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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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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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358px-Coat_of_Arms_of_Leopold_II_and_Francis_II%2C_Holy_Roman_Emperors-Or_shield_variant.svg.png 신성 로마 제국 공치제
카롤루스 대제
(단독)

카롤루스 대제
루도비쿠스 1세
(공치제)

루도비쿠스 1세
(단독)






프랑크 카롤루스 왕조 제2대 국왕
신성 로마 제국 시조
카롤루스 대제
Carolus Magnus


812년 ~ 814년 데나리우스 은화[1]
제호
Karolus Magnus(카롤루스 마뉴스)[2]
이름
Karl(카를, 프랑크어)[3]
Karolus(카롤루스, 라틴어)
출생
742년 4월 2일[4]
벨기에 리에주 주 에르스탈 시[5]
사망
814년 1월 28일 (향년 71세)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아헨 시
신체
192cm[6]
언어
중세 독일어 (리푸아리안 방언[7])
조부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
부왕
피피누스 3세
종교
가톨릭
재위기간
프랑크인의 왕
768년 10월 9일[8] ~ 814년 1월 28일 (46년)
랑고바르드 국왕
774년 7월 10일[9] ~ 814년 1월 28일 (40년)
서로마 제국 황제 (명목상)
800년 12월 25일[10] ~ 814년 1월 28일 (14년)
시복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 → 교황 베네딕토 14세 공인
축일
1월 28일
1. 개요
2. 언어별 표기
4. 외양 및 성향
5. 가족
6. 평가와 역사적 귀속
7. 전설상에서의 모습
8. 여담
9. 매체에서의 등장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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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Pater Europae

유럽의 아버지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2대 이자 서로마 황제 대관을 받은 황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랑크족의 왕이면서도 황제라고 불린다. 이때 서로마는 멸망한 뒤였기에 직함만 서로마 제국 황제일 뿐 다스리는 나라가 서로마 제국이 아니어서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긴 했지만, 이를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으로 보기도 한다. 참조 카롤루스 마그누스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체를 직접 창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체를 직접 창시한 인물인 오토 대제는 비록 카롤루스 가문 출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계로는 카롤루스 가문의 혈통을 자신이 이었음을 강조하며 자신의 황제위의 기반에는 카롤루스의 황제로서의 권위가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그 혈통 명분이 오토 대제의 신성 로마 제국 창건 명분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를 담당하였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카롤루스를 신성 로마 제국의 일종의 상징적인 초대 황제처럼 사람들이 여기게 된 형태이다.


2. 언어별 표기[편집]


고·중세 프랑크 어
Karl(카를)
라틴어
Karolus Magnus, Carolus Magnus(카롤루스 대제)
프랑스어
Charlemagne(샤를마뉴), Charles Ⅰ(샤를 1세)
영어
Charlemagne(샬러메인), Charles the Great(찰스 대제)
독일어
Karl der Große(카를 대제)[11]
네덜란드어
Karel de Grote(카럴 대제)
이탈리아어·스페인어
Carlo Magno(카를로 대제)
한국어
카롤루스 대제
중국어
查理大帝(찰리 대제)
당대 화폐에는 라틴어로 KAROLVS IMP AVG(카롤루스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의 약자)[12], 즉 카롤루스(Karolus) 황제로 표기. 하지만 로망스어군 계열에서는 일반적으로 K보다 C를 선호하기 때문에 Carolus라고도 많이 쓴다. 19세기에 다비드가 그린 유명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등에서 Karolvs Magnvs라고 표기하는 등 프랑스어권에서도 여전히 K가 정통 라틴어 표기라는 인식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샤를마뉴가 제일 많이 통용된 편이다. 이는 프랑스의 영향이 컸다기보다 근대 영국에서 프랑스식 표기를 받아들여 샤를마뉴라는 표기를 많이 썼는데, 영어 서적이 널리 퍼지면서 샤를마뉴라는 명칭이 아시아까지 널리 퍼진 측면이 크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카롤루스를 어느 한쪽만의 위인으로 놓지 않기 위한 중립적 표기로써 라틴어 표기인 카롤루스 마그누스(Carolus Magnus)가 자주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표준 명칭은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이다. 그의 이름이 영단어 King, 독일어 단어 König 등 "을 뜻하는 단어 파생에 영향을 주었다."는 오해도 있는데, 카롤루스 마그누스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대 게르만 제어 사용자 민족들은 왕이나 지도자를 두고 Cyning, Kœnugr, Koening이라는 표현을 썼으며 King, König 등은 전부 여기서 파생된 단어들이므로 카롤루스 대제를 본따서 생긴 단어가 아니다. 애초에 카를 또는 은 고대 게르만 제어에서 남자 등의 의미를 지니지 군주라는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위대하다."는 의미로써 보통 대왕, 대제 등을 표현하고자 사용되는 라틴어 마그누스(마뉴스)가 각자의 언어 방식으로 마뉴, 망누스, 마그노 등등으로 변환된 셈이다. 이 마그누스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고대인을 하나 예로 들자면 폼페이우스, 즉 그 유명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있다.

국내 일부 역사 교양서에서 등장하는 ‘샤를마뉴 대제’라는 표기는 엄밀히는 ‘역전 앞’과 마찬가지로 ‘대제’를 두 번씩이나 사용하는 겹말 오류라 할 수 있다. 즉, 샤를마뉴 대제라는 표현은 따지자면 ‘샤를 대제 대제’ 또는 ‘샤를마뉴마뉴’나 다름없는 표현이다. 사하라 사막처럼 언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된 것으로 여겨진다.

3. 생애[편집]




4. 외양 및 성향[편집]


파일:Karl_der_Große_in_der_Chronik_des_Ekkehard_von_Aura.jpg
1112년 ~ 1114년 상상화. 독일에서 제작.

파일:Charles_Ier_le_Grand_ou_Charlemagne.jpg
15세기 상상화. 프랑스에서 제작.[13]

파일:external/www.wga.hu/2empero1.jpg
1512년 상상화.[14] 알브레히트 뒤러 작(作)
카롤루스 대제의 전기작가인 아인하르트가 저술한《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 따르면 카롤루스는 "눈이 크고 눈빛은 활기를 띠고 있다. 코는 약간 길고, 머리는 금발이며, 표정은 쾌활하게 웃는 듯하다."라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목소리가 가늘고 높은 편이었다고 전하며, 말을 급하게 할 때에는 더듬거리기도 했다고. 대식가이며, 구운 요리를 특히 좋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균형이 잘 잡힌 전사형이었다. 그는 중년에 약간 배가 나왔던 것을 빼면 평생 동안 젊은 시절의 몸매를 유지했다고 한다. 키가 매우 컸다고 전해지는데, 19세기 중반에 그의 관을 열고 신장을 재 본 결과 192cm장신으로 확인되었다.[15] 사치스러운 옷보다는 모피 상의에 푸른 망토를 걸치기를 좋아했지만 무기만은 고급 무기를 고집했다.

앞서 서술했듯이 카롤루스 대제는 구운 고기를 좋아했는데, 의사들이 건강을 위해 구운 고기 말고 삶은 고기를 먹으라고 조언해서 카롤루스 대제는 의사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언도 "나를 그냥 내버려 두게! 당신들의 치료약 없이 죽는 것이 낫겠어!"라고 의사들의 치료를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카롤루스가 글을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실제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침대 베개 밑에 서판을 놔두고 자기 전에 꼬박꼬박 연습을 하며 상당히 노력했음에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서명은 공문서에 2개의 줄을 열십자로 긋는 것이었다고.[16]

Temptabat et scribere tabulasque et codicellos ad hoc in lecto sub cervicalibus circumferre solebat, ut, cum vacuum tempus esset, manum litteris effigiendis adsuesceret, sed parum successit labor praeposterus ac sero inchoatus.

그는 글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침대의 베개 밑에 언제나 서판을 두고 틈이 날 때마다 글자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시작한 게 아니라 너무 늦게 시작했기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17]


다만 아인하르트의 서술이 말하는 실패라는 게 카롤루스가 완전한 문맹이라는 것인지 "온전히(fully) 마스터하는 거에 실패했다."는 것인지가 애매한 편이라, "카롤루스는 문맹이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허나 이 시기 지배층이 대체로 실용적인 글쓰기에 능숙했기 때문에 카롤루스의 경우 상당히 예외적인 케이스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글자 에피소드와는 별개로 카롤루스는 라틴어를 유창하게[18] 말하고 들으며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서사시를 좋아하여 궁정 학자들에게 이를 많이 수집하게 하였고,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인《신국》이었다고 하니 무식하다고 하긴 어렵다.

또한 서체의 통일이 필요함을 느끼고 본인의 지원하에 문맹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카롤링거 서체(Carolingan Minuscule)이다. 로만 하프 언셜(Roman Half Uncial)과 인술라 서체(Insular Script)의 영향을 받아 780년 만들어졌는데 개별 글자들끼리 모양을 다르게 해 문해 난이도를 낮춘 것과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하게 생긴 것이 특징이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하에 전 서유럽으로 퍼져 약 400년 동안 쓰였다. 이후 쇠퇴했으나 블랙 레터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로마자 소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여기서 각 서체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전형적인 고대 말 ~ 중세 초중반 게르만 왕국의 전사왕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아군에게는 인자하고 관대하며 적에게도 대범하지만 일정 선을 넘어서면 잔인하고 무자비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호색한이기도 하여 여러 번 결혼도 하고, 자식도 많이 낳았지만 동시에 친딸들의 순결을 위해 결혼을 시키지 않는 등의 모습도 보였다. 전형적인 난세를 사는 영웅호걸의 성격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친딸들도 결혼만 안 했지 사생아는 많다고 한다.[19] 당시 중세인 기준으로 술을 적게 마시는 편이었다고 하는데, 하루에 딱 1잔만 마셨다고 한다. 다만 당시 중세의 술잔은 거짓말 좀 보태서 세숫대야 정도였으니 현대인 기준으로는 그래도 많이 마시는 편이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톨릭 교회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해 지방통치체계를 구축하기도 하고 무력을 동반한 집단 강제개종도 서슴치 않았지만, 동시에 아바스 왕조와는 상당히 가까운 관계를 맺었고 동로마 제국과는 정치적 입장에서 심한 분쟁의 소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적대시하지는 않는 등 정치적 감각도 상당했다.


5. 가족[편집]


총 4명의 정실 부인을 두었으나 2명의 부인을 뚜렷한 이유없이 내쳤다.

정실 부인 이외에 별도로 6명의 첩을 두었다.

정실 부인들로부터 8명, 첩으로부터 20명의 자녀를 얻었다.

아들 넷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경건왕 루트비히가 그의 뒤를 이었다.


6. 평가와 역사적 귀속[편집]


통칭 Pater Europae(유럽아버지).[20]

프랑크 왕국동로마 제국과 비등한 하나의 제국으로 키워냈으며, 서로마 멸망 후 한동안 역사의 주변부로 전락했던 서유럽을 다시 서서히 역사의 중심 무대로 올라오게 하는 토대를 놓은 걸출한 군주이다. 당대 프랑크 왕국은 문화나 경제력 등의 소프트파워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주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인구나 군사력 등의 하드파워에 있어서는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군사적 확장으로 서방 가톨릭 세계는 독자적인 튼튼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고, 폐허나 다름없던 서방의 지적 풍토에 있어서도 문화적 부흥을 일으킨 점이 높이 평가받는다. 따라서 "서유럽이 카롤루스의 치세에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하였다."고 하는 게 고전적인 역사관이다. 이후 역사학자들은 카롤루스의 통치기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도 불렀다. 다만 최근에는 앙리 피렌을 필두로 하여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카롤루스에 의한 부활에 대한 비중을 줄이고, 로마 세계와 지중해 문명의 계승자로서 메로베우스 왕조를 재조명하며 카롤루스 왕조와 메로베우스 왕조의 차이점을 들어 둘을 구분짓는 시각도 대두되고 있다.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이탈리아서유럽의 주요 국가들 대부분이 그에게서 기원했음을 고려하면[21] Pater Europae(유럽의 아버지)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다보니 유럽의 여러 왕국들은 카롤루스를 대제(大帝)라 불렀으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에서 찾았다.

프랑스에서는 클로비스 1세와 함께 오랫동안 국부와도 같은 지위에 있었고 중세 이래 생성된, 중세 그리스도교 - 기사도 문학 구전에 의해 거의 신화적인 전설들로 포장되어 신격화되기도 했다. 서프랑크카롤루스 왕조라면 당연한 말이고 카롤루스 왕조 직계가 끊어지자 이를 모계 계승으로 이은 카페 왕조 및 카페 왕조의 부계 분가인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오를레앙 왕조 등은 전부 카롤루스 대제와 프랑크 왕국 역사를 자국 및 왕조의 주요한 선조 역사로써 매우 중시하였다.

하지만 근대 후기 내셔널리즘이 확산되면서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땅에서 훨씬 오래된 그 자신들의 기원 중 하나인 고대 갈리아족에 대한 재인식을 하며 이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으며, 또한 게르만적 정체성이 강력한 독일인 계열 세력 국가들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의 첨예한 대립이 두드러지면서 프랑스인이라는 민족을 구성하는 3대 요소인 게르만, 라틴, 켈트 정체성 중에 게르만적인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고 결국 게르만적 정체성을 격하시키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때에 카롤루스에 대한 프랑스 내의 폄하도 두드러지게 발생하였다. 그러나 클로비스 1세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격하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는 클로비스 1세와 그의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이 비록 게르만계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독일인 민족 형성에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은 집단이었으며 반면 카롤루스의 경우에는 독일인 민족 형성에 영향을 끼친 카롤루스 왕조의 핵심적인 인물이고 메로베우스 왕조와는 달리 카롤루스 왕조는 수도 및 행정 관리 체계부터가 독일 방면에 더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다.[22]

오늘날 프랑스는 라틴, 켈트적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프랑스의 실질적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메로베우스 왕조의 프랑크 왕국의 지배층이 게르만계 민족인 프랑크족이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세 프랑스 왕국은 게르만적 정체성도 분명히 내포한 체계였다. 애초에 켈트에 대한 내셔널리즘적 재인식은 무려 19세기에 들어서서 일어난 일이지 그 이전의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게르만계인 프랑크인이나, 하다못해 라틴계인 로마[23]에서 찾았지 그보다 이전의 고대 켈트족에서 찾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천 년 가까이 프랑스를 지배했던 카페 왕조 혈통이 왕위에서 단절되고 이후 이탈리아계(정확히는 코르시카계) 왕조인 보나파르트 왕조가 잠시나마 프랑스를 통치하기까지 하면서 탄생한 프랑스 공화국프랑스 제국 시기부터 급격히 확산된 내셔널리즘 의식 속에서 "너는 게르만, 우리는 라틴과 켈트" 등으로 정체성을 딱딱 구분지으려는[24] 시도가 일어났고 이 때문에 프랑스인이라는 개념 내에서 게르만으로써의 정체성 색채가 상당기간 부정되어버린 것이며 그 때문에 카롤루스도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역사적 위인 중 한 명임에도 강한 폄하를 당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근대 프랑스의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이 직접 "프랑스에 샤를마뉴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다."라고 말하는 등, 카롤루스의 프랑스에서의 존재 자체가 그 시기에 부정된 것은 아니다.

한편 독일 방면에서는 물론 게르만계로서 독일 지역을 정복하고 게르마니아 토착 민족들인 색슨[25], 튀링겐인, 프리스인, 알레마니인 등등을 정복 전쟁으로 모조리 정복한 뒤, 그 전부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하나의 집단 체제 안에 넣어 독일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태동시키게 한 카롤루스를 당연히 자국과 자국민들의 위인 중 하나로 여기긴 했지만 바로 그 카롤루스의 가장 주요한 침략 대상이 다름이 아니라 오늘날의 독일 땅과 그 땅의 토착 게르만계 민족들이었다는 점으로 인해 카롤루스에 대한 숭상이 중세 프랑스처럼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즉, 카롤루스와 프랑크 왕국 사람들은 이런 게르마니아의 토착 게르만 신화를 믿는 게르만계 민족들을 게르만 친척 내지 동족이 아니라, 죽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든지 택일해야 할 사악하고 어리석은 사교도들로 간주하고 있었고, 실제로 밑의 카롤루스의 일대기를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게르마니아 지역에 정복 전쟁을 감행하여 무수히 많은 게르만계 토착 민족들을 학살하고 억압적인 강제 개종 정책을 시행하여 독일 전역을 평정한 자로서 게르만계 민족들 중 하나인 프랑크인의 지도자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독일인의 선조 게르만계 민족들을 도륙한 외세 정복자로서의 이미지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당연히 근현대 독일인들로서는 무턱대고 카롤루스를 숭앙하기에는 다소 꺼림칙한 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카롤루스가 그렇게 독일 지역을 정복하고 가톨릭을 전파하고 게르마니아의 온갖 게르만계 민족들을 통합시켜 차츰 하나의 독일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케 하는 원인이 되었으므로 카롤루스는 독일인의 위인으로도 분명히 평가를 받지만 그럼에도 그 독일인의 선조들을 학살했다는 카롤루스의 역사적 특징 때문에 대단한 위인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독일에서 내셔널리즘 의식이 형성되며 독일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관념을 재고하던 19세기부터의 일이고 그 이전의 전근대 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카롤루스는 그리스도인 전체의 영웅이자 독일을 중심지로 두고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적 기원자로써 독일에서도 크게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근간이 가톨릭인 만큼 사교도 학살과 정복전쟁을 탓하기는 뭐했기 때문이다(중세 후기의 튜튼 기사단만 해도 폴란드에게 깨질 때까지 계속 학살극을 벌였다)말하자면 카롤루스는 프랑스와 독일 양쪽에서 발생한 각자의 근대 내셔널리즘과 자국민들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여러가지 재고 방식들로 인하여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와 독일 쌍방 모두에게 꽤나 역사적인 푸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격하고도 비역사적이며 비학문적인 형태의 내셔널리즘이 차츰 사그라들고 민족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좀 더 학문적이고 다변화된 형태로 재구축된 20세기 중엽부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써 조상의 일원인 프랑크인의 게르만적 정체성을 다시 재고찰하고 인정하게 되었으며 카롤루스 역시 중요한 역사적인 위인으로써 대우하게 되었다. 물론 개개인의 역사관이나 학문적 수준에 따라서 카롤루스에 대한 인식 역시 꽤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현대 프랑스에서 카롤루스는 매우 중요하고도 위대한 역사적 위인으로 대우받고 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카롤루스를 자국의 위인으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롤루스가 프랑스의 위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으며 양쪽 모두 카롤루스를 공통의 자국 위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애초에 중세 시대에 서프랑크동프랑크로 프랑크가 분열할 때에 이미 프랑크 제국에 대한 계승 의식을 프랑크로써의 정통성 계승은 카롤링거 왕가 직계가 가장 오랜 기간 잔존했던 서프랑크(=프랑스)[26]가 이었다고 보는 것이 거의 자타공인이었으며 반대로 제국으로써의 정통성 계승은 동프랑크(=독일)를 중심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건립하고 카롤루스의 모계 후손임을 주장한 오토 대제에 의해 독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역시 거의 자타공인이었다. 즉, 카롤루스의 유산은 프랑스와 독일 양쪽 모두에게 이어져 내려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럼에도 앞서 언급한 카롤루스의 독일 방면에 대한 침략자로서의 역사적 행적 때문에 현대 독일에서는 여전히 카롤루스를 그렇게 크게 대접하지는 않고 있다. 카롤루스가 제국의 수도로 삼고 자신의 고향처럼 여긴 아헨 지역을 제외한 타 독일 지역에서의 카롤루스에 대한 인식은 꽤나 조촐한 축으로 현대 프랑스가 카롤루스를 자국의 위인으로 크게 홍보하는 것과는 꽤나 대비되는 모습이라 하겠다. 실제로도 독일인들은 카롤루스가 자국 위인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중 어느 쪽 위인에 가깝느냐라고 묻는다면 프랑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이 일반적이기도 하다. 이같은 독일인들의 카롤루스에 대한 시선은 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여론 조사를 통해 선정한 위대한 프랑스인 100인위대한 독일인 100인 항목에서 카롤루스가 프랑스인 위인 100인에는 선정되었지만 독일인 위인 100인에는 선정되지 못한 것으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카롤루스가 정복한 북부 이탈리아와 이후 역사에서 프랑크 제국 체제에 오랜기간 속해있던 북부 이탈리아의 카롤루스에 대한 인식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서 훨씬 부정적인 편이다. 현대 이탈리아인들의 경우에는 애초에 중세 초 프랑크족 지배층과 이탈리아인, 랑고바르드 피지배층의 혼혈이 딱히 광범위하게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중세 초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프랑크인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조상의 일원이라기보다는 그저 이탈리아 반도를 스쳐지나간 한때의 정복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며, 또한 현대 이탈리아인들에게 있어서 프랑크 제국은 딱히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고대 로마에 대한 동경의 정서가 압도적이며 하다못해 로마가 아니더라도 랑고바르드 왕국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지 프랑크에서는 거의 정체성을 찾지 않는다. 즉, 딱히 프랑크나 카롤루스 마그누스를 자국의 대단한 위인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예 카롤루스를 자국 위인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침략한 외국인 침략자로 보는 정서가 더 강할 정도이다. 물론 중프랑크 왕국이 오늘날의 이탈리아의 전신격 국가들 중 하나인 만큼 북부 이탈리아인들에게 프랑크족 혈통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생물학적으로만 그럴 뿐 정신적 의미에서 북부 이탈리아의 프랑크족은 현대 북부 이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도록 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 애초에 중프랑크 왕국 자체가 서프랑크 왕국동프랑크 왕국에 비해 후대에 물려준 유산이 적고 국가 자체도 빨리 멸망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나마 프랑스 및 독일어권(스위스/오스트리아)과의 접경지대 정도가 카롤루스 대제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인데, 이족은 해당 국가 주민들과 혼혈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까지 읽는다면 "왜 카롤루스와 프랑크인들이 같은 게르만 민족을 공격했느냐?"라는, 오랫동안 단일한 민족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27] 켈트, 게르만, 라틴과 같은 것은 하나의 민족 개념이 아니라 제어 사용자 민족들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학계에서는 줄여서 제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고대 켈트는 아일랜드에서부터 남부 독일, 이베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이탈리아 북부, 발칸 반도 북부에서 무려 아나톨리아이집트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켈트 제어 사용자 민족들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의 민족인 것이 아니다. 게르만 역시 마찬가지로 프랑크, 색슨, 앵글로, 프리스, 튀링겐, 알레마니, 랑고바르드 등등의 중세 게르만계 민족들은 같은 게르만 제어를 사용하는 각기 다른 민족들인 것이지 하나의 단일한 민족체가 아니었으며 당연히 서로 간의 뚜렷한 동족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28] 따라서 프랑크가 게르만계 민족이었다는 것이 그들이 다른 게르만 민족을 위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다. 또한 현대 독일인이 게르만계 민족들 전체를 대변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게르만계 민족들 중 하나인 도이치인일 뿐인 것이다. 근현대의 사례이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겉으로는 게르만 민족주의를 외쳤으나 실상은 게르만족의 도살자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많은 게르만족(네덜란드인, 노르웨이인 등 비독일계 게르만족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독일인까지)을 학살한 바 있다.

또한 당대 게르만계 민족들은 포르투갈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포르투갈인의 기원적 조상이 된 수에비족, 북부 이탈리아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이탈리아인 정체성의 조상 일원 중 하나가 된 랑고바르드족, 프랑스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프랑스인 정체성의 조상 일원 중 하나가 된 프랑크인, 히스파니아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스페인인의 기원적 조상 중 하나가 된 비시고트(서고트)인 등 구 서로마 제국령으로 이주 정착한 게르만계 민족들과, 반대로 오늘날의 독일 땅인 게르마니아 지역에 잔존한 색슨인, 알레마니인, 튀링겐인 등 잔존 게르만계 민족들로 구분지을 수 있었는데 이주 정착한 게르만계 민족들은 서로마의 유산을 이어받아 전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지만 반면 독일 방면에 잔존하여 살아간 게르만계 민족들은 전원이 인신공양을 하는 전통 샤머니즘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기독교가 가장 뿌리깊게 혐오하고 증오해온 것이 인신공양과 강신술이므로, 카롤루스와 프랑크인들은 저 게르마니아의 잔존 게르만계 민족들을 그저 개종시키지 못하면 죽여 없애야 할 사교도로 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오늘날 카롤루스는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지에서 각자 자국의 위인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비록 20세기에 서로 간에 카롤루스가 누가 그들의 위인인지를 두고 논쟁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들 모두의 공통 위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어쨌건 그의 존재와 행적이 중부유럽 민족들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저 나라들의 역사적 행보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카롤루스 개인의 정체성을 말하자면 아까도 언급했듯이 그는 "나는 게르만인"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며 당연히 당시 프랑크인들이 전부 그러했다. 그들은 그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자 프랑크인"으로 생각하였을 뿐이다.[29]

카롤루스와 그의 프랑크족의 혈통 기원, 문화적 정체성으로 볼 때에는 오늘날의 네덜란드 지역에서 살았던 게르만계 민족인 프리시족과 친척 내지 거의 동류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이 프랑크족이 프랑스 지역에 정착한 뒤에 다시 네덜란드를 침략하여 프리시족의 나라인 프리지아를 멸망시키고 프리시족을 복속시켰으며 그 프리시족과 프랑크족의 융합이 차츰 네덜란드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카롤루스는 네덜란드의 역사적 위인으로도 대우받고 있다. 벨기에의 경우에는 그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정체성을 모두 함유하며 탄생한 국가로서 마찬가지로 카롤루스를 자국 위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유럽에서 카롤루스는 서중부 유럽 전체의 위인이지만 동시에 "굳이 어느 한쪽의 위인인 것이냐?"를 묻는다면 아무래도 프랑스 쪽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상태이다.


7. 전설상에서의 모습[편집]


이후 수많은 기사 전설주인공이 되었으며, 아서 왕 이야기도 상당부분 카롤루스 전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카롤루스 르네상스와 15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다른 점이라면 카롤루스 르네상스는 라틴 문화, 즉 고대 로마의 문화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었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그리스 문화, 즉 동로마 제국에서 전승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었다.

흔히 샤를마뉴의 12기사라고 불리는 롤랑 경을 포함한 12명의 동료들 이야기가 유명하다. 다만 롤랑의 노래에선 200살이 넘는 노인으로 등장한다.


8.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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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서술했듯 카롤루스 대제의 서명은 원래 단순한 열십자였지만, 나중에 가면 이게 그 유명한 'K-R-L-S' 형태의 서명으로 변한다. 정확히 말하면 KAROLVS란 철자를 십자가 형태로 배치한 것.


스타의 뿌리를 찾아 조상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인 Finding Your Roots에 의하면, SNL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 미국 코미디언 빌 헤이더가 무려 카롤루스의 후손 중 하나로 밝혀졌다.


9.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9.1. 소설[편집]



9.1.1. 닥터후 웹 소설[편집]


서기 팔백년 벨기에의 한 만찬에 참가하려다 파란색 빛 속으로 사라졌는데, 마침 그때 만찬에서 음식 맛을 보던 닥터가 손수 구출하러 아르덴 숲에 갔다가 연도 불명의 외계 행성에 워프한다. 거기에 모무스라는 외롭고 정신나간 외계 컴퓨터가 카롤루스 대제 말고도 윈스턴 처칠, 클레오파트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드레이크, 칼리굴라 등 인류 역사의 유명인들을 잔뜩 납치해 그곳의 문명을 재건하려 했는데, 닥터의 설득으로 모두 원래대로 돌아간다. 닥터와 도나가 아가사 크리스티를 만난 건 이 직후의 일이다.


9.2. 만화 및 애니메이션[편집]



9.2.1. 굿모닝 보스(원작)[편집]


'샤를마뉴 심'이라는 트랜스젠더 디자이너가 나온다. 카롤루스 대제와는 무관하고 앙드레 김을 패러디한 이름이다.


9.3. 게임[편집]



9.3.1. 문명 시리즈[편집]


문명 3에서 프랑스 문명의 군사 지도자로, 문명 4에서 신성로마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또 문명 4에는 카롤루스 시대를 집중 조명한 시나리오가 있으며, 문명 6의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인 바이킹에서도 프랑크족의 지도자로 출연한다.


9.3.2. 크루세이더 킹즈 2[편집]


DLC 샤를마뉴에서 드디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연속되는 이벤트를 통해 중간에 뭔가 잘못돼서 죽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역사대로 미칠듯한 정복과 12기사들의 등장이 이어진다. 다만 플레이어가 잡지 않으면 툭하면 전쟁에서 불구가 되거나 죽어버리거나 하기 때문에 생각처럼 팍팍 치고나가지를 못한다. 거기에 쓸데없이 아키텐의 반란을 고증해서 아키텐의 영주들이 샤를마뉴를 싫어하기 때문에 얘들을 중심으로 동생 카를로만이나 메로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생존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반란이 일어난다. 홀리퓨리 들어서는 부족정이 미칠듯이 버프되는 바람에 작센에게 탈탈 털리는 모습까지 목격되었다.


9.3.3. 토탈 워: 아틸라[편집]


DLC인 샤를마뉴의 시대에서 등장한다.

9.3.4. Fate 시리즈[편집]


Fate/EXTELLA LINK에서는 세이버 클래스의 샤를마뉴가 등장하며 엑스텔라 링크의 주연을 맡았으며, 룰러 클래스의 카를 대제도 등장했다. 자세한 것은 카롤루스 대제, 샤를마뉴, 카를 대제 참조.


9.3.5. Carolus Magnus[편집]


그의 이름을 딴 보드게임도 있다. 2000년 SDJ 후보에도 올랐으나 토레스에 밀려 수상하지는 못했다.


9.3.6. 도미네이션즈[편집]


샤를마뉴의 팔 유물함이 전쟁 전당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샤를마뉴의 팔 유물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3.7. 유희왕 오피셜 카드 게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샤를 대제(유희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4. 기타[편집]


  • 독일-프랑스 합작 블록버스터 다큐 <샤를마뉴>가 ARTE TV를 통해 2014년에 방송되었다.
  • 크리스토퍼 리가 2010년, 그의 나이 88세에 발표한 파워 메탈 Charlemagne: By the Sword and the Cross는 바로 카롤루스 대제에 대한 노래다. 크리스토퍼 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외가 쪽 혈통이 바로 카롤루스 대제의 쌍독수리 문장을 사용하는 카랑디니 가문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려 91세의 연세에 카롤루스 대제 연작인 Charlemagne: The Omens of Death (2013)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 미국의 밀리터리 잡지인 암체어에서 선정한 위대한 장군 100명에 이름을 올렸다.
  • 할리우드 배우 키아누 리브스와 젊은 시절이 닮아 보여서 관련 밈과 드립이 많다.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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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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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노 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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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위
98위
99위
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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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롤루스 대제 생전에 묘사된 유일한 초상화다.[2] 그의 시대에 쓰였을 대중라틴어에서는 gn이 '니'로 발음됨[3] 고대 게르만어에서 기원한 유럽의 흔한 인명. 카를 (Karl) - 독일어, 카롤루스 (Karolus, Carolus) - 라틴어, 카롤 (Carol) - 루마니아어, 카를로 (Carlo) - 이탈리아어, 카를로스 (Carlos) - 에스파냐어, 샤를 (Charles) - 프랑스어, 찰스 (Charles) - 영어, 카롤 (Karol) - 폴란드어, 카럴 (Karel) - 네덜란드어, 칼(Karl, Carl) - 스웨덴어[4] 740년, 747년이라는 설도 있다.[5] 다만 독일아헨 시와 이에 대해 논쟁이 있다.[6] 유골 조사 결과에서 나온 키이다.[7] 독일 라인란트팔츠, 헤센, 자르 지방에서 사용되던 중세 고지 독일어 방언으로 분류되는 중부 프랑크어의 일종인 리푸아리아 프랑코니안 방언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이전 문서에는 라인 프랑코니안을 사용한다고 기재되어있었는데, 라인 프랑코니안과 중부 프랑코니안어는 엄연히 다르다. 펜실베이니아 독일어가 여기 속한다. 프랑크족이 사용하던 프랑크어는 여러가지 방언으로 갈라졌다.https://en.m.wikipedia.org/wiki/Franconian_(linguistics). 다만 모어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다. 이 외에도 라틴어를 제2언어로 구사하였다. 참고로 수도 아헨에서는 리푸리아 방언이 사용되었다.[8] 즉위장소는 누아용(Noyon) 대성당[9] 즉위장소는 파비아(Pavia) 대성당[10] 즉위장소는 성 베드로 대성당. 오늘날 개축된 대성당이 아닌 과거의 대성당이다.[11] ß(에스체트)는 일반적으로 ss의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12] 당시 라틴 문자에는 소문자가 없었고 V가 U의 발음을 갖는 문자였다.[13] 생전 모습에 가장 가깝게 묘사한 편이다.[14] 카롤루스 대제가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관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이다. 다만 실제로 카롤루스 대제가 저 관을 쓴 적 없는데, 카롤루스는 8~9세기의 사람이고 저 황관은 10세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관을 쓴 모습은 상상화다.[15] 카롤루스 대제는 늙은 나이인 72세에 죽었으므로 그가 젊었을 때엔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매우 큰 키인데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장신이다.[16] 지금도 유럽미국에서는 글을 모를 경우 X표를 치면 서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관습이 있다. 그래서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 때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씌워주었을 때, 동로마에서는 "글자도 못 읽는 왕 주제에"라는 식으로 비아냥대기도 하였다. 웃긴 점은 동로마에서도 바실리오스 1세 같은 문맹 황제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카롤루스와 마찬가지로 바실리오스 또한 무식한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카롤루스와 같이 명군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17] 카롤루스 대제의 전기 작가인 아인하르트의 기록.[18] 전기작가 아인하르트의 말에 따르면 "모국어만큼 자유롭게"[19] 유명한 일화로 딸 이마는 샤를마뉴의 비서관이자 전기작가 아인하르트와 몰래 사귀었는데 어느 날 밀회를 즐기고 나와보니 눈이 하얗게 쌓여있어 발자국이 남을까봐 이마가 아인하르트를 번쩍 들어서 행정관까지 옮겨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하필 그날 밤 샤를마뉴가 잠이 안와서 서성거리다 창밖으로 이 공주님 안기를 봐버렸고 두 사람을 불러 벌을 내리려 했으나 진심어린 간청으로 사랑을 허락받았다는 이야기.[20] 프랑크 왕국의 강역 때문에 유럽이 아니라 서유럽이라는 태클이 나올 수 있지만, 일단 통칭은 Pater Europae(유럽의 아버지)다.[21] 비록 동유럽영국, 스페인 등 이 말에 해당되지 않는 지역은 상당히 많긴 하지만 이들 지역 일부 역시 간접적으로 카롤루스의 영향을 받았다. 영국 왕실노르만 왕조를 통해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스페인 왕실도 보르본 왕조를 통해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을 이어받았다.[22] 메로베우스 왕조의 수도는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였고 핵심적인 행정 관리 체제도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프랑스 땅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카롤루스 왕조의 상징적인 수도는 카롤루스 대제로 인해 오늘날의 독일에 속한 아헨이 되었고 카롤루스 왕조는 독일 방면 개발에도 열심이었다.[23] 켈트계인 갈리아인과 라틴계인 로마인의 혼혈인 갈로-로만.[24] 실제로는 그렇게 구분되어질 수 없음에도 그리 되었다. 요컨대 독일인들도 순수한 게르만계 고대 민족들의 통합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서슬라브계 민족들이었던 보헤미아인, 포메라니아인, 소수의 폴란드인들도 섞여서 형성된 민족이다. 거기에 고대 남독일 지역을 장악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갔던 켈트계 민족인 보이족도 따지자면 오늘날 독일인의 혈통적 기원 중 하나이므로 독일인은 무조건 게르만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식으로 치부될 수 없었으며 게르만, 켈트, 라틴의 융합체인 프랑스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내셔널리즘의 광풍이 세계를 휩쓸던 때였고 그런 식으로 민족 개념을 단순화, 국가 단위로 일원화하려는 과격하고 비역사적인 행태가 세계 각지에서 만연했다.[25] 브리튼 제도로 건너간 앵글인, 색슨인을 의미하는 게 아닌, 독일 지역에 잔류했던 작센인을 의미한다.[26] 루이 5세가 마지막 카롤루스 프랑스 왕이었으며 그 이후로는 카롤루스의 모계 후손인 위그 카페가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였다.[27] 사실 한국사의 삼국시대후삼국시대 그리고 6.25 전쟁을 생각하면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민족끼리도 모종의 이유로 서로 적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28] 이는 한국사에서 신라삼국통일 이전까지 예맥 계통의 민족들이 따로 국가를 이루면서 살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로 간 문화나 언어의 유사성으로 동질성을 느껴도 단일한 동족이라는 의식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과 유사하다.[29] 비슷한 경우로 청나라만주족 또한 스스로를 "몽골과 중원의 지배자이자 만주족"으로 생각하였을 뿐 퉁구스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주족의 입장에서 나나이족, 우데게족 등 다른 퉁구스계 민족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족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