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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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
성명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Gaius Cassius Longinus
생몰년도
기원전 85년 ~ 기원전 42년 10월
출생지
로마 공화정 로마
이탈리아 로마
사망지
마케도니아 필리피 근처
그리스 트라키 주 필리포이
지위
불명
칭호
불명
국가
로마 공화정
가족
유니아 테르티아(부인)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장모)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장모의 부)
리비아 드루사(장모의 모)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처남)
레피두스(윗동서)[1][2]
직업
군인, 정치가
계급
불명
복무기간
기원전 54년 ~ 기원전 42년
참전
카르헤 전투(기원전53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내전
카이사르의 암살
해방자 내전
로마관직
재무관 > 법무관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기원전 1세기의 로마에서 활동한 원로원 의원이자 무장. 무장으로의 재능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으나 그의 이름을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기억하게 만든 것은 바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3월 15일의 주역이었기 때문. 다만 배신의 아이콘으로써의 이미지는 브루투스에 밀리며, 롱기누스라는 이름 자체는 본인보다는 후대의 일반 병사 1에 밀리는 등 인지도는 그렇게 좋지 못한 편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대단한 집안 출신도 아니었던만큼 그리 썩 많은 것이 알려져있지는 않다.[3]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유년기 시절 술라[4]의 아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술라의 통치에 관해 키배를 뜨면서 독재자를 싫어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다라는 기록이 남긴 하지만 <플루타크 영웅전>이 1차 사료가 아니라 이 시기로부터 100년 이상 지난 뒤에 작성된 2차 사료인만큼 신뢰도는 글쎄... 이후 로도스로 유학을 갔으며 32세였던 기원전 53년에는 크라수스와 함께 로마 공화정 시대 최악의 패배이자 흑역사로 기록된 카르헤 전투의 기병 지휘관으로 참전한다. 이때 전투 막판 패배가 자명해지자 기병 500기만을 거느리고 탈출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데, 이후 1만에 가까운 패잔병을 수습해 이 병력으로 파르티아의 역공을 막아낸다.[5] 이것만 봐도 능력면에서는 꽤나 유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셈.[6]


2.2.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편집]


기원전 50년 카이사르폼페이우스 사이의 전면전이 일어나자 당연히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폼페이우스 파에 가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형이었던 루키우스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활약한다.[7] 폼페이우스 파에서 해군을 지휘하면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웠지만 파르살루스 회전을 끝으로 내전은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난다. 물론 이후에도 잔존 세력이 북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 등지에서 이따금 반란을 일으켰지만 카시우스는 이들에게 합류하지 않고 로마로 귀환한다. 내전 시기 관용으로 유명했던 카이사르인만큼 당연히 원로원 의석도 유지됐다.


2.3.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과 그 이후[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SC_0004a.6.jpg
암살 이후 그리스에서 스스로 발행한 화폐. 왕관으로 상징된 자유를 자기자신의 머리에 씌웠다

내전이 종결된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은채 로마에서 칩거하던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암살을 주도한다.[8][9] 그렇지만 기쁨은 너무나 짧아서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권력을 쥐었던데다가 암살자들은 명분도, 재력도, 힘도 없었다. 이미 탑수스 전투 때 거물급 반 카이사르파 인사들이 대거 전사하거나 항복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에 대항할만한 권위를 지닌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키케로가 직접 나섰다면 몰랐을까. 그나마 그 키케로마저도 딱히 군사복무를 좋아하진 않았기에 군대와는 거리가 꽤 있었던 인물이었다. 키케로와 카시우스가 안토니우스도 죽였어야 됐다고 한탄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작 그 안토니우스가 중재를 하지 않았다면 카이사르 암살자들은 강경파로서 '기병대장'의 직위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들어왔던 레피두스에 의해 전부 죽은 목숨 확정이었다. 일반 시민들 역시 대놓고 '아버지를 죽인 놈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암살자들에 대한 반응은 냉랭함을 넘어서 적대 그 자체였다.

결국 안토니우스의 주선으로[10] 시리아 총독으로 쫓겨나듯이 부임한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제2차 삼두정치가 수립되고 삼두정치 세력들이 카이사르의 복수를 명분으로 곧 자신을 공격할 것이 명확해지자 브루투스와 함께 그리스에서 대규모 군대를 조직한다.

이후 그리스로 건너온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상대로 필리피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브루투스가 군사적인 면에선 별 재능이 없었던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반면[11],고지대를 장악하여 우세를 점하고 있었던 카시우스는 이판사판으로 늪지대로 병력을 투입한 안토니우스에게 패배했다.

옥타비아누스쪽은 1만 8천명, 카시우스는 9천명 정도의 손실을 입어 공화정군에 유리한 상태로 1차전이 마무리되었으나, 워낙 난전이었기에 정확한 전황 파악이 어려웠고 브루투스군도 있어야 할 장소에 없자 대패했다고 판단한 카시우스는 부하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명령하여 사실상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대중매체[편집]


단테는 신곡을 통해 그가 지옥 최하층에서 루시퍼 발 밑에 깔려 있다고 묘사한 바 있다. 덤으로 암살 동료는 루시퍼의 세 입들 중 하나에 물려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선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 처음 등장, 감추어진 존재들의 멤버로 나온다. 아야가 카이사르와 셉티미우스의 행방을 쫓던 와중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더불어 알게 됐다. 그들은 서로 같은 적을 상대한다는 걸 알게 됐고 그는 브루투스와 함께 감추어진 존재들에 가담하게 된다.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사실상 왕이 되겠다고 연설하는 카이사르의 뒤를 아야가 암살검으로 찌른 것을 시작으로 작전에 가담한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카이사르를 난도질한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이란 원정에 참여했다가 일종의 PTSD를 일으켜서 동방원정을 하려는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하는걸로 나왔다.

드라마인 HBO ROME에서는 다소 빈약해 보이는 인상의 인물로 등장. 카이사르를 죽이자고 브루투스를 계속 꼬드기며 멘탈을 흔들어놓는데 아무래도 이간질 같은 뒷공작이고 원한으로 움직이는 세르빌리아와 같이 놀다보니 사람이 다소 치졸하고 비열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의 연합군과 2차 내전이 벌어지자 브루투스와 동지로서 도피행을 같이하고 멘탈이 갈려 자신들을 도와줘야 할 동맹국 비티니아인들에게 술에 취해 시비를 거는 브루투스[12]를 뜯어말리고, 도와줄테니 로마인 여자가 원숭이와 수간을 하는 걸 보여달라는 변태 왕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끄떡이며 구걸을 해야 하는 한심한 처지에 놓인다. 거사에 끌어들이려고 브루투스의 멘탈을 그렇게 만든 건 자기자신이라서 철저히 자업자득일 뿐...결국 필리피 전투까지 함께 하지만 로마군의 상징인 테스투도 전법을 살짝 보여준 의의만 있을 뿐 이후 돌격에서 적과 맞붙자마자 가장 먼저 뻗어버리는 굴욕만 당한 끝에 전투에 패배해 치명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되어 브루투스의 눈앞에서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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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니아 세쿤다가 부인이다.[2] 아켈라우스(스승),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재무관 시절 상관)[3] 사실 개나소나 다 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년시절조차 그렇게 대단히 알려져있는 것이 없는 실정이니 롱기누스 정도야 뭐...[4] 당시 로마를 철권통치하던 독재자[5] 다시 말해 크라수스가 4만의 정규군을 갖고도 패배한 상대를 1만의 패잔병만으로 막아내 크라수스의 군사적 무능력함을 만천하에 인증해줬다.[6] 동시에 죽은 상사무능한 지휘에 얼마나 학을 뗐을지도 대강 유추할 수 있다.[7] 사실 가족들끼리 지지세력이 엇갈리는 이런 현상은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굉장히 잦았다. 당장 키케로의 아들도 카이사르 지지파였다. 물론 키케로가 기겁을 하고 그리스로 끌고 데려가긴 했지만... 거기다 키케로의 동생 또한 카이사르의 지지자였다.[8] 통상 암살계획을 주도한 것은 카시우스지만 암살 이후 암살자들의 리더로 부상한 것은 브루투스라고 얘기된다.[9] 호사가의 여담이지만 공교롭게도 이렇게 해서 카시우스는 파르티아와 두 번 인연을 맺은 셈이다. 한 번은 크라수스 패전 때 부관으로, 다른 한 번은 카이사르 암살로 원정을 무산시켜서.[10] 당시 로마의 정세는 강경파인 레피두스가 군대를 로마 외곽에 주둔시킨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가 자기 임지로 떠났고,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공석이었던 집정관 자리에 키케로의 사위였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당선되었다. 허나 돌라벨라는 안토니우스와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카이사르파였기에 암살자들에겐 여전히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더 이상 암살자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총독 직위를 주고 안토니우스가 쫓아낸 것. 이 때까지만 해도 안토니우스는 정치력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다만 끝을 보지 않고 적당히 덮어둔 것이 로마 시민에게는 좋게 보이지 않았는지 곧이어 등장한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아들 자격으로 나서자 이쪽에 지분을 뺏긴 감이 있다.[11] 옥타비아누스군이 먼저 브루투스군을 상대로 도발을 걸었고, 도발에 넘어간 브루투스군이 명령 없이 돌격했는데 상식과 달리 옥타비아누스군이 대패하고 만다. 군이 패주하고 군단기 3개를 빼앗겼을 정도의 굴욕이었다.[12] 브루투스가 명예롭게 거사했다고 횡설수설하자 현지인들이 한 사람에게 여럿이 칼을 빼든 건 비겁한 처사 아니냐는 지극히 합리적인감상을 내놓았고, 여기에 꼭지가 돈 브루투스가 그렇게 명예로우면 나랑 한판 뜨자고 길길이 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