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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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나치에 협력한 헌법학자이자 뛰어난 국제법학자.[1]
그는 헌법의 수호자 논쟁, 헌법학에서의 결단주의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슈미트의 공간질서 사상, 이른바 광역이론은 슈미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핵심으로써 그것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슈미트는 현대의 대중민주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의회민주주의의 대표의 원리[2] 를 엄격하게 수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3] 슈미트에게 권력의 활동은 제도가 아니라 결단이며, 친구와 적의 구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는 근원적인 사상에는 가톨릭이 위치하고 있다. 슈미트는 자신의 저서 『로마가톨릭주의와 정치형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톨리시즘의 합리주의는 제도적인 것 속에 있으며, 본질적으로는 법적인 것이다."라고.
그의 저서는 발터 벤야민, 레오 스트라우스, 위르겐 하버마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이사야 벌린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모든 이론가들이 좌우를 막론하고 슈미트에게 감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정치적으로는 파시스트이면서도 동시에 전통적 보수주의 성향을 보이는 등 다소 특이한 인물이였다.
2. 생애[편집]
1888년 7월 11일 베스트팔렌주 플레텐베르크(Plettenberg)에서 태어났다. 1907년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해 뭔헨 대학으로 다시 슈트라스부크 대학에서 1910년에 박사학위를, 1914년 교수자격을 취득하였다. 1921년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여, 본 대학(1921년), 베를린 상과대학(Handelshochschule Berlin)(1928), 쾰른 대학(1933년)에서 교수직을 역임했고,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베블린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는 동시에 프로이센 추밀고문관으로 임용되며 잠시 나치 법학자로 이름을 떨치지만, 1936년경 그의 법 이론이 인종적, 민족적 공동체를 기초로 두지 않으며 그의 이론은 가톨릭에 기반한 헤겔주의적 국가론자 라는 비판을 받으며 입당 3년만에 실각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전범재판을 받고 교수직을 상실한 후 고향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5년 4월 7일 사망했다. 97세까지 장수했다.
3. 상세[편집]
칼 슈미트는 나치의 법학자로 사상적 측면에서 전체주의자이며, 행위가 아닌 사상 때문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단죄 당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언뜻 보기에 무시 무시하지만 모두가 헛점을 찔렀다고 생각할만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학에서는 주로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의 양면성을 지닌다는 것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학자이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와의 관계를 탐구한 것으로 유명하며, 민주주의가 스스로 독재를 선택하는 경우에 대해 언급할 때, 칼 슈미트의 이론은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슈미트가 극우 사상가들에게 거론되는 것을 유독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그는 반동이 아니며,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칭하는데[4] , 이는 "극우"라는 단어에 대한 상당한 오용이다. 다른 면에서 사려 깊고 적절한 고찰이 풍부한 정치적 작품을 하나의 말 표현으로 확립시켜보려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현학적인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것도 일반 어원론에 의해서 무제한적 확장해석이 가능한 말을 가지고 그러는 것 말이다.
도리어 현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가 18세기의계몽주의와 공산주의를 다소간 비판의 정도를 높이며 공격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실제적이며 실존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문제들과 연관하여서, 현대의 미국이 공간질서의 수호자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곧 그러한 점에서 슈미트에 의해서 미국의 공간질서가 수호된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5]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이렇게 말한다. 민족국가의 동질성을 파괴하려는 세력에 대하여 자신의 고유한 존재의 권리를 주장할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의 정치적 능력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제법적 질서는,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것의 다수의 개별성에 있어 다소간 우연적인, 특정의 역사적 시점에 있어서의 그때마다 영토적 현상을 수호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초가 되는 노모스, 그것의 공간구조, 질서와 장소확정의 통일성을 수호해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미트가 좌익 세력에게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6] 왜냐하면 슈미트 스스로가 자신의 정치신학이 그들에게 이용되는 것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표현을 하자면, 예컨대 슈미트의 적과 동지는 헤겔의 변증법을 문제시하고 헤겔과 함께 마르크스까지 자신 속에 포함시켜버린 일종의 상급의 이론 구성이라고 하겠다.[7] 물론 이와 관련하여 좌익 쪽에서는 죽어도 인정하기 싫겠지만, 이것도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J. H. 맥코르믹(McCormick)은 슈미트를 현대의 미국의 다양한 보수주의의 흐름의 “대부”(godfather)로 규정한다.[8] R. 메링(Mehring)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보수주의를 주도했던 인물들 중에서 슈미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9] 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를 좌파, 심지어는 극좌로 규정하고 싶어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매우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반공산주의자이며, 경우에 따라서는―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되기는 하지만―나치에 가담한 파시즘적인 성향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으로 현대의 "자유 민주주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적 예외와 민주주의적 예외가 부각되며, 이와 같은 <예외상태>에 관한 학문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다시 연구되어, 재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감벤의 『예외상태』라는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슈미트는 수권법을 통하여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를 구성한다. 여기서 슈미트가 어떤 식으로 역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어내려가며, 독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이 부분은 부연설명은 하진 않겠지만 『독재론』을 참고하는 것을 추천한다. 「프랑스 혁명기 동안의 인민위원의 실제」라는 챕터는 과연 타당하며, 타당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다.
베르나르 페이(Bernard Faÿ)는 문명이라는 단어가 19세기 초에 나온 것이며, 오로지 고대 유럽을 프랑스와 미국과 결합시키고 있는 계속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증하였다.[10] 1796년의 워싱턴 대통령의 고별 교서도, 1923년의 먼로 교서도, 유럽 외부적인 국제법의 기초를 세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미국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유럽 문명과 유럽 국제법의 담지자로 느끼고 있었다.[11] 당시 수립되고 있었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역시 스스로를 자명하게 <유럽 국가군>과 그들의 국제법공동체에 속하는 것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19세기에 나온 아메리카 국제법의 모든 교과서들은, 유럽 국제법 옆에 나란히 놓이는 특별한 아메리카 국제법에 대하여 말하는 경우에도, 더욱 더 자명하게 그러한 주장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12] 따라서 서반구와 더불어 주어진 전세계적 경계선은 비록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구(舊)유럽을 염두에 둔 것이며, 유럽을 배제시킨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특정 의미에서만 반(反)유럽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즉 이러한 점에 한정해서만 오늘날 "좌익들의 칼슈미트 이용"이 이루어진다고 하겠다.다른 의미에서 아메리카의 서반구 경계선은 반대로 자유롭고 진정하며 고유한 유럽이고자 하는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요구를 포함하고 있다.
영미권을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은 칼 슈미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사상적 배경 자체가 완전히 이질적이라서[다른] , "근대의 이원주의적인 사고 방식"[13] 을 보지하는 특정 인물들에게 있어서는 칼 슈미트가 구유럽과 현대의 '극우파' 자유주의자들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 근대의 이원주의에 기반한 정치체제와 이론을 몸으로 체험하며 살고 있는 "좌익"들은 독일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 사람의 문헌을 읽으면 단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가톨릭적인 기초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 즉 이러한 근대의 이원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슈미트가 어떤식으로 구유럽과 영미권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의 보수주의자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지를 확실하게 인지시켜줄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풍부한 설명은 최재훈이 번역한 『대지의 노모스』에서 그 효과를 확실히 발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이른바 제퍼슨 라인으로 표현되어 있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명확하고 일관된 공식화에 의지해 논의를 풀어가 보자.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4] 은 1812년 초에 <영국의 운명은 거의 결정되어 있으며 현재의 영국의 존재 형태는 몰락으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들이 지닌 강력함으로 인해 우리들은 반구(半球)에 대하여 법률을 부과하는 것이 우리에게 허용된다면, 그러한 법률은, 대서양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경선(經線)이 전쟁과 평화의 분리선을 이루고, 그러한 분리선 이 편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행해지지 않으며 사자와 양이 평화 속에서 나란히 쉴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823년 12월 2일의 제임스 먼로(James Monroe)[15] 대통령의 교서는 반구(半球)라는 말을 완전히 의식적으로 그리고 특별히 강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교서는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아메리카로, 그리고 또한 이 대륙이나 이 반구(this hemisphere)로 부르고 있다. 먼로주의와 서반구는 둘이 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 둘은 미국의 특별이익의 영역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국가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간, 즉 광역(廣域, Groβraum)[16] 이라는 말이 지닌 국제법적 의미에서의 광역을 나타내고 있다. 전통적인 미국의 국제법이론은 그것을 법적으로 자위지역으로 이론구성을 하고 있었다. 1939년 10월 3일의 파나마선언에서 우선 서반구라는 표현이 정착된 것으로 보였다. 이 선언에 의해 확정된 아메리카 국가들의 중립성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보장지대(安全保障地帶)의 내부에서는 전쟁 수행 당사국은 어떠한 적대행위도 취해서는 안 된다. 중립적인 안전보장지대의 경계선은 아메리카대륙의 양쪽 해안선에서 대서양 쪽으로도 태평양 쪽으로도 300해리에 이르고 있다. 그 경계선은 브라질 해안에서는 그리니치 자오선(子午線)의 서경(西經) 24도에 도달하고 있으며, 따라서 통상적으로 지도제작법상(地圖製作法上)의 동방과 서방의 분할선을 나타내고 있는 서경 20도에 접근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슈미트가 "전세계적인 경계선사고(Globales Liniendenken)"라고 부르고 있는 "전세계적(global)"이라는 말은 이러한 사고방식의 평면적이며 표면적인 성격과 더불어 대지포괄적-혹성적인(erdumfassend-planertarisch) 성격을 나타낸다.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세계적 경계선사상은 고유의 발전과정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사상은 1492년의 아메리카 발견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아메리카의 선언에 이르기까지의 서로 관련되고 통일적인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초의" "전세계적인" 경계선은 처음에는 아메리카 발견 수개월 후인 1494년 5월 4일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Ⅵ)의 교서,『Inter Caetera』속에서 등장한다.
그러한 종류의 것인 미국의 고립선은, 즉 그러한 선민의식은 정신사적으로는 칼뱅주의적이며 청교도적인 태도로부터 유래한다. 그러한 의식은 이성론적이고 세속화된 형태로 계속되며, 또한 흔히 그러한 형태에로 고양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오로지 신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감정이 함께 세속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즉 1775년의 독립선언 이래 미국적인 선민의식은 프랑스로부터 순수하게 세속적·현세적 성질을 지닌 새로운 도덕적 힘을 공급받는다. 계몽주의 철학자들, 그 중에서도 레이날(Raynal)과 콩도르세(Condorcet)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은 인류 역사의 새로운 상(象)을 창조한다. 이제까지는 가톨릭의 정복자들과 프로테스탄트의 정복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앙의 선교로서 정당화되어 있었던 16세기의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의 정복, 아메리카 토지에 대한 대규모적인 육지취득은 이제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비인간적인 잔혹행위로 나타난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17] 에게서 이러한 견해에 대한 자료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에 반해 미국의 인권선언은 일종의 인간성의 부활로 이해된다. 17세기 철학자인 토머스 홉스에 있어 아메리카는 이기적인 충동과 이익을 위한 국가 이전의 자유로운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자연상태의 영역이었다. 존 로크에 있어서는 아메리카는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출발의 상태에 있었고 자연상태에 있었다. 18세기 말경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북아메리카를 재차 또 다른 종류의 자연상태의 영역, 즉 루소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자연상태, 다시 말해 지나치게 문명화된 유럽의 타락에 물들지 않은 자연상태로 간주하는 것에로 옮아갔다. 이를 위해서는, 프랑스가 미국과 체결한 동맹(1778년) 때문에,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신적 우의(友誼) 때문에도,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18] 의 프랑스 체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아메리카는 유럽의 의식에 있어 두 번째로 자유와 자연성의 공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전세계적인 투쟁선이라는 옛날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고 고립에 적극적인 내용을 부여하는 하나의 긍정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한 기본적인 고립은 그것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에 따라 대지의 새로운 하나의 공간질서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한 고립은 보장된 평화와 보장된 자유의 영역을 전체주의와 타락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식에 의해 새로운 공간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을 완성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아메리카적인 고립의 사고는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헤겔(Hegel)은 이러한 신세계의 구조에 관하여 백 년이 넘는 시간 전에, 1848년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강의의 서문에서 주목할 만한 진단을 제시하였다. 최초의 먼로주의의 시대인 당시, 그는 순진함과 박식함을 천재적으로 혼합시켜, 미국이 아직 결코 국가(Staat)가 아니라는 사실, 미국이 아직도 시민사회의 단계에 있다는 사실, 즉 개인주의적 자유에 대한 변증법적 극복이라고 하는 국가적 상태에 선행하는 이해관계의 자유라고 하는 국가 이전적 상태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였다.
칼 슈미트의 이런 묘한 스탠스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이식된 체제가 독일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준다. 사회민주당, 가톨릭 중앙당, 민주당이라는 세개의 독일 정당들이 많은 학자들에게 헌법 초안을 의뢰해 만들어낸 결과 프랑스식 대통령제, 영국의 의회제,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가 모두 들어있었다. 이를 수권법으로 무력화시킨 후 폭주한 나치당 때문에 이것을 이상적인 헌법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많으나 실상 이 법안 자체가 수권법으로의 전환을 내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점 때문에 칼 슈미트의 이론은 독일 전통의 정치적 방법론으로 영미권의 법률 이론과 논의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다만 그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논의가 너무나도 정교했기에 정치적 의의가 있어 헌법학에 반면교사로서 그의 이름이 남게 되었다. 물론 칼 슈미트의 저작들은 이런 것들 중에서도 상당히 고전적인 것이고 영미권의 민주주의를 공격하는데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에게 구미가 잘 들어맞아 대중적으로도 크게 알려진다. 그의 독특한 법학, 정치학적 사유가 나치당의 집권을 정당화하는데 기여하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나치즘에 기초해 있다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는데, 그의 이론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것의 가능성을 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슈미트에 의하여 영미식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정당화되어지고, 이것이 오늘날의 의회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라는 표현이 실제적이며 실존적으로 타당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슈미트가 나치의 집권 이전 힌덴부르크 대통령 시절에 주장한 표현법은 상당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를 어지럽히는 독일공산당과 나치당의 폭동을 비상대권을 이용하여 제압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슈미트는 나치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는다. <그의 국가론에 인종, 민족적 기반은 전적으로 정치적 입지를 위한 허구이며 실상은 가톨릭에 기반한 헤겔주의적 국가론이다>라고. 더불어 슈미트가 3년만에 당에서 축출었다는 점은 오늘날의 슈미트 연구를 위한 중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실제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사상적으론 나치즘의 인종주의에 빠지지 않을만큼 명석하고, 실제로 유대인 지식인들과도 많이 교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혐오하던 바이마르 자유민주정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나치와 결탁하는걸 주저하지 않았다. 사석에선 나치의 인종주의를 멍청하고 저급한 발상이라 비웃으면서도 나치가 가져올 반민주주의적, 반자유주의적 국가를 위해서는 동료 유대인 교수들을 강단에서 쫓아내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본인의 사상과 차이점을 이미 파악했던 나치 지도자들에겐 그냥 권력에 빌붙은 지식인으로 취급 당하고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했다. 어쨋든 반민주주의, 반자유주의적 일관성을 위해 계속 충성했고, 종전 이후엔 이게파르벤 전범기업가들을 비롯한 전범들 변호에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도 했다. 이렇게 나치즘과 사상적 독립성을 유지할 지성을 가지고도, 딱히 대접도 못받았으면서 적극 부역했다는 점에서 슈미트의 사상과 삶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선 나치보다 더 악질이라 보지만, 어쨌든 이런 특유의 카리스마를 지닌 통찰력이 전후 현대 정치학, 법학계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4. 배경[편집]
근원적으로 근세 영미권에서는, 어쩌다보니 거대 제국이 된 대영제국의 미래상을 두고 제국을 유지해서 얻는 이익 때문에 도덕적 딜레마를 등한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식민지인과 본국인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래서 근대 자유론의 거의 대부분이 영국에서 나오게 된다(존 스튜어트 밀, 존 로크, 토머스 홉스, 존 오스틴,[19] 제러미 벤담 등).
반대로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중앙정부가 사실상 명목만 남은 채로 영방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일찍이 민족국가 체제를 갖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둘러싸여 이권과 영토를 차근차근 무력하게 빼앗기고 있었다. 독일계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독일인이 단결할까, 독일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중권력을 어떻게 구현할까'에 관심이 쏠려 있었고, 근대 전체주의의 대부분이 이러한 고민들에서 나오게 된다(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틴 하이데거 카를 마르크스 등). 이 중 법철학 부분을 담당하는 게 카를 슈미트이다.
부연하자면,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는 영미권 철학자들과 다르게 독일 철학자의 전체주의적 성향에 대해서 그 후계자와 해설자들은 매우 강경하게 부인한다. 그러나 독일철학의 옹호자들이 그들의 선학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양보한 표현으로 전체주의자들이 이들의 사상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해 동원했다라고 말한다면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 독일어권 철학에 대한 어떤 존중도 없는 까칠한 영미권 철학자들의 경우 배경 상황부터 봐도 애초에 그놈들은 그럴 목적이었고 동료, 후학, 대중의 인식도 딱 그랬으며 본인들도 그렇게 해석하던 놈들에게 교수직, 연구기금, 관료 자리를 받아먹던 놈들이라고 표현하는걸 감안하면 이들이 총체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전체주의적 성향이 있다고 해서 이들의 철학이 가치없는 것이 아니고 영미권 철학이 독일철학과 완전히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사상의 전개 결과 전체주의를 옹호나는 결론이 나온다고 해서 이들 철학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영미권 철학자 대다수도 동의한다.
정리하자면 독일과 영국의 상반된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타개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요구가 이런 상반된 전통으로 나타난 것이다.[20]
역사적으로 ‘사회권’ 개념을 처음으로 헌법에 도입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조화시키고자 한 바이마르 체제에 슈미트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음을 간파하고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들을 파고들었다.
고대의 공화제에 바탕한 독재론, 가톨릭계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신학, 프랑스혁명 이후의 헌법제정권력론, 마르크스주의의 혁명론 등을 연구하면서 그는 ‘법제도’와 ‘정치’ 에는 ‘친구’와 ‘적’ 사이에 선을 긋고 ‘보통(nomal)상태=규범성’을 창출하는 ‘결단’이라는 행위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슈미트와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되는 혁명적 좌파들도 그의 ‘결단법론', 친구/적’이론을 깊게 탐구한다. 1990년대 부터는 데리다, 아감벤, 무페 등 포스트모던 좌파 논객들이 슈미트의 이론을 논하였다.
5. 내용[편집]
5.1. 독재론[편집]
고대 로마에는 ‘독재관’ 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독재관’은 공화국에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내란이나 폭동, 외적의 침입 등으로 내부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그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되잡기 위해, 정무관의 권한을 넘어서는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권력을 지니며 총령과 원로원으로부터 권환을 위임받은 특별한 정무관을 의미했다.
독재관은 로마의 모든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무관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사태를 수습하며 법률을 변경할 수도 있었을 정도로 무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만, 견재를 위해 임기는 반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44)는 자신의 독재관으로서의 임기를 점차 연장시키고, 최종적으로 ‘종신독재관’ 으로서 임명된다.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기원전 63-기원후14)는 ‘독재관’의 직을 형식적으로 사임하면서, 그 대신에 ‘황제 imperator’의 칭호를 얻으며, 로마제정의 시대를 열개 된다.
즉, 원래는 한시적인 비상시대권을, 법적 절차를 따라 얻게 된 자가 ‘독재관’이었던 셈이다. 마키아벨리(1469-1527)의 『로마사 논고』(1517)에도, 로마 공화국을 안정시키는 구조로서, 이‘독재관' 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즉, 로마의 독재관 제도가 서양사에서 사전적 의미로의 ‘독재’의 출발점이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 장 보댕(1529-96) 등은 왕에게서서 전권을 위임 받은 행정관들의 ‘독재’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에서도 로마의 ‘독재관’이라는 제도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마키아벨리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프랑스혁명기에는 공안위원회가 로베르스피에르를 중심으로 지방에 파견된 '위원' 들이 이‘독재' 역할의 개념을 맡는다.
슈미트는 보댕 등에 의한 근대적인 ‘독재’론의 계보를 차근히 더듬으며 이론을 출발시키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개념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할 경우 꽤나 흥미로운 결말이 생겨난다.고대 로마
〈dictator (독재관)〉 제도
공화국에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행정관으로서의 권한을 넘어서는 권위를 총령과 원로원으로 부터 위임받은 특별한 행정관. - 견제를 위해 임기를 반년으로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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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tator' (독재자) 의 어원, 슈미트의 독재 해석
슈미트에 따르면 이러한 근대의 독재개념은 고대의 독재개념과 다르다. 근대의 독재개념은 더이상 고대와 같이 과거의 정상상태로의 복귀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신질서의 정상적인 창출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 주권의 내용과 형식상 제한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자유주의는 카이사르주의(Caesarism)와 같은 독재정과 황제정을 구분짓지 못하며 비상사태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은 부분적으로는 독재를 제대로 이해하지만, 최종 목표가 국가의 소멸이라는 점에서 독재의 본래 목적(국가의 통일성과 질서유지)을 망각해 버렸다고 지적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과거의 정상 상황 수복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신질서 창출을 위해 독재를 이용하지만, 국가의 소멸을 지향하기 때문에 미래마저 부정한다는 것이다.[21]
5.2. 가톨릭주의[편집]
어릴적 부터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슈미트는 어릴 적부터 가톨릭 철학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그의 헌법이론의 근저 속에서 가톨릭주의는 그의 철학의 근간의 많은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저서들 속에서는 다양한 신학적 정치학의 바탕이 되는 사상들이 등장하는데, 철학적 첫번째 업적이라 불리는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부터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철학의 허구성과 유악함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메스트르, 루이 보날과 같은 반동적 가톨릭 국가주의 사상[22] 을 기초로 하여 교회론적 철학의 바탕으로 드러난다고 여겨진다.
보날은 자신의 기독교적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1793년의 자코뱅주의를 무신론적 철학의 발현으로 봤다. 그는 신에 관한 신학적·철학적 관념과 정치적 사회질서 사이의 유비를 해명했다. 이는 군주제적 원리가 인격신이라는 일신론적 관념에 대응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인 섭리로서의 인격적 군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군주제적-민주적 구성constitution은 초월적 신이라는 이신론적 가정에 순응해야 한다. 1791년의 헌법Constitution이 하나의 예이다. 이것에 따르면, 국가에 있어서 왕은 이신론의 신이 세계에서 그러하듯이 무기력하다. 보날에게 이것은 이신론이 비밀스런 무신론crypto-atheism이듯이 비밀스런 반왕실주의cryptoantiroyalism이다. 하지만 1793년의 ‘데마고기적 아나키’는 무신론에 열려 있었다. 즉, 신도 없고 왕도 없는 것이다
-<정치적 낭만주의> 중에서-
5.3. 예외상태[편집]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정치신학>의 첫문장-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선언하는 자이다" 로 시작되는 그의 주권론적 통찰은 아주 독특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평이한 증명이 아니라, "예외" 라는 역설을 통한 논리적인 반정립의 반정립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주장해 가기 때문이다.이는 역설을 선호하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진정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통찰은 언제나 밋밋하게 반복을 일삼는 텅 빈 일반화보다 깊은 곳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예외는 정상사태보다 흥미롭다. 정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지만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예외가 규칙을 보증할 뿐 아니라, 규칙은 애당초 예외에 의해서만 존속한다. 예외 속에서 실제 삶의 힘은 되풀이됨으로써 굳어 버린 기계장치의 껍데기를 깨부술 수 있다.
-<정치신학> 1장 중에서, 칼 슈미트-
법실증주의가 제시하는 법 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소멸속에서 입법자의 의무는 단지 정해진대로 법을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정해진 법규범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예외상태(비상사태)" 라면 어떨까?
슈미트에 의하면 이때야 말로 누가 진정한 주권자인지 어떻게 사회적 체계가 조직되어 있는지, 법조문의 존립이 구체적으로 무엇에 근거할 수 있는지. 이러한 "예외상태" 속에서 비로소 주권에 대한 진정한 본질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정상상태는 무엇도 증명하지 않지만 예외는 모든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대통령은 국민의 기본적인 주권을 대의하는 자이고,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그런데 국가에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국가 멸망의 위기가 도래했을 때, 대통령은 계엄이나 각종 비상사태 선포로 국민의 여론을 묵살하면서까지 자신을 뽑아준 국민의 기본권을 합법적으로 제한해버릴 수 있다. 즉 주권을 대의하는 대통령이 진짜 주권자를 제외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며, 합법적으로 법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법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면서 법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이 아닌 대통령이 진짜 주권자라고 봐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생긴다.
5.4. 정치신학[편집]
특정하게 정치적인 구분이란 정치적 행동과 동기들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친구와 적의 구분이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은 규범과 정상성을 창출하는 내부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슈미트에 의하면 이것은 국가뿐 아니라, 국가, 정당, 윤리, 종교, 예술 등을 아우르며 그속의 정치적인 것, 요소를 구별짓는 중요한 기초가 된다.[23]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본질인 "정치적인 것"들을 윤리나 경제에 종속시킨다. 개인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이론,정치이론을 만들지 못하고 오로지 개별적인 정책만을 비평할 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카톨릭계 보수주의의 무신론적 해석이다. 구체적으로 정치는 개인의 영역에서 벗어선 일종의 사회규범과 룰의 역할을 하기에 당연히 비개인적이어야하고 개인의 집단인 사회와도 동떨어져 비사회적이어야한다. 중세에는 신이 그 역할을 담당했는데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부당하게 개인의 영역에 집어넣어버렸다. 개념 정의 수준에서 정치의 기본단위는 개인이 될 수 없다.최소단위는 국가이며 이는 정치행위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 개념이어야하기 때문에 당연하다라는 뜻. 이런 관점을 카톨릭적으로 인식하면 카톨릭계 보수정당이 된다. 그리고 이 정당은 지금도 독일의 유력정당으로 남아있다.
5.5. 결단주의[편집]
여기서 슈미트가 메타법률학의 차원에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이념(ideology)' 이다. 법은 이념이라는 목적을 담고서 그 자체의 '목적성' 을 띄고 있는 것이며, 무언가 다른 것을 이루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의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슈미트에게 법은 그 자체의 지고한 '목적'이지 '수단'이 될 수 없다.[24]
이러한 법 실증주의의 모순은 칼 슈미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그들은 헌법조문을 쓰여진 활자가 튀어나와서 법을 실행한다고 가정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법조문은 사실상 정상상태의 관리의 의미밖에 없으며 그 관리조차도 법조문을 제정하는 자의 "결단"의 권위에 의존한다.
또한 현실의 상황과 법조문과는 당연한 괴리가 있으며 현실은 법전이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예외상태를 발생시킨다. 이때 이 "결단"하는 자는 정상상황을 "결단"한 만큼 "예외상황"도 "결단"할 수 있으며 이 정치행위에 헌법은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다.
이 결단하는 자는 당연히 "주권자"이다. 거꾸로 해도 똑같이 비상상태를 규정하는 자가 "주권자"이며 이는 법 실증주의와는 달리 현행 법조문과 관련하여 주권자가 취하는 행동과 개정[25] 양자 모두에 대하여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핵심이다.
거칠게 줄이자면 소위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한다는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들은 정치적 행위를 규정하지조차 못함을 헤겔인식론을 이용해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들이 정치의 개념조차 규정하지 못하니 이들은 정치의 근원적인 것을 "주관"을 떠나 "객관"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뜻이니 무능한게 아니라 불능하다는 이야기다. 이건 법 실증주의를 까는 이야기다.
영미권 개념에서의 국민주권은 "왕과 귀족은 널 언제나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안죽이므로 너흰 복종해야한다"라는 강압적인 권력에 반대하는 맥락으로 주장된 것으로, 권력의 근원은 국민 그 자체라는 측면에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를 슈미트식으로 뒤집어 이야기하면, '민주주의에서 법을 제정하는 국민의 단결된 힘은 법 위에 있다.'는 것이 된다.[26]
이것이 단순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이다.
어째서 현대민주주의에서는 국민들의 숱한 불만과 불신들을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대의제나 권력분립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자인 엘리트와 민중들 사이에 거리 두려고 하면서, 반면 민중들의 직접적인 의사와 가치들이 반영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본다면...
현대의 헌법학에서 슈미트의 이런 결단주의적 법학은 켈즌(H. Kelsen)으로 대표되는 법실증주의적 헌법이론, 스멘트(R. Smend)에 의해 주창된 통합론(Integrationslehre)과 등 여러 이론과 함께 교육과정 중에 주요 헌법이론 중 하나로 다루어진다.
여기서 그럼 슈미트가 말하는 결단을 일으키는 주체가 한사람에게 만 있다는 라는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나 꼭 그런것은 아니다. 주체자는 구성원을 통합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한명의 사람일수도, 강한 힘을 지닌 특정한 세력들일 수도, 대다수의 국민들 전체의 단결력에서 생겨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헌법적 제정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규범과 질서를 가르는 필연적인"결단"이 생겨난다는 점이다.[27]
그의 결단주의를 드러내는 구절이다.정치이념사 정체를 통틀어 등장하는 고전적 반정립이 이 명제 안에 들어 있다. 바뵈프로부터 바쿠닌,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 그리고 그로스에 이르기까지의 무정부주의적 이론은 모두 하나의 격언, 즉 “인민은 옳고, 정부는 썩었다”(Le peuple est bon et le magistrat corruptible)라는 격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에 대해 드 메스트르는 정반대로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며 그 자체는 선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면 그 자체로 선하다(Tout gouvernement est bon lorsqu'il est etabli). 그 근거는 정부라는 권위의 존재 속에 하나의 결정이 있고, 매우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는 어떻게 결정되는지보다도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데에 있다.
-<정치신학>, 4장 중에서, 카를 슈미트-
이 모든 사상은 훗날 나치 독일의 수령론인 지도자 원리에 강한 영향을 준다.
5.5.1.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해[편집]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특질>에 대한 1932년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해는 슈미트가 두 번째 판에서 수정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이후 슈미트는 스트라우스가 가 독일을 떠날 수 있도록 하는 장학금 지원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슈미트는 그의 연구의 근본적인 어려움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자유주의적 사고의 체계성이 오늘날 유럽에서는 다른 어떤 체계에 의해서도 대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옳다면, 슈미트 자신도 그의 견해를 진술함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사고의 요소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부터 슈미트의 이론구성의 잠정적인 성질이 발생하며, 그 자신이 그것을 언명하고 있다. 즉 슈미트는 광범위한 문제에 이론적으로 『틀지우는(encadrieren)』것 만을 의도하고 있으며, 그의 저작의 명제는 객관적인 토론의 출발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슈미트를 비평하려 하는 자는 어디에서 슈미트가 지배적인 자유주의적 견해에 단순히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어느 점에서 지배적인 자유주의적 견해와 구별되는가라는 것에 관해서 더욱 주의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5.6. 정체성 정치와 공동체이론(동일성 민주주의)[편집]
정치 공동체의 공동의 정체성과 차별성을 표시하는 구분이 구체적 상황에서 인민을 서로에 대하여 기꺼이 투쟁할 용의가 있는 적대적인 집단으로 분류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그러한 구분은 정치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고 슈미트는 강조한다. 그 구분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전쟁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정체성과 차이의 분류이고, 그 분류에 입각하여 인민을 적과 동지로 구분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구분으로 인해 한 공동체는 통일된 사회 단위가 되고 정치적 공동체가 된다.[28]
법과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가 창출되는 것도 바로 인민의 동질성을 정하는 이 근본적인 정치적 결정을 통해서이다. 자유주의는 이와 같은 결정을 회피하거나 영원히 미루려는 태도일 뿐이면서도 정치(적과 동지의 격렬한 대립)의 종언이라는 허구적인 기반을 두고 다원주의 국가를 수립하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체성을 둘러싼 정치적 전투에서 승리하려고 꾀하는 당파적 이념에 불과하다. 적과 동지의 구분을 포기하고 정치적인 것의 격렬한 대립을 외면함으로써 자유주의는 정치에서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 본질적 토대를 제거해버린다.
현대 정치학 용어로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ndentity)가 자유주의보다 정치적인 것의 본질에 더 적합하다.
자유주의적 법률주의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정치에서 더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듯이 짐짓 가장하지만, 이와 같은 가식적인 태도는 자기모순이라고 슈미트는 비판한다.
다원주의와 중립성을 내세워서 적과 동지의 구분을 폐기하려는 태도 자체가 이미 적과 동지의 구분을 전제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다원주의와 중립성 테제에 동의하지 않는 진영을 입헌민주주의의 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29]
슈미트에게 국가란 “정치적 통일의 상태”를 뜻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기초는 피통치자와 통치자간의 동일성을 의미한다.[30]
동일성의 원리는 현존하는 인민(Volk)이 정치적 통일체와 자기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정치적 통일체가 구성되는 원리를 말한다. 이 동일상태는 현존하는 인민이 고유한 정치적 자각과 민족적 의지에 의해 적과 동지를 스스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인민이 정치적 자각(적과 동지의 구별)에 의해 스스로를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와 동일시할 수 있는 상태에 상응하는 국가형태, 즉 동일성의 원리를 실현하는 국가가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국가이다.[31]
슈미트에 의하면 이러한 동일성의 기초는 평등(Gleiheit)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등은 동일성을 갖춘 인민들만의 ‘실체적인 평등’을 뜻한다. 그 결과 슈미트에게 국가형태로서의 민주주의란 모든 인민의 실체적 평등,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명령자와 복종자의 동일성”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국가에서는 통치자가 인민과의 동일성 내지 동질성으로부터 빠져나와서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여서는 아니 된다. 민주국가에서 “통치자의 권력과 권위는 동일성에 의해 일반의지를 실현하는 피치자의 의지, 위임과 신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32]
그는 선거권의 확대, 선거연령의 인하, 선거주기의 단축, 의회해산과 같은 일련의 민주적 경향과 제도들 또한 이러한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실현하려는 노력의 산물로 파악한다. 민주적 과정은 다양한 세력들이 인민들간의 통일된 정체감을 만들어내어 동일성을 실현 시키려 하는 과정이다.
이와 같이 슈미트는 민주주의이념에 기초한 국가를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내지 실체적 평등에 기초한 국가형태로 보았고 자신의 이론이 인민의 자기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동질성에 기초한 정체성을 창조할 것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적 이상은 대립하는 것이다. 즉,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부정한다. 따라서 슈미트에게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고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이다[33]
슈미트와 독일 나치와의 연관성에 대한 강조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이 제공하고 있는 풍부한 통찰들을 평가 절하하는 오류를 피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슈미트의 비판과 그가 내린 이론적 결론들 및 정치적 결정들을 분리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서의 갈등과 적대적 성격에 대한 슈미트의 강조는 물론이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모순되고 화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며, 현대 대중민주주의 내지 의회민주주의는 서로 양립 불가능한 두 구성요소 사이의 긴장과 갈등으로 인해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지속 불가능한 기획이라는 슈미트의 주장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들을 보여줌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로부터 슈미트가 선택한 결정, 즉 파시즘적인 독재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결론이 합리적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슈미트의 이론의 긍정성을 변증법적인 방식으로‘지양’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의 것으로 남아 있다.
-나종석 (2009). ‘정치적인 것’의 본질과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 . 헤겔연구, 25, 227- 254.-
5.7. 참고: 중기사상[편집]
<정치신학> 제2판의 <머리말>에서 슈미트 자신은 ‘규범주의’적 사고와 ‘제도주의’적 사고도 중요하게 본다고 강조한다.참고: 법학적 사고의 세 종류
‘규범주의적 normativistisch’
‘결정주의적 dezisionistisch’
‘제도주의적 institutionalistisch’ : 역사적으로 형성된, 법을 적절하게 기능시키기 위한 ― 그 국가나 지역의 특성에 맞는 ― 제도들을 중시
↳ 중기 슈미트 사상의 개념인 ‘구체적 질서 konkrete Ordnung’
하지만 슈미트는, 서문이 무색하게 해당 저술에서 규범주의적 법적 사고, 특히 법실증주의에 반발하며 ‘결단주의’적 논증을 이어 갔다. 초기 슈미트는 법실증주의와의 대결을 자처하면서 결정주의적(결단주의적)인 관점을 취하게 되는데,
그러나 중기에 이르러 그런 슈미트에 사상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여겨진다, ‘구체적 질서konkrete Ordnung’ 개념이 생겨나면서 제도주의적 관점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 질서’란 한 공간 아래 대지에서 ‘민족’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통상적인 법체계가, 추상적으로 상정하고 있을 뿐인 관념적 철학체계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버크주의와도 비슷한 맥락을 보인다.
이런 슈미트의 '구체적 질서' 등장에 대해서 학자들은 1930년대 나치당이 독일에 집권하며 그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 나치의 민족 생활권이라는 개념과 자신의 사상을 조화시키기 위해 일루어진 것이라 평가하기도 하며 또는 슈미트는 원래 공허한 허무속의 ‘결단’에 관해 말했던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예외상태'와 ‘결단’ 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규범법학과 대비되는 "새로운 법질서를 발견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는 관점으로, 슈미트 철학은 그의 정치적 입장과 별개로 일관된 발전양상을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6. 저서와 인용구[편집]
•정치신학 外, 김효전 역, 법문사, 1988년, 477쪽
•정치적인 것의 개념, 김효전·정태호 역, 2012년, 339쪽
•합법성과 정당성, 김효전 역, 교육과학사, 1993년, 319쪽
•로마 가톨릭주의와 정치형태/홉스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 김효전 역, 교육과학사, 1992년, 401쪽
•헌법의 수호자논쟁, 김효전 역, 교육과학사, 1991년, 308쪽
•유럽 법학의 상태·구원은 옥중에서, 김효전 역, 교육과학사, 1990년, 396쪽
•파르티잔, 김효전 역, 문학과지성사, 1998년, 207쪽
•헌법이론, 김기범 역, 교문사, 1976년, 425쪽
•헌법논집: 1924년-1953 헌법학 자료, 김효전·정태호 역
•대지의 노모스, 최재훈 역, 민음사, 1995년, 432쪽
•독재론, 김효전 역, 법원사, 1996년, 335쪽
•정치적 낭만, 배성동 역, 삼성출판사, 1966년, 197쪽
•국가·운동·민족, 김효전 역, 정치신학 外, 1988년에 수록
•법학적 사고방식의 세 유형, 김효전 역, 정치신학 外, 1988년에 수록
•헌법의 수호자, 김효전 역, 법문사, 2000년, 250쪽
•차별적 전쟁개념으로의 전환
•입장과 개념들, 김효전·박배근 역, 세종출판사, 2001년, 522쪽
•현대 의회주의와 정신사적 지위, 김효전 역, 관악사, 2007년, 118쪽
•국민표결과 국민발안·제2제국의 국가구조와 붕괴, 김효전 역, 관악사, 2008년, 125쪽
•정치신학Ⅱ, 조효원, 그린비, 2019년, 176쪽
•국제법상의 침략전쟁의 범죄와 죄형법주의 원칙, 김효전역, 동아법학 제34호, 2004년, 381-496쪽
•칼 슈미트 연구, 김효전 역, 세종출판사, 2001년, 420쪽
•반대물의 복합체, 김효전 역, 산지니, 2014년, 552쪽
•정전과 내전, 윤인로 역, 산지니, 2020년, 506쪽
독재가 필연적으로「예외상태」라고 한다면,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열거함으로써 그 개념의 다양한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 가능하다.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Souverän ist, wer über den Ausnahmezustand entscheidet).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에 있어 어려운 문제란 평화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평화를 희구한다는 점에 관해서는 모두 자명한 사실로서 일치를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평화에 관해서 결정을 내릴 것인가, 실제로 평화란 무엇인가, 어떤 구체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위협을 받는 평화가 보호되고 교란된 평화가 회복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 즉 누가 결정을 내릴 것인가(Quis indicabit?)가 문제이다.
모든 법은 오로지 정당한 장소에서의 법일 뿐이다(Alles Recht is Recht nur am rechten Ort).
주권국가 상호간의 관계는 의인화의 결과 법(法)뿐만 아니라 예양(禮讓)도 가능하게 된다.
가톨리시즘의 합리주의는 제도적인 것 속에 있으며, 본질적으로는 법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