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클로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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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Camille Claudel


파일:Camille_Claudel.jpg

본명
카미유 로잘리 클로델
Camille Rosalie Claudel
출생
1864년 12월 8일
프랑스 제2제국 엔, 페레앙타르드누아
사망
1943년 10월 19일 (향년 78세)
비시 프랑스 보클뤼즈 주 몽데베르그
국적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직업
조각가
사조
표현주의, 사실주의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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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성장기
2.3. 로댕과의 만남
2.4. 로댕과의 불화
2.5. 독립
2.6. 어려운 삶
2.7. 비참한 말로
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프랑스조각가.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1864년 12월 8일 프랑스 북부 엔(Aisne)의 페레앙타르드누아(Fère-en-Tardenois)에서 등기소 소장이었던 루이 프로스페르 클로델(Louis Prosper Claudel)과 의사의 딸이자 마을 주임 사제의 조카였던 루이즈 아타나이즈 세실 클로델(Louise Athanaïse Cécile Claudel)[1] 부부 슬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여동생인 루이즈(Louise)는 1866년 2월 26일, 남동생이자 훗날 시인으로 활동한 폴(Paul)은 1868년 8월 6일에 태어났다. 카미유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한 편은 아니었다. 카미유의 부모는 19살 차이가 났으며 첫 아들이 생후 2주 만에 죽는 바람에 슬픔에 빠졌다. 카미유의 부모는 첫 아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녀에게 카미유라는 양성적인 이름을 지어 주었다.


2.2. 성장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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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때의 카미유
카미유의 어머니는 유독 루이즈와 폴만 사랑했으며 그러한 편애는 훗날 카미유가 정신병원에서 지내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카미유는 유독 폴과 가깝게 지냈는데 폴은 후에 시인이자 외교관이 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카미유의 보호자가 되었다. 카미유의 아버지는 가정 문제가 모두 자신에 의해 잘못되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성격이 난폭하게 변해갔으나, 카미유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카미유를 항상 사랑해주었던 장본인이었다.

카미유는 빼어난 미모와 강한 자부심과 용기 그리고 고집이 무척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 번은 카미유가 혼자서 20kg의 진흙을 집으로 운반하려 했는데 어머니는 화를 내며 그걸 버리려고 했다. 어머니가 그의 뺨을 여러 번 쳤음에도 불구하고 카미유는 어릴 적 소아마비 때문에 저는 불편한 다리를 동동 구르며 버티다가 결국 아버지가 해결해 주었다. 그만큼 카미유의 성격은 어머니와의 적대관계 역시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1876년 아버지의 전근으로 전 가족이 노장쉬르센(Nogent-sur-Seine)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3년간 거주했다. 카미유는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항상 작은 칼을 가지고 다니면서 과일 껍질을 벗기거나 연필을 깎든지 혹은 진흙을 잘게 부수는 데에 사용했다. 근처 숲 속에서 놀던 카미유는 우연히 구부정하고 울퉁불퉁하여 마치 괴물같이 생긴 '제앵'이라는 바위를 발견했다. 이 바위는 어쩌면 카미유의 조각 본능을 드러내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카미유는 진흙으로 이 바위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정식적인 조각 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나폴레옹 흉상이나 비스마르크다비드골리앗에 관한 이야기에 관련된 소조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런 딸의 재능을 이해하고 1879년 노장 조각가인 알프레드 부셰(Alfred Boucher)에게 정식으로 조각 기초수업을 받게 해주었다.

1880년 아버지가 샹파뉴의 바시쉬르블레즈(Wassy-sur-Blaise)로 전근하게 되어 아이들 교육상 수도 파리의 한 아파트를 빌려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살았다. 이 때 루이즈는 음악학교, 폴은 문학학교에 입학했는데 부셰는 제자 카미유를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시키기 위해 교장인 폴 뒤부아(Paul Dubois)에게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당시 여자의 권위는 말할 것도 없이 낮았고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기에 입학은 거부당했다.

1881년 카미유는 부셰의 도움으로 사립학교인 콜라로시 아카데미(Academie Colarossi)에 입학하여 수업을 받으면서 조각에 전념했다. 작업을 위해 친구 몇몇과 함께 노트르담데샹(Notre-Dame-des-Champs) 근처에 작업실을 빌려 작업에 열중했다. 이 때 틈틈이 부셰가 카미유를 찾아와 지도를 해주었다. 1882년 카미유는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하녀인 엘렌(Hélène)을 모델로 조각 작품을 만들어 살롱[2]에 처음으로 출품했다.

2.3. 로댕과의 만남[편집]


1883년 부셰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이탈리아 로마로 떠나기 전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이자 친구였던 오귀스트 로댕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위탁했다. 부세는 로댕에게 특히 카미유의 지도를 부탁했는데 이때 비로소 로댕과 카미유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카미유의 나이는 19세, 로댕의 나이는 43세였다.

이미 20년간 동거하고 자신의 아들을 낳은 여자 로즈 뵈레가 있었던[3] 로댕은 당시 19살이었던 카미유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 때 로댕의 도움없이 루이즈를 모델로 '16세의 내 동생'을 완성했는데 로댕은 극찬했다. 훗날 카미유는 폴을 모델로 '37세의 폴 클로델'과 '42세의 폴 클로델 흉상' 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 카미유를 짝사랑하던 모델 지강티를 조각한 '지강티의 흉상'을 1885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의 생명력은 말할 것도 없이 마치 살아있는 듯해 로댕은 카미유의 재능에 다시 놀라게 된다.

1885년 카미유는 가족과 상의 없이 로댕의 권유로 로댕의 작업실에서 제자 겸 모델로 활동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로댕과 카미유는 늘 함께 있으면서 애정을 키워나갔다. 24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은 더욱 커져갔다. 로댕은 언제나 자신이 참석하는 모든 사교계에 카미유를 동반하고 다니며 카미유가 대단한 조각가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미유가 작업실에 나오기 시작하자 여자 모델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왜 같은 여자 앞에서 옷을 벗으라는 것이냐는 둥 빈정거리기 일쑤였으며 작업실 분위기는 더욱 냉랭해졌다.

1887년 카미유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정식으로 로댕의 조수로 일하면서 로댕의 작품인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입맞춤> 등의 제작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둘은 사랑을 위해 광란의 뇌부르그로 불리는 집과 투렌느 이즐레트 성을 빌렸고 이 공간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이 때 로댕은 카미유를 '공주님'이라 칭하며 거리낌없이 사랑을 표출했다. 이 시기에 카미유는 '뇌부르그의 광란', '이교도의 농지', '사쿤탈라' 등의 작품을 조각했고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2.4. 로댕과의 불화[편집]


1888년 카미유는 살롱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서 정식 인정을 받게 됨과 동시에 세인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부터 카미유의 작업 스타일이 보다 독창적이고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1889년 이후부터 카미유의 작가로서의 활약이 서서히 커지자 로댕은 까미유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카미유와 로댕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카미유는 1891년까지 로댕과 함께 했으나, 이후에는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하지만 로댕이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맨션을 구입하는 등 그녀의 의견을 무시하자 분노하여 이를 작업에 표현했고 그제서야 로댕은 그녀를 피하고 프랑스 뫼동에 정착했다.

1892년 카미유는 로댕과 헤어지며 로댕의 작업실을 나왔다. 카미유는 실질적인 작품 제작은 제자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끊임없이 사교 모임을 하던 로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댕과의 결별은 카미유가 예술가로서 성공하는 필요한 조력자를 한번에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었다. 로댕은 카미유가 자신의 작업실을 떠나자 유감의 뜻을 밝혔다.


2.5. 독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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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의 카미유

로댕과 헤어진 카미유는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와 친분을 가지며 새로운 연인 관계로 발전할 여지가 보였지만 결국 카미유의 거부로 금방 헤어졌다. 다만 카미유의 작품 중 '왈츠'의 모델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드뷔시에게 선물로 주었고 드뷔시는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1893년 <성숙의 시대>를 살롱에 출품해서 극찬을 받았다. 1894년 로댕의 부탁으로 벨기에 예술가협회의 전시회에 초대되어 작품 전시를 했는데 이때까지도 로댕과는 계속적인 서신 교환은 있었다. 살롱에 <로댕의 흉상>을 출품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로댕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1899년 살롱에 자신의 역작인 대리석 작품을 출품하였으나, 전시회 중 작품을 도난당했다. 작품을 훔친 범인이 로댕이라고 생각했던 카미유는 로댕을 비난함과 동시에 영원히 로댕과 멀어졌다. 카미유는 아예 부르봉가 19번지로 거처를 옮겼고 이 후 14년간 혼자 기거했다.

2.6. 어려운 삶[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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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의 카미유

1900년 <애원하는 여인>을 제작하고 1905년 알고 지내던 작품 중개상 외젠 블로의 주선으로 블로의 화랑에서 단독 작품전 개최를 제안받았다. 당시 카미유의 생활은 매우 빈곤했는데 로댕의 모델로 있을 때 로댕을 사랑한 나머지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고 로댕으로부터 독립 후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겨울에 연료가 끊겨 덜덜 떨다가 싸구려 와인을 연달아 흡입했고 결국 알코올 의존증 증세까지 오게 되었다. 이미 카미유는 이 때 정신병자로 판명난 상태였다.

6개월 후 블로의 화랑에서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 13점을 전시했으나, 이 날 그는 술에 취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블로는 단 한 점의 작품도 팔지 못했다. 한 번 로댕의 연인으로 인식된 카미유를 독자적인 예술가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이로 인해 카미유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되었다. 1906년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을 보이는 족족 부숴버렸고 우울증과 정신착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9년 폴이 청나라 톈진에서 영사로 근무한 후 프랑스로 귀환하여 카미유를 만난 뒤 누나의 비참한 생활상을 청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알렸다. 1906년 카미유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폴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딸의 비참한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매우 충격을 받았고 이 후 아버지와 폴의 도움으로 카미유는 간신히 연명했다.

2.7. 비참한 말로[편집]


1913년 3월 2일 아버지가 사망하고 폴이 급히 귀국하여 장례식을 치렀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절대적으로 지원을 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카미유의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이후 3월 10일 폴은 카미유를 빌에브라르(Ville-Evard) 요양소에 넣었다. 이 곳은 말이 요양소이지 원래는 정신병원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로댕은 로즈와 함께 영국 런던으로 피난했으며 카미유는 프랑스 남부 앙김(Enghiem)의 몽드베르그(Montdevergues)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카미유는 이 후 약 30년간 바깥 출입을 금지당하는 등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카미유는 폴에게 살기가 너무 힘들고 시끄럽다면서 조각을 하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폴은 묵살했다. 그 와중에 1917년 11월 17일 로댕이 사망했고 1934년 5월 3일 루이즈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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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의 카미유

1943년 10월 19일 오후 2시 카미유는 향년 79세로 사망했다. 사망한 곳은 몽드베르그 수용소다. 카미유의 장례식에는 폴조차 나타나지 않았고[4] 무연고자라는 이유로 카미유 클로델은 공동 매장되고 말았다. 그래서 묘소가 존재하지 않으며,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길이 없다. 1955년에 폴은 87살로 사망한다.[5]

카미유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묻혀 있었지만 1980년대 이후 카미유의 작품이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1984년 폴의 손녀이자 전기작가인 렌마리 파리가 자신의 고모할머니였던 카미유의 이야기를 <카미유 클로델의 전기>라는 책으로 발매했다.


3. 대중매체[편집]


  • 카미유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1980년대 이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1988년 브뤼노 뉘탕 감독에 의해 <카미유 클로델의 전기>를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에서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로댕을 맡았고 이자벨 아자니가 카미유를 맡았다. 특히 아자니의 연기가 돋보였는데 카미유가 로댕을 만나게 된 19살부터 정신병원에 수용된 49살까지의 연기를 위화감 없이 맡았다. 카미유가 로댕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끝나는데 마지막에 자막으로 카미유의 말로를 언급하는 것으로 끝난다. 대한민국에서는 1989년 개봉했으며 과거 KBS 명화극장SBS 영화특급에서 방영했다. 성우는 송도영(SBS)/정미숙(KBS). 자세한 내용은 개별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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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년 브루노 뒤몽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여기서 카미유는 쥘리에트 비노슈가 맡았다. 1915년 51살이었던 카미유가 정신병원에서의 사흘을 그린 영화인데 마지막에는 역시 자막으로 카미유의 말로가 언급된다. 뒤몽 영화답게 매우 건조하고 말라붙은 자연주의적 분위기가 특징. 참고로 영화에 나오는 정신병원과 환자, 의사 모두 실존 정신병원과 환자, 의사다.[6] 자세한 것은 카미유 클로델(20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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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는 각각 호불호가 갈리고 평가가 각각 다르지만 시점이 다르기 때문에 카미유의 삶을 보려면 두 영화를 모두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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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미노 요시유키가 감독한 기동전사 Z건담의 주인공 카미유 비단은 이 카미유 클로델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단순히 따온 것이 아니고 예술가로서 존경해서 프랑스까지 가서 작품을 봤다고 한다. 로댕보다 카미유 클로델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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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전성은 '세르보(Cervaux)'.[2] Salon. 1667년 시작된 프랑스의 권위있는 미술 전람회이다.[3] 로댕은 로즈와 1917년에야 정식으로 결혼한다.[4] 남매 중 그나마 그녀와 가장 가까웠던게 폴이었으나 그런 폴조차 카미유의 장례식에 참석하지않았다.[5] 참고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동안 조현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아버지를 제외하면 그나마 카미유와 가까웠던 폴마저도 카미유를 포기한게 아마 이 조현병 증세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은 가족 내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결코 취급이 좋지 못했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안타깝게도 카미유는 동생 폴에게 네 누나가 정신병원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몇 번이나 연락했다고 하는데, 폴은 그래도 카미유를 꺼내주지 않았다.[6] 사실 뒤몽은 비노슈 같은 대배우 캐스팅은 매우 드물며 비전문 배우 기용이 잦은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