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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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슈미트 콜비츠
Käthe Schmidt Kollwitz
1867년 7월 8일 ~ 1945년 4월 22일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언젠가 새로운 이상이 등장하여 이 세상 모든 전쟁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1. 개요
2. 생애
3. 예술


1. 개요[편집]


독일화가. 노동자들의 역사와 삶을 주제로 한 판화 등을 주로 제작하였다.

2. 생애[편집]


케테 콜비츠는 1867년 동프로이센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회주의자이고 어머니는 프로테스탄트였기에, 콜비츠는 꽤나 자유롭고 진보적인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리하여 점차 노동자, 농민, 빈민의 삶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다. 평소 그림에 소질이 있던 콜비츠는 10대 초반부터 미술 공부를 시작했고 베를린뮌헨에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했다. 거기서 콜비츠는 미술을 배우며 판화 작업에 관심을 가졌다. 콜비츠 그림을 배우면서도 틈틈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또 마침 콜비츠가 사귀고 있던 의사 카를 콜비츠(Karl Kollwitz)가 노동자 계급을 진료하던 일을 하던 지라 그를 찾아온 환자들을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카를 콜비츠는 곧 콜비츠의 남편이 되는데, 그 또한 콜비츠처럼 진보적 성향으로 빈민들을 위한 의료사업을 펼쳤으며, 노동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콜비츠의 예술을 후원하고 지지해주었다.

1891년에 카를과 결혼한 콜비츠는 베를린에서 가정을 꾸린다. 기리고 베를린 북부 바이센부르크가 25번지에 50여 년간 남편과 함께 살았다. 나중에 그 곳은 '케테 콜비츠 가'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콜비치는 두 아들을 낳았다. 가정을 꾸리면서 콜비츠는 남편의 의료사업을 도왔고, 노동자들의 삶을 직시하여 이를 자신의 예술에 반영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콜비츠는 작가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조공」을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독일 슐레지엔 지방의 직조공들이 1844년 일으킨 실제 파업을 다루고 있다. 연극에 크게 감명을 받은 콜비치는 이 작품을 모티브로 하여 1893년부터 1898년까지 《직조공들(Ein Weberaufstand)》 연작 6점을 발표하였다. 콜비츠는 이 첫 작품을 아버지에게 바쳤다. 이 작품을 본 아버지는 크게 흥분하여 어머니에게 '우리 딸이 해낸 것을 보라'며 자랑스럽게 작품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콜비츠의 작품이 정식으로 전시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직조공의 봉기'(한국어 번역에서는 '방직공의 봉기'라고도 함) 연작은 곧 케테 콜비츠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베를린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콜비츠의 작품에 독일의 예술가들은 매료되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케테 콜비츠 에게 금상을 수여하기로 했었는데, 그녀에게 반감이 있었던 걸로 보이는 귀족들과 프로이센 정부가 콜비츠의 금상 시상을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참고로 당시 독일 제국의 황제는 빌헬름 2세로 그는 콜비츠의 작품의 기원이 된 「직조공」의 작가 하우프트만의 시상도 무산시킨 바 있었다. 이로써 콜비츠는 촉망받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한다.

1902년부터는 독일 농민전쟁을 다룬 《농민전쟁(Bauernkrieg)》 연작을 제작하여, 1908년까지 7점을 제작하였다. 콜비치는《농민전쟁》이라는 책을 읽다가 농민 봉기를 선동한 '검은 안나'라는 여성을 알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판화 제작에 돌입하였다고 한다. 이 작품도 콜비츠를 더욱 유명하게 했으며, 콜비츠는 1907년 빌리 로마나 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렇게 결혼 이후부터 1910년대 초반까지의 기간 동안 인생예술 두 가지에서 모두 성공적이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나 행복한 생활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전쟁이 터지자 둘째 아들인 페터(Peter Kollbitz)는 입대를 희망하였다. 남편인 카를은 아들들의 참전을 반대했으나 페터는 혈기 때문인지 끈질기게 참전을 요구했고 결국 콜비츠 부부는 "아기의 탯줄을 또 한 번 끊는 심정"으로 울면서 페터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은 전사했다. 그리고 1914년 10월 30일자의 일기에 콜비츠는 단 한 줄만 썼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이 일로 콜비츠는 심한 상실감과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전쟁의 비인간성과 참혹함을 깨달았고 더 이상 "씨앗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때부터 콜비츠는 반전주의, 평화주의의 메시지가 담긴 판화, 조각 등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은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퍼졌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쟁 반대와 평화를 일깨우거나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참여 성향의 예술운동을 퍼트리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콜비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콜비츠를 일컫어 "위대한 예술가"라고 부르며 극찬했다. 시간이 꽤 흐른 후의 일이지만, 1970~1980년대의 대한민국에서도 콜비츠의 작품이 알려져 민중미술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콜비츠는 다시 위협을 받았다. 1920년대 중반부터 기승을 부리던 나치가 끝내 1933년 집권에 성공한 것이었다. 콜비츠는 작품 활동과 함께 나치에 저항하는 예술가들을 결집시켜 반나치 운동을 벌였지만 끝내 나치의 집권을 막지 못했다. 소위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신고전주의를 중시한 나치는 콜비츠는 비롯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가들을 퇴폐미술이라며 극심하게 탄압했고, 독일 내에서 작품을 전시할 권리,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마저 박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비츠는 망명하지 않고 독일에 남아서 여전히 작품 활동을 재개하였으나, 끝내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목도해야 했다. 이 전쟁에서 콜비츠는 자신의 남편을 병환으로, 자신의 손자를 전투로 각각 잃었다. 공교롭게도 전사한 손자의 이름이 둘째 아들의 이름과 같은 '페터'였다. 그리고 콜비츠는 유럽에서의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4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3. 예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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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 <부모>,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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