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라노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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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노미야
桂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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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
황실(皇室)
가조
하치조노미야 토시히토 친왕 (八条宮智仁親王)
종별
세습친왕가
출신지
야마시로국 교토 (山城国京都)
근거지
야마시로국 가쓰라 이궁
도쿄부
지류 분가
히로하타 가 (廣幡家)
당주
단절

1. 개요
2. 성립과 소멸
3. 역대 당주
4.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에 존재했던 세습친왕가.

에도시대에 존재했던 4개의 세습친왕가 중 2번째로 1589년에 창설되었으며, 1881년에 단절되었다.


2. 성립과 소멸[편집]


가쓰라노미야는 106대 오오기마치 덴노의 장남 사네히토(誠仁) 친왕의 6남 토시히토(智仁) 친왕을 시조로 한다. 토시히토 친왕은 당초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으나, 히데요시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히데요시로부터 저택 등을 받아 새로이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토시히토가 세운 별장이 교토에 위치한 가쓰라 이궁(桂離宮)이다. 본궁 자리는 지금의 이마테가와(今出川) 거리에 있으나, 별궁인 가쓰라리큐가 교토 하치조(八条) 거리 연선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치조노미야(八条宮)라는 미야고(궁호)를 썼다.

5대 당주 나오히토(尚仁) 친왕에게는 후계자가 없어서 112대 레이겐(霊元) 덴노의 아들 사쿠노미야(作宮)가 계승하면서 미야고를 토키와이노미야(常磐井宮)로 개칭했으나, 어린 나이로 죽어서 그의 형인 아야히토(文仁) 친왕이 계승하여 미야고를 다시 쿄코쿠노미야(京極宮)로 개칭했다. 9대 당주 킨히토(公仁) 친왕이 죽은 뒤 당주 자리가 한동안 공석이 되었다. 이후 코카쿠(光格) 덴노의 아들 타케히토(盛仁) 친왕이 10대 당주로서 이를 계승하여 미야고를 가쓰라노미야(桂宮)로 변경했으나 타케히토도 어린 나이에 죽어서 당주 자리는 또다시 공석이 된다. 이에 타케히토의 형인 120대 닌코(仁孝) 덴노의 아들 미사히토(節仁) 친왕이 당주 자리를 계승했으나 역시 어린 나이로 죽어서 또 공석이 된다. 1862년에 미사히토의 이복누나인 스미코(淑子) 내친왕이 12대 당주가 되었고, 1881년 그녀의 사망과 함께 가쓰라노미야는 단절된다.

가쓰라노미야의 후손은 2대 당주 토시타다(智忠) 친왕의 동생인 히로하타 타다유키(広幡忠幸)가 일으킨 히로하타(広幡) 가문으로 현존하나, 여기도 남계(男系) 후손은 단절된 상태이다.


3. 역대 당주[편집]


대수
당주
생몰년
1대
토시히토(智仁)[1]
1579~1629
2대
토시타다(智忠)[2]
1619~1662
3대
야스히토(穩仁)[3]
1643~1665
4대
오사히토(長仁)[4]
1655~1675
5대
나오히토(尚仁)[5]
1671~1689
6대
사쿠노미야(作宮)[6]
1689~1692
7대
아야히토(文仁)[7]
1680~1711
8대
야카히토(家仁)
1704~1768
9대
킨히토(公仁)
1733~1770
10대
타케히토(盛仁)[8]
1810~1811
11대
미사히토(節仁)[9]
1833~1836
12대
스미코(淑子)[10]
1829~1881


4. 기타[편집]


  • 다른 세습친왕가에 비해 당주가 없는 시기가 꽤 많았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당시 후계자를 제외한 다른 왕자들을 승려로 출가시키거나 신적강하시켜서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관례에서 기인한다. 이 때문에 가쓰라노미야는 황위계승권자를 확보하기 위한 예비된 자리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한국병탄 당시의 일본 총리였던 가쓰라 다로는 후에 공작(公爵)이 되었는데, 일본의 공작을 영어Prince라고 했기 때문에 무엄하게도 가쓰라는 영문표기상 'Prince Katsura'로서[11] 가쓰라노미야 친왕 행세를 하게 되었다.

  • 가쓰라노미야 궁저는 가쓰라노미야를 지은 초대 당주 토시히토(智仁) 친왕이 조성한 정원 및 연못이 완전히 남아있어서 건물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그러나 정원도 최근 궁내청 직원을 위한 숙소를 신축하기 위해 철거위기를 맞기도 했다. 간인노미야 궁저가 정비복원되어 일반공개된 것이 화제를 모으면서 가쓰라노미야 궁저도 숙소를 이설하고 복원정비하여 일반공개하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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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6대 오기마치(正親町) 덴노의 손자. 하치조노미야(八条宮)를 개창[2] 타다히토(忠仁)에서 개명. 후시미노미야처럼 독자적인 통자(通字)로 토시(智)를 쓰려고 한 걸로 보인다.[3] 108대 고미즈노오(後水尾) 덴노의 아들.[4] 111대 고사이(後西) 덴노의 아들.[5] 111대 고사이(後西) 덴노의 아들.[6] 112대 레이겐 덴노의 아들. 미야고를 토키와이노미야(常磐井宮)로 개칭. 이름이 xx노미야(○宮)인데서 알 수 있듯이 어칭호(御稱號)라고 하는 일종의 아명이다. 정식 명명을 받은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는 친왕선하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쿠노미야는 미야케를 계승하고도 정작 궁저(宮邸)에 입주한 적이 없어서 역대 당주에서 제외하는 경우도 있다.[7] 112대 레이겐 덴노의 아들. 미야고를 쿄고쿠노미야(京極宮)으로 개칭[8] 119대 고카쿠 덴노의 아들, 미야고를 가쓰라노미야(桂宮)로 개칭했다.[9] 120대 닌코 덴노의 아들[10] 120대 닌코 덴노의 딸. 왕자가 아닌 공주가 세습친왕가의 당주가 된 유일한 경우인데, 본래 간인노미야의 5대 당주인 나루히토(愛仁) 친왕과 약혼했으나 결혼하기도 전에 나루히토는 요절한데다, 본가 가쓰라노미야의 당주자리는 이미 공석이었다. 이에 1863년에 가쓰라노미야의 당주가 되는 등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았다.[11] 동아시아의 작위나 칭호를 영어로 번역할 때 통치권이 있는 왕은 king으로 번역하지만, 친왕 등 황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왕작은 prince로 번역한다. 유럽 문화권에서는 황제가 황족이나 신하에게 왕작을 내린다는 개념이 생소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