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비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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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9월 21일 작센의 코르비츠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격돌한 전투. 프로이센군이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2. 배경[편집]


1759년 9월 초 오스트리아 대군의 작센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출격한 윈치 소령 휘하의 프로이센 군대는 드레스덴이 이미 함락되자 철수하다가 9월 8일 지나 전투에서 자신들을 추격하러 온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쳤다. 이후 그들은 작센 북부 일대 대부분을 탈환했고 9월 11일 핀크 중장이 이끄는 증원군과 합류했다. 9월 13일, 윈치와 핀크는 라이프치히를 탈환했고 19일엔 마이센을 향해 행진했다. 이에 드레스덴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안드레아스 그라프 하디크 폰 푸타크 장군과 츠바이브뤼켄 백작 프리드리히 미카엘의 지휘하에 이에 맞서고자 진군하였고, 9월 21일 양측은 코르비츠 전장에서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프로이센군[편집]


  • 사령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핀크 중장, 요한 야코프 폰 윈치 소령
  • 병력: 보병 만여 명, 기병 수천 명

3.2. 오스트리아군[편집]


- 푸타크 장군의 군단: 보병 12,000명, 기병 4,200명
- 츠바이브뤼켄 백작의 군단: 보병 9,600명, 기병 3,100명

4. 전투 경과[편집]


9월 21일 오전 10시 츠바이브뤼켄 백작 프리드리히 미카엘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단은 레르헨베르크 언덕에 주둔한 윈치의 프로이센군을 공격했다. 츠바이뷔르켄 백작은 레프니츠 고지에 여러 개의 포대를 설치하고 프로이센군 진영에 포격을 퍼부었으나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이에 윈치의 포병대는 반격을 가해 적에게 타격을 입혔고 프로이센군은 고지를 끝까지 사수했다. 한편 하디크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문지크와 밀티산드를 지나 크뢰기스와 스트로이센 사이의 평지에 군대를 배치했다. 이후 하디크 장군은 정오에 3개의 포대로 하여금 핀크 장군의 프로이센군을 공격하게 했다.

핀크는 자신의 군대를 포격하는 적에 맞서고자 우측으로 행진하여 슐레타와 코르비츠 시이의 평지에 배치하여 하디크의 오스트리아군 대열과 대치했다. 하디크는 브렌타노 장군의 군단을 프로이센 우익으로 진격시켰다. 핀크는 이에 대해 4개의 척탄병 대대와 마크그라프 카를 장군 휘하의 보병대를 투입시켜 이들을 격퇴했다. 여기에 프로이센 포병대는 하디크의 포대들 중 하나를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디크는 람베르크 소장에게 4개 대대를 이끌고 반격을 가하게 했으나 람베르크 소장은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을 벌인 끝에 쫓겨났다.

하디크는 패주하는 군대를 수습하기 위해 모든 기병대와 함께 공세를 개시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프로이센 기병대를 몰아내고 나서 프로이센 보병대를 향해 5,6차례 돌격했다.마크그라프 카를 장군 휘하의 보병대는 적에게 여러차례 공격당한 후 후방으로 밀렸고,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그런 적을 추격하다가 5개의 야전대포와 2개의 곡사포를 포획했다. 그러나 나머지 프로이센 보병대는 적의 이같은 공세에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다가 해가 질 무렵 오스트리아군은 철수했고 핀크의 군대는 적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제 위치를 사수했다. 이렇게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편집]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1,14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47명의 포로가 발생했으며, 대포 11문을 잃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장교 43명과 병사 1,3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여러 대포를 상실했다. 이렇듯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프로이센군이 끝까지 제 위치를 사수했으므로 프로이센군의 승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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