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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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파라과이 초대 대통령이자 군인 겸 독재자.
2대 대통령인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841년 3월 12일, 의회에서 마리아노 로케 알론소(Mariano Roque Alonzo)와 함께 공동 지도자인 공화국 집정관(Consul of the republic)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844년 3월 13일, 로케를 추방하고 권력을 장악하며 독재를 펼쳤다. 몇 달 후, 의회는 국가 원수의 명칭을 집정관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고 대통령 임기를 10년으로 정하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했다. 신헌법에 의거하여 로페스는 26년 간 집권하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헌법에선 시민권 보장이 없었으며 아예 헌법 원문엔 자유라는 단어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후 3선까지 성공하지만 1862년 9월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을 큰 아들인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계획경제정책을 통해 파라과이의 경제성장을 이끌었으며 외국인 기술자 확보를 위해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을 대거 받아들이며 기술확보에도 총력을 기룰였으며, 문맹퇴치를 위해 초등학교를 대거 건설했고, 그러한 경제성장과 인적자원 확보를 통해 군사력도 크게 강화해서 한동안 파라과이가 남미에서 잘나가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파라과이에서 평가는 매우 높다.
죽기직전 유언으로는 "파라과이 공화국은 아직도 해결못한 문제가 산더미다. 그러니 칼보다는 대화로 문제로 해결하라. 특히 브라질 관련으로는 더욱..." 이 있다.[1] 그러나 아들은 유언을 2년만에 어겨 파라과이를 말아먹었다.
3. 여담[편집]
파일:attachment/과라니/guarani032.jpg
파라과이 5천과라니 지폐의 인물이다.
4. 둘러보기[편집]
[1] 아무리 파라과이가 남미에서 잘나가는 나라가 되었다한들 인구차이가 10배가 넘는 브라질을 상대로 하기에는 너무 벅찬 무리수였다. 특히 남미 국가 대다수가 영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로부터 이민자들을 대거 받아들이는 상태였던지라 이민경쟁에 나섰던것이 이 당시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