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민 올러로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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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민 올러로이우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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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49대



클럽





장쑤 FC 역대 감독
파비오 카펠로
(2017~2018)

코스민 올러로이우
(2018~2021)

해체


샤르자 FC
Sharjah Football Club

파일:올러로이우.jpg

이름
코스민 올러로이우
Cosmin Olăroiu
K리그 등록명
올리
출생
1969년 6월 10일 (54세)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부쿠레슈티
국적
[[루마니아|

루마니아
display: none; display: 루마니아"
행정구
]]

신체
187cm
직업
축구 선수 (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1988 / 유스)
글로리아 부저우 (1989~1990)
메콘 부쿠레슈티 (1990~1991)
기루에타 부쿠레슈티 (1991~1992)
나치오날 부쿠레슈티 (1992~1995)
CS 우니베르시타테아 크라이오바 (1995~1997)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7~2000)
제프 유나이티드 (2000)
코치
나치오날 부쿠레슈티 (2000~2002)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2002)
나치오날 부쿠레슈티 (2002~2005)
폴리테흐니카 티미쇼아라 (2005)
감독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2006~2007)
알 힐랄 FC (2007~2009)
알 사드 SC (2009~2010)
알 아인 FC (2011~2013)
알 아흘리 (2013~2017)
사우디 대표팀 (2014~2015)[1]
장쑤 쑤닝 (2018~2021)
샤르자 FC (2021~ )
국가대표
없음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3.1. 루마니아
3.2. 중동
4. 플레이 스타일
5. 여담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루마니아축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K리그에서 활약했으며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외국인 수비수 계보(올리 - 졸리 - 무사 - 마토 - 리웨이펑 - 헤이네르 - 매튜 저먼 - 도닐 헨리 - 불투이스)의 그 시작.


2. 선수 경력[편집]



2.1. K리그 이전[편집]


1989–1990 시즌 글로리아 부저우 (Gloria Buzău) 팀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올리는 1990–1991 시즌 MECON 부쿠레슈티 (MECON Bucureşti)와 1991–1992 시즌 지루에타 부쿠레슈티 (Girueta Bucureşti)를 거쳐,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낫시오날 부쿠레슈티 (Naţional Bucureşti)에서 뛰었으며,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바데아와 함께 FC U 크라이오바 (FC U Craiova)에서 활약하였다.


2.2. 수원 삼성 블루윙즈[편집]


파일:수원 올리.png

1997년 봄 올리는 올리보다 앞서 수원에서 활약하고 있던 바데아에게 한국행을 제안 받았다. 알바니아 출신 수비수인 아디를 내보낸 수원은 외국인 수비수를 찾고 있었고, 바데아와 같은 동구권 선수를 찾기 원했기 때문. 이에 대해 올리는 처음에는 반신반의 하였지만, 팀 동료이자 스타였던 바데아의 부탁은 거절하기 힘들었고 결국 이를 수락하게된다. 입단 직후부터 수준높은 기량과 프로의식을 보여준 올리는 곧바로 수원의 주축 수비수로 자리잡았으며, 세트피스 상황에서 벼락같은 헤딩골을 기록하기도 하면서 한국 무대에 완벽히 적응하는데 성공하였다. 97시즌 32경기 5골을 기록한 올리는 이후에는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97년 K리그 외국인 올스타에 발탁되기에 이른다. 2년차를 맞이한 98년에는 25경기를 출장하면서 안정적인 수비 조율을 보여준다. 올리의 활약을 앞세워 98시즌 수원은 정규리그 우승을 거머쥐어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당시 수원은 시즌 총 실점이 22실점이었는데, 올리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기복이 너무 심해, 올리가 풀타임으로 뛰었다면 10점대 실점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였다. 이듬해인 99년에도 올리는 수원 수비의 축으로 활약하였고, 32경기에 나서 2골을 기록, 팀의 전관왕 신화창조의 수비공신이 되었다. 2000년 올리는 11경기에 출전하여 1어시스트를 기록한 후, 전반기가 끝나고 J리그의 오퍼로 수원을 떠나 제프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다.


2.3. 제프 유나이티드[편집]


한국에 올 때부터 이미 노쇠기였기 때문에 제프 유나이티드에서 10경기 출장하는 것으로 은퇴했다.

당시 게오르게 하지가 활약하던 루마니아 국대는 전성기였기[2] 때문에, 올리는 K리그에서는 대활약을 했지만, 국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월드컵 1990, 1994,1998 유로 1992(예선탈락), 1996 모두 국대에 나가지 못했다. 당시 K리그의 수준이 그만큼 유럽 상위권팀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3. 지도자 경력[편집]



3.1. 루마니아[편집]


J리그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에서 선수생활을 마친 올리는 2000년 나치오날 부쿠레슈티 (Naţional Bucureşti) 팀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2년 루마니아 최고 명문구단인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거쳐 2005년까지 나치오날 부쿠레슈티로 돌아와 활약한 올리는 폴리테흐니카 티미쇼아라 (Politehnica Timişoara)의 수석코치를 거쳐 2006년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의 감독으로 선임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나이는 겨우 37세로 감독 치고 상당히 젊었는데, 감독이 된 올리는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으로 팀을 UEFA 챔피언스리그 32강으로 이끌고 32강에서도 승리를 일구어내며 성공하였다. 이 때 올리의 이름이 새삼 한국 팬들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3.2. 중동[편집]


성공적으로 부쿠레슈티 감독 생활을 보내던 올리는 사우디알 힐랄에서 감독 제의가 오자 사우디로 건너가 2년간 감독을 역임하였고,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카타르로 건너가 알 사드의 감독을 역임하였다. 다만 알 사드에서는 성적 부진으로 해임당했고, 이후 올리는 UAE 축구팀인 알 아인, 알 아흘리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현재까지 감독직을 수행 중에 있다. 중간에 2015 AFC 아시안컵 호주를 치르는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임시로 수행하기도 했다.

2016/17 시즌에는 UAE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해서 한국 축구인들과 친한 듯, 최강희 감독은 2013년 아챔에서 당시 알 아흘리 감독을 맡고 있던 올러로이우의 도움을 받아 앙숙 팀인 알아인 의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또한 아흘리 시절 권경원을 성장시키기도 했다.


3.3. 장쑤 쑤닝[편집]


2018년 개막 직후 부진했던 장쑤 쑤닝파비오 카펠로를 경질하고 올러로이우를 신임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장쑤에 온 것은 조금 뜬금없는데, 아마도 최용수의 전임감독이었던 루마니아 출신 단 페트레스쿠가 좋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다시 루마니아 출신을 데려온 듯 하다. 페트레스쿠는 2016년 AFC 챔피온스 리그 에서 구단주가 전세기로 전주성까지 와서 직관한 경기에서 전북에게 3-0으로 참패, 격노한 구단주에 의해 리그 2위를 달리고 있었음에도 억울하게 해임되었는데 후임 감독인 최용수카펠로는 아예 팀을 하위권으로 쳐박고 말아먹었기 때문에 구단주가 성급한 해임을 후회한 듯, 다시 루마니아 출신을 데려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있다. 페트레스쿠는 올리와 동시대에 활약했지만, 아시아를 전전한 올리와는 달리 첼시FC에서 풀백으로 5년간 뛴 세계적인 선수였다.

장쑤는 올리호가 출범한 이후 면모를 일신, 4게임 무패행진 (3승 1무)을 계속하며 4월말까지 일약 4위까지 발돋움 했다. 장쑤는 페이롤이나 외국인 선수 이름값을 보나 절대로 하위권에 쳐박힐 팀은 아니기 때문에, 올리가 잘 지휘한다면 다시 아챔권까지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장쑤는 올리의 지휘 하에서 5위로 리그를 마쳤다.
2019년에는 역시 4위로 리그를 마쳤다. 중국 슈퍼 리그에서는 티켓이 3장 주어지는데 (나머지 한장은 FA컵) 아쉽게 아챔과는 계속 인연이 없는 듯.

2020년 슈퍼리그는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조별리그 및 8강 토너먼트로 바뀌었고, 장쑤는 A조 2위로 결선 토너먼트에 올라가서 B조 1위 상하이 상강을 꺾고, 결승에서도 10번째 리그 우승에 도전하는 광저우 헝다를 꺾어서 기어이 슈퍼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21년 2월 11일 상호해지로 장쑤 쑤닝 감독을 사임했다. 사임 이유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쑤닝 그룹이 어려워져서 올러로이우의 연봉인 700만 유로를 맞춰주기 힘들어졌고, 그리하여 상호해지로 나온다고 한다. 2월 28일 결국 클럽이 해체된걸 보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3.4. 샤르자 FC[편집]


2021년 11월 샤르자 FC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전체적으로 매우 터프하고 우직한 수비수였다. 파워풀 넘치는 플레이를 펼치는 탓에 상대 공격수들은 올리를 보면 지레 겁을 먹고 경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팀의 위기 상황에서는 공격본능까지 뽐내며 전천후 수비수로 활약하였다.


5. 여담[편집]


  • 올리가 뛰었던 수원 삼성은 2011년 이후 현재까지도 감독 선임시 지도력이 검증된 감독보다는 팀의 레전드 출신만 우선순위로 두고 감독으로 선임하는, 소위 리얼 블루라는 정책을 10년 넘게 고집하고 있는데 이 정책을 혐오하는 대다수의 수원 팬들도 만약 올리가 수원의 감독으로 부임한다면 적극 환영한다는 입장이다.[3]

  • 한국 문화에 생소한 동유럽 출신임에도 한국적인 사고와 매사에 적극적인 훈련태도로 김호 감독 및 동료 선수들로부터 돈독한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형 용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인지 커뮤니티에서는 차기 한국 대표팀 감독을 논할때 종종 후보로 거론되곤 했다.

  •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을 정도로 외국인 선수 치고 한국 음식에도 잘 적응했다. 실제 은퇴 후 한 인터뷰에 따르면 일주일에 몇 번씩 가족들과 한국 식당에 가서 한국 음식을 즐긴다고 밝혔다.

  • 수원 삼성에서 뛰던 시절에는 빅매치를 앞두고 합숙을 꺼리던 외국인 선수들에게 올리가 먼저 합숙을 제시하는 등 샤샤, 데니스 등 팀 내 외국인 선수들 사이에서 맏형 노릇을 했다.

  • 선수 시절 모습과 은퇴 후 모습을 비교해 보면 살이 많이 불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게다가 감독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아직 50대 초반인데도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인다.

  • 올리는 선수 시절부터 김호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는데, 당시 가르침을 일일이 적은 메모장을 아직도 간직하며, 김호처럼 지도자로서 선수들 훈련을 강하게 시키고 있다고 한다.

  • 장쑤 감독이던 2019년 8월 대한민국을 방문, 20년 만에 수원 홈 그라운드에 서게 되었다.[4] 김호 감독과 고종수, 박건하 등 수원 시절 같이 뛰던 동료들의 안부를 물었고, 최근 구단에 대한 모기업의 투자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안타까움을 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구단은 투자규모가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해체해버렸다.


6. 관련 문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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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 아흘리 감독직과 동시에 직무 수행[2] 정확히는 90년대 초반이 전성기였고, 1994년 강팀 아르헨티나를 꺾고 8강에 올라서 최전성기를 맞았다. 유로 1996에 유력한 우승후보중의 하나였으나, 거기서 망하면서부터 하락 90년대 중반부터는 쇠퇴기였다.[3] 다만 가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올리가 수원 감독으로 부임할 확률은 매우 낮다. 예전만 못한 자금력으로 매년 선수 영입면에서도 활발히 참여를 못하고 있는데 감독으로서 상당한 성과를 쌓아 올린 올리를 수원 감독으로 데려오기에는 그만큼 연봉을 맞춰줄 수 없기 때문이다.[4] 다만 올리가 수원에서 뛰던 시절 홈 구장은 현재 수원 FC가 쓰고 있는 수원종합운동장이었다. 올리가 수원을 퇴단한 지 1년 뒤인 2001년 수원월드컵경기장이 준공되며 홈 구장을 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