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 앤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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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 앤슨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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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Anson%20Cap%20Plaque%2040_NBL.png
캡 앤슨
헌액 연도
1939년
헌액 방식
베테랑 위원회 추천

1881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타격왕
조지 고어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캡 앤슨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
)

댄 브루터스
(버팔로 바이슨스)
1888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타격왕
샘 톰슨
(디트로이트 울버라인스)

캡 앤슨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
)

댄 브루터스
(보스턴 비니터스)

1880년~1882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타점왕
존 오 루어크
(보스턴 레드캡스)
찰리 존스
(보스턴 레드캡스)

캡 앤슨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
)

댄 브루터스
(버팔로 바이슨스)
1884년~1886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타점왕
댄 브루터스
(버팔로 바이슨스)

캡 앤슨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
)

샘 톰슨
(디트로이트 울버라인스)
1888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타점왕
샘 톰슨
(디트로이트 울버라인스)

캡 앤슨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
)

로저 코너
(뉴욕 자이언츠)
1891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타점왕
샘 톰슨
(디트로이트 울버라인스)

캡 앤슨
(시카고 콜츠
)

댄 브루터스
(브루클린 그룸스)







파일:external/sabr.org/AnsonCap-BBHOF.jpg

에이드리언 콘스턴틴 앤슨
Adrian Constantine Anson

출생
1852년 4월 17일
사망
1922년 4월 14일 (향년 69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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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지
아이오와주 마샬
포지션
1루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83cm, 102kg
소속팀
락포드 포레스트 시티 (1871)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1] (1872~1875)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콜츠 (1876~1897)
감독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875)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콜츠 (1879, 1880~1897)
뉴욕 자이언츠 (1898)

1. 개요
2. 평가
3. 유년시절
4. 선수시절
5. 은퇴 후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7. 비판: 메이저리그 최악의 인종차별주의자



1. 개요[편집]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뛰었던 前 야구선수이자 前 야구감독.


2. 평가[편집]


메이저리그 초창기에 활동한 선수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한명이자, 메이저리그 최초 통산 3,000안타과 2,000타점[2]을 달성한 선수다. 또한 감독으로서도 뛰어난 지도력으로 맡던 팀을 강팀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야구 경력과는 별개로, 흑인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막는 등 인종 차별로 야구 외적인 면으로는 큰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하다.


3. 유년시절[편집]


캡 앤슨은 1854년 아이오와 주의 마샬타운에서 태어났다. 앤슨은 어릴 적 부터 야구에 두각을 나타내었고,[3] 그 덕에 미국 최초의 실업야구리그인 내셔널 어소시에이션[4]가 창립되던 1871년, 만 19세의 나이로 락포드 포레스트 시티에 입단하며 선수생활을 시작하였다.

4. 선수시절[편집]


그러나 앤슨이 입단한 팀인 락포드는 프로 팀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었던 팀이였다. 앤슨은 신인으로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했지만 팀은 4승 21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고, 결국 창단 1년만에 해체되었다. 결국 앤슨은 어쩔수없이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 합류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앤슨은 뛰어난 타격감을 선보이며 필라델피아 이적 첫 해 타율 .415, 다음 해에 .398를 기록하며 맹활약했지만 필라데피아는
재정적인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으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1876년, NA가 해체되고,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의 구단주 윌리엄 허버트의 주도로 내셔널리그가 창설되었다. 허버트의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는 NA에서 뛰던 스타선수들을 영입하였고, 이 때 앤슨역시 시카고 유니폼을 입게되었다.
시카고 이적 첫 해, 앤슨은 .356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활약했고, 1877년, 1878년에도 각각 .337, .341의 타율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명으로 올라선다.

1879년에는 팀의 감독이었던 알 스팔딩이 물러나며 감독직을 이어받으며 선수 겸 감독으로 뛰게되었다. 감독으로 부임한 앤슨은 여러가지 전술 고안했는데, 이 때 앤슨이 고안한 전술이 히트 앤 런, 투수 로테이션 등이다.

감독 부임 첫 해 앤슨은 시카고를 8팀 중 4위로 올려놓았고, 급기야 다음 해인 1880년에는 팀을 리그우승으로 이끌고 선수로서도 타율 .337 74타점으로 타격 2위, 개인 통산 첫번째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하며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다음 해인 1881년에는 2년 연속으로 팀을 리그우승으로 이끌고, 타자로서도 4할 타자 직전까지 가는 .399의 타율을 기록하며 그 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내셔널리그 타격왕 타이틀과 82타점으로 개인통산 2번째 타점왕을 차지하는 등 맹활약했다.

1882년 역시 시카고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3년 연속 지구우승이라는 업적을 쌓았고, .362의 고타율과 83타점을 기록하며 근소한 차이로 타격 2위에 머물렀으나 개인 통산 3번째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1883년에는 안타깝게도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며 4년 연속 우승이라는 기록달성에 실패했고, 타자로서도 .308의 타율과 68타점으로 부진하며 아무런 타이틀도 얻지 못했다.

1884년에는 타율 .335 159안타 21홈런 103타점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 개인통산 4번째 타점왕을 차지하며 타자로서는 승승장구했으나 시카고는 그 해 8팀 중 5위를 차지하여 감독으로서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1885년에는 타율 .310 144안타 108타점으로 개인통산 5번째 타점왕을 차지, 팀도 3년만에 리그 챔피언 자리를 탈환하며 앤슨은 감독으로서 통산 4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1886년에는 타율 .371 187안타 147타점으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고타율에도 불구하고 타격왕 자리는 타율 .388을 기록한 킹 켈리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팀의 우승을 이끔과 동시에 개인통산 6번째 타점왕을 차지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1887년에는 타율 .347 164안타 102타점을 기록하며 타격 2위 기록했고, 팀을 3위로 이끌었다.

1888년에는 타율 .344 177안타 84타점을 기록하며 7년만에 타격왕을 수상, 개인통산 7번째 타점왕을 수상했고,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1889년에는 타율 .342 177안타 117타점을 기록, 팀을 3위로 이끌었다.

1890년에는 타율 .312 157안타 107타점을 기록하며 타점 2위에 올랐다.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다.

1891년에는 타율 .291 157안타 120타점을 기록하며 데뷔 이후 처음으로 3할 밑으로 타율이 떨어졌다. 하지만 개인통산 8번째 타점왕을 차지했고,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1892년에는 타율 .272 152안타 74타점으로 커리어로우 시즌을 보냈다. 팀도 12팀 중 7위를 기록했다. 시카고는 이후 하락세를 걷기 시작한다.

1893년에는 타율 .314 125안타 91타점으로 어느 정도 부활했으나 전성기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성적을 기록하였다.[5] 팀은 전년도보다 성적이 더 떨어져 9위를 기록했다.

1894년에는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으며, 타율 .388 133안타 100타점을 기록했다. 팀은 8위를 기록했다.

1895년에는 타율 .335 159안타 91타점을 기록하며다시 한번 부활했는데, 이때 당시 앤슨의 나이는 만 41세였다. 팀도 역시 다시 성적이 올라가며 4위를 기록했다.

1896년에는 타율 .331 133안타 90타점을 기록하며 자신이 아직 안죽었다는 것을 과시했다. 팀은 5위를 기록했다.

1897년에는 타율 .285 121안타 75타점을 기록했고, 팀은 성적이 떨어지며 9위를 기록했다. 앤슨은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성적부진으로 인해 감독직에서도 물러났다.

5. 은퇴 후[편집]


1897년 은퇴한 이후 앤슨은 뉴욕 자이언츠의 감독직을 맡았다. 하지만 앤슨은 고작 22게임만 치르고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야구계를 떠났다. 이후 앤슨은 말년에 자금난을 겪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내셔널리그 사무국에서 앤슨에게 연금을 지급하려고 했으나 앤슨은 한사코 거절했다.

이후 앤슨은 1922년 4월 14일 향년 만 6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인 1939년 베테랑 위원회의 추천으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캡 앤슨
60
361
186
64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First Base (4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캡 앤슨
93.9
41.7
67.8
1루수 HOF 입성자 평균
66.4
42.7
54.6


7. 비판: 메이저리그 최악의 인종차별주의자[편집]


앤슨은 선수와 감독으로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지만,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악의 인종차별주의자로 비판받는다. 1884년, 앤슨이 이끌던 시카고는 당시 메이저리그의 라이벌 조직인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팀인 톨레도 블루스타킹스와 경기를 가졌다. 당시 톨레도의 주전 포수는 모세스 플리트우드 워커(Moses Fleetwood Walker)라는 흑인 포수였는데, 이에 앤슨은 불같이 화를내며 "검둥이와 경기를 하느니 팀을 해체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앤슨은 당시 야구계에서 거물이었기 때문에 톨레도는 어쩔 수 없이 워커를 방출시켰다.

또한 다음 해인 1885년, 뉴욕 자이언츠에서 흑인선수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앤슨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는 1887년 어떠한 흑인도 메이저리그 팀과 마이너리그팀과 계약할 수 없다는 조항이 만들어지는 빌미가 되었다.

만약 앤슨만 아니었더라면 흑인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1884년에 이루어졌을것이고, 그렇다면 조시 깁슨, 사첼 페이지, 쿨 파파 벨, 루브 포스터, 몬테 어빈, 왈라드 브라운 등의 니그로리그의 스타들이 전성기때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었을 것이고 우리는 정확한 기록으로 이들을 평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다 보니 시카고 흑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종차별주의자가 레전드인 팀은 절대 응원 못한다며 화이트삭스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팬덤이 되었다. 사실 미국에서 있었던 인종차별이 현재 단어 하나 말하는걸 까다롭게 금기시할 정도로 갈등의 골을 깊게 팠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여담으로, OOTP 22 퍼펙트 팀에서 캡 앤슨 선수카드의 출시가 취소된 것도 이러한 인종차별 논란이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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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전신인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는 다른 팀이다.[2] 단,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공식적으로 2,000타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메이저리그가 인정하는 최초의 2,000타점은 캡 앤슨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베이브 루스이다. 내셔널 리그 이전 내셔널 어소시에이션 기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초기 KBO 선수가 실업리그 시절 기록을 포함하지 않는 것과 같다. 90년대에도 현대 피닉스라는 실업팀이 현대 유니콘스라는 프로팀으로 바뀌었지만 피닉스 시절 개인기록은 프로 기록으로 넣어주지 않는다. 또한 종종 한국이나 해외언론에서 4할 타자에 그를 넣는 경우가 있지만 이 역시 1876년에 출범한 메이저리그에서 기록한 게 아니라서 메이저리그는 그를 메이저리그 4할 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4할 타자는 비운의 천재 "로스 반스"이다. 4할을 친 다음에 말라리아 치료를 잘못 받아서 후유증으로 2류선수로 전락한 안타까운 선수이다. NA시절에도 4할을 쳤기에 캡 앤슨의 라이벌이기도 했고 캡 앤슨도 천재라고 인정했던 선수가 반스이다. [3] 앤슨이 어린 시절 당시 야구는 처음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스포츠였다.[4] 이하 NA[5] 하지만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커리어 로우 시즌이였던 1892년 당시 앤슨은 만 3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