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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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성공회의 명목상 수장이자 성공회 캔터베리교구의 교구장이다.
2. 역할과 지위[편집]
캔터베리 대주교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최고 성직자이자 전세계 성공회의 일치의 상징으로서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를 대표한다. 잉글랜드 교회를 치리하고, 세계 성공회의 주교 회의인 람베스 회의(The Lambeth Conferences)를 주최하며, 잉글랜드 밖 성공회에 사목적 권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캔터베리 대주교는 천주교의 교황처럼 교회의 수장(Supremacy)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교황과 같은 특정인이 교회의 수장을 맡는 체제를 부정하며 창설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계 성공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캔터베리 대주교는 잉글랜드 국교회 산하의 다른 대주교와 달리 선출 과정에서 국교회 외부의 주교들에게도 발언권이 주어진다. 2023년 기준, 선출위원회 17인 중 성공회 교구로부터 채워지는 인원을 살펴보면 성공회 캔터베리교구로부터 3인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국교회 외부 즉 세계성공회공동체로부터 5인[2] 이 투표권을 가진다. #
캔터베리 대주교에게는 두 채의 공관(런던 람베스 궁, 캔터베리의 올드 팰리스)이 제공되며, 람베스 궁에 상주하는 비서 주교[3] 한 명도 배속받는다. 캔터베리교구장 업무는 평소에 캔터베리교구 교구장대리[4] 가 대행한다.
잉글랜드 국교의 지도자라는 그 권위에 걸맞게 영국의 의전서열에서 왕족을 제외하고 1순위에 해당하며, 영국 귀족원의 당연직 성직귀족 5명 중에서도 최상위에 해당한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은퇴 후에도 최고로 대접받는데, 1928년부터 관례적으로, 은퇴한 캔터베리 대주교에게는 영국 왕실에서 직접 남작위를 부여하며, 대주교의 고향 혹은 그가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을 명목상 남작령으로 지정해준다. 예를 들어,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는 자신의 고향인 스완지에 속해 있는 촌락인 오이스터마우스의 남작 칭호를 받았다. 만약 은퇴한 캔터베리 대주교가 유명한 학자였다면, 영국 내 여러 대학들에서 총장(명예직) 제의가 쏟아지기도 한다.
3. 목록[편집]
- 여기서 성인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공경하는 성인들이며, 성공회식 표기를 따른다.
3.1. 종교개혁 이전[편집]
- 켄터베리의 어거스틴: 일반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라 알려진 교부시대 히포의 어거스틴과는 다른 인물이다. 로마 출신으로 서기 597년 교황에 의해 잉글랜드에 파송된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605년에 선종하였다.
- 앨프해아흐(Ælfheah): 이명은 '앨피지(Alphege)'. 앵글로색슨족 지배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1012년 데인족(바이킹)의 잉글랜드 침략 당시에 포로로 잡혔으나, 자신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이 세금을 내게 할 수 없다면서 몸값을 내는 것을 거부, 결국 바이킹들에게 소뼈로 돌팔매질을 당한 뒤 도끼자루에 맞아 순교하였다. 바이킹들은 거룩한 이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불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 토마스 베켓: 1118년에 출생하여 1170년에 살해당한 주교이자 종교재판관. 헨리 2세 시절 국왕이 원하는 것보다 죄인들에게 온건한 처벌을 내려 왕의 심기를 건드렸고, (국왕의 직접 명령인지 아니면 수하들의 과잉 충성의 결과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헨리 2세의 부하들에게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한다. 사후 즉시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이후 1531년, 수장령을 선포하며 교회와 관계를 단절하는 등 파격적 행보를 보이던 헨리 8세가 뜬금없이 360년 전에 죽은 그를 역모 혐의로 기소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면 30일 간의 기한을 줄 테니 법정에 출두하라고 했지만 죽은 베켓이 법정에 출두하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30일 뒤 개최된 궐석재판에서 헨리 8세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캔터베리 성당에 안치된 그의 유골을 불태우고 조문객들이 바친 헌금을 싸그리 털어갔다.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에도 등장한다.
- 토머스 브래드워딘: 신학자로서의 칭호는 '심오한 박사(Doctor Profundus)'. 아우구스티누스 학파의 신학자로 대주교직에 재임한 기간은 겨우 38일에 불과하다(흑사병으로 선종). 사실 천주교 시대에 재임하기는 하였으나, 존 위클리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마르틴 루터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17] 에 경도되어 있던 당시 신학계에 맞서서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1290년에 출생하여 1349년에 선종하였다.
- 레지널드 폴 추기경[18] : 마지막 가톨릭계 캔터베리 대주교. 부제 때 추기경에 서임되고, 20년 후에 주교로 서품됐다. 1556년 착좌, 1558년 선종.
3.2. 종교개혁 이후[편집]
- 토마스 크랜머: 가톨릭이 아닌 성공회로서의 첫 캔터베리 대주교, 전례 개혁자, 종교 개혁 순교자. 성공회 기도서와 성공회 39개 신조를 집필했으며 현재 성공회 및 잉글랜드 국교회를 탄생시킨 주역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며 순교일인 3월 21일을 잉글랜드 국교회에서는 축일로, 대한성공회에서는 기념일로 지낸다. 물론 토마스 크랜머를 신명으로 쓸 수도 있다. 1489년에 출생하여 1556년 메리 1세 여왕 시기에 화형당했다.
- 매슈 파커: 개혁 신학에 따른 성공회 39개 신조를 작성하였다. 1504년에 출생하여 1575년에 별세하였다.
- 윌리엄 로드: 고교회파(Anglo-Catholic)로서 성공회(당시 잉글랜드 국교회)에 가톨릭적 전례와 제의를 다시 도입하여, 청교도들의 집중 타겟이 되어 처형당한다. 1573년에 출생하여 1645년 영국 내전 도중에 왕당파들이 숙청당할 때 처형되었다. 국교회 예식을 비판하는 청교도들을 잡아 귀와 코를 베고, 종신형에 처했으며 찰스 1세 시대에는 성실청(Star Chamber)이라는 특수 법정에 종교재판을 남발하여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 윌리엄 적슨
- 윌리엄 웨이크
- 윌리엄 하울리
- 존 버드 섬너
- 찰스 롱리
- 윌리엄 템플: 노동운동과 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하였다. 당시 비단 성공회 신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1881년에 출생하여 1944년에 별세하였는데 최초로 화장된 캔터베리 대주교이기도 하다.
- 제프리 피셔: 1959년에 방한하여 대학로교회(당시 성 베다 교회) 성당을 축성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 총장을 맡기도 했다. 때문에 세계교회협의회를 반대하는 일부 개신교인들이, 피셔 대주교가 프리메이슨 회원이라는 낭설을 유포하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19]
- 마이클 램지: 가톨릭 교황 바오로 6세와 교회일치운동에 관해 대화를 한적이 있다. 1973년 방한한 이력이 있다. 방한하여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예방하고 동국대학교에 가서 불교계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 도널드 코건: 1909년에 출생하여 2000년에 별세하였다. NEB 성경(The New English Bible) 번역에 참여하였다.
- 로버트 런시: 1921년에 출생하여 2000년에 별세하였다. 자유주의적 고교회파(Liberal Anglo-Catholic)로서 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하였다.
- 조지 캐리: 1935년생이다. 킹스 칼리지 런던, 더럼 대학교 출신. 캐리 대주교 때에 잉글랜드 교회에서 처음으로 여성 사제를 서품하였다.
- 로완 윌리암스: 웨일스 사람이다. 장로회 출신으로, 자유주의적 고교회파(Liberal Anglo-Catholic)다.[20] 여성 주교 서품 문제, 동성애 수용 문제, 불륜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찰스 3세의 결혼식 주례, 샤리아법 옹호 발언 등으로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 저스틴 웰비: 런던 사람이다. 이튼 칼리지,[21]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 성직 입문 전에는 정유회사 임원으로 일했다. 현임 캔터베리 대주교(105대).
[1] 다른 버전 [2] 대륙별로는 아프리카 1인, 북미 1인, 중동 및 아시아 1인, 오세아니아 1인, 유럽 1인[3] 이 주교는 "캔터베리와 요크 대주교의 직속 주교"라는 정식 명칭이 있다. 비서직과 동시에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 사이의 메신저 역할도 하며, 람베스 회의의 실행위원장 역할도 맡는다.[4] 도버의 주교[5]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다른 인물로, 이름 앞에 캔터베리 지역명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6] 성 라우렌시오와는 다른 인물로 이름 앞에 캔터베리 지역명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명칭] A B C D 일반적으로 이름 앞에 캔터베리 지역명을 붙여 불린다.[7] 일반적으로 이름 앞에 출생지인 탈수스 지역명을 붙여 '탈수스의 성 데오도르'라고 불린다.[8] 승좌 이후 관구장으로서 팔리움을 받기 위해 로마로 향하던 중 알프스 산맥에서 사망함.[9] 왕에 의해 강제 전보.[선출일] A B C D E F G H I J K L M N 승좌일이 아닌 선출일이다.[공란] A B C D E F G H I J K L M N 승좌일을 명확히 알 수 없으므로 공란으로 둔다.[10] 일반적으로 소속 수도원이 위치했던 프랑스의 지명 '베크(Bec, 현 르베크엘루앵·Le Bec-Hellouin)'를 붙여 '베크의 티볼드'라고 불린다.[11] 일반적으로 소속 수도원이 위치했던 영국의 지명 '도버(Dover)'를 붙여 '도버의 리처드'라고 불린다.[12]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예루살렘에서 사망함.[13] 일반적으로 소속 수도원의 이름인 '포드(Forde)'를 붙여 '포드의 볼드윈'이라고 불린다.[추기경] A B C D E [14]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함.[생전퇴임] A B C D E F G H I J K L M [15] 종교 개혁 시기 최초의 개신교계(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16] 최후의 천주교계 캔터베리 대주교.[17] Semi-Pelagianism,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 은총에 인간이 선행으로 응답하여야만 완성된다는 주장이다. 신인협동설이라고도 한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18] 메리 1세 시절 영국이 천주교로 복귀했던 때. 성공회에는 추기경 직위가 없다.[19] 어떤 사람들은 프리메이슨이 음지에서 암약하며 세계를 입맛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은 실제로는 이신론 신봉자의 사교 단체에 불과하며 어떠한 정치적 실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차라리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20] 의외로 다른 개신교에서 성공회로 옮겨온 사람들이 전례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 중에서도 로완은 동방 정교회의 전통과 영성을 성공회에 들이려 했고, 결국 성공회에는 '앵글로 정교회'(Anglo-Orthodoxy)라는 새로운 개념까지 생겨났다.[21] 이튼 칼리지는 이튼 스쿨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의 국제중학교와 비슷하게 주로 부유층 자제들이 진학하는 학교다. 웰비 대주교는 이튼 칼리지 졸업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여,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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