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쿠레키리시탄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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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93년

호류지 지역의 불교 기념물
法隆寺地域の仏教建造物

1993년

히메지 성
姫路城

1994년

고대 교토의 역사 기념물
古都京都の文化財(京都市、宇治市、大津市)

1995년

시라카와고고카야마
역사 마을
白川郷・五箇山の合掌造り集落

1996년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원폭 돔)

原爆ドーム

1996년

이쓰쿠시마 신사
厳島神社

1998년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
古都奈良の文化財

1999년

닛코의 신사와 사찰
日光の社寺

2000년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

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

2004년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紀伊山地の霊場と参詣道

2007년

이와미 은광과 문화 경관
石見銀山遺跡とその文化的景観

2011년

히라이즈미
: 불교 정토 사상을 대표하는 사찰, 정원, 고고 유적군

平泉 - 仏国土(浄土)を表す
建築 ・ 庭園及び考古学的遺跡群


2013년

후지 산
: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

富士山 - 信仰の対象と芸術の源泉

2014년

토미오카 제사 공장과 관련 유적지
富岡製糸場と絹産業遺産群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造船、石炭産業

2016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 모더니즘 운동에 관한 탁월한 기여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
- 近代建築運動への顕著な貢献


2017년

신이 사는 섬
무나카타 오키노시마와 관련 유산군

「神宿る島」宗像・沖ノ島と関連遺産群

2018년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산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

2019년

모즈 · 후루이치 고분군
: 고대 일본의 무덤
百舌鳥・古市古墳群 - 古代日本の墳墓群

2021년

홋카이도 · 북도호쿠의 조몬 유적군
北海道・北東北の縄文遺跡群

자연유산

1993년

야쿠시마
屋久島

1993년

시라카미 산지
白神山地

2005년

시레토코
知床

2011년

오가사와라 제도
小笠原諸島

2021년

아마미 오시마, 도쿠노시마,
오키나와섬 북부와 이리오모테
奄美大島、徳之島、沖縄島北部及び西表島





나가사키현구마모토현에 있는 관련 유적들이 2018년 일본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래 항목 참조.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적지들
영어
Hidden Christian Sites in the Nagasaki Region
일본어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
프랑스어
Sites chrétiens cachés de la région de Nagasaki
국가·위치
일본 나가사키현, 구마모토현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8년
등재기준
(iii)[1]
지정번호
1495

일본어
隠れキリシタン
1. 개요
2. 발생: 일본의 기독교 박해
3. 발견
4. 변질
5. 세계유산
6. 창작물
7.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숨은 크리스천'이라는 뜻으로 일본에도 시대 무렵, 극도의 종교 탄압에 가톨릭 신자들이 음지로 숨어들어, 사제가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비밀리에 종교생활을 지속한 것을 의미한다. 일본기독교 탄압은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신정부가 들어선 1873년(메이지 6년)에 가서야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교령을 폐지하면서 풀렸다.

한국인 일문학자들은 잠복 키리시탄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한다.숨독 키리시탄 관련 유적이 있는 나가사키 일대에서도 잠복 키리시탄(潜伏キリシタン)[2]이라고 불렀다는데, 키리시탄 관련 시설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을 계기로, 일본의 각종 미디어에서도 '잠복 키리시탄'이란 단어가 언론에 잠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1873년 이전의 박해를 받던, 역사 속의 토착 가톨릭 신앙은 한자를 써서 카쿠레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으로 표기하며, 1873년 이후에도 가톨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전의 신비주의를 유지하는 신앙은 가타가나를 써서 카쿠레키리시탄(カクレキリシタン)으로 다르게 표기한다. 물론 발음은 같다.

한때 모든 카쿠레키리시탄(의 자손)은 가톨릭으로 복귀했고, 가톨릭으로 복귀하는 것을 거부했던 하나레키리시탄은 1980년대까지 존재하다가 신자가 모두 죽자 사라졌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91년 인류학자 크리스탈 웰란이 나가사키현 고토시에 아직 존재함을 확인했다. 고토시가 워낙 외진 섬이라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존재를 숨긴 채 신앙을 유지해온 만큼, 다른 오지에서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에 복귀할 뜻이 없고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나, 젊은층이 이탈하면서 미래는 밝지 않다.[3]


2. 발생: 일본의 기독교 박해[편집]


일본에 처음 전파된 기독교 종파는 가톨릭인데, 센코쿠 시대 무렵 일본무역을 하던 스페인, 포르투갈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전래되었다. 센코쿠 시대다이묘들은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를 허가하였고, 오토모 소린이나 타카야마 우콘, 이치죠 카네사다,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구로다 조스이 등 스스로 가톨릭 신자가 된 다이묘도 있었다. 이 때 개종한 사람들을 일본에선 '키리시탄', 개종한 다이묘를 '키리시탄 다이묘'라 불렸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후, 히데요시는 각지의 다이묘들이 서양무역으로 이득을 얻어 세력을 키워 자신에게 대항하게 될까 우려하여[4] 그 첨병인 선교사를 겨냥해 바테렌(선교사) 추방령[5]을 내리고 1597년에 나가사키에서 키리시탄을 집단 처형했다. 그리고 일부 광신도들이 신토불교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신사을 습격해서 신체를 훼손하고 불상을 파괴하는 등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한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치세에 금교령(禁敎令)을 내리고,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 외국과 이 독자적으로 무역하는 것을 막고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파일:external/www.pine-o.co.jp/rakujo2.jpg
반군의 근거지였던 하라성(原城)을 공격하는 막부군.

일본에서 가톨릭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계기는 키리시탄들을 중심으로 막부의 지배에 저항하여 대봉기를 일으켰던 시마바라의 난이다. 시마바라의 난을 겪은 뒤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은 정권을 엎으려는 반란분자'라고 생각했으므로 후미에 같은 일을 벌여 키리시탄을 색출해서 죽이려 하는 등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 이러한 금교령은 에도 막부의 통치기간 내내 유지되었다.

이렇게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키리시탄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지만, 키리시탄임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장장 250년 동안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다.

이렇게 본인들은 숨는다고 숨었지만, 실은 에도 막부 역시 카쿠레키리시탄의 존재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6] 법대로 하자면 다 처형해야 하지만, 한국의 천주교도들과 달리 일본의 천주교도들은 정부에 무력 저항을 한 역사가 있으므로 한두 명이 아니라 수천 명 단위 단체가 발각되어 처형하면 제2의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그냥 사상범[7]이라는 빠져나갈 수 있는 이름으로 부르며 눈감아줬다.[8] 심지어 시마바라의 난이 이미 터졌었던 아마쿠사에서 2백 년 만에 1805년에 또 대량으로 신자가 발각되었는데 막부에서는 이들에게 강제로 후미에 및 배교 서약서를 쓰게 하고 사건을 덮어버렸다. 사실 키리시탄들이 발각된 이유는 육식 금지령을 어기고 소고기를 먹었다가 들킨 것 때문이다.

하이쿠 시인인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가운데 君が代や茂りの下の耶蘇仏(천황 치세여, 우거진 수풀 아래 기독교 불상)이라는 시가 전하는데, 잇사가 큐슈를 여행하던 중에 가톨릭 성상을 보고 읊었다고 한다.


3. 발견[편집]


파일:external/oratio.jp/ooura-720x480.jpg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개항 이후 외국인에 한해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시에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9]의 베르나르타데 프티장(Bernard-Thadée Petitjean.1829~1884) 주임신부는 일부러 성가를 부르며 다니는 등 선교를 시도했으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성당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성모상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모여살던 마을에 "프랑스 절에 성모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 사이에는 당시로부터 250여 년 전 순교한 바스챤[10]이 예언한 "7대가 지나면 흑선을 타고 파파(교황)가 보낸 콘페소르(고해신부)가 온다. 매주라도 콘삐산(고해성사)을 할 수 있다.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키리시탄의 노래를 부르며 걸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 길에서 젠쵸(외교인)를 만나면 그가 길을 양보한다."라는 전승이 있었다. 이에 예언이 실현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1865년 3월 17일 금요일, 산파 이사벨라 유리의 가족과 동네 사람 13~15명(모두 카쿠레키리시탄)이 구경을 핑계 삼아 오더니, 기도하고 있던 프티 장 신부에게 "성모님을 공경하십니까?", "결혼은 하셨습니까?", "전례력을 지키십니까?"[11]를 질문하였다. 이에 프티장 신부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제는 결혼하지 않으며, 전례력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12] 키리시탄들은 그제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님과 같습니다."라고 속삭인 후 "サンタマリアの御像はどこ? (성모 마리아님의 성상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이에 프티장 신부가 안내해 주자, 그냥 구경 온 척하던 마을 사람 전원이 갑자기 몰려들어 기도를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온 이들이 가톨릭 사제라고 확신하여 감추어 온 신앙을 드러낸 것이다.

파일:오우라 천주당의 '신자의 재발견'.jpg
오우라 천주당에 새겨진 '신자 발견'을 그린 조각

1865년 3월 17일의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신자 발견'이라고 부른다. 프티장 신부는 이를 당시 요코하마 교구장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일본 외부에서는 이런 신자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이들을 발견한 서양 신부들은 이를 기적이라고까지 말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계승한 메이지 정부 또한 키리시탄 박해를 철폐하지 않았던 때라, 이들을 굴비 엮듯 엮어서 좁은 방 안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만 물과 음식을 주었다. 대놓고 고문을 하지는 않았으나, 좁은 곳에 많은 사람을 집어넣어 미어터지는 방 안에서 더위와 질병에 시달리게 하거나 추운 곳에 유배 보내 눈 오는 바깥에 방치하는 식으로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과정에서 여러 순교자가 나왔다. 이 일로 당시 일본과 통상 중이던 서구 열강들이[13] 기독교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 조약 개정도 없다며 메이지 신정부를 압박했다. 이때 일본은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는다. 그 자들은 기독교인이라서 박해받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종교를 버린다면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해[14] 실질적으로 키리시탄 박해였음을 에둘러 시인했다.

메이지 정부 내 존황양이파 인사 가운데는 "어차피 우리는 국가신토국교로 법에 명시한 나라인데, 국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믿는 것부터가 우리 실정법 위반 아냐? 그리고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저네들이 과연 불평등조약 개정해 주겠어? 이건 그냥 우리에 대한 기 죽이기고 내정간섭이잖아!"라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고, 워낙 박해해온 세월이 길고 집요했다 보니 민중들 사이에서도 사교로 각인이 많이 된지라 "키리시탄 박해 해금? 그거 꼭 해야 되나? 위험한 거 아냐?" 정도로 거부감이 적지 않았다. 한편 오랫동안 일본 민중들 사이에 신앙해오던 불교에 대한 강제적인 폐불훼석이나 국가신토를 따르지 않는 각지 신사에 대한 강제 통폐합 과정에서 불교계나 기존 신토계의 반발에 직면했던 메이지 정부가 마침 '공공의 적' 취급 받던 키리시탄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이용해서 그들의 반발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과의 교류를 희망하던 메이지 정부에게 있어 종교의 자유를 허하라는 서구 열강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 조약 개정 안 해준다고 나오니... 결국 1873년 2월 24일 키리시탄들이 풀려났고,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교령을 폐지하고 메이지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면서 카쿠레키리시탄은 대부분은 통상적인 형태의 가톨릭으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카쿠레키리시탄의 전승이 많이 변해서 "조상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라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원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으로의 원복을 거부하고 카쿠레키리시탄으로 남는다. 이런 자들을 하나레키리시탄(離れ切支丹, 떨어져 나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다만 하나레키리시탄은 일본 내에서도 거의 천연기념물급이다.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카쿠레키리시탄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라틴어 기도문도 역시 입에서 입으로 전수하여 공동체의 원로가 세례를 베푸는 식으로 전승하였다. 그런데 구전하는 동안 라틴어 기도문의 발음이 바뀌었으니, 도대체 어디까지를 천주교 기준으로 유효한 세례라고 인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15]

만일 이들의 세례가 무효하다면 다시 해주면 그만이기에 세례가 무효화되는 것은 예민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의 세례가 교회법적으로 유효한 세례라면 또 세례를 해주는 것이 되므로 민감했던 것.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개신교든 세례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성사[16]이고, 세례를 여러 번 하는 것은 재세례파를 긍정하는 꼴이 될 수 있으므로... 프랑스 성직자들은 세례 기도문을 확인하여 라틴어 발음이 정말 심각하게 변형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가급적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받은 세례를 인정하기로 하였다.


4. 변질[편집]


이를 문화 연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흥미롭다. '원형 문화'와 '오랜 세월 동안 구전만으로 이어지면서 뒤바뀐 변형 문화'를 눈앞에서 확실하게 비교 대조해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례로서, 원형 문화와 변형 문화가 모두 확고하게 존재한다. 가톨릭은 단일성을 유지한 채로 현재까지 굳건하게 살아 있으며, 원조 가톨릭의 입장에선 카쿠레키리시탄이 변형된 집단이지만 원조와 연락이 끊긴 채로 이어진 카쿠레키리시탄(특히 하나레키리시탄)의 입장에선 원조 가톨릭과 다른 점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막부의 박해 때문에 외국인 성직자들은 순교하거나 배교[17]하며 전멸해 버렸고, 외국 선교사에게 교육받아 탄생한 일본인 성직자들이 있었지만 일본 기독교는 아직 스스로 성직자를 양성해낼 정도로 성숙한 단계는 아니었고 이들 역시 박해 때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싹 전멸당하고 말았다. 시마바라의 난의 지도자인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도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평신도였다. 게다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이 완전히 단절되고,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는 선교불허를 조건으로 제한된 무역만을 유지했기 때문에,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을 지도해줄 성직자를 모셔오기는커녕 가톨릭의 본산인 교황청과도 일절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일본인 사제와 수도자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전술했듯 사제와 수도자를 직접 양성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어차피 교황청과 연락이 닿지 않으면 정식 사제라고 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초기 일본 가톨릭의 지도자들은 박해 때문에 완전히 성직자가 사라지고 평신도들만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몇 가지 교육자료를 남기고 신자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자료들은 향후 카쿠레키리시탄이 250년간 버티는 마지막 신앙적 보루가 되었다.

결국 숨어서 살아남은 신자들은 전례를 집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이끌어줄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18][19] 자기들끼리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구전 전승만으로 종교를 유지해야 했다. 사소한 성물도 기리시탄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경 내용도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 자신은 크리스천으로 남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구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250년이 지나는 동안 신자들의 신심과는 별개로 외형상으로는 상당히 다른 독특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카쿠레키리시탄의 성가.

큰 특징으로는 쵸우가타(翁方)라는 원로격 우두머리의 아래로 비밀 조직을 유지하며 주문 등을 전파하는 밀교적인 특성을 지녔으며,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각종 상징물에 몰래 종교적인 뜻을 담았다. 특히 불교로 많이 위장하였으며, 불상불경으로 위장하여 기독교적인 문구를 집어넣거나 마경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Virgin_Mary_disguised_as_Kanon_Japan.jpg 파일: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마리아 관음 돌조각.jpg 파일: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마리아 관음 도자기.jpg
카쿠레키리시탄의 마리아 관음상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인데 위의 것들은 모두 성모 마리아이다. 맨 앞의 불상을 자세히 보면 가슴에 십자가 무늬가 있는데 이런 성상은 성모상을 불상으로 위장했다고 하여 마리아 관음(マリア観音, 마리아 간논)이라고 한다. 심지어 '삼존불' 형식 성상이 발견된 적도 있다. 당시 일본에서 원래 모양대로 성모상을 모셨다가는 "나는 키리시탄이오." 하고 자백하는 짓이라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있는 것들은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는 있는 마리아 관음인데, 본디 불교에는 송자관음(送子觀音)이라 해서 아이를 안은 관음상이 있기에 자기네 신앙을 숨기기에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이것은 가톨릭의 시각으로 보아도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모상이 현지화되는 것은 전 세계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광화문에 설치된 제대 옆에도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 모셔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이 탄생하기 거의 천 년 전에 아시아에 와서 기독교를 전래한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서는 '마리아 관음상'뿐만 아니라 '마리아 관음도'나 '예수 미륵도' 등 불화를 기반으로 한 '성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이 외우던 기도문을 오라쇼(라틴어: oratio)라고 하는데, 당시까지 전래되었던 라틴어 기도문을 음차하여 염불처럼 음률을 붙인 형태를 띠고 있다. 당연히 뜻은 제대로 모르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외웠는데, 예를 들어 성체를 의미하는 'Eucharistia(에우카리스티아)'는 구전되면서 '요우카시치'로 바뀌고, 다시 '요우가노시치'가 되었다가 '요우가시치야'로 바뀌더니 이두식 한자를 써서 八日の七夜[20]가 되어 본래의 의미를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오라쇼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현재는 일본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성호경을 예로 들면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Amen.

인 노미네 파트리스, 엣 필리이, 엣 스피리투스 상티, 아멘.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いん のうみね ぱあちりす ゑつ ひいりい ゑつ すぴりつす さんち あめん

인 노-미네 파-치리스 에츠 히-리- 에츠 스피리츠스 산치 아-멘.

으로 외우는 식이다.[21]

이들이 가톨릭으로 복귀한 직후인 1873년의 교리지도서 '세례성사'에서는 성호경을 다음과 같이 표기했다.

いん のみね ぱちりす えつ ひりい えつ すぴりとす さんち あめん

인 노미네 파치리스 에쓰 히리 에쓰 스피리토스 산치 아멘.

일본어 음가 표기의 한계를 제외하면 다시 라틴어에 가까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라틴어로망스어변해가는 모습과도 유사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성경의 내용은 두루뭉술하게 옛날 이야기처럼 구전되었다. 전승도 달라졌는데, 선악의 이분법적인 서양의 세계관과 달리 융합과 용서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아담하와가 낙원을 내쫓긴 사건이 사라졌고, 이에 따라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 원죄가 사라졌다.(...) [22]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은 것으로 되었다고 변개되었다.(참조) 또한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의 신앙대상을 데우스 사마(님)라고 불렀다.

소토메, 고토 등 나가사키계 기리시탄의 전승 서적천지시지사(天地始之事)[23]에는 기본적인 성서의 내용도 있지만, 아담의 자녀인 치코로우(ちころう)와 탄호우(たんほう)는 남매인데 결혼하여 자녀를 보았다고 하는 등[24], 일본 전통의 이자나기, 이자나미 설화가 혼합된 모습도 보인다.

카쿠레키리시탄이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굳건해보이는 문화인 종교 문화조차도 철저한 탄압 아래에서는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뒤틀릴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을 유지하려는[25] 인간 의지의 경탄스러움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세계유산[편집]


2018년, 마을 10곳, 성 터 1곳, 성당 1곳까지 총 12곳의 유적이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적지들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나가사키시 중심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낙도나 산 속 등 오지에 위치해있다.

  •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
    • 소토메(外海)의 시츠(出津) 취락 : 시츠 교회
    • 소토메(外海)의 오노(大野) 취락 : 오노 교회
  • 미나미시마바라시
    • 하라성 터(原城跡)
  • 사세보시
    • 쿠로시마(黒島) 취락 : 쿠로시마 천주당
  • 히라도시
    • 히라도시마(平戸島)의 성지와 취락 : 야스만다케(安満岳), 가스가(春日) 취락
    • 히라도시마(平戸島)의 성지와 취락 : 나카에노시마(中江ノ島)
  • 고토시
    • 히사카지마(久賀島)의 취락 : 옛 고린(旧五輪) 교회
    • 나루시마(奈留島)의 에가미(江上) 취락 : 에가미 천주당
  • 오지카초
    • 노자키지마(野崎島)의 취락 터 : 옛 노쿠비(旧野首) 교회
  • 신카미고토초
    • 카시라가시마(頭ヶ島)의 취락 : 카시라가시마 천주당
  •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시
    • 아마쿠사(天草)의 사키츠(﨑津) 취락


6. 창작물[편집]


음지에 숨어 신앙을 수백년간 유지했다는것에 감명받은 사람이 많은지 일본산 창작물에서는 많이 언급되고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의 문화가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카쿠레키리시탄 자체가 은폐된 밀교라서 세세한 부분을 파악하기 어려운 탓인지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도 카쿠레키리시탄과 이 과정에서 막부에 의해 배교하거나, 순교한 자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는 항목 참조. 아마도 카쿠레키리시탄을 다룬 모든 창작물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또한 가톨릭문학으로서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 SF 단편 만화 모음집인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에 기재된 단편들 중 2번째 편인 <경귀전(鯨鬼傳)>이 있다. 카쿠레키리시탄화 되기 직전, 그야말로 박해의 마지막을 달릴 시기 신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며, 또한 모비 딕(소설)을 오마쥬한듯한 스토리가 특징.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서는 아마쿠사식 십자처교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등장. 칸자키 카오리는 원래 여기의 프리스티스였다. 특징으로, 본디 박해를 받아 숨어들어 밀교가 되였던 것에서 기인한 일상생활의 행동이나 소품 등에 숨겨진 형태를 띠는 종교, 마법적 기술과 도구들을 쓰며, 변형되어 불완전해진 교리적 부분을 채우기 위해 여러 종교들의 기술들을 가져다가 꼬리를 물듯이 보완해서 본래의 십자교에는 없는 신을 죽이는 술법이나 다른 종교의 교리의 허를 찌르는 기술 등 독특한 기술들을 보유하는 점 등이 있다.

  •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TVA 오리지널 에피소드인 『사마바라 편』의 메인소재로 쓰였다. 카쿠레키리시탄 신자들을 이끌고 있는 비천어검류 검객 아마쿠사 쇼고가 메이지 정부를 뒤엎어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 반란을 계획중인 가운데, 이를 주인공 히무라 켄신 일행이 막는다는 내용.

  • 소니의 게임 시리즈 사이렌 역시 밀교와 신적 존재라는 점에서 이들의 존재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사무라이 참프루 에피소드 19화에서 에도시대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 키리시탄들이 등장한다. 천주교에 대한 막부의 종교탄압, 신앙심을 이용해 신자들을 모아서 불법 화약무기를 만들며 사기를 치는 사이비 키리시탄 교주 등의 내용이 개그스럽게 묘사된다.


  •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아마쿠사 보물 전설 살인사건의 주요 소재로 다뤄진다. 카루레키리시탄들이 숨긴 보물을 찾는다는 내용이며, 미유키와 김전일이 아사쿠사에 위치한 카쿠레키리시탄 박물관에서 관련 유물을 보는 장면도 나온다.



  • 일본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주인공 쥬베이[26]가 과거 막부의 무사였던 시절, 카쿠레키리시탄 마을 하나를 전멸시켜 버린 전적이 있다.

  • 모로호시 다이지로요괴헌터 시리즈의 단편 '생명의 나무' '검은 탐구자 죽은자 되살아나다'에는 카쿠레 키리시탄의 후손들[27]이 모여 사는 마을이 등장한다.


  • 요시무라 카나의 만화 무르시엘라고에도 작중 에피소드의 주요 꼭지로 등장한다.

  • 공허의 소녀에 등장하는 주요 장소인 히토가타 마을도 카쿠레키리시탄이 만든 마을이다. 물론, 게임의 장르적 특성 답게 기독교의 원형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


7.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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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일본식 발음은 '센푸쿠 키리시탄'[3] 다만 세계적으로 종교와 거리를 두는 젊은 사람들은 매우 많아지고 있다.[4] 오토모 소린은 서양 선교사의 연줄을 통해 서양으로부터 불랑기포를 들여왔고, 1586년 우스키 성(臼杵城) 농성 당시 시마즈 이에히사의 군을 상대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 심지어 소린은 불랑기포의 자체제작기술도 보유했던 듯하다. 다만 불랑기포는 일본 내에서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오토모 소린 항목 참조.[5] 바테렌(伴天連)은 포르투갈어 파드레(padre)의 고어(古語)로, 가톨릭이 일본에 전래된 당시의 선교사나 신부에 대한 호칭이었다(출처: <동아시아 역사와 일본>)[6] 1800년대 초반이 되면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다시 발각되는데, 키리시탄이 아닌 다른 이상한 종교로 간주하여 묵인하거나 배교만 시키고 풀어줬다.[7]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생각이 다른 자.[8]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도 이노우에 지쿠고노카미가 후미에를 마친 로드리고에게 "아직 고토 열도 쪽에 숨어서 자기들끼리 믿는 키리시탄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잡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뿌리가 잘린 거나 다름없으니 서서히 말라 죽을 테고, 애초부터 일본과는 맞지 않았던 기독교라는 서양의 묘목은 이 늪지와 같은 땅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고 변질되어 버릴 테니까." 하고 이죽거리는 장면이 나온다.[9] 당시에는 '후란스데라(仏蘭西寺)', 즉 프랑스 이라고 불렸다. 과거 전국시대~에도시대와 달리 19세기 일본에서의 가톨릭 포교는 동시기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리 외방전교회프랑스인 신부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곳은 일본 26위 성인 성당으로 불린다.[10] 세바스티아노라는 세례명을 받은 사람으로, 평신도 지도자였다고 전한다.[11] 이는 처음 가톨릭이 일본에 전해질 때가, 유럽에서 한창 가톨릭과 개신교가 치고 박고 할 시기였기 때문. 그래서 이 세 가지는 둘을 구별하는 단서로 카쿠레키리시탄 사이에 구전되었다. 그렇기에 카쿠레키리시탄들은 메이지 시대에 가톨릭과 함께 들어온 개신교에는 가지 않았다.[12] 정확하게 이사벨라 유리는 "지금 저희는 슬픈 시간(사순 시기)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킵니까?"라고 질문했다.[13] 미합중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대영제국 국왕 빅토리아 여왕, 덴마크 왕국 국왕 크리스티안 9세 등.[14] 그러니까 “종교 문제 때문인 건 맞는데 쟤들 기독교 아님. 어쨌든 아님”이라고.[15] 세례성사는 받는 이가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일 의지가 있고 다른 이가 물을 이마에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람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는 '형상'이 충족된다면 무조건 유효하다. 이들이 보존한 라틴어 기도문을 읽은 것이 '그렇게 말한 형상'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16]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고 박해도 심하던 곳에선 간혹 갓난아기가 세례를 두 번 받는 사고(...)가 빚어지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한 번만 해줄 수 있었다.[17] 배교한 성직자 중에선 크리스트발 페레이라(포르투갈)과 주세페 키아라(이탈리아, 당시는 통일 국가는 아니었다)가 있다. 두 사람은 배교 후 일본식 이름을 받고 기독교 물품을 검열하는 자리를 받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나온 소설이 바로 <침묵>.[18] 외국인 선교사들의 상황은 본문에 있으며 개항 이전에 배출된 마지막 일본인 사제인 고니시 만쇼1644년 순교하면서 개항 때까지 성직자가 없었다. 1709년 이탈리아 선교사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가 밀입국했지만 카쿠레키리시탄 공동체와 접촉하지 못하고 막부에 잡혀 1714년에 옥사했기에 개항 때까지 성직자가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19] 시도티 신부의 심문을 맡았던 막부의 관리 및 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시도티 신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들은 서양 소식을 기록해 모은 서양기문(西洋奇聞)이라는 책에 있다. 아라이는 시도테 신부의 심문을 마치고 막부에 보고하기를 '그냥 본국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상책이고, 평생 가둬 두는 것이 중책이고, 처형시키는 것이 하책'이라고 했다. 시도티 신부는 자신이 연금되어 있던 기리시탄 저택의 하인 부부에게 기독교를 전도하다가 투옥되어 끝내 옥사했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는 당시 시도티 신부의 도일과 체포, 아라이 하쿠세키의 심문 과정부터 끝내 시도티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내용을 다룬 단편소설 '지구의(地球儀)'를 썼다. 이 소설은 그의 단편집 <만년>에 수록되어 있다.[20] 요우카노시치야, 요우카=八日, 시치야=七夜[21] 이 외에도 많은 버전이 있다. 이 논문의 16쪽 참고. 논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어 특유의 발음으로 라틴어 기도문을 표기하고 외웠던 것 뿐만 아니라 완전 다른 기도문인데 성호경인 경우가 꽤 있다.[22] 다만 이는 가톨릭과 몇 개신교 종파에 따른 관점이며, 다른 교파에서는 비슷한 개념이 있지만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처럼 명확히 해 놓지는 않았다.[23] 기리시탄의 교리와 그 존재 의의, 신앙을 지켜야 할 이유를 적은 책[24] 원래 성경에 언급된 아담의 자녀는 그 유명한 아벨카인, 그리고 세스 뿐이다.[25] 제대로 된 성직자 없이 오랜시간을 보내오면서 형태는 변질되었어도, 사상이 변질되지 않았기 때문.[26] 와타나베 켄이 연기했다.[27] 그냥 카쿠레 키리시탄의 후손이 아니라,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최초의 인간인 '쥬스헤루'의 후손들이다. 그 때문인지 병이나 사고가 아니면 죽지 않지만, 그들의 수가 불어날 것을 우려한 신에 의해 일정한 때가 되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