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프리드리히 그라프 폰 퓌클러-부르크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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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나치 독일의 정치인, 슈츠슈타펠 중장.
2. 독일 제국 시절 행적[편집]
퓌클러-부르크하우스는 1886년 오버슐레지엔의 프리들란트에서 프로이센군 소령 프리드리히 폰 퓌클러-부르크하우스 백작과 엘라 폰 쾨펜 백작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퓌클러-부르크하우스는 독일제국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대위로 예편하고 1931년까지 독일 국가인민당에서 활동했다.
3. 나치 행적[편집]
1931년 국가인민당을 탈당하고 나치당에 입당한 퓌클러-부르크하우스는 돌격대에도 입대해 소령 계급을 받았다. 1933년에는 의원도 지냈으며 1937년 돌격대 소장까지 진급한 후 1940년 슈츠슈타펠로 이적해 친위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독일 국방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4.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42년 초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SS대장의 대리로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로 임명되었고 9월 12일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의 친위대 지도자가 되었다.
1944년 최종적으로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 1945년 프라하 봉기에서 퓌클러-부르크하우스는 강경한 진압을 주장하였다. 퓌클러-부르크하우스는 전투 중단을 반대했지만 카를 헤르만 프랑크에 의해 결국 봉기에서 독일군은 항복했다.
5. 최후[편집]
1945년 5월 7일 모든 독일군은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페르디난트 쇠르너 원수는 퓌클러-부르크하우스에게 미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민간인들도 그의 부대에 합류했지만 미군에게 항복을 거절당했고, 5월 11일 소련군이 도착하자 슬리비체 전투를 벌였다.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5월 12일 퓌클러-부르크하우스는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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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riedland in Oberschles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