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림 압둘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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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 압둘자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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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선수)

1980
(선수)

1982
(선수)

2009
(코치)

1985
(선수)

1987
(선수)

1988
(선수)

2010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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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워키 벅스 영구결번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영구결번
No. 33
No. 33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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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 압둘자바
헌액 연도
1995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 33
밀워키 벅스 No. 33
카림 압둘자바
Kareem Abdul-Jabbar[1][2]

출생
1947년 4월 16일 (76세)
뉴욕주 뉴욕시 할렘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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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UCLA
신장
218cm (7' 2'')[3]
체중
102kg (225 lbs)[4]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69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밀워키 벅스 지명

소속 팀
밀워키 벅스 (1969~1975)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75~1989)
지도자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코치 (2000)
오클라호마 스톰 감독 (200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코치 (2005~2011)
등번호
33번 - 밀워키 / 레이커스
종교
가톨릭이슬람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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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선수 경력
3. 수상 내역
4. 플레이 스타일
5. 출연작
5.1. 영화
5.2. 드라마
6. 기타



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으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센터. 본명은 퍼디낸드 루이스 앨신더 주니어(Ferdinand Lewis Alcindor, Jr), 통칭 루 앨신더였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사진에서 보이는 고글블로킹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스카이훅 슛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밀워키 벅스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영구 결번. 1970년대에는 밀워키 벅스의 창단 첫 우승을, 1980년대에는 매직 존슨과 더불어 쇼타임 레이커스를 이끈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로 불리는 전설적인 선수이다.[5]

1969년부터 1989년까지 뛰었으며 통산득점 38,387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NBA 통산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고 2023년 2월 7일(한국시간 2월 8일) 르브론 제임스가 1위로 올라가기 전까지 무려 34년 동안 1등을 지켰다.

세이버메트릭스 기록은 다음과 같다.
  • WS 단일시즌 1위(25.37 / 1971-72 시즌)
  • WS 통산 1위(273.4)
  • OWS[6] 단일시즌 1위(18.31 / 1971-72 시즌)
  • OWS 통산 1위(178.92)

2. 선수 경력[편집]


뉴욕 출신으로 1947년에 태어났으며 농구 이전에는 야구 외에 수영축구도 했었다. 14세 때인 1961년부터 파워 메모리얼 아카데미(1984년 폐교.) 시절 잭 도나휴(1931~2003) 감독[7]에게 농구수업을 받았다. 고교 시절 71연승을 기록하는 등 고교 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을 보여왔고, 1966년에 농구명문 UCLA에 입학하여 존 우든(1910~2010)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3년 동안 전부 NCAA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서 싹수부터 시퍼랬다.

이 시절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루머는 입학 직후 1학년과 상급생으로 나눠져서 연습경기를 했는데 압둘자바가 주축이 된 1학년팀이 상급생팀을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것. 문제는 그 상급생들이 그 직전해 NCAA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한 주전 멤버들이었다는 것이다. 슬램덩크의 인기로 인해 꽤 유명한 사실이다[8]. 압둘자바(당시 루 앨신더)는 1965년에 입학해 1학년 시즌이 1965-66 시즌이었는데 [9]그가 입학하던 전 시즌인 1964-65 시즌에 UCLA는 토너먼트 우승을 거뒀다(65년 토너먼트 결과). 이를 두고 압둘자바는 "그들(상급생 팀)은 1965-66 시즌을 시작하며 전국에선 넘버 원이었지만 캠퍼스에선 넘버 투였죠"라고 언급했다.

다만 이 때 압둘자바에게 패배한 팀은 전 시즌 우승팀이었지만 게일 굿리치라는 에이스를 비롯하여 그해 졸업한 선배들의 전력 누출 때문인지 전혀 강하지 않았다. 1966년 NCAA 토너먼트 결과를 보면 UCLA는 우승은 커녕 토너먼트 진출도 못했다.1966년 토너먼트 결과. 상세한 성적을 보면 이 당시 UCLA팀은 18승 8패라는 평범한 성적을 거뒀다. 1965-66 시즌 UCLA 로스터. 물론 압둘자바가 대단한 건 변함이 없지만, 그가 이긴 팀이 전 시즌에 우승을 거둔 팀임에도 실제 전력은 그리 강하진 않았기 때문에 좀 애매한 케이스이다.

여담이지만 1966년에 우승한 팀은 텍사스 웨스턴(Texas Western)이란 학교로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당시에 역대 최초로 주전선수 전원이 흑인인 팀으로 NCAA 토너먼트 우승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고 이 팀을 이끈 감독 돈 해스킨스와 선수들의 일화가 영화로 나온게 Glory Road란 작품이다. 영화 소개.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했다. 현재 텍사스 웨스턴 대학교는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로 교명을 바꾸어 지금도 존재한다.

아무튼 1학년을 마치고 NCAA 토너먼트에 데뷔한 압둘자바의 대학생활은 딱 한마디로 설명 가능하다. 역대 최고의 NCAA 선수.[10] 이 시기 UCLA가 NCAA 토너먼트를 7연패하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와중에 1967년에서 1969년까지가 압둘자바의 시대였다. 얼마나 사기 유닛이었냐면, 압둘자바가 2학년 시즌을 마치자마자, NCAA에서 덩크 금지 룰을 만들 정도. 그리고 덩크가 금지당한 이 괴수께서는 손수 스카이 훅을 개발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압둘자바가 스카이 훅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이미 NBA 초창기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전신인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의 조지 마이칸이 리그를 지배할 때, 그가 즐겨 쓰던 슛이 현대에 부르는 훅 슛이다. 압둘자바도 이를 참고했고, 특유의 길죽길죽한 비주얼과 높은 타점으로 독특한 폼을 선보였던 것이다. 훅 슛은 기본적으로 빅맨이 팔을 위로 쭉 뻗은 상태에서 쏘는 것이라 일반 슛보다 타점이 훨씬 높고 쏘는 속도도 빠르며 블록하기가 훨씬 힘들지만 한손으로 쏘는 것이기 때문에 골대에서 멀어지면 정확도가 현격하게 떨어진다. 하지만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은 기존의 훅 슛과 다르게 팔을 아예 골대 반대 방향으로 (물론 수평으로 뻗는 게 아니라 ↗요 정도 각도로 위쪽으로) 뻗은 상태에서 압둘자바 특유의 높이와 점프력을 이용해 올라가서 쏘는 것이기 때문에 안 그래도 타점이 높은데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더 올라가서 앞에서 막는게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비교적 타점이 낮은 뒤쪽에서 막는다고 해도 기본 높이가 너무 높고 빨리 올라가기 때문에 블록하기 불가능한 건 마찬가지. 이토록 특이한 슛이라 기존의 훅 슛과 구분해서 '스카이 훅'이라고 부르는 것. 슛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보통 훅 슛은 툭 던지는 느낌이라 포물선을 그리 높이 그리지 않지만, 스카이 훅은 길고도 높은 포물선을 그린다. 물론 이렇게 하면 난이도는 극악으로 올라간다. 훅 슛이 공을 올려놓는 느낌이라면 스카이 훅은 거의 반대쪽에서 투척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둘자바는 극강의 손끝감각으로 이런 어려운 슛을 높은 확률로 넣을 수 있어 주무기로 써댈 수 있었던 것. 다른 빅맨들도 스카이 훅이 위력적인 건 알지만 알아도 어려워서 못 쓴다. 보통 선수들 같으면 터프샷이라 피해야 하는 페이더웨이를 주무기로 썼던 마이클 조던과 같은 케이스다. 정리하자면 훅 슛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처럼 훅 슛을 던지는 것은 NBA 역사상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NCAA는 단기간 리그파괴를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NBA의 빅맨들에겐 20년의 재앙을 선물해줬다. 졸업과 동시에 1969 드래프트에 참가, 전체 1번 지명으로 창단된 지 2년 된 밀워키 벅스에 지명 됐다. 그러고는 당연히 신인왕 획득. 이 때 NBA의 라이벌 리그인 ABA에서도 압둘자바를 꼬시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는데, 바로 원하는 팀에서 데뷔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드래프트 당시부터 엄청난 대우를 받았던 것.

입단 2년차에 일찌감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밀워키 벅스 역사의 첫 번째 우승이 이 시기였다. 이 때의 밀워키 벅스는 고작 창단 3년차로, 창단 후 가장 빨리 우승한 구단이 되었고, 이는 여지껏 깨지지 않고 있다. 커리어가 굉장히 길어지고,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의 모습이 많이 방송되어서 기억엔 많이 남아있지만 밀워키 벅스에서 6시즌을 보냈던 선수이다. 빌 러셀에 치이고, 윌트 체임벌린에 치이는 등 우승에 한끝 모자랐던 은퇴를 앞둔 오스카 로버트슨을 도와 우승을 이뤄냈다.

하지만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대도시인 뉴욕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학생 시절을 보낸 압둘자바에게 미국 중부지역의 소도시 밀워키는 그에게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우승한 후 팀에게 끊임없이 우승도 시키고 해줄만큼 해줬으니 고향팀으로 트레이드를 시켜달라고 요구한다. 팀도 더 이상 잡지 못할 것을 아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나마 원래는 고향 뉴욕이나 뉴저지로 가고 싶어했는데 트레이드 카드가 안맞아서 밀워키 벅스 프런트는 압둘자바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안으로 로스앤젤레스로 트레이드 시킨다.[11] 그 이후 밀워키 벅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 그래도 압둘자바는 밀워키 벅스에서 6시즌동안 매시즌 매경기 40분 이상 뛰면서 20-10을 밥먹듯했고, 창단 첫 파이널 우승과 1973-74 시즌 파이널 준우승 등 신생팀 밀워키 벅스의 리그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거기다 트레이드 되지 않았다면 자유계약으로 나갈 것이 확실했다. 다름아닌, 밀워키 벅스의 우승을 함께 이끈 오스카 로버트슨이 1970년 존 하블리첵 등과 함께 NBA를 연방법원에 제소하여 1976년 FA 제도의 초석이 되는 선수의 자유이적을 보장하는 판결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압둘자바가 1975년 이후 팀에 남았더라도 근 시일 내에 이루어졌을 FA 제도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이 때문에 밀워키 벅스도 미련 없이 압둘자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실제로 NBA에서 자유계약제도가 생긴 것은 1976-77 시즌 종료 후로, 최초의 자유이적은 당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가드 캐지 러셀이 되었다. 러셀은 시카고 불스로 1년 계약을 맺고 자유이적했다.

그러고는 1975년 이적 후에는 핵심선수로 뛰다가 1980년 매직 존슨제임스 워디가 온 후에는 그들에게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골밑 수비에 전념하는 런앤건의 골키퍼가 되어 41세[12]까지 선수로 활약하며 19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나이들어서 매직 존슨에게 팀 리더 역할을 물려주기 전까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1옵션이었다. 물론 매직이 팀의 리더가 된 후에도 속공상황이 아닌 하프코트 오펜스 상황에서의 압둘자바는 안정감 그 자체라 38세까지 평득 20점에 야투율 50% 후반대를 찍었다. 그만큼 늙어도 괴수였단 이야기.

3.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NBA-Champion.png NBA 챔피언 6회 (1971, 1980, 1982, 1985, 1987-1988)
파일:NBA-Champion.png NBA 파이널 MVP 2회 (1971, 1985)
파일:NBA 로고.svg NBA 정규시즌 MVP 6회 (1971-1972, 1974, 1976-1977, 1980)
파일:NBA 로고.svg 올-NBA 퍼스트 팀 10회 (1971-1974, 1976-1977, 1980-1981, 1984, 1986)
파일:NBA-Allstar2021.png NBA 올스타 19회 (1970-1977, 1979-1989)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세컨드 팀 5회 (1970, 1978-1979, 1983, 1985)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5회 (1974-1975, 1979-1981)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6회 (1970-1971, 1976-1978, 1984)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신인상 (1970)
파일:NBA 로고.svg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70)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블록왕 4회 (1975-1976, 1979-1980)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득점왕 2회 (1971-1972)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1976)
파일:stvstmfts.png 네이스미스협회 선정 올해의 대학선수상 3회 (1967-1969)
파일:NCAA 로고.svg NCAA 챔피언 3회 (1967-1969)
파일:NCAA 로고.svg NCAA 파이널 포 MOP 3회 (1967-1969)[13]
파일:HOF-Logo.png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5)

4. 플레이 스타일[편집]


218cm의 신장과 긴 팔, 말랐지만 그 신장대에서 나오기 어려운 뛰어난 기동성까지 고루 갖추었고 공/수 양면에서 엄청난 기량을 선보인 선수였다.



밀워키 벅스 시절의 스카이 훅 (Skyhook)

그의 주특기인 '스카이 훅'은 타점이 높고 깊은 데다 슈팅 레인지가 넓어서 막을 수 없는 신기였다. 훅 슛은 원래 골밑에서 포스트업을 하다가 한손으로 툭 던져놓거나 덩치들이 힘으로 욱여넣다시피하는 막슛에 가깝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상대 수비와 직각으로 서고, 일차적으로는 슛하지 않는 반대 손으로 수비를 견제하며 던질 수 있기에 빅맨에게는 배우면 좋은 필수 무기로 각광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은 일반적인 훅 슛과는 달리 정말 부드러운 릴리즈를 가졌고, 레인지 역시 자유투 라인 이상의 거리에서 던져넣을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14] 메커니즘과 레인지 자체가 블록을 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는데, 218cm의 신장과 긴 팔을 가진 압둘자바의 높이까지 고려하면 릴리스 도중 뒤에서 긁어내는 것 외에는 거의 찍어낼 방법이 없었다.


물론 다 못 막은 것은 아니고, 윌트 체임벌린은 연속으로 블록에 성공하기도 했다.[15]그러나 이 장면을 잘 보면 첫 번째 슛은 스카이 훅보단 일반적인 훅 슛에 가깝고, 두 번째는 골텐딩이다. 무지막지한 타점 외에도 바로 저 부분이 스카이 훅의 사기적인 부분인데, 일반적인 훅 슛은 타점이 위에 있기 때문에 수비가 찰싹 달라붙으면 블록이 가능하다. 그러나 스카이 훅은 타점이 골대 반대편에 있어서 포물선을 비교적 높게 그리기 때문에 수비수의 팔을 지나갈 때쯤 되면 볼이 하강 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높이로 블록해봤자 골텐딩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16] 한마디로 골텐딩에 엄격한 현재 룰이었으면 더 막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소리이며, 위 두 번째 블록 역시 현재같으면 무난히 골텐딩이 불렸을 장면이다.

그 외에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시절의 데니스 로드먼, 고대 센터인 네이트 서몬드 등 수비 실력만큼은 레전드였던 선수들이 종종 블록을 해냈다고 전해지긴 한다. 물론 통상적으로 블록이 거의 불가능한 슛임은 명확하고, 때문에 당대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근 30년간 많은 선수들이 연습을 시도했지만 택도 없었다.[17] 근래에 압둘자바가 교습다니면서 여러 센터들에게 전수하기도 했지만 실전에서 써먹은 선수는 거의 전무. 왜 '거의'냐면 딱 한 명 제대로 써먹은 선수가 있기 때문인데, 또다른 먼치킨이자 압둘자바의 레이커스 시절 파트너인 매직 존슨이 바로 그 선수이다. 물론 매직 또한 스카이 훅을 그대로 따라하진 못했고, 베이비 훅(혹은 주니어 스카이 훅)이라는 이름으로 손목을 쓰는 훅 슛이라기 보단 반대쪽으로 던지는 플로터처럼 띄우는 스타일로 나름대로 응용버전을 개발해서 말년까지 유용하게 써먹었다. 1987 파이널 4차전에서는 이걸로 결승골을 성공시키기도 했으며, 아래의 장면이 그것이다.[18]


어찌보면 218cm의 매우 가볍고 슬림했던 압둘자바의 신체조건과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는 기술이었던 셈. 그는 포스트업을 하더라도 상대를 거침없이 밀고 들어가 힘으로 욱여넣는 파워형 센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무지막지한 높이로 림에 직접 내리꽂는 덩크는 매우 위협적이었지만, 림과 어느정도 간격을 두고 던지는 샷 또한 선호했으며 그 과정에서 마무리로 즐겨 사용한 기술이 바로 스카이 훅이었던 것. 또한 근거리 페이더웨이 역시 포스트업의 마무리 기술로 잘 사용했다. 무시무시한 타점 덕분에 수비수를 밀어내거나 타이밍을 어렵게 뺏지 않더라도 스카이 훅&페이더웨이 등의 골밑~숏미드 피니시를 안정적으로 구사할 수 있었으며, 덕분에 압둘자바의 로포스트 무브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더라도 간결하고 깔끔한 인상을 준다.

롱 훅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중거리 슈팅도 가능했고, 자유투 성공률은 커리어 통산 0.721로 높다고는 못하더라도 준 거인급 센터로서는 결코 떨어지는 수치가 아니었다. 또한 통산 정규시즌 어시스트 개수가 3.6개로 수비 리바운드를 잡고 던지는 속공플레이도 뛰어났으며 포스트 플레이메이킹에도 능했던 당시 빅맨 치곤 뛰어난 시야와 패싱 센스를 보유했었으며 당대 최고의 수비 리바운더이자 11회의 디펜시브팀 및 4회의 블록리더를 기록할 정도로[19] 수비까지 정평이 나있었으니, 그야말로 농구 역사에서 세 손가락에 꼽힐 만한 공수겸장이었던 셈.

특징이라면 상기했듯이 그는 신장에 비해 유독 마른 몸이었다는 것. 1970~1980년대 선수들의 평균 체중이 지금보다 확실히 가벼운 편이었지만 압둘자바는 그 중에서도 상당히 호리호리한 인상을 주는 선수였다. 몸무게가 225파운드 정도로 압둘자바보다 약 10cm 이상 작은 데이브 코웬스와 몸무게가 비슷했고, 마찬가지로 10cm 이상 작은 윌리스 리드(240파운드)보다는 오히려 더 가벼웠다.[20][21] 이는 압둘자바가 엄청나게 장수하는데 도움이 됐는데, 당시 농구화는 현재와 달리 보호 기능이 거의 없었기에 압둘자바처럼 기본기가 뛰어나고 몸이 가벼워 발목과 발에 부담이 적게 가는 선수들이 장수에 유리했다. 실제로 그와 비슷하게 장수한 로버트 패리시 역시 230파운드밖에 안 나갔다.

다만 이렇듯 가벼운 체격 때문에 육중하고 터프하며 파워가 막강한 일부 선수들에겐 비교적 약한 편이었는데, 키는 압둘자바보다 훨씬 작지만 당대 최강의 파워 센터였던 모제스 말론이 대표적이었다.[22]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압둘자바가 말론의 밥이었던 수준은 아니지만, 상성상 말론을 상대하면 평소보다 훨씬 힘들어한 것은 사실이었다. 말론의 동료이자 또다른 레전드였던 줄리어스 어빙은 "말론이 압둘자바를 산채로 잡아먹곤 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으니, 이러나저러나 압둘자바의 최고 난적은 말론이었다.

물론 말론을 상대로 힘에서 버거워했지만 압둘자바는 쳇 홈그렌이나 빅터 웸반야마같은 프레임이 얇고 파워가 부족한 선수가 절대 아니었다. 즉 얇은 프레임 대비 힘도 좋았으며 전성기 때는 힘 좋은 센터들을 상대로 포스트 플레이로 제압하기도 했었다. 이건 말론이 나이도 젊고 전성기에 접어들 때라 한창 때였고 압둘자바는 이미 한참 전에 전성기에서 내려오면서 노장으로 불리던 시점과 맞물렸던 것이다. 루키 때인 밀워키 벅스시절에는 비록 전성기 때에 모습은 잃었지만 여전히 골밑에선 파워가 넘치던 윌트 체임벌린을 상대로 잘 막았으며 또한 포스트 공격에서도 수비 중인 체임벌린이 애를 먹기도 했었다.

5. 출연작[편집]



5.1. 영화[편집]


  • 1978년 사망유희
  • 2022년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23]


5.2. 드라마[편집]


  • 2013년 ~ 2014년 크레이지 원스 - 본인 역
  • 2019년 빅뱅 이론 - 본인 역

6. 기타[편집]


  • 무하마드 알리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계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흑인 고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진보 성향의 인물이다. UCLA 2학년 시절 수니파로 개종했으며[24]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차출을 거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활약한 흑인 전차부대의 역사를 조명하는 책을 포함해 여러 책을 집필했고, 각종 매체에서 인종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였다.


  • EA의 고전게임인 Lakers vs. Celtics and the NBA Playoffs에 등장했는데 스카이 훅은 쏘면 대부분 들어갔다. 하지만 노장이라 토너먼트 등 시뮬레이션 모드에선 체력이 훅훅 떨어진다

  • 농구 이외에도 부업으로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사망유희에 출연했으며 이소룡과 압둘자바의 대결은 액션 영화계에서 알아주는 명장면이다. 기골이 매우 장대하고 리치가 길며 싸움을 잘하는 흑인 캐릭터로서 깊이 각인된 장면.
파일:5a0152c1876bfdfcda7cf430bf8d4ffd.png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작중 압둘자바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하킴이었다 실제로 이소룡에게 무술 지도를 조금 받았으며, 이 때 배운 정권으로 시합중에 자신에게 하드파울을 시전한 켄트 벤슨을 가격했고, 턱이 부서지는 부상을 입혔다. 이소룡은 이에 대해 실망의 표현을 했고, 압둘자바도 크게 뉘우치고, 그 이후 누군가를 경기중에 때린 적은 없다. 여담이지만 카우보이 비밥 2화에서는 이 하킴을 오마주한 압둘 하킴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며, 역시 이소룡의 절권도를 사용하는 스파이크 스피겔과 위 영상을 오마주한 대결을 벌인다.

압둘자바가 사망유희에 출연한 것은 눈에 띄는 피처링이었고, 이 후 스포츠맨들의 영화 출연 행각에 영향을 준 바가 있다. (장클로드 반담미키 루크의 영화 더블 팀은 콜로세움에서의 격투를 다루는 등 이소룡의 영화를 오마주한 흔적을 보이는데, 여기에 데니스 로드먼을 출연시켜 기골이 장대하여 리치가 매우 긴 파이트를 보여준다.)

이외에도 1980년작 코미디 영화 에어플레인[25]에서는 로저 머독이라는 비행기 부조종사 역으로 나름 비중있게 나온다. 이름이 로저라서 조종사랑 항공관제사가 알겠다는 뜻으로 "ROGER!" 할때마다 자기 부르는 줄 알고 "뭐?" 라 말한다. 그리고 꼬마 승객이 "나 당신 알아요, 분명 카림 압둘자바야!"라고 하는데 딱 잡아뗀다. 그리고 "울 아빠가 당신은 디펜스 능력이 부족하댔어요. 그리고 플레이오프가 아니면 설렁설렁 한다고도 했어요"라고 깐족거리니 꼬마의 멱살을 쥐고 "야, 내가 그 얘기 NCAA 때부터 들었거든? 내가 매일 밤 얼마나 뭐 빠지게 뛰는지 알아? 그렇게 불만이면 너희 아버지보고 빌 월튼이랑 밥 레이니어 데리고 48분동안 코트 뛰어보라고 해"하며 자폭한다. 중후반에 상한 생선을 먹고 실려나간 후에는 안 나온다.[26]

  • 하지만 은퇴한 뒤엔 수 차례의 사업 실패로 인해서 망하고, 이 때문에 미국 운동선수 사이에서는 늙어서 카림 압둘자바처럼은 되지 말자 식으로 수군거린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도 있었지만, 그의 돈은 대부분 빈민구호 명목의 기부로 이어졌다. 자선사업으로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캠프를 보내 수학과 과학, 공학 등을 가르치는 자선재단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현역시절 트레이드마크인 고글과 우승반지, 트로피도 모두 자선재단 기부로 인한 경매에 들어갔다.


  • 1990년엔 친정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비롯해 1993년 4월 24일 밀워키 벅스에서 등번호 33번이 각각 영구결번 지정 되었고, 2009년 9월에는 前 NBANBA G 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감독 자격으로 방한하여 KBL 올스타팀과 대결을 펼친 적이 있다. 당시 무명시절의 샘 해밍턴이 행사에 참여해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샘이 이야기하기를 예상 밖으로 재밌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27]

  • 만화 슬램덩크에서 채치수의 방에 붙어있는 포스터의 주인공이다. 그 밖에도 서태웅의 1학년 팀과 채치수의 2, 3학년팀이 연습경기를 할 때, 채소연이한나 매니저가 위에 언급된 1학년 시절 압둘자바의 팀이 선배들을 연습시합에서 박살내버린 일화를 얘기하며 등장했다.

  • 1994년작 MBC 미니시리즈 《마지막 승부》에서는 시력이 나쁜 이동민이 고글을 끼고 운동을 하자, 고참인 김만재가 건방져보인다, 렌즈 끼라며 갈구고, 이에 동민은 기합을 받으며 나는 압둘자바다! 나는 압둘자바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 2008년 말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2011년 2월에 완치 소식을 발표했다.

  • 재즈 매니아로 유명한데, 3000장이 넘는 음반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존 콜트레인델로니어스 몽크 등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고, 재즈/소울 뮤지션이자 시인인 길 스콧헤론[28]과는 학창 시절부터 친구였으며 스콧헤론의 결혼식에 압둘자바가 들러리를 서 주기도 했다.



  • 2015년 9월 셜록 홈즈의 형인 마이크로프트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마이크로프트 홈즈를 출간했다. 1870년대 20대 초반의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라고 한다.

  • 커리어 통산 블록 개수가 3,189개로 하킴 올라주원디켐베 무톰보에 이은 역대 3위이다. 그러나 그는 프로 데뷔 후 네 시즌이 지나서야 블록이 집계되어 손해를 봤는데, 만약 첫 네 시즌 동안의 숫자가 집계되었다면 올라주원을 훌쩍 뛰어넘는 기록을 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압둘자바는 블록이 처음 집계된 1973-74 시즌에 평균 3.5개를 내고 그 다음 7시즌 동안 평균 3.5개를(최소 한 시즌 3개) 기록했다.[29] 이 수치를 블록이 집계되지 않은 초반 네 시즌(321경기)에 대입하면 그의 통산 블록은 4,312개가 된다. 보수적으로 잡아서 평균 3개라고 쳐도 4,152개로 하킴(3,830)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가 나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역대 선수들을 다 고려하면 압둘자바의 순위는 여전히 3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윌트 체임벌린빌 러셀의 존재 때문인데[30], "평균 7~8개"라는 증언이 과장이라고 생각해 평균 5개라고 생각해도 체임벌린은 5,225개, 러셀은 4,815개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가 나온다. 사실 "평균 7~8개"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보기도 힘든 게 한 양덕이 체임벌린과 러셀의 당시 블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 신문기사를 샅샅이 뒤져서[31] 통계를 내본 결과 체임벌린은 112개에서 평균 8.8블록, 러셀은 135경기에서 평균 8.1블록이라는 무지막지한 수치가 나왔다고 한다.[32] 참고로 두 선수 모두 마지막까지 포함된 수치.[33][34] 게다가 블록 능력에 있어선 저 둘에게 꿇리지 않았던 네이트 서몬드의 존재까지 고려하면 어쩌면 3위 밖으로 밀려났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 본인의 우승 반지 4개를 비롯하여 234개의 기념품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한다. 경매 수입의 대부분은 본인이 새운 재단인 '스카이 훅 재단'을 통해 아동 지원 사업에 쓰일 예정이라고. 이에 압둘자바는 "내가 현역 시절 받은 반지, 트로피들을 방에 전시하는 것과 어린이들이 교육받을 기회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내가 가진 것들을 다 팔아도 좋다"고 말했다. 이 기념품들은 한화 약 33억에 팔렸다. # 전당포 사나이들의 에피소드에서도 이 물품들이 나오는데 경매장에 물건을 구입하러 온 릭의 앞에 직접 본인이 나타나서 진품 인증을 해 준다. #[35]

  • 압둘자바가 농구 경기 중에 고글을 착용하는 이유는 대학 시절에 왼쪽 눈을 다친 것 때문이다. 재밌는건 같은 팀의 제임스 워디 역시 1985년부터 눈 부상으로 고글을 항상 쓰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어린 NBA팬들은 저 둘을 "고글 쓴 큰 선수/작은 선수"로 구분하기도 했다. [36][37][38]

  • 키가 14세 때 이미 6-8, 즉 203cm에 달했다고 한다.

  • NBA는 카림 압둘자바의 이름을 따 '카림 압둘자바 사회정의상'을 선정하고 있다.

[1]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인명을 표기할 때 줄표(-)를 무시한다. 줄표의 앞뒤를 별개의 단어로 보아 띄어 쓰지는 않되, 연음 등은 고려하지 않고 표기한다.[2] 개명 전 이름은 퍼디낸드 루이스 앨신더(Ferdinand Lewis Alcindor, Jr), 통칭 루 앨신더.[3] 본인이 밝힌 맨발 신장은 7피트 2인치(218cm)를 아주 살짝 밑도는 정도라고 한다. 착화신장으로는 7피트 3인치(221cm)까지도 표기할 수 있는 사이즈인 셈.[4] 커리어 초반에는 102kg로 신장대비 매우 마른 체격이었다. 레이커스 시절에는 최대 121kg(267 lbs)까지 나간적도 있으나, 커리어 전반적으로 신장 대비 가벼운 체중을 유지했던 편.[5] 80년대에 보스턴 셀틱스와 더불어 라이벌리에서 앞섰다는 점과 12시즌 동안 5번의 우승과 4번의 준우승을 거뒀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3-peat을 기점으로 논하는 왕조 의미엔 부합되지 않음에도 별개의 왕조로 취급받았다.[6] Offensive Win Shares. 공격 기여도.[7] 그는 1972년부터 16년간 캐나다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어 1976 몬트리올 올림픽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두 차례 4등을 차지했고, 2013년 국제농구협회(FIBA) 명예의 전당까지 헌액됐다.[8] 이외에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스몰 포워드였던 릭 배리의 특이한 자유투폼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알려졌었다.[9] 미국 학교는 가을에 개학해 이듬해 봄에 종강한다.[10] 그에 비견될 만한 선수는 압둘자바와 마찬가지로 3년 연속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고 2년 연속으로 무패 우승한 그의 대학 후배 빌 월튼 정도 뿐이다. 압둘자바와 월튼이 재학하는 동안 UCLA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는데,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서 후술되는 7연속 우승을 포함해 무려 9번이나 우승하기도 했다.[11] 사람들은 이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후배 센터인 샤킬 오닐과 비교한다. 둘 다 다른 팀에서 시작했고,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본인이 싫어서 먼저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결국 로스앤젤레스로 오는 과정이 닮아있다.[12] 참고로 압둘자바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한 첫해, 훗날 1981-82 시즌부터 레이커스의 감독을 지낸 전설적인 헤드코치 팻 라일리는 선수로 뛰고 있었다.[13] 압둘자바는 NCAA 역사상 유일한 3년 연속 최우수선수상을 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더 무서운건 당시 1학년은 공식 경기 출장이 금지 되어있었다. 즉, 압둘자바는 대학 농구에서 본인이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하고 최우수선수상을 탔다. 그는 NBA 커리어도 역대 최고 중 하나지만, NCAA 커리어는 그 마이클 조던도 따라올 수 없는 역대 최고임엔 이견이 없다.[14] 대학 시절에 이미 스스로 습득한 기술이지만,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의 스카이 훅이 릴리스와 레인지 측면에서 더 완성도가 높다고 하는 편이다.[15] 게다가 그는 이미 커다란 무릎부상으로 전성기때의 운동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16] 사실 골텐딩 룰 자체가 1950년대에 조지 마이칸 때문에 생겨난 지라 1960년대~1970년대 초에는 골텐딩이 지금처럼 엄격하게 불리지는 않았다.[17] 심지어 스카이 훅과 마찬가지로 사기적인 스킬로 불리는 학다리 페이더웨이로 NBA무대를 점령한 디르크 노비츠키마저도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을 연습했지만 압둘자바의 슛을 마스터 할 수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18] 매직은 특이하게 포인트 가드였음에도 포스트업과 골밑에서 마무리 능력, 특히 훅 슛능력이 일품이었다. 또한 포인트 가드임에도 점프슛을 거의 쏘지 못해 세트슛을 이용했다. (이와 별개로 슛 능력 자체는 좋은 편이었다) 이는 매직의 신체조건 탓인데 206cm란 신장은 지금도 파워 포워드, 적어도 스몰 포워드는 보는 게 일반적인 신장이고 당시에도 빅맨을 보는 게 당연한 신장이었다. 게다가 매직은 키만 큰게 아니라 덩치도 크고 힘도 세서 득점을 할때 매치업 상대로 포스트업으로 죽죽 밀어내고 마무리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훅 슛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소속팀 공격의 거의 전부를 본인이 시작했기 때문에, 패스를 받아서 점퍼로 마무리하는 플레이를 할 일이 없었고 점퍼를 연마할 기회도, 이유도 없었다.[19] 역대 블록 순위에서 1위인 하킴 올라주원, 2위인 디켐베 무톰보에 이은 3위인데 압둘자바가 데뷔하고 4시즌이 지난 이후에 블록 랭킹을 집계했으니 상대적으로 압둘자바는 순위에서 손해를 봤었다. 안 그랬다면 통산 4000개가 넘는 블록을 하면서 압둘자바가 1위였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물론 압둘자바의 선배들인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은 당시 골밑의 지배자였으니 더 높았을 수도 있다.[20] 물론 리드는 당대 센터들답지 않게 프레임이 좋고 탄탄한 몸을 가진 선수였다.[21] 물론 225파운드의 몸무게는 그의 NBA 데뷔 시절 즉 초기의 몸무게였고 이후엔 피지컬을 키워서 벅스 후기와 레이커스 초기 사이 즉 전성기 적에는 235파운드 근처였고 이후 골 밑에서 버티기 위해 중량하면서 대체적으로 240에서 250파운드를 유지했었다. 그러다가 87년 쯤에 즉 커리어 말년에 270파운드 넘게까지 벌크업을 했지만 여전히 압둘자바는 꽤 날씬한 모습을 유지했었다.[22] 1981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상대할 당시 압둘자바는 31.1점 17.7리바운드, 야투율 51.4%를 기록한 말론을 상대로 26.7점 16.7리바운드 야투율 46.2%를 기록했는데, 특히 야투율은 정규시즌 57.4%에 비해 11%나 떨어진 것이었다. 반면 말론은 정규시즌 52.2%랑 별 차이가 없었다. 이때 레이커스는 디펜딩 챔피언이었음에도 플레이오프 막차를 탄 말론의 휴스턴에게 업셋당했다. 압둘자바가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말론은 최전성기였던 83년에는 파이널에서 붙어 말론의 필라델피아가 아예 스윕해버렸는데, 득점은 25.8대 23.5로 별 차이가 없고 야투율은 압둘자바가 오히려 55.2% 대 50.7%로 앞섰지만 리바운드에서 18개 대 7.5개로 완전히 압도당했다.[23] 영화 초반에 브누아 블랑어몽어스를 하는 4인 중 한 명.[24] 원래 종교는 가톨릭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말콤 엑스 등의 영향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흑인 미국인들이 꽤 있었다.[25] 레슬리 닐슨류 코미디 영화로 유명한 "ZAZ 사단"의 초기작으로 1984년에는 우주를 배경으로 속편까지 나왔다. 레슬리 닐슨 본인도 돌팔이 의사 역으로 내내 등장한다. 그 전까지 닐슨은 맥베스 등 온갖 심각한 역만 도맡아 하던 정극배우였다.[26] 정작 실려나갈 때는 파일럿 셔츠 밑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유니폼 하의, 무릎보호대, 경기용 고글까지 모조리 착용한 모습이다.[27] 샘 해밍턴의 미니홈피에 사진과 소감 중[28] 1949~2011. 랩의 원형을 제시한 1971년 노래 '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로 유명하다.[29] 블록수치에 가장 영향을 주는 요소는 높이(키 + 팔길이) 다음으로 운동능력이기 때문에 보통 출전시간이 확보될 경우 커리어 초반의 블록 수치가 가장 높은 경우가 많다. 샤킬 오닐의 경우에도 루키 시즌의 블록이 3.5개로 압도적으로 가장 높다. 그 다음은 1999-2000 시즌의 3개.[30] 다만 압둘자바 이상의 블록 능력을 갖고 있던 네이트 서몬드는 여기에 끼지 못할 확률도 있다. 서몬드는 부상이 비교적 잦아 통산 경기수가 964경기에 불과해서 압둘자바의 2/3도 되지 않기 때문. 물론 이는 러셀도 마찬가지지만 러셀의 경우 마지막 시즌까지 한 경기 (비공식) 21개, 13개 블록 경기가 나올 정도로 블록 능력이 압도적이었다.[31] 기사에서 "~개 블록을 했다"라고 언급된 경우. 기록이 상충되는 경우 더 적은 기록을 선택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기사에서 7개 블록, 다른 기사에서 9개 블록의 경우 7개 블록이라고 기록하는 식.[32] 일류 빅맨이 평균 2개 정도만 기록해도 디펜시브 퍼스트, 세컨드 팀에는 뽑힌다...[33] 참고로 체임벌린의 마지막 시즌은 표본이 21경기로 평균 7.6개, 러셀의 경우 표본이 13경기로 8.3개였다. 게다가 "블록 수치가 높은 것만 기사화됐을 것이다"라고 추정할 수도 없는게 블록 수치가 1,2개인 경기까지 그대로 집계되어 있다. 참고로 시즌 하이 수치는 체임벌린은 15블록, 러셀은 21블록이다.[34] 공식 수치만 따지면 NBA 역대 한 경기 블럭 1위는 엘모어 스미스의 17개, 15블럭이 넘은 경기는 5차례에 불과하다. 저 둘의 블럭 능력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수준인지 알수 있다. 저들의 블럭 수치가 기록됐다면 트리플 더블 순위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35] 릭은 컬렉션중에서 40,000달러에 팔려했던 고글을 25,000달러+카림 압둘 자바와 LA 레이커즈 경기 관람에 구매했다.릭다운 반값이고 5천달러는 레전드와 같이 경기관람기회라고 보면 된다.[36] 한국 한정으로 1993 파이널에 올랐던 피닉스 선즈에서 백인에 슈팅이 뛰어난 댄 멀리와 대니 에인지 역시 "3점 쏘는 백인 좀 큰 애/좀 작은 애"로 구분되기도 했다. 당시 중계화면 화질이 좋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다.[37] 압둘자바나 워디가 착용했던 고글은 도수가 없는 일반 스포츠용 고글이었는데 눈 부상 방지용으로 시중에서 판매되던 것이었다. 진짜 눈이 나빠서 고글을 착용해야 했던 선수로는 NFL 명예의 전당에 입당한 러닝백 에릭 디커슨이었는데 착용하기를 싫어해 콘택트 렌즈를 착용하고 훈련했더니 종목의 특성상 콘택트가 빠지는 경우가 많아 부득이하게 착용하게 된 것이라 한다. # 또한 시카고 불스의 호레이스 그랜트 역시 시력 교정용으로 고글을 착용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사석에서 압둘자바나 워디는 안경을 끼지 않았지만 그랜트는 당시 사석에서 안경을 꼈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나빠졌는지 카림은 노인이 된 이후엔 안경을 끼고 다닌다.[38] 하킴 올라주원도 초창기에 고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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