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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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산둥성 동부, 산둥반도에 위치한 항구도시.
비공식적으로 한국 한자음 발음을 따라 청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경상북도 청도군과 헷갈릴 수 있다. 공교롭게도 경상북도 청도군의 청도 또한 중국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면 '칭다오'다. 우선, 한자가 다르니까 어느 정도 구별은 된다.
한국과 비행기로 1시간[1] 이다.
2. 역사[편집]
도시의 이름은 19세기 말 이전의 현재의 칭다오 스난구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내주부 교주 즉묵현의 평범한 어촌 청도진으로, 마을이 면해있는 만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청도(지금의 샤오칭다오)로부터 이름을 따 왔다. 지금은 칭다오시가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자오저우만 일대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항구 만들기 딱 좋은 위치로, 춘추전국시대부터 송대에 이르기까지 항구도시가 번성하였으나, 대체로 만 안쪽인 교주(지금의 자오저우시), 즉묵(지금의 지모구) 등이 번성했고 만 밖에 있는 청도진은 그다지 번성하지 못하였다.
전한시대부터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칭다오 시가지(자오저우만 동안) 일대는 불기현(不其县)으로 불렸으며, 고대부터 영산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 라오산을 끼고 있어 그럭저럭 이름은 있었으나 주변 대도시인 낭야(현재의 황다오구 랑야진 일대)나 즉묵(即墨, 지모)에 비해서는 지명도가 밀렸다. 수나라 때부터는 원래 핑두시 쪽에 있었던 즉묵현과 불기현이 합쳐지고 그 치소가 지금의 지모구청에 설치되면서 칭다오만 일대도 즉묵에 속하게 되었다. 부산과 동래의 경우와 비슷하게 현재는 칭다오가 넘사벽으로 커졌고 즉묵은 칭다오의 현급 도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세기 말 청도진이 위치해 있던 자오저우 만(胶州湾, 교주만) 어귀가 독일 제국에게 할양되어 해군 기지인 키아우초우가 되었다. 상하이와 마찬가지로 100년 정도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서 조계지가 설치되었다. 칭다오는 키아우초우의 중심지였다. 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신경쓰지 못하는 틈에 연합군에 군수물자를 팔며 이득을 보던 일본 제국이 연합군에 가담, 제국군을 진군시켜 이곳을 점령했다. 1927년 1차 산동파병과 1928년 2차 산동파병 등 일제의 중국 침략 기지로 활용되었다. 그 후로 국민정부 아래서 12개 직할시 중 하나로 지정되어서 지역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비록 국민당 정부 시절에 지정된 직할시였지만 산둥성 내에서 성도인 지난시를 능가하는 경제력과 인구를 가지고 전국적 지명도를 가지고 있기에 은근히 직할시로 승급되길 원하는 시민들이 있다.
이후 중일전쟁에 다시 일본에게 점령되었다가 일제 패망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국공내전 때는 화북지역 국민당 최후의 보루로 버티다가 1949년 6월 2일 공산당에 점령된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 시기 연안개방도시[2] 로 선택된다.
3. 인구[편집]
인구는 약 1,000만 명에 달한다. 한국인들과 조선족들의 인구수도 꽤 되는 편이며[3] 전체 인구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이 둘을 합치면 한국의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 수준은 된다. 면적은 약 11,026㎢이다.[4] 칭다오에서 한국 사람이 주로 많이 사는 지역은 성양구이다.
4. 특산물[편집]
주요 특산물은 한국인에게도 유명한 칭따오 맥주가 있으며[5] , 동일한 이유로 중국내에서 유명한 와인 산지로도 꼽힌다. 라오산(崂山) 지역에서는 녹차 및 광천수[6] 도 생산된다. 해안 도시인 덕택에 예로부터 가리비 등 각종 싱싱한 해산물이 풍부하게 잡혀서 해산물 요리로도 상당히 유명했지만, 이전부터 남획으로 고기가 잘 안 잡히게 되었고, 칭다오 앞바다의 오염도 심해서 현재는 대다수가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