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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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
Karl Barth'''

파일:Karl Barth Bundesarchiv Bild.png

출생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
사망
1968년 12월 10일 (향년 82세)
스위스 바젤
학력
마르부르크 대학교 (독일 헤센주 마르부르크 시)

종교
개신교 (장로교회)
가족
아내 넬리 호프만
딸 프랜지스카, 아들 마커스, 크리스토프, 마티아스, 한스 제이콥
서명
파일:karl_barth_sign.jpg

1. 개요
2. 생애
2.1. 어린시절 (1886-1904)
2.2. 학창시절 (1904-1911)
2.3. 자펜빌 목회시절 (1911-1921년)
2.3.1. 사회주의 운동
2.3.2.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2.3.3. 블룸하르트와의 만남
2.3.4. 결혼과 가족관계
2.3.5. 『로마서 강해』출간
2.4. 독일 대학교수 시절(1921-1935년)
2.4.1. 괴팅겐 대학시절(1921-1925)
2.4.2. 뮌스터 대학시절(1925-1930)
2.4.3. 본 대학시절(1930-1935)
2.5. 스위스 바젤 대학교수 시절(1935-1962년)
2.6. 은퇴 그리고 사망(1962-1968)
3. 바르트 신학개요
3.1. 하르낙과의 논쟁
3.2. 로마서 강해
3.4. 바르멘 신학선언
3.5. 자연신학 논쟁
3.6. 교회교의학
4. 평가
5. 저서
6. 기타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나는 흡사 어두운 밤에 종탑을 올라가는 사람 같았다.

나는 비틀대다가 난간대신 종 줄을 잡아 버렸다.

놀랍게도 커다란 종소리가 온 동네로 울려퍼졌다.

—칼 바르트, 1922년 『로마서 강해』 제2판이 출판되고 신학계에 던진 반향(反響)에 대해서 회고했을 때.[1]





Karl Barth - Epistle to the Romans

20세기 스위스의 개혁 교회 목사이자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폴 틸리히(Paul Tillich), 칼 라너(Karl Rahner) 등과 더불어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을 대표하는 이로 꼽힌다. 슐라이어마허, 리츨, 하르낙으로 대표되는 18-19세기의 신칸트주의, 자유주의 신학, 문화개신교주의를 극복하고, 20세기 하나님 말씀의 신학의 태동기를 알렸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 즉, 자기계시를 강조했다. 그래서 바르트의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 부른다. 그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신학은 스위스 종교개혁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장 칼뱅(John Calvin)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저에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에게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분기점으로 알려져 있는 『로마서』 와 2차대전 이후 독일교회의 재건을 위해 작성된 교의학인 『교회교의학』 이 있다.

그의 『로마서』가 유럽의 교회와 신학에 이르킨 반향은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2세(Pius XII)가 바르트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이후 서방신학이 낳은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라고 평가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신학을 따르는 학자들을 소위 "바르티안"이라고 부르며, 위대한 사상가들이 대게 그렇듯, "우파"와 "좌파"가 있다. "우파"의 대표적인 신학자로는 "에버하르트 융엘 (Eberhard Jüngel)"이 있으며, "좌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에는 "헬무트 골비처(Helmut Gollwitzer)",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르크바르트(Friedrich-Wilhelm Marquardt)"가 있다. 이후 정치신학을 전개한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도 크게는 바르트 좌파로 분류된다.

2. 생애[편집]



2.1. 어린시절 (1886-1904)[편집]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독일계 스위스인으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계열의 개혁교회 목사였는데 아버지를 따라서 독일의 루터교가 아니라 개혁교회의 신학을 따라갔다. 바르트의 가계는 전형적인 유럽의 목회자 집안으로 조부와 외조부 모두 목사였다.

그는 어린 시절 장난을 많이 치고 말썽도 많이 부려서 아버지에게 상당히 혼이 많이 났다고 한다. 전형적인 말썽쟁이였는데 바르트의 부모는 바르트가 10살에 바이올린을 배우게 했지만 그렇게 열정적으로 배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못한 것은 아니라서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연주까지 했다. 그는 헨델과 모차르트 곡을 연주하기 좋아했고 특히 모차르트에 대한 사랑은 그가 죽기전까지도 이어졌다. 이 시기에 바르트는 문학에 관심이 있어 시를 짓거나 낭송하기를 즐겼다. 바르트는 이때를 행복한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2.2. 학창시절 (1904-1911)[편집]


1904년부터 바르트는 신학 수업을 시작하였다.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하던 시기였다. 18세 1904년 베른 대학에서 신학을 시작했는데 당시 바르트는 칸트의 철학에 깊이 빠진다. 그의 철학을 통해서 복음은 복잡하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선명하고 누구라도 접근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품었는데, 이는 바르트의 사상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이후 1906년 독일의 베를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신학을 공부했다.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게 되는데 당시 자유주의 교의학의 대가 카프탄(J. Kaftan)과 구약학자 궁켈(H. Gunkel) 그리고 역사신학자로는 하르낙(A. Harnack)에게서 열정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다. 이후 1907년 베른 대학에서 잠시 지내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튀빙겐 대학으로 갔으나 1908년 4월에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루터교 독일 신학자인 윌리엄 헤르만(W. Hermann)을 만났는데, 『로마서 강해』1판 이후 자유주의와 단절했음에도 그의 제자로서 헤르만에게 영향을 받았다.


2.3. 자펜빌 목회시절 (1911-1921년)[편집]


1909년 바르트는 마르부르크를 떠나 목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약 2년간 부교역자로 봉사했는데 첫 사역지는 제네바에 있는 개혁교회였고 그 이후 취리히에서 목회생활을 하였다. 이후 목사고시에 통과 하였으나 자신의 양심의 문제에 부딪쳐 즉시 안수를 받지 않았다.

2.3.1. 사회주의 운동[편집]


1911년에서 1921년까지 그는 자펠빌(Safenwil)에서 목회를 하였다. 이 시기 그는 사회주의 정신으로 근로자의 입장에 서려는 목회로 당회와 자주 충돌했다. 당시 자펠빌은 공업도시로 근로자들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편물직공 55명을 조직해 공장주와 맞서도록 해서 공장주들과 상당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1911년부터 "인권과 시민의 의무" "복음과 사회주의","사회정의를 위한 예수와 운동", "1944년엔 "복음과 사회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또한 사례비 문제와 관련지어서도 당회와 다툼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런 이유들로 해서 당회는 바르트를 '붉은 목사'라고 문제시하였다. 이런 사회운동과 관련 지어서 그는 진정한 삶(real life)와 진정한 문제(real problem)이 뭔지 알게 되었다고 말할 만큼 세상과 당시 실존을 경험하였다.

2.3.2.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편집]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과 헤르만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자유주의를 신봉하였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지성인 93인이 독일 황제의 전쟁정책이 기독교 문명 보호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사건이 있었는데, 하르낙이 이것을 기초하였고, 헤르만, 제베르그, 라데등 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에 서명하였다.

바르트는 그들이 "지성인의 선언"에 서명한 것은 잘못된 신학과 철학에 근거한 것으로 보고 그들의 정치적 이념과 신학은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바르트는 더이상 그들의 입장을 따를 수 없었고 그것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종언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래는 당시 상황에 대해 바르트가 남긴 글이다. 본문을 보면 '신들의 황혼', 즉 북유럽 신화의 세계 종말인 '라그나로크'를 경험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개신교 신학자인 칼 바르트가 이 표현을 사용할 정도면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전 세계 앞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수상 베트만-홀베크(Bethmann-Hollweg)의 전쟁 결정에 찬성하는, 그야말로 처참한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성명서에 서명한 지성인들의 명단에 나의 독일인 스승들의 이름이 거의 다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르낙, 헤르만, 라데, 오이켄 등이 이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았을 때", 어떻게 종교와 학문이 "모조리 지성의 42cm 대포"로 둔갑하는지를 보았을 때, "나는 이른바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을 경험했다."

"이제 나는 독일에 있는 나의 모든 스승들, 그 위대한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전쟁 이데올로기 앞에서 실패했다고 느꼈으며, 그 실패로 인해 그들은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나락에 떨어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윤리적 실패"는 "그들의 성서 주석학과 교의학의 전제도 올바른 상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까지 철저하게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겼던 세계, 곧 성서 주석, 윤리, 교의학, 설교의 세계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당시 독일의 다른 신학자들이 주장하던 내용의 진실성도 덩달아 흔들리게 되었다.

"그 성명서를 통해,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난 모든 것을 통해 정체가 드러난 그 신학의 기초를 세우고, 그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계시와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 카를 바르트, 글의 순서대로 "W. Spoedlim 에게 쓰는 편지. 1915년 1월 4일", "뮌스터 대학교 개신교 신학과 기념앨범 자서전적 텍스트(Autobiographische Texte). 1927", "알베르트 셰델린 기념 문집 회고<Das Wort sie sollen lassen stehn ABT(Autobiographische Texte)>. 1950", "에드워드 트루나이젠과의 서신교환. 1921-1930년. 1974년 발견" 中 에서 추출해낸 그의 개인적 심경들 -


2.3.3. 블룸하르트와의 만남[편집]


하지만 그의 자유주의 신학의 포기하면서 생긴 사상적 공백이 문제였는데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 키에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도 투르나이젠을 통해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 부자를 알게 된다. 바르트는 1945년 4월에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와 만나면서 그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 C. Blumhardt)의 설교와 저서를 탐독하했다.

당시 그는 하나님 나라의 세상을 뒤흔드는 역동성과 이를 서두름 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바르트는 "승리자 예수"를 주제로 한 설교에 감동을 받았다. 블룸하르트 부자는 "예수는 승리자"(Jesus ist Sieger)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예수만이 진정한 악의 힘을 이긴다는 의미였다. 바르트는 이들을 통해서 '거룩한 계시만이 현실을 변화시킨다'고 믿게 되었다. 여기서 계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바르트 신학에서 블룸하르트의 신학을 바르트는 그의 저서였던 『교회교의학』Ⅳ/3 화해론에서 다루는데 서구에서 "예수는 승리자"라는 항목으로 길게 다뤘다. 이와같이 바르트의 신학에서 블룸하르트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바르트가 승리자 예수와 그리스도론에 집중함은 블룸하르트의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2.3.4. 결혼과 가족관계[편집]


1911년에 바르트는 넬리 호프만과 약혼하였다. 1913년에 결혼하여 딸 하나에 아들 네 명을 낳았다. (딸 프랜지스카, 아들 마커스, 크리스토프, 마티아스, 한스 제이콥)

2.3.5. 『로마서 강해』출간[편집]


이 시기 바르트는 목회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특히 설교 문제에 대해서 아주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가 설교 준비를 몇 번이고 고민하고 며칠씩 매달리기도 하였지만 그의 설교는 교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상황을 "항상 머리로 벽을 치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이후 자펠빌을 떠났다가 1935년에 다시 자펜빌읠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그 당시 목회할 시절을 회상하면서 복음을 분명하게 알고 선포하지 못했다고 하며 '자펜빌의 목사로서 실패자였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의 설교에 대한 고민은 본질적인 고민-무엇을 선포할 것인가란 답을 '성서'로 돌아가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로마서 강해』이다. 『로마서 강해』는 세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한 후 1919년 베른의 작은 출판사에서 제1판을 인쇄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1,000권 중 기증한 300부 외엔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 자신도 자신과 가까운 주위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독일에서 다시 출판된 『로마서 강해』1판은 신학계에 상당한 관심을 끌었고 이 영향으로 1921년 괴팅겐 대학으로 초청되어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일약 세계적인 신학자로 알려진 계기는 1922년 완전히 고친 『로마서 강해』2판 출판이었다. 이 책으로 인하여 새로운 신학의 장이 열렸다. 투르나이젠은 불난 줄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알아채고 뛰어나간 것 같다고 말했으며, 가톨릭 신학자 아담스(K.Adams)는 자유주의 신학자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고 표현했다. 바르트 본인마저 그가 쓴 『로마서 강해』가 던진 반향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를 비판하며 비슷한 신학적 인식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을 받아들이며 다시 재해석했고 이후 이들의 신학은 강조점에 따라서 '위기의 신학', 신학방법론에 따라선 '변증법적 신학'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신정통주의 신학'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2]

2.4. 독일 대학교수 시절(1921-1935년)[편집]


1921년부터 1935년까지 바르트가 독일의 여러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던 시절의 항목이다.

2.4.1. 괴팅겐 대학시절(1921-1925)[편집]


1921년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로 인하여 개혁신학 교수로서 교수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이때 중요한 사건은 하르낙과의 신학논쟁이었는데 1923년 하르낙이 "학문적 신학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한 15개의 질문" 이후 공개 신학논쟁이 벌어졌다.

2.4.2. 뮌스터 대학시절(1925-1930)[편집]


1925년 뮌스터 대학에서 교의학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당시 그의 첫 세미나는 "칼뱅의 강요"였다. 칼뱅에 대한 강의와 해석은 바르트가 개혁신학자로서의 위치를 명백하게 보여줬다.

2.4.3. 본 대학시절(1930-1935)[편집]


1930년 그는 본(Bonn)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였다. 이 시기를 바르트의 생애에 있어서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면 이 시기를 기점으로 나눌 수 있다. 1931년 바르트는 『안셀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내놓는다. 이 책은 어떤 다른 책보다 더 깊은 애정으로 저술했다. 일반적으로 이 책을 통하여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위한 방법론을 찾았다고 평가한다. 이는 초기 바르트는 하나님의 절대성, 일방성, 초월성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인간과의 상호성과 연결성이 약화 된다는 지적이 었었지만 후기엔 인간에 대한 긍정과 연결성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바로 『안셀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중요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1932년 그가 본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에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집필하였다. 이 저서는 1932년부터 시작하여 1968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6년 동안 집필한 8천 면, 12권에 달하는 방대한 전집이었지만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한편 1933년 독일교회는 독일의 나치 정권에 지배를 받았고,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이념이 제국교회화되었다. 그렇기에 뜻 있는 목사들이 모여 독일 고백교회(German Confessing Chruch)를 결성했다. 1934년 5월에 '바르멘 신학선언'(Barmen Theological Declaration)을 선포하는데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는 고백교회의 신학선언이었다. 이 시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브루너(E. Brunner)와 소위 자연신학 논쟁(혹은 계시논쟁)을 벌였고 이 논쟁을 통하여 바르트 신학에 중요한 특징이 내보이기도 하였다.

2.5. 스위스 바젤 대학교수 시절(1935-1962년)[편집]


1934년 12월 본 대학으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바르트가 강의를 시작할때 나치식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히틀러에 대한 충성 서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인데, 이로 인하여 교수직을 박탈당하였다. 이후 바르트는 고향인 바젤로 돌아가 바젤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이후 은퇴할때까지 큰 변화없이 생활하게 되었다. 바르트는 이때부터『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본격적으로 집필한다. 이 책은 4부 13권으로 구성된 약 9185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으나 결국 미완성이 되었다. 『교회 교의학』첫 번째 권은 1932년에 출간되었고 두 번째 책은 1938년에 출판되었다. 마지막 '세례론'은 1967년에 출판되었다.

이 시기에 바르트 사상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면 1956년 아라우(Aarau)에서 행한 "하나님의 인간성"이란 강연이었는데, 이 강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간성에 대하여 강조했다. 이는 초기 바르트가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강조한 것과는 상당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인간성'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2.6. 은퇴 그리고 사망(1962-1968)[편집]


1962년 3월 1일. 바르트는 고별강연을 끝으면 바젤 대학을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 초기엔 미국 강연도 하였으나 점점 학교에 거의 출근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을 집이나 레스토랑에 불러 세미나를 하거나 만났다. 1964년 그의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는 여러 가지 사회활동도 했지만 건강이 나빠진 이후 마지막 2년 동안은 몸이 불편하여 활동을 중단했다.

1968년 12월 8일. 바르트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고 오후는 부인 넬리와 시간을 보냈다. 늦은 오후 사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요양소에 있는 샬롯데를 방문했다. 9일에는 종일 강의를 준비했고 저녁에도 강의 원고 작성에 시간을 보냈다. 늦은 밤 친구였던 투르나이젠과 우울한 세계정세에 대해서 대화 했는데 대화 중에 걱정하지 말라면서 불름하르트의 "그(예수)가 다스릴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전화가 끝나고 그날 밤 쓰던 원고를 마치지 못하고 그는 잠자리에 들었고, 1968년 12월 10일 새벽에 향년 82세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3. 바르트 신학개요[편집]


다음의 내용은 아래의 문헌을 통하여 쓴 것임을 밝힌다.
  • 목정균, 『현대신학논쟁』(1995, 서울 : 도서출판 두란노).
  • 김동건, 『현대신학의 흐름 - 계시와 응답』(2008,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3.1. 하르낙과의 논쟁[편집]



3.2. 로마서 강해[편집]


바르트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꼽자면 바로 『로마서 강해』라고 볼 수 있다. 바르트의 사상에 있어서 표면적으로 나타낸 시기가 1915년인데 당시 그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 신학과 끝을 낸 다음에 나타난 사상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회적 행위가 동일하다'라는 생각을 버리고 성서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단 사상이 나오게 된다. 성서의 길은 종교의 길과 다르고 성서가 보여주는 세계는 인간의 종교가 아닌 위대한 세계에 대해서 말했다.

바르트가 후술하기를 이 책은 원래 출판을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라, 트루나이젠을 비롯한 자신의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의 모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이것은 한 권의 책으로 구체화되었고, 결국 책으로 출간되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성서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간의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사상이다. 성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야기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알려준다. 어떻게 우리가 그에게 도달하는 길을 발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도달하는 길을 찾으셨고 또 발견하셨는가 함이다.[3]

바르트가 이때 발견한 성서의 세계는 그에게 완전히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바르트는 성서에서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발견했다. 이러한 바르트의 사상은 1919년 『로마서 강해』1판으로 나오게 되었고, 여기서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한 자유주의와 개인적인 도덕을 신뢰한 경건주의 모두를 비판했다. 인간의 죄와 죄성에 대해서 인간의 경건과 성취에 대해서 심한 회의를 보였다. 『로마서 강해』1판은 그의 변증법적 신학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부정과 긍정을 통한 인식도 내보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확장하고 역사 속에서 완성된다. 『로마서 강해』2판은 1판에서 내보인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를 완전히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바르트는 이 『로마서 강해』2판을 통해서 신학적 거장이 되었다.

3.3. 안셀무스 연구[편집]


바르트에 따르면, 안셀무스는 신앙보다 더 중요하고 신앙으로부터 독립적이며, 신앙의 <신빙성>을 제시할 어떤 종류의 <철학적 신학(신론)>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신학자의 사명은 신앙 조항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지 않고, 바르트가 말하는 것처럼 신앙 조항의 <어떻게>(신앙 조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데 있다. 달리 말해 이성은 신앙의 맥락 안에서 항상 신앙을 전제로 한 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의 말처럼, <신앙(교회의 신경)을 부인하고 의문시하는 신학이란 그 자체로 ‘믿을 만하지도 못하고’, ‘과학적이지도 않다’.>[4]

하느님에 대한 유일한 지식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받은 신앙의 지식이고, 따라서 은총의 도움을 받지 못한 이성은 신학적인 영역에서 아무런 힘도 없다. <안셀무스가 볼 때 올바른 지식은 그보다 하느님의 은총 — 올바른 지식보다 선행하거나 함께 작용하는 — 에 따라 규정되어 있다. 이런 일반적인 고찰과 더불어 이 은총이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추구되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를 위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능력은 인간 이성 — 자기 자신에 근거해서 작용하고 있는 — 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이성에게 부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5]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모놀로기온 & 프로스로기온』Monologion & Prosologion, 박승찬 역주, 아카넷, 2012 2판, 역자 해제

바르트의 사상에 있어서 후기 바르트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1931년에 그가 쓴 『안셀무스[6]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봐야 한다. 안셀무스가 신의 존재 증명을 논한 『프로스로기온』(Proslogion)에 대한 연구를 통한 연구결과로서,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인 『교회교의학』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키포인트이자 자신의 전 사상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라고 말했다.
바르트는 안셀무스 연구를 통해 신앙이 어떻게 비합리적이지 않고 합리적 성격을 가지며 신과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토대를 놓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종교적 지식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 않다는 확신 위에 서었는데, 이를 토대로 신학은 성서의 다양한 개념과 상징적 표현을 잘 해석하여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과 같은 범주에서 '합리성'으로 인식 되는 것을 동의하지 못했다. 바로 이 합리성에 대하여 동의하지 못한 그는 신앙은 정말 불합리 한 것이며 이해를 거부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고 『안셀무스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통하여 대답을 내놓게 되었다. 이 책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기존의 생각을 고수한다. 그 이유는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들려지는 메시지이다.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선포될 때 들려질 수 있는 합리적 성격을 내포한다. 즉,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인격과 들려지는 메시지의 이중적인 성격이 있다. 따라서 메시지는 선포되고 인식될 때 합리성을 띤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궁극적인 진리, 즉 '진리의 합리성'으로 보았다. 다른 모든 합리성은 진리의 합리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된다고 봤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신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진리가 계시되면 인간은 합리성을 가지고 신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말씀에 대한 인식 능력을 창조하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인간에게 계시가 되면 인간에 의하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인간은 결코 수동적이고 약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신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알릴 때 이 대상이 다른 것으로 계시될 수 없다. 인식의 필연성은 인식의 대상을 다르게 인식 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계시에 의해 신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면 그 대상에 대해 다른 인식이 불가능하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합리적' 지식은 신앙의 대상으로 오는 것이며, 결구 이건 궁극적 진리인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이 인식될 수 있도록 자신을 허락하지 않으면 신앙은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해를 추구한다.

신학은 신앙과 연관돼서 신학은 신앙이 일으킨 이해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신상에 내재된 말씀을 인간에게 새롭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신앙은 모호하거나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는 구체적 사건이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신앙은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고 신비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는 말씀이 들려지고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앙은 결코 비논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일 수 없다. 신앙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인식적이고 개념적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지식의 근원으로서 이해의 대상으로 허락될때 진정한 이해인 신앙이 가능하다고 봤다. 신학의 과제는 우리 지식에 주어진 것을 통해 더 확고한 신앙으로 나아간다고 여겼다. 안셀무스 연구를 통하여 바르는 신앙과 이성의 간격에 교두보를 놓았고 변증법적 사고에서 교회 교의학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3.4. 바르멘 신학선언[편집]



3.5. 자연신학 논쟁[편집]



3.6. 교회교의학[편집]




4. 평가[편집]


바르트는 종교개혁가들, 특히 루터의 순수한 가르침을 상기하며 복음주의 신학[7]

에 구원 활동을 하느님의 독점적인 업적과 구원을 오직 은총에 의해, 인간에 대한 선택과 예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강하게 강조했다. 인간은 비참한 죄인이었고 동시에 언제까지나 그런 죄인으로 남아 있다. 이는 개신교 고유의 개념이다. 이렇게 해서 바르트는 개신교 사상을 가톨릭 사상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구별하는 흐름으로 새롭게 지적했다. 칼 바르트 신학의 본질적인 순수함을 고려해 볼 때, 그의 신학적 건축은 그의 모든 작품과 생애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매력적이고 경이롭다. 정말이지 그것은 모범적이고 교훈적이다.

...20세기 후반의 신학에 대한, 특히 개신교 세계에 대한 바르트의 영향은 지대했다. 본회퍼가 짧은 시기 동안 영향을 미친 것을 제외한다면, 그의 신학은 오늘날까지도 확실하게 지배적인 노선을 장악하고 있다. 많은 분야에서 강한 호감을 불러일으킨 가톨릭 세계에서도 그의 영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Battista Mondin,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a 제4권, 이재룡·윤주현·안소근 옮김, 가톨릭출판사, 2020, pp.588-590

바르트의 신학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는 대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개신교 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20세기 개신교 신학은 그의 로마서에 관한 주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가톨릭에서도 매우 선호하는 개신교 신학자이다. 실제로 바르트는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과 깊게 교류하였으며,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바르트에 대한 존경을 표한 바 있다.

Q: 교황님은 제자들과 함께 스위스의 개신교 신학자 카를 바르트를[8]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A: 저는 비록 바르트 교수님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쇤겐 신부님에 의해서 이미 그분의 팬이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성장하게 한 신학의 스승 가운데 한 명입니다. 바르트 교수님과의 만남은 그분의 절친한 친구였던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여행도 했습니다. 그분이 매우 연로해서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분을 만난 것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Q: 교황님은 그를 매우 존경했나요?

A: 네,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분도 저를 좋아했습니다. 2011년 독일 여행 때 학장인 슈나이더 신부님이 말하기를, 바르트 교수님이 항상 학생들에게 "라칭거의 책을 읽어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이야기(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페타 제발트 대담 및 정리,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옮김

재미있는 건, 바르트, 발타사르, 베네딕토 16세 모두 에큐메니컬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바르트는 때때로 가톨릭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고, 베네딕토 16세는 일반인에게도 보수적인 성향이 널리 알려져있으며, 발타사르도 진보적인 신학이랑은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여행도 다닌 사이인 것.

가톨릭적인 것das Katholische과 개신교적인 것das Evangelische은 양자 자신이 가장 철저하게 자기 자신일 경우에만 서로 화해할 수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가 시종일관 개신교 신학의 진수를 구현하였기 때문에 가톨릭에도 가장 가깝게 다가온다는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의 의견에 나는 동의한다.

Hans Küng, "Erkämpfte Freiheit: Erinnerungem", (뮌헨, 2004), 168.[9]


5. 저서[편집]


국내 출판된 저서 기준.

  • 로마서 강해
  • 교회교의학 Ⅰ/1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Ⅰ/2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Ⅱ/1 하나님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Ⅱ/2 하나님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Ⅲ/1 창조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Ⅲ/2 창조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Ⅲ/3 창조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Ⅲ/4 창조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Ⅳ/1 화해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Ⅳ/2 화해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Ⅳ/3-1 화해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Ⅳ/3-2 화해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Ⅳ/4 화해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개론
  • 개신교신학 입문
  • 자연신학 - 에밀 브루너의 자연과 은혜와 칼 바르트의 아니오
  • 교의학 개요 - 사도신경에 담긴 기독교 진리
  • 칼 바르트 기도 - 종교개혁 교리문답에 따른 주기도 해설
  • 울프강 폰 모차르트
  • 설교자의 기도
  • 하나님의 인간성
  • 사도신경 해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6. 기타[편집]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모차르트 애호가였다. '팬'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고, 거의 '오타쿠'에 가깝다 할 정도로 엄청나게 좋아했다. 특히 압권은 다음 진술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 아무리 찬양해도 모자랄 전축의 발명 덕택에 - 매일 아침을 만사 제쳐놓고 우선 모차르트를 듣는 일로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 물론 그 사이에 신문을 읽기도 하지만 - 교의신학에 몰두합니다. 그뿐이랴, 이것도 고백해야겠습니다. 언젠가 내가 하늘 나라에 가게 된다면, 나는 거기서 누구보다도 먼저 모차르트 선생을 찾아뵐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루터, 칼빈, 슐라이어마허 선생들은 다음 차례입니다.

-카를 바르트,《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1997, p.11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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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 신학자 아담스(K.Adams)는 자유주의 신학자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자유주의 신학에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고 볼 수 있었다.[2] 그러나 '신정통주의'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주로 쓰이고 유럽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용어다. 무엇보다 바르트를 '신정통주의'라고 하는 것은 약간의 얕잡아 보는 관점을 내재한다.[3] K.Barth,『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서울 : 기독교서회, 1998)[4] (책 속 주석)K. Barth, Fides quaerens intellectum (engl. tr.), p.37.[5] (책 속 주석) Ibid., p.57.[6] '안셀름'이라고도 한다.[7] 발췌자 주석: 영미권 신학과는 달리 유럽의 신학에서 '복음주의'란 개신교 내부의 특정한 신학적 조류가 아니며, 그냥 개신교를 뜻하는 단어다.[8] 카를 바르트(Karl Barth)[9] 번역 출처: 이규성. 「개신교 신학의 가톨릭적 수용 가능성: 칼 바르트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의 신학적 대화를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