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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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성의 지급시. 중국 7대 고도 중 하나로, 5대 10국의 5대와 북송의 수도였다. 한족의 수도로 유명한 곳이지만 북방 이민족의 정복 활동에 유린되고 정복된 한족들의 수도이기도 하다.
카이펑시와 별개로 카이펑현이 있었으나 2014년 샹푸(祥符)구가 되어 편입되었다.
위도는 약 34도로 한국의 목포, 거제, 다른 7대 고도인 뤄양, 시안과 비슷하다.
카이펑, 즉 개봉(開封)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춘추시대 이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정(鄭)나라의 장공(莊公)이 현재의 카이펑 근처에 성을 쌓고 계봉(啓封)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에서 시작한다. 전국시대 때는 기원전 364년부터 위의 수도였고, 당시 이름은 대량(大梁)이었다.[1] 황허 유역에 평야였기 때문에 시내에 많은 운하를 파서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 되었는데, 반대로 이 때문에 홍수와 외부침략, 특히 수공에 매우 약했고, 결국 진의 수공에 함락되어 위는 멸망한다. 이때 대량의 완강한 저항에 노한 진시황의 명령에 따라 철저히 파괴되어 이후 한, 위진남북조시대의 수백 년 역사에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의 주요 고대 도시 중 삼국지에 나오지 않는 거의 유일한 도시다.[2] 후한-삼국시대에는 연주 진류(陳留)군[3] 에 속했고, 현 중심지는 준의(浚儀)현에 속했다.
수나라가 만든 대운하를 당나라 때 적극 사용하면서 개봉은 번창하였다. 대운하 덕분에 수운이 발달해 상업도시로 성장했는데, 당시 지명은 변(汴)이었다. 당 멸망 이후 5대10국시대의 5대[4] 와 이를 통일한 북송은 변을 수도로 삼았다. 북송 시기 공식 명칭은 동경 개봉부[5] 였고 변은 변경(汴京), 변량(汴梁) 등의 명칭이 되어 민간에서 자주 쓰였다.[6] 그 후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 시대에는 금의 4경 중 하나로 남경 개봉부가 되었다.
북송의 엄청난 경제력으로 매우 번화했고, 야간통행금지와 상업 구역 제한이 철폐되어 불야성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으며, 상업도시답게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포청천 전설이 나올 수 있었다. 장택단의 그림 청명상하도와 맹원로의 저서 동경몽화록에 이때의 번영이 묘사된다. # 가장 번영했던 11세기의 인구는 40만에서 100만 정도로 추정되고,[7] 북방 민족의 공격에 대비해 삼중벽을 쌓았다.
다만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은 그대로여서 1127년 금의 공격으로 함락, 황제가 포로로 잡혀가는 정강의 변이 일어나 금의 영역이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금의 수도 중도(中都)의 뒤를 이은 제 2도시였고 남송과 몽골이 침략하여 위기를 맞자 선종이 수도로 삼기도 했지만 결국 애종 때 몽골군의 포위로 인한 아사, 전염병 유행으로 백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후 금나라가 무너지고 남송이 옛 수도를 되찾는가 싶더니 다시 몽골 제국에 함락되어 철저히 파괴되었다. 명나라 때 다시 재건되었지만 이자성의 난 때 명군의 수공으로 큰 피해를 입고 크게 쇠퇴하게 되었다.
원, 명 대에 대운하를 재정비하면서 카이펑이 그 경로에서 제외된 것도 쇠퇴의 큰 원인이 되었다. 원나라 이후 통일중국의 수도가 베이징으로 옮겨가면서 카이펑을 거치지 않고, 동해안을 따라 베이징과 항저우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청대 강희제가 재건을 명했지만 과도한 개발, 기후 변화[8] 와 그로 인한 잦은 홍수로 더이상 발전하기 힘들었다. 중일전쟁 때도 수공을 맞아 현재까지 과거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9] 그나마 1954년까지는 허난성의 성도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는데, 성정부도 1954년에 철도 요충지인 정저우시로 옮겨갔다.[10] 역사적으로 가장 최근에 이 도시가 언급된 일로는 문화대혁명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가 마오쩌둥에 의해 숙청당해 귀양왔다가 홍위병 의사의 치료 거부로 1969년에 사망한 사건이 있다.
대표적인 관광지인 철탑. 실제 철로 만든 것은 아니고 색깔이 비슷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역사가 길고, 송나라의 수도였으며 중국 사대기서 중 하나인 수호전의 무대가 된 곳이기 때문에 명소가 많다.
쉬란고속철도가 란카오난역, 카이펑베이역을 지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허난성의 지급시. 중국 7대 고도 중 하나로, 5대 10국의 5대와 북송의 수도였다. 한족의 수도로 유명한 곳이지만 북방 이민족의 정복 활동에 유린되고 정복된 한족들의 수도이기도 하다.
카이펑시와 별개로 카이펑현이 있었으나 2014년 샹푸(祥符)구가 되어 편입되었다.
위도는 약 34도로 한국의 목포, 거제, 다른 7대 고도인 뤄양, 시안과 비슷하다.
2. 역사[편집]
카이펑, 즉 개봉(開封)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춘추시대 이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정(鄭)나라의 장공(莊公)이 현재의 카이펑 근처에 성을 쌓고 계봉(啓封)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에서 시작한다. 전국시대 때는 기원전 364년부터 위의 수도였고, 당시 이름은 대량(大梁)이었다.[1] 황허 유역에 평야였기 때문에 시내에 많은 운하를 파서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 되었는데, 반대로 이 때문에 홍수와 외부침략, 특히 수공에 매우 약했고, 결국 진의 수공에 함락되어 위는 멸망한다. 이때 대량의 완강한 저항에 노한 진시황의 명령에 따라 철저히 파괴되어 이후 한, 위진남북조시대의 수백 년 역사에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의 주요 고대 도시 중 삼국지에 나오지 않는 거의 유일한 도시다.[2] 후한-삼국시대에는 연주 진류(陳留)군[3] 에 속했고, 현 중심지는 준의(浚儀)현에 속했다.
수나라가 만든 대운하를 당나라 때 적극 사용하면서 개봉은 번창하였다. 대운하 덕분에 수운이 발달해 상업도시로 성장했는데, 당시 지명은 변(汴)이었다. 당 멸망 이후 5대10국시대의 5대[4] 와 이를 통일한 북송은 변을 수도로 삼았다. 북송 시기 공식 명칭은 동경 개봉부[5] 였고 변은 변경(汴京), 변량(汴梁) 등의 명칭이 되어 민간에서 자주 쓰였다.[6] 그 후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 시대에는 금의 4경 중 하나로 남경 개봉부가 되었다.
북송의 엄청난 경제력으로 매우 번화했고, 야간통행금지와 상업 구역 제한이 철폐되어 불야성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으며, 상업도시답게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포청천 전설이 나올 수 있었다. 장택단의 그림 청명상하도와 맹원로의 저서 동경몽화록에 이때의 번영이 묘사된다. # 가장 번영했던 11세기의 인구는 40만에서 100만 정도로 추정되고,[7] 북방 민족의 공격에 대비해 삼중벽을 쌓았다.
다만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은 그대로여서 1127년 금의 공격으로 함락, 황제가 포로로 잡혀가는 정강의 변이 일어나 금의 영역이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금의 수도 중도(中都)의 뒤를 이은 제 2도시였고 남송과 몽골이 침략하여 위기를 맞자 선종이 수도로 삼기도 했지만 결국 애종 때 몽골군의 포위로 인한 아사, 전염병 유행으로 백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후 금나라가 무너지고 남송이 옛 수도를 되찾는가 싶더니 다시 몽골 제국에 함락되어 철저히 파괴되었다. 명나라 때 다시 재건되었지만 이자성의 난 때 명군의 수공으로 큰 피해를 입고 크게 쇠퇴하게 되었다.
원, 명 대에 대운하를 재정비하면서 카이펑이 그 경로에서 제외된 것도 쇠퇴의 큰 원인이 되었다. 원나라 이후 통일중국의 수도가 베이징으로 옮겨가면서 카이펑을 거치지 않고, 동해안을 따라 베이징과 항저우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청대 강희제가 재건을 명했지만 과도한 개발, 기후 변화[8] 와 그로 인한 잦은 홍수로 더이상 발전하기 힘들었다. 중일전쟁 때도 수공을 맞아 현재까지 과거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9] 그나마 1954년까지는 허난성의 성도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는데, 성정부도 1954년에 철도 요충지인 정저우시로 옮겨갔다.[10] 역사적으로 가장 최근에 이 도시가 언급된 일로는 문화대혁명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가 마오쩌둥에 의해 숙청당해 귀양왔다가 홍위병 의사의 치료 거부로 1969년에 사망한 사건이 있다.
3. 관광[편집]
대표적인 관광지인 철탑. 실제 철로 만든 것은 아니고 색깔이 비슷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역사가 길고, 송나라의 수도였으며 중국 사대기서 중 하나인 수호전의 무대가 된 곳이기 때문에 명소가 많다.
- 철탑 - 1049년 건립된 탑. 개보사(開寶寺)라는 절의 사리탑이었지만 탑만 남았다.
- 산수감회관 - 청나라 상인 동향 조합 건물
- 연경관 - 원나라 때 건설된 도교 사원
- 번탑 - 974년 건립된 탑. 천청사(天清寺)라는 절의 사리탑이었지만 탑만 남았다.
- 북송 동경성유적
- 카이펑 성벽 - 청나라 때 건설된 성벽
- 용정공원(용정 또는 용대) - 후주와 송나라 시기의 궁궐터이자 명나라 때 궁터에 건설된 궁전으로 1642년 홍수로 파괴되고 청나라 이후부터 다시 일부가 복원, 현대에 공원이 되었다.
- 대상국사 - 555년에 건립된 오랜 역사의 불교 사원으로 수호전에서 노지심이 나무를 뽑은 곳이다.
- 우왕대 - 우왕의 사당
- 송도어가 - 북송 상점가 재현 거리
- 청명상하원 - 청명상하도에 그려진 거리를 재현한 테마파크. 북송의 역사를 공연하는 대송동경몽화가 열린다.
- 포공사 - 포청천의 사당
- 감루
- 악비묘 - 악비의 사당
- 흥국사탑
- 장량묘 - 장량의 무덤
- 녹대강유적
4. 교통[편집]
쉬란고속철도가 란카오난역, 카이펑베이역을 지난다.
5. 기타[편집]
- 징기스칸 4에서 중국문화권 화북지역의 도시로 등장한다. 도시명은 한국어로 음역한 개봉.
- 경상북도 영천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6. 출신인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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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수도는 안읍(安邑)이었으나 위혜왕때 진과의 전쟁에서 밀려 방위가 위태로워지자 천도했다. 이때문에 맹자에서 위혜왕은 양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읍 일대는 진에 완전히 넘어간 이후 하동군이 설치된다.[2] 화려했던 전국시대를 끝으로 듣보잡 도시가 된 한단시조차 조조가 원상을 추격할 때 잠시 언급된다. [3] 헌제가 황제 즉위 이전 책봉받은 작호인 진류왕의 진류.[4] 후당 제외. 후당의 수도는 낙양이었다.[5] 서울특별시에 비유하면 동경은 특별시, 개봉부는 서울이라고 할 수 있다.[6] 다만 이는 그저 통속적으로 자주 쓰이던 것이지 개봉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다고 보긴 어렵다.[7] 일단 송나라의 역사를 다루는 사서 《송사》 85권 지리지1에 적힌 1100년대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1100년대 시점으로 개봉부 전체를 다루는 행정구역 경기로의 인구가 442,940명이었다. 다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추정치의 편차가 크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코르도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와 함께 당대 최대의 도시로 꼽힌다.[8] 이 때문에 현재 화북의 대부분 도시들이 침체되었다. 남송과 명나라를 거치며 경제와 상업의 중심이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했고, 무엇보다 화북지역은 정치의 중심지였던 만큼 원나라 이후로 명말청초의 대혼란과 신해혁명, 중일전쟁, 국공내전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전란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리면서 현대에는 원동력을 거의 잃어버린 상황으로 화북의 침체는 중국 내에서도 뿌리깊은 사회 문제로 남아있다.[9] 2015년 기준 1인당 GDP 5672달러로 허난에서도 가난한 편이다.[10] 청 말기까지는 허난성의 중심 도시였지만, 1906년 개통된 징한철도(오늘날 징광철도의 우한 이북 구간)가 이 도시가 아닌 정저우시를 지나는 바람에 전세가 역전 되었다. 카이펑보다 개발이 덜 된 정저우를 경유하는 것이 공사비가 덜 들고 노선 길이가 단축되기 때문이다. 카이펑시는 발전이 지체된 반면 정저우시는 철도의 수혜를 입어 카이펑시보다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 영향으로 허난성 정부가 정저우시로 옮겨가게 되었다. 참고로 중화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에서는 성정부 이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카이펑시가 허난성의 성도로 되어 있다.[11] 開封有個包青天, 카이펑에 포청천이라는 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