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가노츠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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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가노츠보네
春日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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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79년
탄바국 쿠로이 성
(現 효고현 탄바시 코젠지)
사망
1643년 10월 26일 (향년 64세)
에도 성 (現 도쿄도)
묘소
린쇼인(麟祥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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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사이토 후쿠(斉藤福)
애칭
오후쿠(お福)
가문
사이토
부모
친부 사이토 토시미츠
친모 安
양부 이나바 시게미치(稲葉重通)
배우자
이나바 마사나리 (이혼)
형제
오빠 사이토 도시무네(斎藤利宗)
자녀
아들 이나바 마사카츠(稲葉正勝)
아들 이나바 마사사다(稲葉正定)
아들 이나바 마사토시(稲葉正利)
양자 홋타 마사토시(堀田正俊)
위계
종2위(従二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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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화백 아다치 긴코(安達吟光)가 그린 카스가노츠보네[1]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유모가 되다
2.3. 권세를 누리다
2.4. 사망
3. 여담
4. 창작물에서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센고쿠 시대에도 시대 초기의 인물.

에도 성 오오쿠의 기틀을 닦은 실질적인 오오쿠의 창시자로,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떠받치는 세 기둥[2]으로 평가받는다. 근대 초기의 일본의 여성 정치인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후 에도 막부의 안정화에 기여한 여걸로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579년 덴쇼 7년, 사이토 토시미츠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사이토 후쿠(齋藤福). 애칭은 오후쿠다.

친가인 사이토 가문은 미노 지방의 명문이었는데, 바로 유명한 사무라이 가문인 사이토 가문 출신이다. 후쿠는 당시 아버지의 영토였던 단바국[3]의 구로이 성(黒井城)에서 태어났다.[4] 단바 국은 아케치 미츠히데의 지배하에 있었고, 오후쿠의 아버지 사이토 토시미츠가 미츠히데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오후쿠는 어린 시절 구로이 성의 공주처럼 지내며 풍족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카스가노츠보네의 할아버지는 이나바 요시미치(稲葉良通)이다. 오호쿠의 아버지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중신이었던 탓에, 혼노지의 변 당시 아케치 미츠히데의 반란에 가담했다. 당시 주력부대를 이끌고 노부나가를 습격한 사람이 미츠히데의 필두 가로였던 오후쿠의 아버지 사이토 리조였다. 야마자키 전투에서 사이토와 아케치 일가는 하시바 히데요시[5]에게 패하였다. 그녀의 아버지 토시미츠가 성으로 돌아가자, 사카모토 성 근처의 오미 국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당시 그녀는 처형된 아버지의 모습을 눈으로 봤다고 한다. 그의 여러 형제들은 패배하고 쫓기게 되어, 적들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도는 오치무샤[6]가 되어 각지를 유랑했다.

사이토 후쿠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을 면했고, 형제들과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 카이호 츠나치카(海北綱親, 1510 ~ 1573)의 아들이자 화가 카이호 우쇼(海北友松, 1533 ~ 1615)에게 의지하고 교토의 토후쿠지를 방문했다고 여겨진다. 카이호 우쇼는 오후쿠의 아버지 사이토 토시미츠와는 처형된 토시미츠의 시체를 밤몰래 빼돌려 사찰에 묻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도요토미의 추격자가 다가오기 시작해 외할아버지인 이나바 요시미츠의 도움으로 외할머니의 친가인 교토의 산죠니시(三条西) 가에 거두어져 산조니시 킨쿠니(三条西公国, 1556 ~ 1588)에게 길러졌다. 입양된 후, 그녀는 다도와 같은 교토 공가(公家) 귀족의 소양을 익혔고, 서예, 와카, 분향 등 궁중의 귀족들에게 필수적인 예술들을 배웠다. 산조니시 가문은 교토 공가 중에서도 명문중의 명문이었다. 그곳에서 오후쿠는 열심히 일하고, 예의범절은 물론, 와카 등의 교양을 배워 간다.

하지만 평온한 생활도 약 3년밖에 가지지 못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사이토 후쿠가 산조니시 공국에 있는 것이 알려져 버렸고, 1584년 아버지의 여동생이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시집간 것으로 인해, 시코쿠의 토사 · 오카토요 성의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의지했다. 1589년, 12세가 된 사이토 후쿠는, 산조니시 가문을 계승하고 나이도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던 산조니시 사네에다(三条西実条)를 의지해 다시 쿄토를 방문해 노래ㆍ문학ㆍ학문 등의 교양을 더욱 몸에 익혔다고 한다. 그녀는 어디를 가나 남들이 좋아하고 똑똑한 여성으로 평판이 나 있었다고도 한다. 그 후, 16세가 된 오후쿠는 외삼촌 이나바 시게미치(稲葉重通, ? ~ 1598)[7]의 양녀가 되며 외가쪽 친척인 8살 연상의 이나바 마사나리(稲葉正成, 1571 ~ 1628)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다.[8]


2.2. 유모가 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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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이나바 마사나리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 오후쿠의 남편 이나바 마사나리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끄는 서군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섬겼다. 히데아키가 미츠나리와의 갈등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유리한 전쟁의 진행으로 인해 오후쿠의 남편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설득해서 동군에 합류시켰다. 히데아키가 이에야스에 합류한 후, 미츠나리의 군대는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오후쿠 가문은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또 그가 최근 그가 히데아키 가신단에 참여한 시점이 세키가하라 이후일 가능성이 제기된 상태다. 하지만 오후쿠의 남편 마사나리는 주군인 히데아키와 갈등을 일으키고 그의 곁을 떠나 녹을 잃고 매인 데 없이 떠돌던 무사인 로닌츄(浪人中)가 된다. 한마디로 백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후쿠는 부친의 사후와 남편의 로닌츄로 인해 2번에 걸쳐 씁슬함을 맛보았다.

1603년에 도쿠가와 막부가 열리고, 그 다음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손자이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적장자인 다케치요[9]유모 모집을 시작한다. 그리고 1604년 오후쿠는 히데타다의 후계자인 다케치요의 유모로 임명되었다. 오후쿠는 쇼군 집안의 유모에 오르기 위해 남편 마사나리와 이혼하는 형식을 취했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서인지 당시 막부가 정한 규정인지 자세한 이혼 이유는 알 수 없다.[10] 그 후, 이나바 가문은 본래의 적장자인 마사나리의 전처가 낳은 마사츠구가 아니고, 오후쿠가 낳은 마사카츠가 계승했다고 하므로, 그녀와 이나바 가문은 이혼했다고 해도 인연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11]

이후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유모로 이타쿠라 가쓰시게(板倉勝重, 1545 ~ 1624)가 추천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스스로 오후쿠를 선택했다는 설이 있다. 그녀가 어떻게 유모로 선택됐는지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설을 제기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설은 이에야스가 그녀가 뛰어난 혈통과 세련되고 잘 받은 교육, 전남편 마사나리의 군사적 공로를 종합해 그녀를 유모로 선발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마사나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라오카 요리카츠와 함께 주군 히데아키를 설득하여 코바야카와군을 전향시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승리로 이끈 공로자였다. 그래서 이러한 보상으로 오후쿠를 유모 자리에 발탁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역자의 딸이자, 몰락 무사의 아내를 유모로 채택했기 때문에, 그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연 관계 아니었냐는 음모론도 있다.[12]

쇼군의 손자의 유모로 뽑힌 오후쿠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도쿠가와 막부의 일원이 됐다. 그녀는 이에미츠에게 자식 이상의 애정을 쏟아 육아에 힘썼다. 이대로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순조롭게 가면 미래의 쇼군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1606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정실 오에요 부부의 사이에 차남인 쿠니마츠[13]가 탄생한다. 어머니인 오에요가 적남인 도쿠가와 이에미츠보다 차남인 쿠니마츠를 귀여워하게 되면서부터" 오후쿠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남인 쿠니마츠를 귀여워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린 시절의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병약한 체질이라 장래의 쇼군직은 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중에 태어난 도쿠가와 타다나가는 똑똑하고 용모도 단정하여[14] 쇼군다운 비주얼로 유명했다.

이것은 유모의 입장에 있는 오후쿠에게도 중대한 문제였다. 오후쿠는 이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여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얼마나 푸대접받고 있는지를 호소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자해를 시도하다 막판에야 말렸다는 일화[15]가 있고, 오후쿠는 이것에 충격을 받게 된다. 오후쿠는 히데타다의 편애가 너무 커지고 그가 돌본 이에미츠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직접 슨푸에 있는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찾아가 다케치요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승인받는 등 이에미츠의 쇼군 등극에 큰 공을 세우게 되며, 유모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된다. 흔히 이를 카스가의 발참(春日の抜参り)이라고 한다. # 하지만 오에요와의 대항 의식을 불태워 이에야스에게 호소한 것이나, 그 때문에 슨푸성까지 달려간 것은 에도 시대의 창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근래에는 통설이다. 또한 오에요가 차남 타다나가를 일방적으로 아끼고 장남 이에미츠를 소홀히 다루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


2.3. 권세를 누리다[편집]


이후 자신이 키운 이에미츠가 쇼군이 됨으로써 도쿠가와 히데타다스겐인은 에도성 서쪽의 처소를 옮기고 이에미츠가 성의 중심의 등장하게 되며 막부의 권력이 크게 바뀌게 되다. 그러나 오후쿠의 걱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걱정은 바로 차남 도쿠가와 타다나가였다. 이후 히데타다가 물러나자 이에미츠는 고립된 도쿠가와 타다나가에 대해, 모반의 기도가 있다고 하여, 타다나가의 영지를 모두 몰수한다. 또한 오후쿠는 자신의 몸을 이에미츠의 곁에 두게 되며, 이에미츠의 절대적인 신뢰를 배경으로 막부의 실력자 중 한 명으로 올라서게 된다.

1623년 겐나 9년, 이에미츠가 쇼군이 된 후 오후쿠는 쇼군사마고쿄쿠[16](将軍様御局)로 에도성 혼마루의 오오쿠 공무를 총괄하게 된다. 오후쿠는 오오쿠의 총책임자로서[17]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카스가노츠보네가 정리한 이때의 오오쿠는 사치를 멀리하고 무가 특유의 검소함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녀는 에도성에 안채인 오오쿠를 설립한 초대 미다이도코로 오에요의 추천을 받아 오토시요리(御年寄り) 즉, 최고 대우의 총관리관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오오쿠와 관련된 모든 공무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쇼군의 권위를 등에 업고 그녀의 당시 권세는 쇼군의 로쥬(老中)[18]를 능가할 정도였다.

일생 동안 그녀는 황실로 파견 나가서 고미즈노오 덴노를 몇 차례나 알현하기도 했고, 막부 내각을 유지시키고, 자신의 측근들을 등용시켰으며, 오오쿠 체제의 안정화를 책임지며 높은 정치적 위신을 쌓았다. 설령 막각의 사전 지식이라고 해도,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는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일화로 쇼군의 식단이 상의에 맞지 않아 다른 준비가 안 된 적이 있었다. 오후쿠는 로쥬인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를 불러들여 보조의 필요성과 합리성을 설파하고 이를 고치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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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쿠가 기틀을 닦은 오오쿠(大奥)

또한 오후쿠는 쇼군을 등에 엎고 권세를 가지게 되면서, 그녀의 측근들도 덩달아 출세하게 된다. 옛 남편이었던 이나바 마사나리는 에치고[19]의 이토이가와에 2만 석의 다이묘로 복귀하게 된다. 또, 이나바 마사나리와 오후쿠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이나바 마사카츠는, 최종적으로 사가미 오다와라 번[20]에서 8만 5,000석을 소유하는 다이묘로 엄청난 출세를 하게 된다. 카스가노츠보네의 오빠 사이토 도시무네(斎藤利宗, 1567 ~ 1647)는 이후에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하타모토로서 5,000석을 영유하게 된다. 자세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카스가노츠보네를 원조한 다른 인물들도 대부분 이례적인 출세를 했다고 한다. 산조니시 사네다(三条西実条, 1575 ~ 1640)는 카스가노츠보네가 황궁을 방문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웠으며, 조정에 의해 무가전주(武家伝奏)[21]에 임명되었고, 결국 우대신이 되었다. 이에미츠의 많은 문하생들은 로주까지 계급이 올라갔으며, 이들 중에는 카스가의 친척들도 많았다. 이에야스의 인 오카지노가타(お梶の方, 1578 ~ 1642)는 이에야스가 죽은 후 도쿠가와 가문의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카스가노츠보네의 의해 고용되었다.

이후 칸에이 6년, 즉 1629년에 카스가노츠보네는 이에미츠의 천연두 치유를 기원하기 위해 교토이세신궁 참배 여행을 가게 된다. 그러나 무가인 사이토가의 딸이라는 신분으로는 조정에 들어갈 수 없어, 사망한 양아버지의 아들과 의남매가 되어 산죠니시 가문의 딸이라는 자격으로 교토 조정에 입궐한다. 이에미츠의 특명을 받고 관계가 악화된 막부와 조정의 교섭을 담당한다. 고미즈노오 덴노를 알현하고 쇼군의 유모로서는 이례적으로 종3위의 품계와 카스가노츠보네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22] 더 나아가 천황이 내린 사케까지 받게 된다. 츠보네(局)는 그녀가 덴노를 알현할 때 신분 없는 몸으로 궁에 입궐할 수 없었기에 받은 관직인데, 고미즈노오 덴노는 히데타다의 딸이자 이에미츠의 동생인 카즈코와의 정략결혼 문제다. 이 사건은 당시 그녀의 권세를 알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관등도 없이 쇼군 곁의 한 유모에 불과한 그녀가 황궁을 찾아 천황을 참견한 것을, 덴노와 많은 공경들은 모욕으로 여겼다. 또한 막부의 압박으로 인해 총애했던 인 요츠츠지 요츠코(四辻与津子, ? ~ 1639)를 자식들과 함께 출궁시킨 일과 더불어 품계도 없는 무가 출신 여자를 덴노에게 알현시켜 권위를 실추시킨 막부의 행동을 참지 못해 동년 11월 8일에 출가하고 양위한다.[23]

이와 같이, 스겐인이 죽은 후, 미다이도코로 다카쓰카사 다카코(應司孝子, 1602 ~ 1674)가 그 역할을 완수할 수 없는 가운데, 에도성 안쪽을 관리하고 있던 것은, 이에야스의 부인들과 그 친족(죠코인)이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후 슨푸에서 에도로 옮겨온 이에야스의 별처(운코인, 에이쇼인[24]

)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중에서 쇼군가 이에미츠케로서 오모테노쿠니(表の局)라 불리고 있던 오후쿠가 에도성에서의 지위를 부상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간에이 6년에 이에미츠의 명대표로 상락하여 고미즈노오 덴노로부터 카스가노의 국호와 위계를 배령했기 때문일 것이다.

후쿠다 치즈루 (역사학자, 규슈대학 역사학 교수)#


오후쿠가 실질적으로 오오쿠를 완전하게 장악해 뛰어난 수완으로 오오쿠의 제도와 법도를 확립해 지배하게 된 것도 이 시점이다. '카스가노츠보네'라는 이름을 덴노에게 받으면서 다른 여성들을 능가하는 지위와 권위를 갖게 되어, 명확한 책임자가 부족한 안쪽의 국(局)과 바깥의 국을 아울러 오오쿠를 완전하게 통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오쿠총단속(大奥総取締)'이라고 잘 알려진 직책을 맡아 오오쿠의 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그녀는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1634년 쇼군 이에미츠가 로쥬제를 확립하지만, 표면적인 방법으로만 정치가 움직이지 않았다. 내증(内証)[25]적인 방법이라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방법은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아베 다다아키(阿部忠秋, 1602 ~ 1674), 아베 시게츠구(阿部重次, 1598 ~ 1651)의 세 로쥬들이 맡았고, 내증적인 방법은 오후쿠의 측근인 홋타 마사모리[26](堀田正盛, 1609 ~ 1651)와 홋타의 친족이기도 한 카스가노츠보네가 창구로서 함께 내증적인 방법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러 다이묘와 이에미츠를 잇는 역할을 담당했다. 카스가노츠보네는 여러 다이묘들과 신뢰를 쌓기 위해 성 밖 각지에 저택을 갖고 자주 면담을 했다고 한다. #

카스가노츠보네는 이후에도 1632년 7월 20일 다시 메이쇼 덴노를 알현하러 갔고, 위계가 종2위로 승서하게 된다. 오후쿠는 히바카마(緋袴)의 착용을 허락을 받았고, 다시 한번 천황의 참작어배도 받는다. 따라서 오후쿠의 위계는 종2위로 일컬어지며, 같은 종2위의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아내 타이라노 도키코(平時子, 1126 ~ 1185)와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여걸 호조 마사코[27](北条政子, 1157 ~ 1225)에 비견되는 대단한 위계가 된다.[28] 또 카스가노츠보네는 쇼군에게 다이칸쵸와 카스가쵸에 저택을 받았고,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카스가노츠보네는 오오쿠를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표(表)에 대해서도 발언권이 있었다. 로쥬 홋타 마사모리(堀田正盛),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등도 어릴 적부터 이에미츠의 근처를 섬겨 카스가노츠보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아 자랐다. 1624년에는 사찰 천택사 린쇼인[29](麟祥院)를 건립하기도 했다.

또 동생만 편애했던 기 센 어머니에게 질려 여성혐오증이 생겼던 이에미츠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염려하여, 조카인 오후리를 소개해주는 것부터 시작해, 측실이 되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 스카웃해 오오쿠로 들여왔다. 도쿠가와 가문이 흔들리면 전란의 싹이 되기 때문에, 그 싹을 자르기 위해서 카스가노츠보네는 이에미츠의 후계자 만들기를 위한 장대한 계획에 착수한다. 히데타다의 시대에 에도성은 수백명의 규모에 지나지 않았던 오오쿠를 1,000명 규모로 단번에 확대한다. 거기에, 측실 후보를 모두 살게 해, 여자의 성을 쌓아 올린다. 그리고 피라미드형 조직으로 흔들림 없는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다. 쇼군의 제일의 역할은 후사를 남기는 것이라며, 거대 조직 오오쿠를 쌓아 올린 것이다. 카스가노츠보네가 여러쪽으로 데려왔다고 하는 측실들은 오라쿠[30][31], 오나츠[32], 오만, 오타마[33], 오후리[34], 오리사가 있다. 그러나 이에미츠의 직계는 증손에서 끊기고, 오오쿠가 결국 막부의 돈 긁어먹는 골칫거리[35]가 된 걸 생각하면, 카스가노츠보네의 후사 구하기는 그녀의 실책이 됐다.

말년에 들어서는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오후쿠에게 은 3,000개와 금 100개를 하사했고, 유시마[36]에 거창한 주택을 하사하기도 해, 다이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지위를 누리며 풍족한 말년을 보냈다.

2.4. 사망[편집]


카스가노츠보네의 말년의 에피소드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약 중단 사건이다. 과거 그녀는 병이 잦았던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염려해 이에미츠의 병의 완쾌와 무사를 위해 "이제부터 일절 약을 복용하지 않겠다"는 입원을 내세우며 평생 약을 먹지 않았다. 그녀는 특별히 건강하지 않았고 병도 적지 않게 앓고 있지만, 그래도 단호히 복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에미츠의 병을 스스로 맡아 자신의 죽음 직전까지 이에미츠를 지키려 하였다. 가장 늦은 나이에 병으로 누워 위독한 상태에 이른 그녀에게 이에미츠가 친히 병상의 노유모에게 복약을 명하는 편지가 남아 있기도 하다. 이 둘 사이의 신뢰관계가 잘 전달되는 내용이다.

오랜 세월 나에게 약이 들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약을 먹지 않았다지만, 죽기 전에 이르러 약을 먹는 것은 자신의 섭생을 위해 먹는 이치와 같지 않소. 이번에 타케치요(이에츠나)의 기합에 정성을 다하여 약을 먹지 않고 또 그쪽에 뜻밖의 일이 있으면, 여러가지 고생을 다하는 것이 되므로, 그렇게 되면 정력도 다하여 목숨도 다해버리오. 천하를 위해서, 몸을 위해서이니 이번에는 약을 먹고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큰 효도이니 속히 성 안에서도 약을 먹고 나아가 봉공[37]

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오. 약을 먹지 않는 것보다는 먹는 것이 봉사가 되오. 이 말을 저버리고 약을 먹지 않는다면 죽은 후에도 괘씸한 짓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아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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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가노츠보네의 묘

이후 카스가노츠보네는 1643년 칸에이 20년, 향년 64세로 숨을 거둔다. 그녀가 죽었을 때, 이에미츠는 친부모가 죽었을 때 이상으로 애통해 했다고 한다. 사세구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西に入る 月を誘い 法をへて 今日ぞ火宅を逃れけるかな

서(西)로 들어가는 달을 꾀어 불법(佛法)의 길을 따라 오늘이야말로 속세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묘지는 도쿄도 분쿄구에 있는 사찰 린쇼인에 있으며, 가노 탄유가 그린 카스가노의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다. 이 사찰은 카스가 거리의 도쿄대학으로 빠지는 근처에 있다. 묘석은 난탑이라 불리는 세로로 긴 부드러운 곡선을 가지고 있으며, 그 묘석 위쪽에 둥근 큰 구멍이 사방으로 나 있다. 이는 죽은 뒤에도 천하의 정도를 지켜보며 이를 고쳐 나갈 수 있도록 황천이 내다보이는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분쿄의 카스가 지역은 그녀의 이름을 따왔다. 또 다른 무덤은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에 있다.

그녀의 사망 이후 이시다 가문은 사가미·오다와라 번 85,000석이 되어, 크게 출세한 이나바 마사카츠는 장래가 기대되었지만 1634년 불과 38세에 사망했다. 장남이 사망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차남 이나바 마사노리, 이나바 마사미치가 이어, 모두 막부 로쥬 요직을 지냈지만,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 옹립 때 이나바 마사노리는 실각하고, 1683년에 은거한다. 이나바 마사미치가 가독을 이어받았지만 1685년, 에도에 가까운 오다와라에서 이봉되어 103,000석으로 에치고 · 타카다 번으로 옮겼다. 그 후 102,000석에서 시모사쿠라 번, 1723년 이후에는 야마시로 요도 번 102,000석에서 에도 막부 말기까지 이어졌다.

카스카노 츠보네는 모반인의 딸이라는 역경을 거쳐 출세의 계단에 올라 여성의 신분으로 정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


3. 여담[편집]


  • 이나바 마사나리와의 사이에서 마사카츠, 마사요시, 마사토시 세 아들을 낳았고 이 중 마사카츠는 이에미츠를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26세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유모인 카스가노츠보네의 헌신적인 간병으로 완치됐다. 카스가노츠보네는 어린 시절에 가벼운 천연두에 걸린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경험이 활용되었던 걸로 보인다. #

  • 성의 통금 시간에 늦었을 때 규칙을 지키는 것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며 문 앞에서 하룻밤을 새웠다고 한다. #

  • 또한 그녀는 약 끊기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 이에미츠가 병이 났을 때 회복을 기원하며 약 단식을 맹세하고 평생 복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

  • 카스가노츠보네가 엄청난 권세를 자랑하자, 이후에 유모가 이렇게 큰 권력을 얻으면 안 되기 때문에 유모가 후계자에게 젖을 줄 때 얼굴을 기억하지 못 하도록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일화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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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는 그녀가 부하를 배려하는 의외의 일면을 알 수 있는 편지가 발견되었다. 자신의 하인의 어머니가 니시혼간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친히 붓을 잡고 스님 료쿄(良如)에게 "(부하를) 모친을 만나게 하여 니시혼간지에 봉양하게 한다면 매우 고맙겠다."고 청하였다. 당시에 카스가노츠보네 같은 신분이 높은 인물이 하인을 위해 편지를 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의 상냥함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

  • 역사학자 타바타 야스코(田端泰子)는 그녀의 성격에 대해 "젊었을 때 고생을 거듭한 것으로부터, 카스가노츠보네는 사람의 아픔을 아는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여겨진다."라고 말했다. #

  • 어릴 적 지병을 앓아왔던 이에미츠의 식욕을 돋구기 위해 칠색반(七色飯)을 지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가운데 중 하나는 이에미츠의 입에 맞을 것이라 생각해 준비한 이 7가지 의 주 메뉴들은 각각 나물밥, 보리밥, 조밥, 팥밥, 지은 밥을 다시 찐 밥과 말린 밥, 그리고 으깬 쌀로 지은 밥이다. 요시나가 후미의《오오쿠》에서도 카스가노츠보네가 오오쿠를 설립한 이유 및 계기로 이 설을 차용했다.

  • 한낱 유모의 신분으로 당대 오고쇼였던 이에야스를 알현해 의견을 올렸다는 점에서, 그와의 관계에 대한 추문이 있었다. 이에미츠가 카스가노와 이에야스 혹은 도쿠가와 히데타다 사이의 아들이라는 음모론도 있을 정도. 이 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야기 토메오(八切止夫)가 그렇다.

  • 역사학자이자 규슈대학 역사학 교수 후쿠다 치즈루(福田千鶴)는 카스가노츠보네의 평전에서 이 음모론에 대해 분석했다. 일찍부터 카스가노츠보네가 이에미츠의 생모였다는 음모론은 있었지만, 교수는 사료 등을 검토해 히데타다에게 스겐인 이외의 여성으로부터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는 것이 명백한 점과 스겐인과 히데타다가 이에미츠의 출산 전년도의 후시미와 에도에서 떨어져 살고 있었다는 점, 당시의 서출자와 적출자의 상속 관행, 도쿠가와 가문의 적장자이면서 이에미츠의 어릴 적 실적이 모호하다는 점, 스겐인이 이에미츠의 생일을 공개하려 하지 않은 점, 스겐인의 장례식은 장자인 이에미츠가 아니라 도쿠가와 타다나가가 담당한 점 등을 근거로 스겐인이 이에미츠의 "생모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적었다. 그는 이에미츠의 생모는 에도성의 히데타다의 시첩의 한 사람이라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으로 적었고, 카스가노츠보네가 이에미츠의 생모라는 설을 "사실로서 인정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신중함이 요구된다."고 평했다. 후쿠다 교수는 "즉, 이에미츠는 시첩에게서 태어난 서출 둘째 아들이었다. 그래서 비록 셋째 아들이지만 본처인 스겐인에게 태어난 적장자인 타다나가에 비해 이에미츠의 대우가 동등한 2번째에 놓이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뒤에 펼쳐질 오후쿠의 노력의 의미도 쉽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 하지만 그 오다 노부나가의 혈통을 가졌고 긍지와 자존심도 높았던 스겐인을 두고, 그렇지 않았더라도 집안 전체가 혼외아들을 완전히 장남 취급하여 구별해주는 것이 가능했을지는 의문이 든다.

  • 사실 그녀와 스겐인과 사이가 좋았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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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그녀의 무덤이 있는 도쿄도 분쿄구로 카스가노츠보네의 동상을 이전했다.

  • 도쿄도 분쿄구 카스가는 카스가노 배령지[38]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 도쿄도에 있는 카스가거리(春日通り) 역시 위에 있는 분쿄구 카스가에서 유래한 도로의 통칭명이다. 그녀의 저택이 있던 카스가 정에서 유래한 것인데, 현재까지 그 이름이 남아 있는 것에서도 당시의 권세상을 알 수 있다.

  • 권력이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일본 3대 악녀를 꼽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실책을 저지르긴 했지만 악녀라고 불릴만한 악한 행동을 한 적은 없다. 미디어 믹스에서 부풀려져 억울하게 악녀 소리 들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카스가노츠보네가 무서운 여성이었고 악역과 같은 묘사로 그려지는 것은,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유모가 되어 엄격한 태도로 오오쿠의 총관리자를 맡고 있었기 때문인듯 하다. 실제로 그녀가 권력을 남용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카스가노츠보네는 혈연관계가 없는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소중히 기르고, 도쿠가와 가문의 피를 끊기지 않도록 오오쿠에서 많은 을 영입하여 도쿠가와 이에미츠나 도쿠가와 막부를 제일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여걸인지라 창작된 소문이 상당히 많다. "남편의 바람에 화가 나서 상대를 죽이고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과 "고미즈노오 덴노에게 양위를 요구해 덴노가 분노했다."는 것도 창작이라고 여겨진다. 또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창작물에서 음모를 꾸미는 흑막 같은 느낌으로 등장할 때도 있다.

  • 에도 막부 공식 사서《도쿠가와마키(徳川實紀)》에는 그녀의 인물평으로 "카스가노츠보네의 충절에 대해서.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많더라도. 쓸데없는 것만 많이 전해져. 이익없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쓰여있다. 즉, 이 사람에 대해 전해지고 있는 소문에 대해 "거짓말로 지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 에도 막부의 공식 견해다.

  • 요즘으로 치면 카스카노츠보네는 열심히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

  • 일본 속어 중에 성격이 드세고 유난히 나이 어린 직원들(특히 여성)에게 갑질을 하는[39] 밉상 고참 여직원이나 여자 상사를 비꼬는 '오츠보네(お局)', 혹은 '오츠보네사마(お局様)'[40]라는 표현이 있는데, 아래에 언급되는 NHK 대하드라마《카스가노츠보네》방영 이후 순식간에 유행어가 되면서 원래 계급을 나타내는 말이었던 오츠보네가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내포한 속어로 정착했다고 한다. 드라마 방영 당시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현재만큼 활발하지 않았던 탓에 장기근속을 한 여성 직장인들의 사회적인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이유가 컸고, 이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가 되었다는 것. 2020년대에는 장기근속 여부보다는 개인의 성향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꼰대가 되기 쉬운 사람들의 특징과도 상당 부분 겹치는데, 불안과 열등감이 비정상적으로 심하고 인정욕구가 강하며, 자신의 지위나 입장에 집착이 강하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소위 '오츠보네'가 되기 쉽다는 것. 또한 2020년대에는 변종으로 '와카테 오츠보네(若手お局)[41]'라는 표현도 간간이 사용된다.


4. 창작물에서[편집]


  •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다보니, 많은 미디어 믹스에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오오쿠를 주제로 한 창작물에서 최종 보스격으로 등장할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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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가노츠보네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드라마 '카스가노츠보네'

* 1989년도 NHK 대하드라마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42]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오하라 레이코가 연기했는데, 궁중모략이나 암투보다는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착한 인물상으로 그려졌다.

  • 1990년에는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여제 카스가노츠보네(女帝春日局)'가 개봉했다. 배우는 토아케 유키요.

  • 2000년에 방송된 대하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는 일본의 국민 배우인 키키 키린이 연기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쇼군 등극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카스가노츠보네를 연기했다. 카스가노츠보네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담판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파일:오오쿠 마츠시타 유키.jpg

  • 창작물에서는 쇼군가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스겐인과의 암투가 자주 부각되는데, 2004년도 드라마 '오오쿠 제1장'에서 그것이 잘 드러난다. 마츠시타 유키가 연기했다.


  • 2012년 방송된 사카이 마사토타베 미카코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오오쿠~탄생 아리고토·이에미츠 편'에서도 등장한다. 아소 유미가 연기했다. 만화 오오쿠가 원작이다.

  • 타임보칸 24에서 그녀의 에피소드가 다뤄졌는데, 일본의 미디어 믹스 소재로는 꽤나 레어한 케이스.

  • 파일:C_X5EvTU0AIDctF.jpg

토귀전에서도 캐릭터로 등장한다.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바질리스크 코우가인법첩에서는 이에미츠의 유모로 들어가기 전에 남편이 자기 몰래 첩을 두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까지 낳은 걸 알고는 남편이 외출했을 때에 모자를 몰래 불러들여 죽인 후, 아무렇지도 않게 친정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파일:오오쿠 카스카노.jpg
만화 오오쿠의 카스가노츠보네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 오오쿠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상당히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 과거에 남편의 첩 오리키가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마다 장남 마사카츠를 때리는 걸 알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그녀를 죽이고 이를 계기로 스스로 남편에게 이혼을 요청하고 이에미츠의 유모로 들어간 걸로 나온다.

  • 인왕에서는 본명인 후쿠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난코보 텐카이의 제자인 음양사로 묘사된다.[43] 후속작인 인왕 2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토시미츠가 등장한다.



5. 관련 문서[편집]




6.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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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의 대표적인 여걸로서 카스가노츠보네를 나타낸 그림이다. 카스가노츠보네가 강도와 싸우는 모습을 그려냈다. 당연하지만 실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니다.[2] 나머지 둘은 야규 무네노리, 마츠다이라 노부츠나.[3] 현재의 효고현쿄토[4] 이나바 가문서에는 쿠로이 성(黑井城)이 있고, 성 아래에 사이토 후쿠가 걸터앉았다는 '오후쿠이시(御福石)'나 '오후쿠노우물(御福の生湯)', 사이토야시키(西藤屋, 지금의 흥선사 경내)를 비롯해 탄생 전설이 많다.[5]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6] 전란에 패배해 도망다니는 무사.[7] 당시 이나바 미치시게(稲葉通重, ? ~ 1618)는 장남이면서 측실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나바 본가의 가독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미노 시미즈 12,000석을 지행하여 다이묘가 되었다.[8] 마사나리에게 그녀는 후처이며 전처인 이나바 시게미치의 딸과의 사이에서 마사츠구(稲葉正勝, 1597 ~ 1634)와 만이라는 1남 1녀가 있었다.[9]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어릴 적 이름[10] 일반적으로는 일족 재흥과 자식의 출세를 기원하며 유모에 응모했다고 전해진다.[11] 대신 마사츠구는 1618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사관하여 5,000석의 하타모토가 되었다.[12] 이 설이 더 나아가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사실은 오후쿠의 아들이다."라는 음모론도 나온다. 여담 항목 참조.[13] 훗날 도쿠가와 타다나가[14] 이에미츠는 어린 시절 못생긴 얼굴로 유명했다.[15] 이 일화는 창작이라는 설이 많다.[16] 고쿄쿠는 에도 시대 쇼군의 개인방을 가지고 있던 오오쿠 여자를 말한다[17] 그 이전에도 오오쿠는 존재했으나, 이 때를 기점으로 체계가 잡히고 정비된다.[18] 쇼군 원로회의의 일원[19] 현재의 니가타현[20] 현재의 카나가와현 오다와라시[21] 막부와 조정의 통신을 담당하는 관리로 정원 2명[22] 비슷한 케이스로, 먼 훗날인 1795년에 김만덕정조를 알현할 때 명예직인 의녀반수 벼슬을 받았다.[23] 막부에 의해 요츠코와 같이 쫓겨난 자식들 중, 첫째 공주인 분치여왕(文智女王, 1619 ~ 1697)의 딸이 타카츠카사 노부코(鷹司信子, 1651 ~ 1705)인데, 이후 노부코는 아이러니하게도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정실로 들어가게된다.[24]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 이에야스 사후 여성 관료로서 카스가노츠보네와 함께 최상위를 차지하였다. 혼인 시 가마의 순서는 에이쇼인이 카스가노쿠니보다 먼저였다고 한다.[25] '막적으로 몰래 하는 것'을 말한다.[26] 마사모리는 계조모 카스가노츠보네가 유모를 맡은 이후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3대 쇼군이 되자 근습(쇼군을 가까이 섬기는 신하)에 발탁되어 사카이 시게스미와 비견되는 총신으로 순식간에 비정상적인 출세를 했다.[27] 배후에서 많은 정치를 행사해, 별명이 '비구니 쇼군'이었다. 일본사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여성으로 평가받기도 한다.[28] 스겐인이 종1위를 받기는 했지만, 이것은 사후 추증이다. 생전에 종1위를 받은 여성은 코다이인이 있다.[29] 이 곳에 카스가노츠보네의 무덤도 있다.[30]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생모[31] 이에미츠가 데려왔다는 이야기도 있다.[32]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할머니[33]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생모[34] 치요히메의 생모[35]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오오쿠 초기에는 무가식 검소와 가풍을 강조했었지만, 카스가노츠보네 사후 대행자로 오만노카타가 총책임자가 되자 가풍을 교토 귀족 풍으로 바꿔놓았던 탓도 있었다.[36]도쿄 분쿄구[37] 몸을 바쳐 공적 일에 봉사함.[38] 현재의 분쿄구 고라쿠[39] 간호사들 사이에서 관행으로 이루어지는 '태움'을 생각하면 된다.[40] 정중한 표현인 오츠보네사마 쪽이 비꼬는 뉘앙스가 조금 더 강하다. 참고로 오츠보네(오츠보네사마)는 보통 40대 ~ 50대의 고참 여직원(상사)에게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간혹 30대 후반에게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어에는 대응하는 표현이 없고, 그냥 남녀 모두에게 통용되는 꼰대로 치환할 수 있다.[41] 한국으로 치면 젊은 꼰대, 즉 '젊꼰' 정도.[42] 각본가는 오싱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각본가 하시다 스가코.[43] 그녀가 작중 텐카이의 정체의 가신의 딸이었던 것의 영향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