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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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ld_cathedral_of_Kaliningrad_in_Russia.jpg
파일:external/a2ua.com/kaliningrad-001.jpg
칼리닌그라드 시
Калининград
깃발
파일:Flag of the City of Kaliningrad.png
문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px-Coat_of_arms_of_Kaliningrad.svg.png
인구
493,256 (2021)
면적
224.7 km²
인구밀도
2,195명/km²
시간대
UTC+2




1. 개요
2. 명칭
3. 역사
3.1. 독일령 시절
3.2. 냉전
3.3. 현재
4. 독일과 칼리닌그라드
5. 관광
6. 기타



1. 개요[편집]


칼리닌그라드 시는 칼리닌그라드 주의 주도이며, 발트 해에 면한 항구 도시이다. 인구는 2010년 통계에 따르면 431,402명이다. 러시아 본토와는 떨어져 있는 월경지로서, 북쪽과 동쪽으로는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폴란드, 서쪽으로는 발트해에 접해 있다.[1]

역사적으로는 독일을 최초로 통일한 독일 제국의 주역이자 전신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의 두 주역 중 하나인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고,[2]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이며 동프로이센주의 주도로 독일 역사에서 나름 빼놓을 수 없는 도시 중 하나였다.

나치 독일의 패전 이후로 소련에 할양된 초창기에는 독일어 이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유래한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라 불렸다. 이후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한국에서는 레온하르트 오일러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로 의외의 인지도가 있다. 이 곳도 2차 대전 이전에는 독일인이 다수였지만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 소련이 이 도시를 차지하면서 독일인은 거의 쫓겨나고 러시아인 이주민이 빈 도시를 채웠다.

러시아가 보유한 몇 안 되는 부동항이자 군사적 요충지로서 소련 시절 이곳은 비밀도시였다. 선박 관련 중공업이 발전했으며 그 외에도 어류 가공업 등의 경공업이 조금 있다. 또한 해군의 발트 함대 사령부가 위치한다.

2. 명칭[편집]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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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Калинингра́д (Kaliningrád)
Кёнигсберг (Kjónigsberg)
독일어
Kaliningrad, Königsberg
폴란드어
Królewiec[1]
리투아니아어
Karaliaučius

지명은 러시아어로 '미하일 칼리닌의 도시'를 뜻하며 과거 명칭은 독일어로 '왕의 산'을 뜻하는 쾨니히스베르크였다.[3] 칼리닌그라드뿐만 아니라 칼리닌그라드 주 내의 모든 역사적 독일어 지명은 오늘날 러시아어 지명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면 인스터부르크는 체르냐홉스크, 굼비넨은 구세프, 틸지트는 소베츠크로 개명되었다.[4]

비슷하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할양된 동프로이센의 남부 지역은 그나마 원래 이름을 폴란드어 표기와 발음으로 바꾼 경우가 많지만, 러시아에 할양된 북부 동프로이센(칼리닌그라드 주)만큼은 완전히 뜬금없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앞으로도 원래 이름을 되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리투아니아에 할양된 메멜 역시 클라이페다라는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다만 클라이페다라는 이름은 리투아니아에서 15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절부터 사용한 역사적 지명이지만 칼리닌그라드 지역은 거의 2차 대전 이후에 아예 새로 지은 이름이다.

러시아가 스웨덴어와 독일어의 혼합 지명인 상트페테르부르크처럼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란 독일어식에 가까운 지명을 복구하여 그 이름 그대로 사용하거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한때 러시아어식인 페트로그라드(Петроград)로 불렀던 경우처럼 러시아어로 번역된 '코롤레베츠(Королевец)'와 같은 식으로 부를 수도 있을텐데 영유권 문제 때문인지 공식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곳과는 경우가 다르지만, 원래 이름없는 황무지였다가 소련 시절에 와서야 도시로 개발된 곳도 이런 식으로 공산당스러운 이름이 남은 사례가 몇몇 있다.[5]


3. 역사[편집]



3.1. 독일령 시절[편집]


12세기 이전에는 서발트계 종족이 살던 지역이었지만 13세기 튜튼기사단이 칼리닌그라드를 비롯한 발트해 연안을 정복하면서 독일인들이 대거 칼리닌그라드로 이주하고 발트계 종족들의 독일화가 진행되었다.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의 중심지 쾨니히스베르크 그 주변 지역이었으며 프로이센 공국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통합해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되면서 수도는 베를린으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동프로이센의 주도이자 프로이센의 고도로서 독일인에게 상징적인 도시로 남았다. 독일 제국(제2제국)이 프로이센 왕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나라인만큼 근대 독일의 발상지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독일 통일을 주도한 프로이센 왕국의 실질적 거점은 베를린이었고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도 프로이센 공국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후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굉장히 위험한 해석이다.[6]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 학문의 메카였고 수많은 학자들이 이 도시에 거주했다. 특히 이 곳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저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이다. 칸트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생전에 이 도시의 반경 150km 밖으로 나간 적이 없고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오데르-나이세 선 이서로 강제된 현 독일 영토를 밟은 적이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전의 역사는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동프로이센 공세 문서를 참고.

3.2. 냉전[편집]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과 함께 독일인은 추방되거나 비참하게 죽었고, 대신 러시아인들이 대거 이주해 들어왔다. 1945년 이 지역은 소비에트 연방의 최대 구성국인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땅을 이에 인접한 소련 구성국인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하려고 했다. 실제로 병합됐다면 지금쯤 칼리닌그라드는 리투아니아 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의 공산당 지도자 안타나스 스녜츠쿠스(Antanas Sniečkus)가 거절해서 무산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스녜츠쿠스는 이 곳을 리투아니아로 합병하면 리투아니아 인구 가운데서 러시아계의 비율이 너무 높아져 버리는 상황을 꺼려서 거절했다고 한다.[7]

어쨌든 1946년 4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속 쿄닉스베르크주(Кёнигсбергская область)가 설치되었으며 도시 이름도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였으나,[8] 동년 7월 미하일 칼리닌(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이 사망한 후, 도시와 주 모두 그의 이름을 따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3.3. 현재[편집]


소련의 서단에 위치한 이 지역은 냉전 시대에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으며, 따라서 비밀도시 중 하나였다. 이후 소련이 해체되고 리투아니아·라트비아·벨라루스가 독립한 후 칼리닌그라드 주는 러시아의 일부로 남아 본토와 떨어진 기묘한 존재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러시아 본토와 칼리닌그라드를 국내선 항공으로 이동하면 상관없지만 육로로 오가려면 리투아니아·라트비아 또는 리투아니아·벨라루스를 거쳐야 한다. 소련 시절에도 러시아의 월경지이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당시에는 소련 안에 있는 행정구역들 중의 월경지였으므로, 주권국가 소련 전체로 봤을 땐 월경지가 아니었고, 지금의 리투아니아 땅을 거치는 국내 이동도 자유로웠는데 이제는 러시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벨라루스가 각각 독립국이 되어서 미묘해졌다. 그만큼 칼리닌그라드의 경제 상황은 좋지 못하다.[9]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부차 학살을 저지, 규탄하기 위한 제재의 일환으로 현재 통신선을 포함한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된 상태이다.#


4. 독일과 칼리닌그라드[편집]


원래 독일령이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독일이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서독동독과의 통일을 앞두고 결국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도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양차대전을 일으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해야 했고 또한 오데르-나이세 선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동독과의 통일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영유권 주장을 과감히 포기했다. 프로이센 문서 참조.

게다가 2차 대전 패전으로 옛 독일 동부를 폴란드와 러시아에 할양했는데 이 지역은 위치상 독일에서도 육상으로 직접 접근할 수 없으며[10], 동프로이센의 남부 지역은 폴란드 영토가 된 지 오래인데 만일 이 곳을 되찾으면 다음 순서는 동프로이센의 남부 지역, 슐레지엔, 포메른 등 폴란드 내 구 독일령도 위태해지기 때문에 폴란드가 독일의 통일을 방해할 충분한 사유가 된다. 당장 2차 대전 개전도 비슷한 일(단치히 회랑 문제) 때문에 벌어져서 폴란드가 멸망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지역 영유권을 완전히 포기한 독일 정부와는 달리 독일 민간 차원에서는 여전히 독일의 경제/정치/문화적 영향력 유지를 바라는 사람들이 적잖다. 실제로도 칼리닌그라드에 독일 영사관을 별도로 설치하거나 BMW 공장[11]을 유치해서 경제 활성화에 기여한다거나 프로이센-독일 제국 시절의 건축물들을 유지 보수하는 등의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쾨니히스베르크 성처럼 잔해만 남았던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도 철거 예정이었지만 칼리닌그라드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반대와 독일 기업들의 제의로 재건되었다. 현지 거주 독일인들이야 숫자가 얼마 안 되고 가난한 편이니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독일 기업들의 제의를 무시하기에는 제의에 따라오는 조건이 좋았다.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의 정보와 설계도를 러시아에 넘긴 것도 다름 아닌 독일 정부였고 독일 기업들이 재건에 크게 관여했다.[12] 그 밖에도 칼리닌그라드 주의 대표 맥주 오스트마르크는 쾨니히스베르크 시절 맥주 브랜드명과 독일식 맥주순수령에 따른 레시피 그대로 부활하여 절찬리에 현지에서 판매한다.


5. 관광[편집]


2014년부터 한국인들이 러시아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게 되면서, 동유럽을 여행할 때 쉽게 들를 수 있게 되었다.[13] 폴란드 북부 그단스크나 리투아니아에서 정기 국제 버스를 이용하여 입국할 수 있는데, 입국 심사가 무슨 이스라엘만큼 빡세다. 만약 육로로 여행할 계획이라면, 운이 좋으면 그냥 빨리 끝날 수도 있지만 일단 폴란드에서 칼리닌그라드로 입국할 때 1시간, 다시 칼리닌그라드에서 폴란드로 들어갈 때 4시간 정도를 출입국 심사에 희생할 각오를 해두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돈은 러시아 루블을 쓰고 물가는 러시아 영역이라 서유럽보단 저렴한 편. 영문 안내 등 관광 인프라는 아직 부실하다.

볼거리는 구 쾨니히스베르크 시청이나 쾨니히스베르크 성당, 호박 박물관, 증권거래소, 쾨니히스토르(왕문), 칸트 동상 등 프로이센 시절의 주요 유적들이다. 독일인들이 비록 러시아에 넘겨준 땅이지만 프로이센 시절의 유물 유지보수에 꾸준히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비록 독일이 영토 자체는 포기했을지언정, 경제적 / 문화적 영향력 만큼은 남기길 원한다는걸 알 수 있다.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의 그 다리도 걸어볼 수 있다. 이젠 3개밖에 안 남았지만.

칼리닌그라드 시 시가지에서 버스로 약 1시간 떨어진 얀타르니는 소련 시절 약 600톤의 호박이 채집된 곳으로 유명하며 발트 호박의 90%가 매장되어 있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러시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유럽연합의 재정으로 러시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에 걸친 광활한 '발틱 앰버 비치'가 조성되어있다. 운이 좋으면 허허벌판 모래사장에서 아주 작은 호박 조각을 채취할 수도 있다.다만 공중 화장실이 몇 개 없으며 1회 이용시 가격이 15루블(2015년 9월 기준, 2017년 시점에서 원화로 대략 300원 정도)이다.


6. 기타[편집]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의 개최도시들 중 하나다. 러시아 본토도 월드컵 경기와 무관한 지역이 널려 있는데 굳이 본토와 떨어진 이 곳을 개최지로 정했다는 점에서, 이 참에 분리주의 및 독일로의 귀속설 등을 가라앉히려는 속내가 엿보인다. 그래서 현지의 분리주의자들이 러시아 월드컵 보이콧을 부르짖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칼리닌그라드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독일전 조별리그는 없었고, 16강 이후로는 독일전 자체가 없었다.[14]

IKBFU(임마누엘 칸트 발트 연방 대학교), KSTU(칼리닌그라드 국립 공과 대학교) 등 몇 개의 대학이 있다.

2019년 10월 18일에 칼리닌그라드에서 러시아와 독일의 다큐멘터리 영화제가 개최되었다.#(러시아어)

러시아 국민가수 올레크 가즈마노프의 고향이기도 하다.

2023년 5월 11일, 폴란드의 요구로 칼리닌그라드의 폴란드어 구글맵 표기가 폴란드어 명칭인 크롤레비에츠(Królewiec)로 변경되었다. 관련 자료.

2023년, 에스토니아 정부는 이 도시를 칼리닌그라드 대신에 쾨니히스베르크라고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1] 지도에서 그냥 칼리닌그라드를 찍으면 역사나 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러시아 땅이 아니라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의 영토, 혹은 동유럽의 작은 독립국으로 오해할만하다. 큰 지도에서는 칼리닌그라드라고 쓰지 않고 작게 러시아라고 써놓는 경우도 많다.[2] 나머지 한 주역은 프로이센 왕국의 본체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다.[3] 발트 십자군 원정을 도운 보헤미아 왕국 국왕 오타카르 2세를 기념하여 붙었다.[4] 다만 기존 독일어 지명이 문화재의 대외적인 이름에 남아있는 경우는 간혹 있다. 가령 칼리닌그라드의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이나, 그바르데이스크의 타피아우 성이 있다.[5]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1세스웨덴이 차지하고 있던 잉그리아 늪지대 위에 세운 도시인데다가 대북방전쟁으로 스웨덴이 완전히 몰락해서 스웨덴어와 독일어의 혼합 지명을 써도 영유권에 아무 문제가 없지만, 소련-러시아의 수뇌부는 원래 독일 땅이었던 칼리닌그라드에서 독일의 흔적을 최대한 없애야 러시아가 이 땅을 계속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6] 특히나 빌헬름 1세, 빌헬름 2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 등 프로이센 왕국의 주요 당사자들은 기원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 보았지 프로이센 공국으로 보지 않았으며 독일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프로이센의 기원과 독일 군국주의튜튼 기사단프로이센 공국에서 찾지 않는다. 튜튼 기사단-프로이센 공국에서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군국주의의 기원을 찾는 것은 독일 역사를 피상적으로 연구했던 과거 영미권 학자들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대한민국 서양 사학계에서나 통용되고 있다.[7] 사실 칼리닌그라드가 튜튼 기사단이 정복하기 이전에는 고대 프로이센인 같은 발트족의 땅이었고 프로이센 공국도 상당기간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이었지만 러시아가 점령한 것은 고작 7년 전쟁이랑 제1차 세계 대전 초반 일시적으로 점령한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러시아에 소속되는 것보다 리투아니아에 소속되는 것이 훨씬 역사적 명분이 있다. 그러나 이곳은 독일인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군인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계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인들이 추후 발트 3국 주류 민족과 불편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건 당시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이 곳 없이도 발트 3국 독립 후 발트 3국 내부에선 그렇게 되었다. 결국 칼리닌그라드는 그대로 러시아 소속으로 굳어졌다.# 영토와 함께 리투아니아 입장에서는 통제하기 어려운 거대한 소수민족 집단이 덤으로 따라오는 셈이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 리투아니아 인구가 350만 내외였고, 거기서 정점을 찍고 인구가 계속 줄어들어 2021년 현재 270만 내외로 추정되는데, 칼리닌그라드 주는 흐루쇼프 당시인 1959년 센서스 기준 60만 내외였지만 계속 늘어나서 2021년 현재 100만이 넘을 것으로 추정 된다. 실제로 리투아니아의 우방국들이 러시아계 주민에게 시민권을 갱신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국적을 주지 않아서 20퍼센트 가까운 무국적자가 대량 발생했음을 생각하면,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위 설이 사실이라면 안타나스 스녜츠쿠스의 선견지명이다.[8] 러시아어에는 한국어에 있는 외래어 표기법 비슷하게 외래어를 옮기는 규칙이 있는데, 이 규칙에 따라 독일어를 러시아어로 비슷하게 옮긴 게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 [ˈkʲɵnʲɪɡzbɛrk\])이다. 지금도 이를 줄인 '쿄닉(쿄니크)'이라는 별명이 여행사 등에서 사용된다.[9] 공교롭게도 독일령 시절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프로이센의 경제 상황 역시 썩 좋지 않았다. 이 일대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융커들이 산업화보다는 안빈낙도를 추구하는 바람에 산업화가 적게 이루어져 이촌향도 현상이 심했기 때문이다.[10] 독일에서 육상으로 접근하려면 폴란드를 경유해서 가야 한다.[11] 정확히는 현지 기업인 Avtotor에서 CKD 생산을 하고 있다. 이 업체는 기아차도 역시 CKD 생산을 하고 있다.[12] 다만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은 외관만 예전과 똑같고, 내부는 거의 러시아 정교회에 가깝게 바뀌었다. 과거 독일 시절에는 프로이센 공국의 창립자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그 외 역대 튜튼 기사단장들의 무덤이 남아있었으나 전쟁으로 다 파괴되어 현재는 알브레히트 공작의 세노타프(Cenotaph)만 복원되었다.[13] 종전에는 러시아 본토를 안 가고 동유럽 여행 중 여기만 지나간다고 해도 비싼 러시아 비자를 시간 들여 받아야 했기 때문에, 어떤 동기가 있어서 반드시 여기를 가야만 한다는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여행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았다.[14] 심지어 토너먼트 경기도 칼리닌그라드에선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여기에 들어오는걸 원천 봉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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