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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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비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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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선수권 여자 싱글 챔피언
파일:독일 빙상연맹.jpg

아네트 푀치
(1980)

카타리나 비트
(1981~1988)


에블린 그로스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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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카타리나 비트(Katarina Witt)
국적
[[동독|

동독
display: none; display: 동독"
행정구
]]
(1965~1990)
[[독일|

독일
display: none; display: 독일"
행정구
]]
(1990~)
출생
1965년 12월 3일 (58세)
동독 베를린 슈타켄
신체
165cm
종목
피겨 스케이팅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2.2. 1978-79 시즌
2.3. 1979-80 시즌
2.4. 1980-81 시즌
2.5. 1981-82 시즌
2.6. 1982-83 시즌
2.7. 1983-84 시즌
2.8. 1984-85 시즌
2.9. 1985-86 시즌
2.10. 1986-87 시즌
2.11. 1987-88 시즌
2.12. 1993-94 시즌
3. 은퇴 이후
4. 평가
5. 주요 수상 이력
6. 기타



1. 개요[편집]


동독독일의 前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며, 현재는 독일의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동독 슈타켄(Staaken)에서 출생했는데, 이 곳은 서베를린과 접하는 동네였다. 이 동네는 원래 베를린의 일부로 베를린의 4개국 분할 당시 영국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베를린에 포함되어야 했지만 영국이 자신들이 주둔하던 가토(Gatow) 비행장을 완전히 관할하기 위해[1] 영토 교환으로 소련에게 넘겨주면서 졸지에 서베를린에서 동독으로 이관된 비운의 동네였다.

어쨌든 이 영토 조정 때문에 동독으로 편입된 슈타켄에서 태어난 카타리나는 이후 카를 마르크스 슈타트(現 켐니츠시)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고, 곧 국가 차원에서 운영하는 스포츠 영재학교(Kinder- und Jugendsportschule, KJS)에 발탁되어 동독의 체계적인 체육 프로그램을 통해 엘리트 선수로 길러졌다.

2.2. 1978-79 시즌[편집]


블루 스워드 트로피에서 우승하고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1979 동독선수권에서는 동메달을 땄고 1979 유럽선수권에서는 14위를 기록했다.

2.3. 1979-80 시즌[편집]


블루 스워드 트로피와 1980 동독선수권에서 모두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0 유럽선수권에서 13위, 1980 세계선수권에서 10위를 기록했다.

2.4. 1980-81 시즌[편집]


1980 NHK 트로피와 챌린지 컵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1 동독선수권에서는 처음으로 우승했다. 1981 유럽선수권과 1981 세계선수권에서는 모두 5위로 마쳤다.

2.5. 1981-82 시즌[편집]


블루 스워드 트로피와 챌린지 컵에서 우승했다. 1982 동독선수권에서는 2연패를 달성했다. 1982 유럽선수권과 1982 세계선수권에서는 처음으로 모두 은메달을 획득했다.[2]

2.6. 1982-83 시즌[편집]


1982 NHK 트로피에서 우승하고 1983 동독선수권에서는 3연패를 달성했다. 1983 유럽선수권에서는 첫 우승을 차지하고 1983 세계선수권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2.7. 1983-84 시즌[편집]


1983 스케이트 캐나다와 챌린지 컵에서 우승했다. 1984 동독선수권과 1984 유럽선수권에서는 각각 4연패와 2연패를 달성했다.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에서는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로잘린 섬너스와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섬너스가 프리에서 트리플 점프를 더블링으로 처리하여, 비트가 금메달을 가져갔다.[3] 1984 세계선수권에도 참가하여 첫 우승을 달성했다.

2.8. 1984-85 시즌[편집]


1985 동독선수권, 1985 유럽선수권, 1985 세계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했다.

2.9. 1985-86 시즌[편집]


1986 동독선수권과 1986 유럽선수권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1986 세계선수권에서는 데비 토머스에게 패배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2.10. 1986-87 시즌[편집]


1986 NHK 트로피에서 우승했다. 1987 동독선수권과 1987 유럽선수권에서는 7연패와 5연패를 달성했다. 1987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3번째 세계선수권 우승을 달성했다.

2.11. 1987-88 시즌[편집]


1987 NHK 트로피, 1988 동독선수권, 1988 유럽선수권에서는 6연패를 달성했다.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데비 토머스와 함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급인 일명 카르멘 전쟁으로 여자 싱글 라이벌리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 당시 카타리나는 피겨 프로그램에 최초로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을 포함시켰고 말 그대로 '연기' 그 자체를 실현한 최초의 스케이터가 되었다.[4] 그러나 컴펄서리와 쇼트에서 1위였던 토마스가 부담감을 느껴 프리에서 실수하고 다른 메달 후보였던 엘리자베스 맨리도 실수함에 따라 비트가 우승을 거머쥐었다.[5] 이로써 소냐 헤니 이후 여자 싱글 부문 두 번째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1988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한 후 였다.[6]

은퇴한 이후로는 동독 국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로 무대에서 활동했다.[7]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면서 완전한 활동의 자유를 얻었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2.12. 1993-94 시즌[편집]


이 시즌 복귀를 선언했으나, 예전만큼의 기량은 선보이지 못했다. 1994 독일선수권에서는 타나 세젠코에 이어 2위를 하고 1994 유럽선수권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는 각각 8위와 7위를 했다. 그러나 비트는 이 대회를 통해 오히려 더 큰 인기를 끌었는데 "나이가 들어도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이야기했다.

3. 은퇴 이후[편집]


아이스 쇼와 영화에도 출연하기도 했으며, 방송 진행도 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98년 플레이보이누드 화보가 실렸을 때는 메릴린 먼로 화보가 실린 창간호 이후 2번째로 전량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100만 달러의 거금을 받고 찍었다 보니, 아무래도 "스포츠마저 성 상품화에 오염된 것 아니냐?"라는 논란과 비판의 목소리도 있긴 했다. 이에 카타리나 비트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빙판 위에서의 귀엽고 공주 같은 고정된 이미지를 도발적인 이미지로 바꾸고 싶었다."라고 밝혔었다. 은퇴 이후에도 아이스 쇼에서 최고의 인기 스타였고, 프로 활동을 2008년까지 했을 정도로 피겨 스케이팅의 대중화에 관심을 가지고 가장 크게 기여한 선수이기도 하다.

4. 평가[편집]


전설적인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 중 한 명으로, 미셸 콴, 김연아 등으로 이어지는 피겨 여제 계보의 원조다. 올림픽 2회 연속 우승, 세계선수권에 4회 우승을 기록을 갖고 있으며 여자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손꼽힌다. 뛰어난 예술성을 지녔으며 기술력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8] 다만, 점프의 역동성은 동시대 선수였던 데비 토머스를 더 인정해준다.

1980년대 공산권 국가들을 비롯해서 2010년대의 김연아가 주목을 받았던 것 이상으로 전세계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는 빙상의 여제였다. 동독은 물론이고 공산권 국가에서도 동계 스포츠의 자존심이자 간판 선수였으며 "공산권 국가에서 배출한 최고의 자본주의적인 상품" 이라는 평가까지 따라다녔을 정도였고 서구권을 비롯한 세계구급으로 인기가 정말 많았던 선수였다.

지금도 피겨 스케이팅의 역사에서 카타리나 비트의 전성기는 반드시 언급된다. 그녀가 활동했던 냉전 시대에 스포츠는 자본주의공산주의 양 진영의 대리전이나 마찬가지였고,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수많은 선수들이 그녀의 아성에 도전했으나 선수로서의 역량은 물론이고 스타성으로도 당대에 그녀를 뛰어넘는 여자 싱글 선수는 사실상 아무도 없었다.

5. 주요 수상 이력[편집]


대회



올림픽
2
0
0
세계선수권
4
2
0
유럽선수권
6
1
0
합계
12
3
0

올림픽
금메달
1984 사라예보
여자 싱글
금메달
1988 캘거리
여자 싱글
세계선수권
금메달
1984 오타와
여자 싱글
금메달
1985 도쿄
여자 싱글
금메달
1987 신시내티
여자 싱글
금메달
1988 부다페스트
여자 싱글
은메달
1982 코펜하겐
여자 싱글
은메달
1986 제네바
여자 싱글
유럽선수권
금메달
1983 도르트문드
여자 싱글
금메달
1984 부다페스트
여자 싱글
금메달
1985 예테보리
여자 싱글
금메달
1986 코펜하겐
여자 싱글
금메달
1987 사라예보
여자 싱글
금메달
1988 프라하
여자 싱글
은메달
1982 리옹
여자 싱글

국제대회
대회
78–79
79–80
80–81
81–82
82–83
83–84
84–85
85–86
86–87
87–88
93–94
올림픽





1st



1st
7th
세계선수권

10th
5th
2nd
4th
1st
1st
2nd
1st
1st

유럽선수권
14th
13th
5th
2nd
1st
1st
1st
1st
1st
1st
8th
스케이트 캐나다





1st





NHK 트로피


2nd

1st



1st
1st

챌린지 컵


2nd
1st

1st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
3rd










블루 스워즈
1st
2nd

1st







국내대회
독일선수권










2nd
동독선수권
3rd
2nd
1st
1st
1st
1st
1st
1st
1st
1st


6. 기타[편집]


  • 1990년 동서독 통일 직후, 그녀가 8살 때부터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에 의해 그녀의 모든 일상생활이 감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동독에서는 그녀가 서방 세계로 망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상생활을 감시했는데, 3000쪽에 달하는 그녀의 감시 기록에는 "성관계를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끝났다."는 기록까지 있었다.[9]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동독을 나쁘고 끔찍한 나라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내가 운동선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최대한의 지원을 해준 나라이며 그에 맞춰 최상급 대우를 받으며 멋진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나라"라고 말했다.
  • 브룩 실즈를 닮은 빼어난 미모와 아직까지도 스포츠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자 운동선수 랭킹에서 지속적으로 상위권에 들 만큼 뛰어난 몸매를 가졌다. 선수 시절 키는 167cm로, 요즘 기준에서 보았을 때 피겨선수로서는 큰 키다.
  • 1985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후 대한민국을 방문해서 서울 태릉 아이스링크와 대구 스포츠센터 아이스링크에서 시범 경기를 하기도 했다. 세계선수권에서 입상한 다른 나라 선수들과 함께 내한했는데, 동독 선수 외에도 소련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도 포함되었다. 이는 냉전이 끝나기 전이던 시절 공산권 선수들 여러 명이 한꺼번에 한국을 방문하여 경기를 한 최초의 사례였다. 당시 피겨 스케이팅비인기 종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방한이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 독일테니스 선수인 보리스 베커 등 현역 시절부터[10] 은퇴 이후까지 숱한 염문설이 있었고 구애하는 남자들도 많았으나, 현재까지도 미혼이다. 아무래도 구 동독 시절부터 사생활까지 감시를 당했던 경험도 있거니와, 현역 시절부터 "결혼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없다"고 밝힐 정도로 독립심이 강한 성격인 탓도 있다. 하도 결혼을 안 해서 독일인들도 "제발 결혼 좀 하라"고 할 정도였다. 참고로 도널드 트럼프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1] 비행장 부지의 대부분은 영국 관할 지역에 속해있었으나 일부 부지가 소련 점령지인 브란덴부르크에 걸쳐져 있었다.[2] 우승자는 미국의 일레인 자약이였는데, 트리플 토룹 점프를 무려 4번이나 뛰어서 논란이 있었다. 이후 같은 트리플 점프를 2번 이상 뛰지 않고, 두 번 중에 한 번은 반드시 컴비네이션 점프로 뛰게 하는 '자약 룰'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3] 그러나 비트의 경기도 깔끔하지는 않았다. 당시 수행이 2Lz+3T, 2S, 2A, 3S+2Lo+SEQ, 2F+2A+SEQ, 3T, 2A였는데 두번(2S, 2F)의 점프를 더블로 처리하는 실수가 있었다.[4] 피겨는 점프 경연 대회가 아니라며 이러한 부분을 매우 중시했는데 이것이 후대에 개인적으로 김연아를 높게 평가하는데 크게 영향을 준 듯 하다.[5] 프리에선 맨리가 1위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구채점제 규정상, 맨리가 금메달을 따기 위해선 프리에서 자신이 1등, 비트와 토마스가 모두 3위 이하 등수를 차지해야 했는데, 맨리 1위, 비트 2위, 토머스 3위가 됨으로써 총점에서 비트가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었다. 맨리는 은메달, 토마스는 동메달을 챙겼다.[6] 여담으로 이 대회에서는 올림픽에서 입상한 선수들이 그대로 그 순위로 입상하였다.[7] 후술할 슈타지 감시 논란도 그렇고, 동독 정부는 자국의 간판급 스포츠 스타였던 비트가 서방 세계로 망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감시했다. 비트의 코치인 유타 뮐러의 딸이자 1968 그르노블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가브리엘 세이페르트를 포함하여 1980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아네트 푀치도 제대로 된 프로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소냐 헤니 이후 56년만의 올림픽 2연패’라는 조건으로 겨우 프로 활동을 약속받을 수 있었고, 그마저도 벌어들이는 수입의 대부분을 동독 정부가 가져갔다. 결국 비트에게 두번째 올림픽 도전은(선수로서의 승부욕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자유가 걸린 상황이었던 것.[8] 트리플 플립 점프를 여자 싱글 선수 최초로 랜딩했다. 그러나 1984년 올림픽 이후 트리플 살코-더블 플립 시퀀스 점프로 대체했으며, 구 채점제 시절 많은 선수들이 그랬듯이 러츠 점프의 정교함은 불분명했다.[9] 첨언하자면, 성관계 기록에 대해서는 그녀 뿐만 아니라 당시 슈타지의 감시하에 있던 동독인이었다면 모두가 피할 수 없었다.[10]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당시, 이탈리아의 세계 정상급 스키 선수인 알베르토 톰바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일이 유명하다. "비트가 금메달을 못 따면 내 금메달을 주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당연히 비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정작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기간에는 둘이 데이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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