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레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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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12대 총리
오스트리아 제3대 연방대통령
카를 레너
Karl Renner


파일:Karl_Renner_1905.jpg

출생
1870년 12월 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 돌니 두나요비체
사망
1950년 12월 31일 (향년 80세)
오스트리아 공화국
재임기간
초대 연방총리
1918년 10월 30일 ~ 1919년 10월 21일
제12대 연방총리
1945년 4월 27일 ~ 1945년 12월 20일
제3대 연방대통령
1945년 12월 20일 ~ 1950년 12월 31일
정당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사민당
]]

가족
배우자 루이즈 레너
경력
내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오스트리아 초대·제12대 연방총리
오스트리아 제3대 연방대통령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의 초대 및 제12대 연방총리이자 제3대 대통령으로 현대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국부로 간주된다.

2. 생애[편집]


제1차 세계대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나고 찾아온 전간기 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민주당의 지지세가 매우 높았고, 공산당과 끝없이 투쟁해야했던 독일 본토의 사회민주당과는 다르게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장애물 없이 노동자들의 몰표를 받았기 때문에 공산당에 의해 위협받을 일도 없었다.

카를 레너는 이 사회민주당의 수장으로 초대 총리가 되어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대독일 통일을 제창했지만 협상국에 의해 거부당했고, 오히려 티롤주데텐란트 지방을 잃으면서 정치적으로 타격을 좀 입었다. 그럼에도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무난하게 총리로 재임하며 공화국 오스트리아의 기반을 닦았다.

향후 레너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써 계속 활동하지만,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여기 어울리지 않고 정치에서 완전히 은퇴한 뒤 나치의 협력 제안을 원천 거부한다. 정확히는 당초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에 찬성하였으나 순간의 광기로 끝날 줄 알았던 나치즘이 오스트리아까지 완전히 지배해버리게 되자 거리를 두게 된 것에 가깝다.#

이 영향인지 소련군이 오스트리아에 진주하자 레너를 총리로 추대했는데, 레너는 연합군 군정기에 사회민주노동당(SDAPÖ)의 당수이자 총리로서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재건국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소련의 요구로 내각 장관의 1/3과 내무장관, 교육부 장관을 공산당원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동시에 두 부서의 차관 두 자리에 공산당이 아닌 인사를 임명하여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소련의 희망대로 공산화되거나 독일처럼 분단되는 것을 막았다. 오히려 소련에서 오스트리아 독립을 위해 자신들을 이용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 원로로서의 본인의 인망 역시 높은 편이어서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역시 레너를 소련이 보낸 괴뢰 정치인이라 의심하지 않고 믿을 만한 정치인으로 인식하여 신뢰를 보냈다.

동독의 오토 그로테볼이나 북한의 조만식처럼 소련에 의해 '공산국가가 아닌 국가를 세우려는 겉포장'처럼 이용되다가 버려질 수도 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가 분단되지 않고, 또 공산화되지도 않고 남은 것은 레너의 업적인 셈. 결국 소련의 기대와 달리, 1945년 11월 열린 전후 첫 총선에서 레너와 사회민주당은 76석을 확보해 겨우 4석 확보에 그친 공산당을 압도했고 보수 성향 인민당대연정을 구성해 공산당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로에 힘입어 12월 20일, 총선 결과에 따라 재건된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오스트리아의 세번째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여기에는 특기할 만한 점도 있는데, 동독의 군정지휘관이었던 소련군 바실리 소콜롭스키 원수나[1] 북한 지역의 내정을 치스차코프 장군 대신 맡아 공산당 아닌 정치세력을 모두 극렬히 탄압한 정치장교 출신 테렌티 시티코프 장군에 비해 오스트리아에 진주한 표도르 톨부힌 원수는 특이하게도 소련 내에서도 덕장으로 유명한 인물로, 본래 소련에 피란을 와 있던 오스트리아의 망명 공산주의자로 공산국가를 세우려던 스탈린의 계획에 반대하고 현지의 명망있는 정치인으로 레너를 선택해 스탈린의 마음을 돌리게 해 결과적으로 레너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1950년 12월 31일, 대통령으로써의 임기를 보내던 도중 사망했고 사후 빈에 있는 중앙 묘지 대통령 무덤에 안장되었다.

반유대주의자였다[2]. 장관직에서 유대인을 배제했고,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유대인들을 매몰차게 외면한 것도 비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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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는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동독 지역을 맡았고, 어느 정도 서방과의 협상도 진행되고 있었지만 2차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각한다.[2]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현재와는 달리 그 이전에는 좌파에 반유대주의가 있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유럽에서 반유대주의자 아닌 사람을 찾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