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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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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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
Coen brothers


파일:external/movie.daum-img.net/people_101011.jpg

왼쪽이 동생 에단 코엔, 오른쪽이 형 조엘 코엔 판박이
이름
형: 조엘 코엔 (Joel Coen)
동생: 에단 코엔 (Ethan Coen)
출생
조엘: 1954년 11월 29일 (69세)
에단: 1957년 9월 21일 (66세)
직업
영화 감독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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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데뷔
1984년 영화 분노의 저격자
배우자
조엘: 프란시스 맥도맨드(1984년~현재)
에단: 트리샤 쿡(1990년~현재)
1. 개요
2. 경력
3. 성향
4. 여담
5. 기타
6. 필모그래피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형제 감독이다.


2. 경력[편집]


1984년 《분노의 저격자》(Blood Simple)로 데뷔한 이래 유수의 작품들을 만들어 낸 예술영화, 독립영화 감독들이다. 그 이전에는 샘 레이미의 호러 걸작 《이블 데드》 에 편집 조수로 참여하며 꾸준히 영화 관련 일을 하던 경력도 있다[1].

칸 영화제 대상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골든글로브 각본상을 모두 석권해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초기 영화 크레딧에는 형인 조엘 코엔(1954년생)이 감독으로 올라가 있고, 동생인 에단 코엔(1957년생)이 제작자로 구분되어 있지만 공동 감독을 허용하지 않는 미국감독협회 규정으로 인해 크레딧을 나눈 것이며 비공식적으로는 공동으로 감독을 하였다. 《레이디킬러》 이후로는 규정이 바뀌어 공동감독으로 올라간다. 편집도 둘이서 하는데 로더릭 제인스(Roderick Jaynes)라는 가명을 사용한다.[2] 이 로더릭 제인스는 《파고》로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로 오를 때까지는 미스테리의 인물이었는데 말론 브란도의 수상 거부 사건 이후로 대리 수상을 허용하지 않는 아카데미의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라는 것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규정을 알기 전까지는 알버트 피니를 대신 보내려 했다나.

데뷔작은 블러드 심플 (분노의 저격자)이다.《분노의 저격자》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제임스 M. 케인 풍의 작품이다. 형제는 시나리오 집필을 완료했지만 이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단 3분 길이의 예고편을 먼저 촬영한 다음, 그들의 고향인 미니애폴리스의 유대인 자선단체 '허대서' 사무실로 가서 그 지역의 부유한 유대인 100명의 명단을 부탁했다. 외모와 이름을 봐도 알겠지만 코엔 형제는 유대인이라서 동족인 유대인 부자들에게 부탁해 제작비를 지원받으려 한 것이다. 명단에 나온 고향 유대인들에게 예고편[3]을 보여줬고 잠재력이 있다고 느낀 68명에게서 85만 5천 달러의 제작비를 받은 코엔 형제는 그 돈으로 8주 만에 영화를 완성했다.


3. 성향[편집]


형은 조엘 코엔(1954~), 동생은 에단 코엔(1957~)으로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시나리오도 함께 쓰고 있다. 코엔 형제의 작품색은 상당히 뚜렷해서 사전정보가 없는 사람도 코엔 형제의 작품임을 쉽게 눈치챌 정도이다. 어딘가 엇나가있는 등장인물들의 오해가 겹치고 겹쳐 블랙 코미디적인 파국을 보여준다. 그 냉랭하고 건조한 대사처리나 시선은 타란티노로드리게스 같은 악동 감독과도 겹치는 면이 있지만 그렇게 막나가지는 않고, 꽤 절제되어 있는 편이다. 특히 느린 호흡 속에서 긴장을 끌어내는 실력은 최고급으로 소리나 조명, 소품, 상황 조성에 영상미 등 하나도 빼놓을 것이 없다. 이제는 개봉된 지 40년되는 데뷔작부터 이미 연출이나 작품색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무서움을 알 수 있다. 촬영 시에 스토리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필요한 신만 정확히 찍고 끝낸다고 하며 배우들의 애드립을 허용하지 않아 완성된 영화와 각본과의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제외였던 배우는 존 터투로인데, 《위대한 레보스키》에서 터투로는 작은 장면에서 나오지만 개그씬이라 배우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줬다. 볼링공을 혀로 핥는 행위나, 매니큐어, 춤사위 등은 코엔 형제가 연출한 게 아니라 터투로 본인이 제안한 것이였다. 터투로도 이걸로 "나 코엔 형제 영화에서 애드립 한 사람이야"라고 주변에 자랑하고 다니는 듯 하다. 그리고 터투로 본인이 작중에서 굉장히 활약했다.

같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계속해서 기용하는 편인데, 초기에는 스티브 부세미, 프란시스 맥도맨드, 존 굿맨, 존 터투로가 코엔 사단 배우들이었으며 이후에는 조지 클루니를 자주 기용한다. 다만 클루니가 출연한 영화들은 약간 평이 갈린다. 스태프로는 촬영감독인 로저 디킨스가 《번 애프터 리딩[4], 《인사이드 르윈[5]을 제외하면 《바톤 핑크》 이후의 모든 작품을 맡았으며 그 외에도 의상담당자나 음향편집 등을 비롯한 많은 스태프들이 지속적으로 기용되고 있다. 그 덕분에 영화 촬영장은 가족같은 분위기이며 스태프들이 기계처럼 알아서 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촬영이 가능하다고 한다. 맨 인 블랙 실사영화 시리즈, 아담스 패밀리의 감독인 배리 소넌펠드가 《분노의 저격자》, 《아리조나 유괴사건》, 《밀러스 크로싱》의 촬영감독을 맡기도 했다. 조엘과 뉴욕대 영화과 동기인 인연인 듯. 조엘이 뉴욕 대학교 영화과를 다니면서 그렇게 크게 배운 건 없고 졸업해서 소규모 영화에서 편집일을 하면서 배운 것이 대학에서 4년동안 배운 것 보다 많다고 한다.(...) 동생 에단은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는데 그 시절부터 연극을 위한 희곡을 쓰며 대학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4. 여담[편집]


칸 영화제가 사랑하는 감독이기도 한데 《밀러스 크로싱》으로 가장 먼저 초대된 이후, 《바톤 핑크[6] 때 황금종려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동시에 수상하였고,[7]파고》,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인사이드 르윈》이 감독상과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칸 영화제에서 가장 많이 수상한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국제 영화제의 수상과는 달리 아카데미 시상식은 《파고》의 각본상 수상 말고는 수상실적이 없었는데 2007년 드디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색상을 받았다. 그 이후 2010년에는 《트루 그릿》으로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하나도 수상하지 못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인터뷰 모음집도 출간되었는데, 제목은 《코언 형제 부조화와 난센스》. 무덤덤하고 흥미 없어 보이는 태도로 인터뷰하기 힘든 대상으로도 알려져 있다. 덧붙여서 두사람이 인터뷰 때 가장 듣기 싫은 질문은 "둘이 얼마나 싸우나?". 하지만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거의 싸우지 않았으며, 의견이 불일치하는 경우도 적다고 한다. 반대로 DVD 등지에서는 굉장한 개드립을 날려대기로 악명높다. 블러드 심플 DVD가 나왔을땐 한 배우가 가상의 제작사 포에버 영 필름스 소속의 감독 케네스 로링으로 출연하여 엉터리 정보를 늘어놓는 본편 음성해설을 집어넣어 사람들을 여럿 뒤집어놨으며[8] 위대한 레보스키 10주년 상영회때도 복원관련 개드립을 날렸다가 네이버 기자가 낚이기도 했다.[9]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만큼 인지도는 높은 편이지만, 흥행은 그에 비하면 다소 저조한 편이다. 2008년 개봉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지만, 그외의 작품 흥행은 별 볼 일 없다. 그나마 한국 개봉작에서 가장 대박이 《파고》로 서울관객이 9만 6천 명이라 전국관객이 적어도 20만 정도로 추정된다. 이게 그나마 가장 대박이니 말 다했다. 이건 코엔 형제 영화가 국내 관객들 취향과 다르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코엔 형제 영화는 항상 비수기 시즌에 개봉하고[10]...덕분에 흥행할만한 영화도 잘 안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린 안될거야 아마... 그렇긴 해도 엄청나게 적은 상영관 속에서도 선전한다. 비흥행 감독이니 그렇게 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는 전국에서 겨우 16개 극장(그것도 주말은 교체 상영)에서 상영했음에도 전국 6만이 넘는 상당한 선전을 펼쳤다. 이건 독립영화 흥행 범위 2014년 《인사이드 르윈 》도 적은 상영관에서도 10만 명을 동원하며 다양성 영화 중에서 상당히 흥행한 영화가 되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트루 그릿의 앤솔리지 시리즈 《카우보이의 노래》 로 영화 배급이 아닌 첫 넷플릭스 제작 하였고 2018년에 공개되었다.

한국에선 이들이 미국에서 활동해서 그런지 그냥 할리우드 감독으로 치부하는 면도 보인다. 이들은 유럽에선 꽤 거장급 예술영화 감독으로 인정받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할리우드 시스템 바깥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어서 칼같이 구분하기도 애매하긴 하다.

두 형제간 얼굴은 판박이이지만, 키 차이가 매우 크다. 그리고 둘다 지금 70이 다되어가지만 동안이다.


5. 기타[편집]


데뷔작부터 함께 해온 배우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형인 조엘 코엔과 결혼하였으며, 8편의 작품을 함께 했다. 그중 《파고》의 경찰서장 역은 맥도먼드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었다. 《분노의 저격자》가 개봉한 후 코엔 형제, 샘 레이미, 프란시스 맥도맨드, 홀리 헌터[11], 캐시 베이츠 등이 LA에서 한 동안 함께 살기도 하였다. 동생 에단은 동료 편집 기사인 트리샤 쿡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들의 많은 영화들의 편집자가 로데릭 제인스라고 나오지만 사실 이건 코엔 형제 본인이다. 그래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상 후보로 얼굴이 뜰 때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우디 앨런의 사진이 나온다.

넷플릭스는 예술을 살아있게 해준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흑백영화는 상을 부른다는 발언을 했다.#

2021년 8월 조엘 코엔의 단독 데뷔작인 맥베스의 비극과 관련해 작곡자 카터 버웰이 LA 매거진과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에서 카터는 에단이 인터뷰 시점에서 연극으로 관심을 돌렸으며[12], 당분간 영화를 만들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

하지만 에단 코엔도 형인 조엘 코엔이 맥베스의 비극으로 단독 데뷔한것처럼, 단독 데뷔작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 자신의 아내인 트리샤 쿡과 공동 각본을 맡는 작품이며, 레즈비언 로드트립 코미디 영화라고.[13] 또한 단독으로 제리 리 루이스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6. 필모그래피[편집]


조엘 코엔 & 에단 코엔 감독 장편 연출 작품



연도
제목
제작
연출
각본
비고
1984
블러드 심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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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1986
크라임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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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아리조나 유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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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밀러스 크로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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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바톤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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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1994
허드서커 대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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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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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1998
위대한 레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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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편집
2000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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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편집
2001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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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편집
2003
참을 수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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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편집
2004
레이디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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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편집
2006
사랑해, 파리 中
튈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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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단편
2007
그들 각자의 영화관 中
월드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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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단편
200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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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편집
2008
번 애프터 리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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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편집
2009
시리어스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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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0
트루 그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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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3
인사이드 르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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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4
언브로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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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스파이 브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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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헤일, 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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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
서버비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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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카우보이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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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1
맥베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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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14]
2023
드라이브 어웨이 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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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15]


7.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0 21:50:06에 나무위키 코엔 형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참고로 imdb 이블데드 항목을 보면 조엘 코엔이 편집 조수로 참여한건 맞지만 메인 편집자는 따로 있는데다 각본에 참여한 적은 없는 것으로 나와있다.[2] 맥베스의 비극은 에단 코엔이 참여를 안해서 레지날드 제인스로 크레딧이 올라갔다.[3] 그 트레일러[4] 촬영감독은 엠마누엘 루베즈키[5] 촬영감독은 브루노 델보넬. 델보넬과 함께 최근에 합이 잘맞아서 디킨스와 더불어서 카우보이의 노래부터 같이 협업을 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디킨스가 바쁘면 앞으로 델보넬을 계속 기용할 모양.[6] 정은임 라디오 해설 94.12.14-박찬욱-바톤 핑크[7] 당시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이었던 로만 폴란스키바톤 핑크에 환장해 그 영화에 상을 매우 줬다고 한다.(..)[8] 차내 장면은 차와 배우들을 거꾸로 매달고 찍었다느니, 영화에 나오는 개는 애니매트로닉스 로봇이라느니, 사립탐정 캐릭터는 원래 불가리아 독재자 지브코프의 아들이라느니 따위의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만 골라서 해댔다.[9] "10주년 기념판을 위해 리마스터링 작업을 하려 했지만 이 영화의 네거티브 필름은 사고로 사라졌다. 수소문 끝에 이탈리아의 한 수집가가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어 더빙판을 찾게 되었지만, 필름 상태는 최악이었다고 한다. 알칼리 용액으로 꼼꼼히 씻은 후 초음파 광선으로 건조시켜서 필름은 어느 정도 상태가 개선되었지만, 문제는 대사가 이탈리아였다는 것! 결국 출연했던 배우들이 다시 녹음했는데 존 굿맨이 바빠서 성대모사 달인을 데려와 녹음했다."라는 거짓말이였다. 당시 코엔 형제의 명성과 연도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네가티브가 아니였다는게 함정.[10] 대부분이 3,4월 아니면 9,10월 새학기 시즌에 개봉[11] 《분노의 저격자》에 가장 먼저 캐스팅되었으나 스케줄로 하차하였고, 당시 룸메이트였던 맥도먼드에게 역을 추천하여 맥도먼드가 캐스팅되었다. 이후 《아리조나 유괴사건》,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에 출연하였고 《아리조나 유괴사건》의 에드 역은 처음부터 홀리 헌터를 모델로 삼아 만든 캐릭터이다.[12] 둘이 불화가 있어서 헤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13] 조엘 코엔에 의하면 맥베스의 비극 제작당시 에단은 셰익스피어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14] 조엘 코엔만 참여.[15] 에단 코엔만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