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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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ars, Cathari, Catharism
Albigenses, Albigensians

1. 개요
2. 역사
2.1. 발생
2.2. 알비 십자군
3. 특징
3.1. 조직
3.2. 사상
3.3. 여성의 역할과 성관념
3.4. 소수설
4. 미디어


1. 개요[편집]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기독교이단. 어원은 '청정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타로스καθαρὀς = katharos'에서 유래하였다. 프랑스 왕국 남부의 알비를 중심으로 퍼졌다고 하여 '알비파'라는 별명도 있지만, 실제 중심지는 알비가 아니라 툴루즈였다고 한다. 그 외에 '바타리니파', '랑그독파' 등이라고도 불린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그룹인지, 혹은 다른 그룹인지는 아직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불가리파(불가리아파)라는 별명도 있었다.

프랑스 왕국 남부와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걸쳐서 널리 퍼졌으나, 가톨릭이 이단으로 판단하여 무력으로 카타리파 신자들을 학살해서 멸망되었다. 카타리파에 대한 공격은 십자군 전쟁과 같이 여겨졌으며, 이를 '알비파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2. 역사[편집]



2.1. 발생[편집]


파일:Spread_of_Paulicanism.png

카타리파의 사상은 동유럽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불가리아 제1제국과 동유럽에 퍼져 있던 바오로파, 보고밀파와 관련이 깊다는 추측이 있다.

처음 기록이 나타난 것은 1081년 쾰른이다. 이 무렵 독일 지역에서 카타로스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남프랑스에서 1112년에서 1120년에 걸쳐서 카타리파가 증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카타리파는 강한 반카톨릭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언되었으며 기록상으로는 1122년에 카타리파 신도의 첫번째 처형이 이루어졌다. 일시적으로 약화되기도 했지만 기세는 죽지 않고 점점 전파가 이루어졌다. 특히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교세가 확대되었으며 12세기 후반에는 남프랑스를 장악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세가 커졌다.

결국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1179년)에서 카타리파 금지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교황은 처음에는 특사를 프랑스 남부에 파견하여 카타리파 신도들을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도록 호소하였다. 하지만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프랑스 왕권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 있었고,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도 싫어한 지역 주교들도 교황 사절의 개입을 거부하였다.

카타리파가 주로 남프랑스에서 맹위를 떨친 것은 남프랑스 지역의 영주들의 직간접적인 비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카타리파가 퍼져나갈 당시 남프랑스는 분할상속의 원칙 때문에 수많은 군소영주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교황청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남프랑스의 영주들이 갖고 있던 세금 징수권의 일부를 자신들이 차지해 버렸다. 이에 대해 영주들은 당연히 큰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다들 세력이 약한데다 이들을 단결시킬 구심점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 유럽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고 있던 교황청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반카톨릭 성향을 갖고 있는 카타리파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파문이 두려워서 섣불리 카타리파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영지에서 카타리파가 퍼져나가는 것을 방관하거나 은밀히 돕는 방식으로 카타리파의 세력확산에 기여했다. 남프랑스 여러 곳에서 카파리파 교회와 모임이 만들어졌다.

특히 툴루즈 백작 레몽 6세가 유명했는데, 그는 카타리파가 아니라 정통 가톨릭 신자였지만 카타리파를 보호했으며 교황청의 원복 시도에 일절 협조하지 않았다.[1] 결국 카타리파를 소탕하기 위해 후술하는 알비 십자군이 결성되자 레몽 6세와 그의 아들 레몽 7세는 반 십자군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1100년대부터 교황청의 주도 하에 성직자와 설교자들이 카타리파의 세력이 커진 남프랑스에 들어가서 이들의 주장을 논파하는 방식으로 카타리파 신자들을 가톨릭에 복귀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영주들의 비협조 때문에 이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교황청은 카타리파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카타리파 처리문제는 정치적 사안으로 비화되었다.


2.2. 알비 십자군[편집]


1209년, 카타리파 및 카타리파를 비호하는 영주들을 모두 공격하기 위하여 십자군이 편성되었다. 이것이 알비 십자군이다. 이 십자군의 결성된 배경에는 프랑스 남부를 완전히 왕권 아래에 두고 싶어했던 당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의중이 크게 작용했는데, 이러한 프랑스 왕의 의도가 카타리파(알비파)의 확대에 고민하던 교황청의 의도와 일치하였다. 다만 당시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존 왕과 한참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카타리파 정벌에 협조할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직접 십자군에 참여하는 대신 십자군이 북프랑스를 통과할 때 약간의 도움을 주는 정도에 그쳤다. 카타리파 정벌에 적극 나선 것은 필리프 2세 다음으로 프랑스왕에 즉위한 그의 아들 루이 8세였다.

파일:Cathars_expelled.jpg
  • 카르카손 요새에서 추방당하는 카타리파 신도들(프랑스 대연대기(Grandes Chroniques de France)의 1209년도 삽화)

알비 십자군은 비교적 순조롭게 성과를 거뒀다. 남프랑스의 영지와 도시는 차례차례 점령되었고, 카타리파는 각지에서 학살, 처형되었다. 1209년 말에는 난공불락의 요새 카르카손까지 함락된다. 일시적으로 툴루즈 백작 레몽 6세가 세력을 회복하기도 했으나, 레몽 6세는 아들 레몽 7세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점령군의 폭정 때문에 민심이 악화되자 다시 영국에서 돌아와 툴루즈를 회복하고 세력을 확대하기도 했지만 레몽 6세가 죽은 뒤 레몽 7세 시기에 완전히 패배하였다.

1228년, 툴루즈가 완전히 함락되고 레몽 7세가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항복하면서 십자군 전쟁은 종결되었다. 툴루즈 백작령의 항복으로 카타리파를 비호하는 세속 영주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1229년부터 카타리파에 대한 종교재판이 실시되었다. 붙잡힌 카타리파 지도자들은 종교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영주에게 인도되어 처형되었다.

마지막 남은 카타리파의 거점은 산악 지역에 있는 몽세귀르(Montségur)의 산성 요새였다. 카타리파는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마지막 저항을 계속했다. 1244년 3월 16일, 십자군은 바스크 산악지대 출신의 병사들을 고용하여 요새를 함락시켰고, 농성하던 카타리파 신도 2백 명 이상은 화형에 처해졌다.[2]

1321년에 마지막 완덕자(Perfecti) 기욤 베리파스토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1330년 이후 이단심문소의 자료에서 카타리파의 이름은 사라졌다.

한편 십자군이 알비파의 거점인 베지에(Béziers)를 점령할 당시, 어느 병사가 알비파를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질문하자 현장에 있던 교황 특사인 아르노 아모리(Arnaud Amalric)가 남긴 말이 매우 유명하다.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Kill them all and let God sort them out.

전부 죽여라. 판단은 신께 맡겨라.


번역에 따라 '모두 죽여라. 주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백성인지 아신다, 주님께서 가려내실 것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발언은 알비 십자군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적 광기를 비판할 때 자주 인용된다. 다만 실제로 그가 이런 말을 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1303년 알비파의 근거지였던 남프랑스 지역을 방문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현지 주민들의 프랑스 왕실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높은 증오심을 직접 겪고 크게 놀랐을 만큼 알비파의 영향력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1308년부터 1323년까지 로마 교황 클레멘트 5세종교 재판관들을 남프랑스 지역으로 보내 남아있는 알비파 잔당들을 뿌리뽑아야 했고, 1350년이 지나서야 알비파가 비로소 완전히 사라졌다[3].

3. 특징[편집]



3.1. 조직[편집]


카타리파의 조직은 알기 어렵지만, 크게 완덕자(perfecti)와 일반 신도(credentes)로 나누어진다. 완덕자는 소수이며, 카타리파의 교리를 완전히 실행하여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고 노동을 하지 않으며 세속과 단절된 생활[4]을 보냈다. 이들이 지극히 금욕적이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보였기 때문에 당시 가톨릭의 부패에 염증이 난 민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완덕자는 지도자로서 신도들을 이끌었으며, 남성과 여성 모두 완덕자가 될 수 있었다.

3.2. 사상[편집]


현재 카타리파의 사상은 알기 어렵다. 카타리파는 소멸했고, 그들 자신이 남긴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의 사상은 주로 반박자들의 문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5]

전체적으로 선과 악, 신과 악마, 천국과 현세, 영혼과 육체 등을 대칭적으로 뚜렷하게 구분하는 이원론이 특징이며 선한 신의 영혼의 천국은 따로 있고 현재의 세상을 더러운 물질적 악의 세상으로 보고 있다. 영지주의적인 색채가 강했으며, 카타리파는 이를 보고밀파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카타리파는 세상을 렉스 문디(Rex Mundi)라는 악한 존재가 창조했다고 생각하였는데, 고대 영지주의와 다른 점은 세상을 창조한 악한 존재를 사탄과 동일시 하게 여겼던 것이다. 또한, 카타리파는 환생을 믿어 금욕적이고 정결한 삶을 살다 죽으면 사탄이 다스리는 더러운 물질적/육체적 현세를 벗어나 죽은 사람의 영혼이 영적인 세계인 선한 신의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6]

영지주의에서 믿듯이, 물질 세계에 갇힌 영혼은 세상을 벗어나서 영적 세계인 천국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러운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금욕 생활을 보내는 것이다. 카타리파의 수장인 비숍과 카톨릭보다는 간단하고 평등한 여러 성직자 계급이 있고 일반교인으로 완전한 금욕생활을 보내는 신도가 완덕자(Perfecti)이다. 카톨릭과는 달리 여성도 성직자가 될 수 있었다.

예배 의식으로 엔두라(endura)가 있었으며, 죽음 직전에 안락식(Consolamentum)이라는 의식을 하였다. 그 이외의 가톨릭에서 하는 7성사는 일절 거부하였다.

카타리파에게 가장 큰 죄악은 살인이었으며 따라서 육식 또한 기피하였다. 완덕자 (Perfecti) 들은 부산물이나 생식을 통해서 나오는 음식들은 무조건적으로 기피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채식주의 생활을 하였다. 고기는 생식활동의 결과이므로 먹지 않았고, 생식활동의 결과물인 다른 음식(달걀, 치즈, 버터) 역시 금지하였다.

단, 야채과일 이외에도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은 뭐든지 먹어도 좋았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해산물은 생식활동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카타리파는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손을 번식하는 것 또한 가장 기피하였다. 이는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또한 물질세계에서의 고통을 받는 것을 받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속박의 굴레를 씌우는것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고로 그들은 주로 '생식에 연결되지 않는 성행위'를 하였다.[7] 이러한 것들 때문에 고발당한 의심스러운 신도를 조사할시 "합법적으로" 결혼한 것을 확인하였을때 그 신도는 제명되었다.

카타리파에서는 '맹세'를 금지하였다.[8] 이 때문에 봉건질서를 파괴한다고 여겨져서 세속 봉건 영주들에게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일체의 상업적 행위도 금지하였다.

다만 카타리파 신도들 중에서 이러한 규율들을 정말 칼같이 다 지키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카타리파 신도들은 정상적인 성관계를 가져 아이를 낳았고, 고기와 술과 계란도 마음껏 먹고 살았다.[9] 규율들을 다 지키는 것이 어렵기도 했거니와, 가톨릭 교회 당국에 체포당해 "너는 이단인 카타리파가 아니냐?"라고 추궁을 받았을 때, "나는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고기와 술과 계란도 마음껏 먹고 삽니다. 이렇게 카타리파의 규율들을 지키지 않는 나는 결코 카타리파 신도가 아닙니다."라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럼에도 카타리파가 급속도로 세력이 확산되고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던 비결은 당시 서유럽가톨릭교황청이 세속화가 이뤄지면서 부정부패와 연관되고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해 갔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인 교회에 반발심을 가지게 된 귀족, 가톨릭의 교리상 성직자[10]가 될 수 없던[11] 여성, 그리고 라틴어를 모를 뿐만 아니라 문맹으로 인해 라틴어로 집전되는[12] 미사를 이해할 수 없던 서민층 등이 가톨릭에 비해 훨씬 교리적으로 가볍고 입문하기 쉽던 카타리파 등의 이단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서민들은 내용을 알 수 없던 성당에서의 미사보다 집에서 개인적인 예배를 보는 것을 중시하게 되면서 신앙이 올바른지에 대한 검토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보고밀파, 카타리파와 같이 이단으로 부를만한 교단들이 발생하거나 침투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게 되었다.

즉 어떻게 보면 카타리파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벌어진 알비 십자군 전쟁은 이후 벌어질 교황청 권위의 추락과 종교개혁의 서막과도 같은 사건이라고 볼수도 있다.

3.3. 여성의 역할과 성관념[편집]


카타리파는 당시 여성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이는 Perfecti(완덕자)와 같은 높은자리 또한 가톨릭과 달리 여성에게도 열려있으며, 이 Perfecti (완덕자)는 안락식(Consolamentum)이라는 의식을 주도할수도 있었다.

또한, 카타리파는 앞서 언급한 대로 환생을 믿었으며, 남자 또한 여자로써 부활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성차별도 상대적으로 당대와 달리 적은편이었다. 이는 카타리파의 믿음 중 영혼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비물질적이며 성이 없는 (Sexless)로 기록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카타리파는 여성을 동등하게 그리고 영적지도자로 오를수있었다.

고로 카타리파는 당시 가톨릭 사회가 인정하지 않던 Perfecti(완덕자)같은 자리를 약속하며 여성신도들을 모집하였다.
이 여성 완덕자들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지킬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들만의 가정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었다. 또한 여성 완덕자들은 소수지만 선교 또한 담당하였다.

여성신도들은 카타리파 공동체 내에서 신앙등을 교육받으며 밖으로 나가 아이를 배어 낳으면 그 아이 또한 신도로 교육시켰다. 여성신도들의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 카타리파 신도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된다.

하지만 카타리파는 여성을 완벽하게 동등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례로 그들의 믿음중에서는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영적세계로 가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남성이여야만 하며, 여성은 죽어서 남성으로 부활해야 구원(salvation)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여성의 성적 매력은 물질 세계를 향한 남성의 경계심을 흐트러뜨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들로 인해 카타리파의 양성평등 관념은 점차 희석되어 갔으며 여성 완덕자 또한 제외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후기 프랑스 카타리파들만의 제한된 유행이며, 이탈리아 카타리파들은 여전히 여성완덕자들이 존재하였다.

3.4. 소수설[편집]


일부 개신교계에서는 알비파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주교제와 제국교회의 성사 발전과정을 거부한 고대 교회의 후예로 본다. 카타리파는 7성사 이전의 교회 방식을 보존한 자들이며, 가톨릭이 이단으로 규정지은 보고밀파/바울파, 이탈리아북부의 발도파와 일치를 이룬 성직제도를 거부한 고대 교회의 후예였다고 보는 것이다.[13] 이는 이탈리아 개혁교회가 된 발도파 교회들, 프랑스 개혁교회 등의 입장이며 국내에서는 성서침례친우회, 일부 장로회 인사들이 주장한다.[14]완덕자의 존재와 성관계 및 음식에 관한 규율 등은 이들을 마니교로 몰려 한 왜곡이라는 것이다.[15] 이러한 관점에서는, 알비파는 '제도 교회'로 표현되는 가톨릭과 대비되는 '영의 교회'가 되며,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영의 교회'가 다시 빛을 본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개신교 내부에서도 다수설이 아니며.[16] 오히려 '고대 교회 - 알비파 - 개신교'로 연결되는 역사성을 만들어내려는 강력한 목적성을 갖춘 왜곡이다. 알비파와 비슷하게, 제도 교회를 적대시하는 영성 중심의 분파들은 교회사에서 여럿 있었는 것은 사실이나, 하나하나의 분파인 이들을 16세기 이후의 교회사에 맞춰서 '개신교 역사'로 소급시킬 이유가 전혀 없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사가들은 개신교의 시작을 마르틴 루터로,[17] 혹은 더 올려잡아도 후스파 정도로 잡지 '참 교회'가 어둠 속에서 1500년쯤 이어졌다는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18]

4. 미디어[편집]


현대에는 십자군과 보편교회에 대한 반발로서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 11eyes - 메인 빌런인 리제롯테 베르크마이스터는 원래 카타리파의 일원으로, '리젯트 벨토르'라는 이름의 순수한 소녀였다. 교황청의 베지에 대학살과 이후 겪은 막장스런 일들로 인해 세계를 저주하는 악녀가 된 것.
  • 다빈치 코드
  • 성혈과 성배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가톨릭의 이단으로 등장한다. 별개의 교황을 가지는 프라티첼리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다른 가톨릭 이단들과 달리 카타리파는 교황이 없지만 관용 기술 레벨과 무관하게 남녀평등 상속제를 실시할 수 있고 여성도 사제, 자문위원, 군사지휘관이 될 수 있어서 능력치 좋은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상 게임 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이단이기에 이단 플레이를 하는 유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단이다. 그러나 EU4에 컨버트해서 등장시키는 경우 참된 신앙 관용도 +2, 안정도 비용 -10%라는 심심한 특성을 가지는 복붙 종교가 된다. 비공식 한글패치의 구버전 번역명은 원뜻을 직역한 순결파.
  • l'Abbaye des Morts - 인디 게임 제작사 Locomalito에서 제작한 고전 플랫폼 스타일의 횡스크롤 게임으로 배경이 알비 십자군에 의해 카타리파가 학살당하던 시기이며, 주인공인 장 레이몬드는 카타리파의 수도사라는 설정.
  • 마운트 앤 블레이드에서 모드 Nova Aetas 모드에서 나온다. 스와디아 지방에서 Cathars로 나오며 거주지또한 존재하며 모든 병력들이 블랙 플레이트로 떡장을한 기병들이며 근거지 소탕은 역사대로 성을 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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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로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알비파 '문제'의 난해함은 신학적 이단 문제와 정치적 적대감 사이의 구분이 힘들었다는 것이다.[2] 다만 이때는 베지에 함락과는 다르게 개종을 한 사람들은 무사히 성을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화형을 당한 이 200명은 그러한 관대한 조건에도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불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어 죽어갔다.[3] 출처: 신의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195쪽[4] 성직자와 평신도가 각각 '선택된 자'와 '듣는 자'로 구분되었던 마니교와 유사한 요소이다.[5] 개신교계 일각에서는 카타리파가 재세례파와 유사했으나 가톨릭 측에서 왜곡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일각'이며, 개신교계에서도 대다수는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본다.[6] 사실 카타리파의 뿌리인 마니교도 환생을 믿었는데, 이는 마니교가 원래 불교의 교리를 베껴서 만들어진 종교라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니교는 아니지만, 드루즈파 같은 이슬람교의 각종 이단 종파들도 불교나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환생을 믿었는데, 정통 이슬람교에서는 그런 교리들을 당연히 이단으로 취급하여 철저하게 탄압하였다.[7] 여기에서 영어 비속어 "Bugger"가 나왔다. 카타리파가 불가리아인들의 이단종파로 알려져서 "불가르"파로도 불렸기 때문.[8]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라고 한 구절 때문이다.[9] 이러한 점은 카타리파의 뿌리인 마니교도 마찬가지였다. 마니교도 일반 신자들 중에서는 육식음주를 금지하는 규율들을 별로 지키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어느 종교의 신자라고 해서 그 종교의 규율들 모두를 진짜 칼같이 다 지키는 철두철미한 신자는 드물지 않은가?[10] 주교, 신부, 부제. 수녀는 성직자가 아니라 수도자이며, 수도자는 남녀 모두 될 수 있다(수사, 수녀).[11] "세례 받은 남자만이 (거룩한) 서품을 유효하게 받는다(가톨릭교회법 제 1024조)."[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부터 자국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고, 이전에는 모두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13] 피에르 발도는 발도파의 창시자가 아니라 이들에 합류한 리옹 일대의 집단의 지도자로 본다.[14]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기욤 파렐의 평전에서도 해당 내용이 나온다. #[15] 이러한 관점을 담은 국내에 번역되거나 출판된 도서들은 링크 참조 1,2,3 [16] 당장 위의 각주에서 소개된 세 책들만 하더라도 학술서가 아니며, 한 책은 아예 안식교의 책이다.[17] 심지어 칼빈의 경우도, 이단의 대명사로 카타리를 그의 저술에 쓰기도 했다. 소수설과 동일한 주장을 펴던 이탈리아 피에르몽의 발도파와 협력하던 기욤 파렐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18] 또한 개신교 신학에서는 가톨릭식 주교 제도가 성경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보지만, 합법성 논쟁과는 별개로 역사학적으로는 '주교 1명이 교구를 이끄는 단독지도체제'가 늦어도 2세기엔 이미 통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