여주며 성스러운 조정(왜국)을 섬기라는 식의 윤색을 해놓았기 때문.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아들 아신에게 물려줄 왕위를 동생 진사에게 빼앗겼다."고 적혀 있다. 학계에서도 침류왕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승하했을 뿐만 아니라 침류왕 사후 왕위가 장자인 아신에게 돌아가지 않고 동생 진사에게 넘어갔다는 점에서 진사왕이나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침류왕을 시해한 후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을 유력하게 보고 있다.
3.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침류왕 본기>
一年夏四月 침류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사절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다
一年秋九月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하다
二年春二月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에게 도첩을 주다
二年冬十一月 침류왕이 죽다
재위 기간은 고작 2년이지만 기록이 무려 5줄이나 된다.
4. 기타[편집]
- 백제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었기에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왕이다.[2]
- 재위 기간이 짧지만 한 가지의 중요한 업적으로 기억되는 군주라는 점에서 백제 문주왕,[3] 발해 성왕,[4] 고려 창왕[5] 과 공통점이 있다.
- 훗날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고구려의 소수림왕, 신라의 눌지 마립간[6] 과 더불어 삼한에 불교를 가져와 세상을 어지럽힌 불교 3형제(...)로 꼽히면서 "부처님 믿는답시고 난리를 치더니 1년만에 칼맞아 죽기나 하고 불교 믿어봤자라니까?"라는 식의 유교 짱짱맨 주장의 근거로 엮이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동사강목》을 편찬한 순암 안정복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언급이 나온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기조의 연장선상으로 보면 될듯. 실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불교를 검색해보면 기승전불까 수준으로 불교를 씹는 기록이 한 트럭 쏟아지는데다[7] 조선시대에 목을 자른 부처상이 전국 여기저기서 발견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또 정작 왕족, 귀족 중엔 불교신자들도 제법 있었으니[8] 결국 까는 까대로, 빠는 빠대로 논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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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 근구수왕의 출생년대 추정을 기반으로 추정[2] 불교 수용 내지 공인은 전진의 순도가 고구려 소수림왕(372년), 동진의 마라난타가 백제 침류왕(384년),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법흥왕(527년) 순.[3] 3년 재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4] 1년 재위,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5] 1년 재위, 박위의 쓰시마 정벌이 창왕 재위 기간에 이루어졌다.[6]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최종적으로 공인한 법흥왕을 눌지 대신 3형제로 꼽아서 까기도 한다.[7] 이는 조선 왕조가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적 질서를 명분으로 창업한 나라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의 반불교 기사 중에는 이유가 있는 반불교도 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의 가치관에서 벗어난 현대인이 보기엔 무리한 비판도 많긴 하다.[8] 당장 태조 이성계부터가 불교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