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안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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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안의 침입
哈丹─侵入

날짜
1290년 1월 20일 ~ 1291년 6월 5일
장소
한반도 북부 전역
실질적인 원인
원나라 내 세력 전쟁과 내전에서 패배한 카다안 반란군의 고려 침공.
교전국
고려(高麗)
(元)

합단적(哈丹賊)
지휘관
세도칸
나이만다이
기자오
한희유
나유
원충갑
김흔
인후
이무
카다안
라오데이
도라도 †
투에나
보랄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고려의 방어 성공.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폭풍전야
3.2. 정수기의 삽질
3.3. 치악성 전투 : 원충갑의 맹활약
3.4. 충렬왕의 무책임한 태도
3.5. 연기 전투
3.6. 한희유 무쌍
3.7. 일 다 끝나자 돌아온 왕
3.8. 이무의 무쌍과 전쟁의 종결



1. 개요[편집]


고려시대 원 간섭기 초반 제25대 충렬왕 치세에 벌어진 원나라(元)-고려 연합군이 한반도를 침공한 '합단적'(哈丹賊), 즉 원나라의 반란군인 카다안(哈丹)의 군대가 한반도를 침략하는 것을 저지한 격렬한 전쟁이었다.

40여 년간의 참혹한 대몽항쟁이 끝난 무렵에 일어난 대규모의 침략전쟁으로, 이로 인해 충렬왕강화도로 퇴각하기도 했으나 원나라의 군사개입과 한희유(韓希愈) 등의 맹활약으로 카다안군이 한반도를 점령하는 걸 저지시켰다.


2. 배경[편집]


대몽항쟁 이후 고려원나라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고려의 제24대 원종(元宗)은 몽골 제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조 쿠빌라이 칸 군대와 아리크 부카 군대와의 내전에서 쿠빌라이의 편에 붙었다.

그 무렵,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된 쿠빌라이 칸도 다른 문제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같은 몽골 제국의 계승 제국들 중 하나였던 오고타이 칸국카이두와의 내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대 중앙아시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었던 카이두는 칸을 참칭한 후, 제5대 대칸이었던 쿠빌라이에게 격렬하게 대항했는데, 그 시작은 1277년 카이두가 알말릭에서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진격하면서부터였다. 이에 쿠빌라이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명장 바린 바얀(伯顔)을 중국 대륙에서 소환했다. 바얀은 카이두 반군의 군인인 시리기 등과 오르콘 강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이르티쉬 강까지 밀어버리는 군공을 세웠다.

헌데 이러한 실패를 맛본 카이두는 포기하지 않고 1287년 새로운 동맹을 구성하여 다시 한번 쿠빌라이에 대항했다. 이때 카이두가 끌어들인 방계 몽골 지파들의 지도자들은 나얀(乃顔), 식투르(勢都兒), 그리고 카다안(哈丹) 등이었다. 칭기즈 칸의 막내아우 테무게 옷치긴(鐵木哥 斡赤斤)의 후손이었던 나얀은 제국의 동북부 만주 지역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으며, 식투르는 칭기즈 칸의 큰 아우 카사르의 손자였고, 카다안은 둘째 아우 카치운(合赤溫)의 손자였다. 이들의 근거지는 동몽골과 만주 지역이었는데 카이두의 서방 세력과 결합하여 동•서에서 협공한다면 쿠빌라이에겐 대단히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재빨리 움직였다. 쿠빌라이가 선택한 패는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장수인 바린 바얀이었으며, 바얀에게 카이두를 저지하도록 시키고, 72세였던 자신은 직접 나얀과 전투를 치러 그를 패배시키고, 나얀을 사로잡아 목숨을 빼앗았다.[1]

한편, 이 전란 동안 눈치를 살피던 충렬왕은 장인이었던 쿠빌라이 칸의 점수를 따기 위해 1287년 5월 12일, 장군 류비(柳庇)를 파견하여 나얀의 반란 토벌에 한 몫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쿠빌라이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에 한희유(韓希愈) 등의 장수들과 충렬왕 본인이 직접 원나라로 향하기도 했다

헌데 아직 남아 있는 반란 세력으로 카다안의 군대가 있었다. 테무르 울제이투(Temur Oljeitu)는 이 카다안의 반란 세력을 패퇴시켰는데, 남은 잔당들은 이후 다시 세력을 일으키려 했으나 나이만다이(那蠻歹)에게 패배해서 더 이상 만주 지역에서 세력을 일으키긴 힘들었다. 카다안의 세력은 원나라와 죽을 때까지 싸울지 항복할지를 논하다가…

고려를 공격해 들어왔다.

3. 전개[편집]


파일:coKpJgN.jpg
파일:2SgmSF0.jpg[2]


3.1. 폭풍전야[편집]


카다안의 침입은 원나라 내부, 심지어 보르지긴 가문 내의 왕위 계승 전쟁이 이웃인 고려에까지 불똥이 튄 경우였다. 1290년 1월 경 원나라에서 돌아온 오인영(吳仁永) 등은 이 정보를 입수하여 고려 조정에 카다안이 침공해 온다고 보고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홍자번(洪子藩)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정가신(鄭可臣) 등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징발하는 한편, 안전(安戩)을 경상도 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 김지숙(金之淑)을 전라도 도지휘사(全羅道都指揮使)로 각각 임명해서 방어군을 편성하도록 조치했다.

2월 1일, 조정에서는 추가적으로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를 금기산동(禁忌山洞)에 보내 주둔시키고, 박지량(朴之亮)은 이천현(伊川縣)[3]에, 한희유는 쌍성[4]에, 김흔(金忻)은 환가현(豢猳縣)[5]에, 나유(羅裕)를 통천에 각각 주둔케 하여 카다안의 반란군에 대항해 방비토록 했다.

헌데 이 당시에 소문으로는 카다안의 세력이 이미 쭉쭉 밀고 들어와 있다고 알려졌고, 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자 홍자번은 일단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는 편이 좋겠다고 권했고, 조정의 여론도 이와 비슷했다. 그런데 최유엄(崔有渰)과 허공(許珙)만은 이를 반대했는데, 이 당시에는 충렬왕이 부재 중이었다. 원 간섭기에는 고려 왕이 자주 원나라에 가야 했는데 이 때문에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허공 등은

"왕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대로 수도를 옮기면 안 된다."

고 이를 반대했는데 재상들은

"허공이 본래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지금 개소리하는 거 보면 그렇지도 않구만?"

하며 비아냥거렸지만 허공은 끝까지 버티며 수도 이전을 찬성하지 않았다.

헌데 이후 원나라에서 온 인후(印侯)[6]

"쿠빌라이 황제가 고려 왕에게 말씀하셨는데, 감히 함부로 수도를 옮기자고 지껄이는 사람이 있다면 잡아오라고 했다."

고 말하였고, 이에 사람들은

"허공이 맞는 말을 했다"

며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 원나라에서 체류 중이던 충렬왕은 3월경 고려로 다시 귀국하여 카다안군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5월 무렵에 일전에 보낸 김흔, 나유, 정수기 등이 지금의 함경도 길주군 지역인 해양(海陽)까지 카다안이 밀고 들어왔다고 보고를 올렸다. 이에 5월 13일에 충렬왕은 전군을 소집하여 점검을 한 다음, 5품관 이하의 문관으로부터 내시(內侍), 다방(茶房), 3관(三官), 5군(五軍), 금학양관(禁學兩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군하도록 했다. 또한 원나라에도 김연수(金延壽)를 보내 반적 카다안의 고려 침공 사실을 보고하도록 했다.

이후 6월 3일에는 대장군 한신(韓愼)에게 명령하여 서경의 병사를 이끌고 동계(東界) 지역을 방비하도록 했다. 한편 쿠빌라이 칸의 대답 역시 도착했는데

"반란 토벌군을 보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테니, 고려군이 주요 경로를 방어하고 있어라."

라는 지시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 여름 7월이 되자 충렬왕은 대신들을 불러 모아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본래 몽골 출신인 인후(印侯)가 이렇게 말했다.

"주상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동계(東界)로 나아가 적의 진격로를 차단하십시오. 적이 만약 개경 근처까지 육박해 오면 주상께서는 강화도로 들어가시고 저희들에게 분부하시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도록 하소서."

충렬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국경 지대에서 카다안군을 막고, 하다하다 안 되면 강화도로 피난을 떠나라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충렬왕은 앞의 국경 지대로 군사를 이끌고 나가라는 말은 무시하고, 뒤의 말에 대해서만 패기넘치게 대답했다.

"백성은 곧 나라의 근본인데 과인이 어찌 먼저 피난하여 민심을 혼란시키겠는가? 적이 비록 이긴 기세를 타고 여기까지 쳐들어올지라도 과인은 삼군의 후군(後軍)이 되어 사직(社稷)을 보전할 것이다!"

이때까지의 말만 보면 그야말로 간지폭풍의 발언이었지만…… 8월 20일 무렵, 충렬왕은 대장군 류비를 원나라에 보내 구원병을 독촉하는 한편 강화도로 좀 도망가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했다. "어찌 먼저 피난하겠는가?"라고 사자후를 터뜨린지 1개월 무렵만에 완전히 말을 바꾼 것(…). 이를 쿠빌라이 칸이 허락하자 충렬왕은 10월 무렵 노약자와 여자들을 강화도로 보내고, 11월에는 국사(國史)와 보문각(寶文閣), 비서시의 문적, 태조 신성대왕 왕건의 소상(塑像), 궁인들을 강화도로 보내며 분주하게 피난 준비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원나라에서 온 평장사 토리테무르(闍梨帖木兒)는 사람을 보내 충렬왕에게

"마땅히 고려 왕은 수도에 머물며 우리 군사를 위로하고 음식 등을 베풀어라."

라고 했지만 충렬왕은 이 말조차 씹고 인후를 보내 수비하게 하고는 12월 18일 강화도로 들어가버렸다. 왕이 강화도에 들어가 있는 동안 수도 개경은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使司) 송분(宋玢)이 담당하여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송분은 이튿날 바로 도망쳤으며 당시 서경유수였던 정인경(鄭仁卿)도 강화도로 도망쳐왔다.

그러는 사이 카다안의 침략군은 동북 쌍성총관부 관할 지역이었던 화주(和州) 근처까지 도달했다. 만주에서 쫒겨 내려온 카다안의 군대는 굶주리고 지쳐 진군 속도는 느린 편이었지만 그 행패는 대단히 극심했는데, 카다안의 침략군은 식량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여 양식으로 삼고, 부녀자를 잡으면 사슴이 흘레붙듯이 집단 강간을 한 다음 살을 저며서 포를 떠먹었다. 가히 인외마경이 따로 없는 판이었다.

그런 난장판 속에서 12월 4일 경, 원나라에서 보낸 토리테무르, 평장사(平章事) 세도칸(薛闍干), 우승(右丞) 타추(塔出) 지휘 휘하의 보병기병 13,000여 명의 병력이 고려의 강역 안으로 들어왔다. 이에 따라 상황은 고려군, 카다안의 침략군, 카다안을 토벌하러 온 원군이 섞인 혼전으로 변모했다.

3.2. 정수기의 삽질[편집]


이런 상황에서 해가 흘러 1291년이 되었다. 이 해 정월 20일, 카다안의 군세는 철령(鐵嶺)에 이르렀다. 그러자 작년에 보낸 정수기는 싸움 한번 안 해보고 달아나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다. 적의 군세가 워낙 강하면 물러날 수도 있긴 한데, 큰 문제는 정수기가 급하게 도망치느라 양식을 모조리 두고 달아났다는 점이었다. 당시 카다안의 군대가 지난 길은 길목이 좁아 말을 탄 병사들도 내려서 걸어야 했기에 대단히 지쳐 있었고, 극악의 식인 행위를 했을만큼 궁핍한 상황이었으나 정수기가 버리고 간 양식을 먹어 다시 힘을 냈다.

만일 양식을 모조리 옮기거나 태우고, 정수기가 조금이라도 지연전을 벌이면서 후퇴했다면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던 카다안의 반란군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어쨌든 사기가 오른 카다안의 군대는 그동안 미적거리던 움직임과는 다르게 순식간에 교주도(交州道)까지 냅다 달려왔고, 김흔 등은 싸워보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카다안의 군대는 현 경기도 양평군인 양근성(楊根城)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3.3. 치악성 전투 : 원충갑의 맹활약[편집]


파일:WZfX7TG.gif

이때 고려의 각 고을에서는 카다안의 군대가 이르렀다는 소문만 들려도 모두 달아나는 판국이라 이를 저지하려는 병사조차 없었다. 카다안은 이 무렵에 현 강원도 원주시인 원주(原州)에 머물며 여기저기 노략질을 하여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보급하려 했다. 게중에 기병 50여명 가량은 현재의 치악산에 있었던 치악성(雉岳城) 아래까지 와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있었는데, 원주 별초 향공진사(原州別抄鄕貢進士)였던 원충갑(元沖甲)이 보병 6명을 이끌고 이를 공격해서 기병 50여명을 쫓아내고는 이를 추격하여 말 8필을 탈환했다.

이어 얼마 뒤 도라도(都刺闍), 토에나(禿於乃), 보랄(孛蘭)이라는 이름의 카다안군 장수들이 4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시 와 병사들의 녹봉으로 주려고 모아두었던 양식을 탈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원충갑은 중산(仲山)이라는 사람을 포함한 7명과 함께 나와서 기회를 엿보다가, 갑자기 7명으로 기습을 가하여 400여 명을 격퇴해버렸다. 심지어 어찌나 놀랐는지 적들은 말을 25필이나 남겨둔 채 달아났다고 한다.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는 이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적이 버리고 간 말들을 모두 맹활약한 용장 원충갑에게 주었다.

그러자 적들은 또다시 몰려와 성을 포위하고,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는데 원충갑은 항복 편지를 전달한 사람의 목을 벤 다음 여기에 항복 편지를 묶어 성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카다안군은 분개하여 공성 장비들을 보수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치악성 내부는 충격과 공포의 상태가 되었다. 이에 카다안군은 일전에 양근성에서 사로잡았던 부녀자 2명을 성안으로 보내 항복을 권하게 했다. 그러자 원충갑은 그 여자들을 참수하고는 그 수급을 밖으로 던져 적을 도발했고, 이에 적은 북을 치며 사방에서 성을 공격해 치악성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 위기 상황에서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曺愼)은 갑자기 성 밖으로 나가 싸웠고, 그 틈에 원충갑은 말을 달려 나가 적병을 한 명 베니 적군의 기세가 갑자기 줄었다고 한다. 여기에 별장(別將) 강백송(康伯松) 등 30명의 결사대가 원충갑을 도와 싸우는 가운데 원주의 주리(州吏) 원현(元玄), 부행란(傅行蘭), 원종수(元鍾秀)가 국학생(國學生) 안수정(安守貞) 등 100여명을 이끌고 서쪽 봉우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결사대를 도와 싸움은 혼전 양상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먼저 성 밖을 나섰던 조신이 직접 북채를 들고 싸움을 독려했는데, 화살이 오른 팔목에 맞았으나 그 상태로 계속 북을 쳐 북소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싸우자 카다안군의 선봉도 기가 질려 물러나기 시작했는데, 또 그것이 연쇄적인 효과를 일으켜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카다안군은 자기들끼리 엉켜 밟아대면서 난장판이 되고 말았고, 그틈을 타 원주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적들을 공격했다. 함성 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가운데 이런 난전이 10번이나 이어졌고, 적장 도라도는 살해당했으며, 카다안군의 절반 가량이 활에 맞아 죽었다.

이는 카다안군의 기세를 꺾는 효과를 가져왔고, 고려군 전체의 사기 진작에도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런 큰 역할을 담당한 원충갑은 대번에 6번이나 승진해 삼사우윤(三司右尹)이라는 관직에까지 올랐다.

3.4. 충렬왕의 무책임한 태도[편집]


이렇게 고려 내부에서 맹장 원충갑이 격렬하게 분전을 펼치는 동안, 당시 왕세자였던 훗날의 충선왕(忠宣王) 왕원은 원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명민했던 세자 왕원은 2월경 장군 오인영(吳仁永)을 외할아버지 쿠빌라이 칸에게 보내 고려의 어려운 사정을 알리도록 했는데, 카다안의 반란군이 부마(쿠르겐)국인 고려의 북계(北界)를 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노년의 쿠빌라이 칸은 황당해하며 물었다.

"당 태종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

그러자 오인영은

"그때는 그때일 뿐 지금의 고려는 다르다."

라고 대답해야만 했다.[7] 쿠빌라이 칸

"카다안을 무찌르기 위해선 밤중에 전투를 치러야 한다"

고 충고했다. 또 외손자인 세자 왕원의 지원 요청에 대해서는, 나이만다이에게 10,000명의 병사를 보내 지원하도록 했다.[8]

3월 20일, 충렬왕은 대장군 송화(宋華)를 보내 송분이 버리고 달아난 수도 개경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미 그 주변에도 카다안의 무리들이 약간씩 어슬렁거리고 있어 소규모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하간 왕도 달아난 난장판의 상황이라 이천(利川) 사람 신비(申費)는 카다안의 간첩과 공모했고, 용강(龍岡) 사람 김철(金哲)은 적에게 투항해 개경으로 가는 길잡이 노릇을 해주었으므로 그들을 잡아 저자에서 목을 베는 일도 있었다.

4월 6일, 원주산성 방호별감(原州山城防護別監)이었던 복규가 카다안군 포로 58명을 충렬왕에게 바쳤는데, 이는 격렬했던 치악성 전투에서 사로잡은 병사들인 듯 싶다. 며칠 뒤인 4월 17일, 마침내 기다리던 원나라 지원군이 도착했다. 마음이 든든해진 충렬왕은 원나라 장수들에게 연회를 베풀며 놀자판을 벌였다.

헌데 이것이 못마땅했던 지원군의 사령관 세도칸이

"지금 도 없는데 이렇게 놀다가 적하고 싸울 때 군량미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인가?"

라고 따져 물었다. 이후 세도칸은 옆에 앉아 있던 홍자번에게

"네가 정승이니 국가 재정의 일은 잘 알고 있을 테고, 마땅히 군대에 군량을 잘 지급해야 할 것이다!"

라고 일갈을 했다. 이렇게 되니 연회 자리는 축하는커녕 분위기가 냉랭해졌고, 무안해진 충렬왕은

"내고에 비축해 둔 것이 있으니 필요하면 지급할 수 있을 거요."

하고 대충 둘러대야 했다.

또 며칠 뒤인 4월 21일에 충렬왕개경 부근에서 또다른 지원군을 이끌고 온 나이만다이를 위로하는 잔치를 다시 벌였다. 헌데 여기서 나이만다이는

"적이 쳐들어왔는데 왕께서 친히 적을 막으시는 게 어떻겠느냐."

고 물었고, 이에 충렬왕은

"나는 너무 늙고 병들어서 곤란하다."

고 대답했다.

그러자 고려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나이만다이조차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는지,

"적이 나라 안까지 쳐들어왔으면 명색이 왕인 사람이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 늙고 병들었다고 혼자만 손가락 빨고 있으면 되겠느냐."

며 엄청나게 강경한 언사로 훈계를 퍼부었지만 충렬왕은 못들은 척했다.(…)

그 다음 날, 나이만다이는 사람을 보내 충렬왕에게 말을 전했는데,

"어제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건 기쁘지만, 적을 막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돌아가버렸으니 도와주러 온 우리는 정말 당혹스럽다. 이웃집에 불이 나도 기꺼이 달려가 도와주는 법인데, 하물며 자기 집 일인데 왜 가만히 있느냐."

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와 더불어 쿠빌라이 칸의 막내 딸이었던 왕비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에게 말 안장을 하나 바쳤다.

충렬왕이 이런 상황을 방임한 것은 내심 원나라에 대한 반발이 컸고, 침입한 카다안 반란군을 이용해 원나라의 내부 분열을 부추기려고 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중앙군말고는 군대라고 할 만한 전력도 없고, 일반 백성들을 모아 조직한 군대는 전투력에 한계가 명백한 만큼[9] 애초에 카다안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다만 추측대로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치더더라도 나이만다이가 말했듯이 자기 백성과 국토를 유린받도록 방치한 것은 사실이니 충렬왕의 언행은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3.5. 연기 전투[편집]


파일:fb2YLNh.jpg
연기 전투 기념비

이런 막장극을 찍는 와중에 5월 1일 경, 카다안의 군대가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인 연기현(燕岐縣)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에 세도칸의 원나라 군대와 고려군은 밤낮으로 행군을 해서 정좌산(正左山) 아래로 진군했고, 여기서 전투를 치루게 되었다.

이 공격은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본래 원 - 고려 연합군은 근방의 목주(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에 머물고 있었는데 카다안의 위치가 파악되자 빠르게 이동하여 포위전을 벌인 것이다.

별안간에 공격을 받은 카다안군은 크게 놀라 산으로 올라가 험한 지리를 이용해 버티려고 했다. 고려군은 보병을 전면에 내세우고, 기병으로 압력을 가해 적들을 쫓았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은 적들은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기민하게 움직였는데, 과감하게 말에서 내려 기병의 이점을 포기하는 대신, 숲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가린 채 화살을 쏘아댔다.

적들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가까이 접근하던 두 명이 화살에 맞아 나가떨어지자 고려군은 공포에 질려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김흔 등이

"물러서는 자는 베어버리겠다."

고 군졸들을 밀어붙였고, 고려군 보병 500명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라는 기세로 밀어붙이자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이때 일개 병졸이었던 이석(李碩)과 전득현(田得賢)이 돌격하여 카다안군의 선봉이었던 장사들을 전사시키자 고려군 병사들은 용기가 올라 적들을 밀어붙혔으며, 한번 밀리기 시작한 카다안군은 완전히 무너져 큰 피해를 받고 흩어졌다. 고려군은 공주강(公州河)까지 적을 추격했는데 죽어 넘어진 카다안군의 시체가 30여리에 걸쳐 있었고, 물에 빠져 죽은 적병들도 대단히 많았으며, 전리품도 상당했다. 다만 적의 정예 기병 1,000여 명은 강을 건너 패주했다.

대승리를 거둔 얼마 후, 나이만다이가 이끄는 원나라 병사들이 도착했다. 연기 전투에서 세도칸이 이끈 원나라 병사들은 고려군과 함께 했으나 조금 늦었던 나이만다이는 이에 합류하지 못한 것이다. 연기 전투의 대승 소식을 들은 나이만다이는 이런 승전에 자신이 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다음의 전투에는 꼭 참가하겠다"고 벼르게 되었다.

3.6. 한희유 무쌍[편집]


연기 전투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카다안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10]

5월 8일 카다안은 다시 한 번 고려군과 진을 치고 대치했다. 이때 적군의 용맹스러운 병사 한 명이 나서서 활을 쏘았는데, 쏘는 족족 고려 병사들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이때 한희유는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말을 몰고 1장 8척이나 되는 장창을 휘두르며 적에게 달려들었고, 놀란 적은 도망쳤지만 결국 잡혀서 목숨을 잃은 후 목이 잘려 창대에 걸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 모습을 본 카다안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런 상황속에서 고려 - 원나라 연합군이 공격을 퍼붓자 카다안군은 힘을 써보지 못하고 괴멸당했다. 다만 카다안과 그의 아들 라오데이(老的)[11]가 2,0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간신히 도주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헌데 고려 - 원 연합군은 이를 추격하지는 않고, 다만 회군하여 석파역(石破驛)에 머물렀다. 이는 동맹군인 원나라군 지휘관들의 의견이 갈렸기 때문인데, 나이만다이는

"적의 수괴를 잡지 못했으니 마땅히 추격해서 끝을 봐야 한다."

고 주장한 반면, 세도칸은

"우리는 황제의 명령만 수행하면 된다. 굳이 여기서 더 피를 볼 이유 따윈 없다."

며 이를 거절했기 때문이다.[12]


3.7. 일 다 끝나자 돌아온 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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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忠烈王)
두 번의 승리 이후 인후와 한희유, 김흔 등은 포로 등을 바치고 고려군이 승리했음을 알렸다. 그러자 충렬왕은 배를 타고 개경으로 나왔는데, 그러면서

"과인은 적을 토벌하는 전투에 나설 것이다."

라고 선포했다.

한편 세도칸 등도 승리를 거둔 후 5월 27일 개경에 돌아와 제국대장공주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틀 후에 충렬왕은 승전을 축하한다며 술이나 먹고 놀자면서 세도칸을 초대했으나, 세도칸은

"이미 명령받은 임무를 완수했으니 더 지체할 수 없다."

는 간지폭풍의 발언과 함께 그 즉시 떠나버렸다.

세도칸은 고려와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고, 외국군의 입장에서는 여기저기서 약탈을 하며 전투하는 것이 편했을텐데도, 그 군령이 엄하고 위세가 대단해 세도칸 휘하의 사병들은 고려 백성들을 약탈하지도, 괴롭히고 행패를 부리며 재산을 뺏는 일도 전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윽고 5월 30일에는 나이만다이 등도 귀국길에 올랐다.


3.8. 이무의 무쌍과 전쟁의 종결[편집]


이때 카다안의 기병 3,000여 명이 추가로 철령을 넘어 교주에 주둔하였고, 이 중에 1,000여 명은 강원도 철원 부근까지 진군했으나 연기 전투 등의 패배 소식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다. 고려군은 잔당 괴멸에 나서, 6월 1일 김흔을 죽전(竹田)으로, 한희유를 충청도로, 나유를 교주도로 보냈다. 적병 530여명 등은 한희유에게 항복해오기도 했다.

그런데 카다안의 아들인 라오데이는 이미 죽전을 넘어 서경으로 진군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자 당시 배에 타고 있던 나유는 육지에 상륙해서 라오데이와 싸우려고 하였다. 이에 현문혁(玄文奕)은

"지휘를 보니 매복을 당할지도 모른다."

며 만류했지만 나유는 이를 듣지 않았는데, 고려군이 전열을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라오데이의 군대가 급습을 해왔다. 나유는 군대를 후퇴시켜 간신히 배에 올랐지만 낭장(郞將) 이무(李茂) 등 수십 명은 미처 배에 올라타지 못했다. 그러자 현문혁은

"이무야! 네가 지금 위급하다고 적에게 항복한다면 처자식은 죽겠지만 적과 싸우다 죽는다면 나라에서 상을 내려 줄 것이다!"

라고 소리쳤다.

가족 생각이 났는지 이무 등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라오데이군에게 항복하지 않고, 근처의 산으로 달아났는데, 적군은 산을 포위하여 사방에서 화살을 쏘아대었다. 이무는 나무에 딱 붙어 화살을 피하며 저녁까지 버티다 주머니 속의 말린 식량을 나눠 먹으며

"사내라면 사지에 몸을 던져 살 길을 찾아야 하는 법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소리치며 남은 군사들의 사기를 달랬다. 이후 활 시위를 당겨 쏘아 적장의 목을 꿰뚫어 죽이고 혼란에 빠진 라오데이군에게 결사적으로 달려들어 육탄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싸움을 마지막으로 카다안군과의 혈전도 드디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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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몽골 사회에서는 혈통을 중시하는데, 같은 보르지긴 왕가의 친척이었던 나얀은 나름 명예롭게 죽었다. 다만 그 명예로운 방식이 질식시켜 피를 흘리지 않게 하는 방법이었다. 좀 부정적으로 적었지만, 몽골에선 이것이 정말 명예로운 방식이었다. 칭기즈 칸에게 죽었던 자다란 자무카 또한 이런 방식으로 죽었다고 한다. 일단 대부분 이렇게 믿고 있다. 사실이야 뭐... 전승으로는 그렇게 전해지며 원나라에서도 높게 평가받았던 인물인지라 대체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2] 하란군이 바로 카다안 세력이다.[3]강원도 이천[4] '쌍령'의 오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지역은 당시 원나라의 영역에 속했고, 제31대 공민왕 무렵에나 수복되었기 때문이다.[5] 현 강원도 고성군이다.[6] 본명은 '홀라대'(忽刺歹). 고려로 귀화한 이후의 이름이 '인후'로, 이 사람은 연안 인씨의 시조다.[7] 정작 카다안의 반란군에게 맞서야 할 고려군을 해체시켜 원나라의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든 장본인이 쿠빌라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뻔뻔한 발언이었지만, 그렇다고 대몽골 울루스의 대칸이자 대원제국의 황제였던 쿠빌라이를 대놓고 디스할 수는 없었으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8] 조선 후기 정동유의 《주영편》에 따르면 이때 세조 쿠빌라이가 외손자인 세자 왕원(충선왕)에게 야간 전투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9] 조선시대 의병 조직을 생각하기 쉽지만 의병들은 당시만 해도 건재했던 조선군의 징병제에 의거하여 엄연히 정규군에 교대로 입대했다가 돌아와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즉 어느 정도는 전투라는 걸 할 줄은 알았다는 점에서 이 시점에 이르면 아예 군문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 대다수가 된 고려 백성들과는 전혀 달랐다.[10] 이때 충렬왕은 아내 제국대장공주와 함께 새 궁궐을 구경하며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11]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의하면 카다안은 자신의 아들 싱라카르(勝納哈兒)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따라서 '라오데이'는 '싱라카르'일 가능성이 높다.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칭기스칸기》, 사계절, 2003, 90쪽 ~ 92쪽[12] 세도칸은 이미 연기 전투 등에서 큰 군공을 세웠으니 무리를 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 물론, 이후 충렬왕의 놀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회군을 한 면모에서 보이듯 세도칸은 FM 스타일의 사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