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하인츠 푀르스터

덤프버전 :



카를하인츠 푀르스터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베스트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27px-UEFA_Euro_1980.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61px-UEFA_Euro_1984.svg.png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FFFFFF; font-size: 0.9em;"
UEFA 유로 1984







독일의 前 축구 선수


파일:K.Forster_Profile.jpg

이름
카를하인츠 푀르스터
Karlheinz Förster

본명
카를하인츠 헬무트 푀르스터
Karlheinz Helmut Förster
출생
1958년 6월 25일 (65세)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모스바흐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신체
178cm | 체중 73kg
직업
축구 선수 (센터백 / 은퇴)
에이전트
소속팀
바데니아 운터슈바자흐 (?~? / 유스)
SV 발트호프 만하임 (?~? / 유스)
VfB 슈투트가르트 (?~1977 / 유스)
VfB 슈투트가르트 (1977~1986)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6~1990)
국가대표
81경기 2골 (서독 / 1978~1986)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은퇴 후
5. 논란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1. 개요[편집]



파일:K.Forster_National_1.jpg


독일의 前 축구 선수. 80년대 전차군단의 스토퍼었으며 동시에 슈투트가르트마이스터샬레를 이끌었다.

178cm로 센터백으로서는 작은 키였지만 뛰어난 점프력으로 자신보다 큰 선수에게도 밀리지 않았으며 특히나 1대1에 매우 강했던 선수로 발군의 대인마크 능력을 발휘하며 스트라이커의 공포(Schrecken aller Mittelstürmer)[1]와 천사의 얼굴을 한 범죄자(Treter mit dem Engelsgesicht)[2]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2. 클럽 경력[편집]



2.1. VfB 슈투트가르트[편집]



파일:K.Forster_Stuttgart_1.jpg


원래는 형인 베른트 푀르스터와 함께 SV 발트호프 만하임의 유스 소속이었지만 1군 데뷔는 1976년에 슈투트가르트에서 했다.[3] 1976/77시즌부터 주전으로 뛰었으며 2부 리그에서 우승하여 독일 분데스리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1978년부터는 형인 베른트도 슈투트가르트로 이적해서 형제가 같이 뛰어난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다.[4]

1977/78 시즌에 1부 리그에 복귀하자마자 4위를 기록했고 이후 2-3-3-9-3이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다 마침내 1983/84 시즌에 첫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클럽에게는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첫 우승이자 강등당한 지 9년 만에 기록한 쾌거였다. 당시 슈투트가르트는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역동적인 공격축구를 구사해서 많은 화제를 모았는데 일반적으로 공격에 중심을 두는 팀은 수비에서 약점을 보이기 마련이지만 슈투트가르트는 실점도 적었고, 그 중심에 카를하인츠 푀르스터가 있었다. 80년대 초중반 분데스리가, 서독, 그리고 유럽을 대표하는 특급 스토퍼로 이름을 날렸는데 터프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한 반칙은 하지 않았고, 카드 관리에 능해서 공식경기에서 퇴장은 단 1번밖에 당하지 않았다.


2.2.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편집]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끝난뒤 프랑스로 건너갔는데 행선지는 마르세유였다. 1986년에 프랑스의 기업가 베르나르 타피는 마르세유의 회장이 된 뒤 지금까지 프랑스에서 볼 수 없었던 위대한 팀을 만들겠다는 야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 첫 타자로 영입된 게 카를하인츠 푀르스터와 프랑스의 스타플레이어 알랭 지레스였다.[5] 유럽 최고 레벨의 선수였던 푀르스터는 손쉽게 마르세유의 주전자리를 꿰찼으며 3시즌 동안 팀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1990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거의 통으로 날렸고 결국 이른 나이에 프로커리어를 마감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형보다 1년 빠른 1978년에 브라질을 상대로 데뷔하여 1986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꾸준히 주전으로 활약했다. UEFA 유로 1980에서 벨기에의 얀 쾰레만스를 상대하여 유명해졌고, 이후 에이스 킬러로 명성을 떨쳤다.[6]

1986년까지 4번의 메이저대회에 연속으로 참여했고, 특히 1982년 월드컵에서는 형 베른트와 함께 결승전에 출전해 1954년의 발터 형제 이후 처음으로 결승전에서 같이 뛴 독일인 형제가 되기도 했다.[7] 1986년 월드컵에도 참가한 그는 8강전에서 멕시코의 골게터 우고 산체스와 준결승전에서는 프랑스의 플레이메이커 미셸 플라티니의 전담 마크맨으로 활약하며 두 에이스를 무력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4. 은퇴 후[편집]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요 고객으로는 VfB 슈투트가르트에서 뛰고 있는 다니엘 디다비SSV 얀 레겐스부르크의 주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베네딕트 김버가 있다.


5. 논란[편집]


2015년 초 독일에서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VfB 슈투트가르트와 SC 프라이부르크아나볼릭 스테로이드로 도핑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카를하인츠 푀르스터는 동료선수와 함께 즉각적으로 반박했으나 도핑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문서가 나와서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당시에는 국가를 막론하고 팀닥터를 통해 암암리에 도핑했을 거란 얘기가 많긴 하지만[8] 이렇게 자료가 함께 제기되는 건 드문 일이라 주요 언론들이 연달아 보도했었다. 푀르스터는 과다한 진통제 처방으로 인해 몸이 망가져 말년에 상당히 고생한 것으로 유명한데 아무래도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6.2. 개인 수상[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9 19:24:24에 나무위키 카를하인츠 푀르스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982년 키커지의 표현[2] 거칠지만 더러운 반칙은 하지 않는 플레이스타일 때문에 붙은 별명[3] 베른트는 2년 앞서 만하임에서 데뷔했으나 이내 이적했다.[4] 커리어를 중앙수비수로 보낸 카를하인츠와 달리 베른트는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으며 특히 측면수비수로 활약했다.[5] 당시에는 이 둘의 이름에 가려져있었지만 장피에르 파팽도 1986년에 영입되었다.[6] 팀의 우승과 함께 베스트팀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7] 독일인 외에는 1966년 잉글랜드의 형제와 1978년 네덜란드의 판 더 케르크호프 형제가 있다.[8] 당장 베른의 기적도 서독 선수들이 하프타임에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안좋은 실상이 밝혀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