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쿠보 히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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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bgcolor=#000000> 감독 || 90 코쿠보 히로키 ||
||<bgcolor=#000000> 1군 || 95 나라하라 히로시(수석코치) · 94 쿠라노 신지(수석투수코치 겸 수석코디네이터) · 72 나카타 켄이치(투수코치)
72 와카타베 켄이치(투수코치) · 78 무라카미 타카유키(타격코치) · 93 무라마츠 아리히토(타격코치)
80 혼다 유이치(내야수비·주루·작전코치) · 87 이데 타츠야(외야수비·주루·작전코치) · 84 타카야 히로아키(배터리코치) ||
||<bgcolor=#000000> 2군 || 74 마츠야마 히데아키(2군 감독) · 76 테라하라 하야토(투수코치) · 77 요시모토 료(타격코치) · 88 아카시 켄지(타격코치)
82 타카타 토모키(내야수비·주루코치) · 96 키도코로 류마(외야수비·주루코치) · 83 시미즈 마사우미(배터리코치) ||
||<bgcolor=#000000> 3군 || 85 오가와 히로시(3군 감독) · 86 사쿠모토 마사히로(투수수석코치) · 97 마키타 카즈히사(투수코치) · 75 오미치 노리요시(타격코치)
91 카네코 케이스케(내야수비·주루코치) · 98 타카나미 후미카즈(외야수비·주루코치) · 95 요시츠루 켄지(배터리코치) ||
||<bgcolor=#000000> 4군 || 011 사이토 카즈미(4군 감독) · 012 카와고에 히데타카(투수수석코치) · 013 모리카사 시게루(타격코치)
014 사사가와 타카시(내야수비·주루코치) · 016 마토야마 테츠야(배터리코치) · 017 모리야마 료지(투수 재활코치)
019 세키가와 코이치(야수 코디네이터) · 020 호시노 쥰(투수 코디네이터) · 022 모리 히로유키(배터리 코디네이터) ||
||<-2><bgcolor=#fcc800,#fcc800>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선수 ||
||<bgcolor=#ffffff,#1f2023><:><-3>틀: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돌아가기 ||
||<-2><height=30><bgcolor=#ffffff,#1f2023> 다른 NPB 팀 명단 보기 ||


고쿠보 히로키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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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9다이에.pn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5.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99[1]
2011


파일: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로고.svg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bd5c24 동메달}}}
1992

파일:WBSC 프리미어 12 엠블럼.svg
2015 프리미어 12
{{{#c63 동메달(감독)

2015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5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후쿠라 준이치
(오릭스 블루웨이브)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오오시마 코이치
(오릭스 블루웨이브)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오오시마 코이치
(오릭스 블루웨이브)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훌리오 프랑코
(치바 롯데 마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1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알렉스 카브레라
(오릭스 버팔로즈)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대호
(오릭스 버팔로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5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츠지 하츠히코
(세이부 라이온즈)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오오시마 코이치
(오릭스 블루웨이브)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10, 201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타카하시 신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나바 아츠노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5년 퍼시픽 리그 최다 홈런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년 퍼시픽 리그 최다 타점



고쿠보 히로키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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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6b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번호 9번}}}
우치노쿠라 타카시
(1991~1993)

고쿠보 히로키
(1994~2003)


임시결번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6번}}}
카와이 마사히로
(2000~2003)

고쿠보 히로키
(2004~2006)


코사카 마코토
(2007~2008)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9번
임시결번

고쿠보 히로키
(2007~2012)


야나기타 유키
(2015~)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등번호 90번
공번

고쿠보 히로키
(2013~2017)


타구치 카즈토
(2017~2019)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90번
로베르트 수아레스
(2016~2019)

고쿠보 히로키
(2021~)


현역



파일:고쿠보 히로키 소프트뱅크.jpg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No.90


고쿠보 히로키
小久保裕紀 | Hiroki Kokubo

생년월일
1971년 10월 8일 (52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신지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학력
와카야마현립 세이린 고교 (와카야마)[1] -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신체
182cm, 87kg
포지션
3루수, 1루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3년 드래프트 2라운드 (다이에)[역지명]
소속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4~2003)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4~2006)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7~2012)
지도자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3~2017)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수석코치 (2021)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 감독 (2022~2023)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2024~)
응원가
요미우리 시절[2][3]
소프트뱅크 시절[4]

1. 개요
2. 선수 생활
3. 지도자 생활
4. 기타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이다.

선수 시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거포 내야수로서 활약을 하였고 양 구단에서 주장을 맡기도 했다. 다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의 선수 생활은 3년뿐이었고, 그 이전과 이후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프로 선수생활은 호크스에서 했기에 후쿠오카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여겨진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사단법인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의 제10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2. 선수 생활[편집]


파일:external/cdn.mainichi.jp/011.jpg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에서 주전으로 뛰며 팀을 사상 첫 대학야구 일본제일 팀으로 만들기도 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일본 대표팀으로 참여해,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 후, 1993년 역지명 형식[5]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드래프트 2위로 입단한다.

입단 직후부터 오 사다하루 감독에게 자질을 인정받았고, 데뷔 해엔 조금 저조한 성적을 찍었지만 서서히 성장해가며 2년차부터 본격적으로 비밀번호를 열심히 찍고 있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주전 2루수로 정착해 주축 타자로 활약했다. 광활한 후쿠오카 돔을 사용하면서도 1995년도 퍼시픽리그 홈런왕(28홈런)[6][7][8] 1997년 퍼시픽리그 타점왕(114타점)을 수상했을 정도로 호쾌한 장타가 매력이었던 선수였다. 쿠도 키미야스, 아키야마 코지, 조지마 겐지 등과 함께 다이에의 중심 선수로 활약하면서 1999년 일본시리즈 우승, 2000년 리그 연패에 공헌하는 등 호크스의 암흑기 탈출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한다.

그렇게 2001년 44홈런 123타점[9], 2002년에도 32홈런을 치는 등 중심타자로서 꾸준한 활약을 했으나, 2003년 시범경기에서 부상[10]을 입게 되어 한 시즌을 날리게 된다. 고쿠보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이구치 타다히토, 마쓰나카 노부히코, 조지마 겐지, 페드로 발데스"100타점 4인방"으로 대표되는 다이에의 일명 다이하드 타선은 쉴새없이 불을 뿜었고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토시야, 와다 츠요시, 아라카키 나기사 등 호화 투수진의 활약이 더해진 다이에는 한신 타이거즈와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11]팬들은 물론 선수들도 이 핵타선에 고쿠보까지 부상에서 돌아온다면 다이에 타선은 내년에도 최강이다!라고 예상했으나...

2003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무보상 트레이드 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난다! 부상 치료비 지급을 둘러싼 구단과의 트러블이 원인이었다고 하는데, 이전까지 팀의 성골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선수단의 리더였던 고쿠보를 허무하게 떠나보내게 된 선수단과 팬들은 당연히 멘붕에 빠졌고, 선수단은 항의의 의미로 이해 시즌 종료 후 예정되었던 우승 여행을 보이콧하며 고쿠보를 그따위 방식으로 허무하게 방출시킨 구단을 거세게 비난하였다.[12] 트레이드 자체는 고쿠보가 먼저 요구했다고 하지만...[13]

이 무상 트레이드의 진실은 베일에 가려져있었으나, 고쿠보의 자서전이 출판되고 나서 비로소 진실이 밝혀졌다. 트레이드를 원한 것은 본인으로, 단순히 수술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한다. 다이에 호크스의 운영진들은 선수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에도 화류계 여성들을 불러들이고, 심지어 경기가 끝난 다음 수훈선수와 그런 여성들이 사진을 찍도록 하는 등 구단 운영이 막장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선수의 성적이 아닌, 선수 굿즈 판매실적을 연봉협상에 반영하겠다는 등 도를 넘는 짓들을 하기 시작했고 고쿠보는 이런 것들에 지속적으로 항의하는 입장이었다.[14] 이후 고쿠보가 2003년 큰 부상을 당하고 나서 수술을 미국에서 하겠다고 추진했으나 구단 측에서 돈이 많이 든다며 취소했고, 이게 고쿠보가 가진 마지막 인내심을 끊는 계기가 되어 타팀으로 이적을 요청하게 된다. 호크스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입장이었으며 딱히 요미우리 이적을 요청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다이에와 요미우리간에 어떤 계약이 있었는지도 본인은 알지 못 한다고 한다.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7f506cce.jpg
우여곡절 끝에 요미우리에 입단한 고쿠보는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4년에는 요미우리 우타자로는 사상 최초로 40홈런을 돌파(41홈런)하며 컴백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는 리더십을 인정받아 이적 선수로서는 최초로 요미우리의 주장에 선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승엽에게 4번타자 자리 빼앗긴건 함정 요미우리의 지독한 순혈주의를 생각하면 대단히 이례적인 사례. 다만 그 시절 요미우리는 막장 감독 호리우치 츠네오 아래에서 구단 사상 초유의 암흑기(래봐야 2년 연속 B클래스이지만)를 겪던 때라 고쿠보의 활약이 다소 빛바랜 감은 있다.

파일:external/athlete-maniax.blog.so-net.ne.jp/E5B08FE4B985E4BF9DE8A395E7B480.jpg
2006년 시즌 종료 후 FA자격을 취득했고, 친정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금의환향해 은퇴할 때까지 뛰었다. 복귀의 가장 큰 이유는 오 사다하루 감독을 행가레 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클린업 트리오의 일각으로 활약했으며, 2011년에는 40세의 나이로 일본시리즈 MVP를 차지하면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가 되었다.[15]

파일:external/hwd.heteml.jp/20120625_31695.jpg
(선수 마지막 해인 2012년 2000안타를 돌파한 모습)

2012년 통산 2,041안타, 413홈런의 대기록을 세운 후 명예롭게 은퇴했다. 그러나 정작 은퇴경기가 됐던 2012년 정규시즌 마지막 홈 경기인 10월 8일 경기에 팀은 상대팀 투수인 오릭스 버팔로즈니시 유키에게 노히트 노런을 헌납했다. 고쿠보 본인이 선수생활 하는 동안 처음으로 경험하는 노히트 노런 경기였다고(...). 심지어 이 날은 본인의 생일이기도 했는데...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퇴 선물


3. 지도자 생활[편집]


이듬해인 2013년부터는 NHK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16]


3.1. 2015 WBSC 프리미어 12[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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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낄낄
Go KBO
2015 WBSC 프리미어 12를 통해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첫 데뷔 대회를 치루게 되었다. MLB 사무국에서 메이저리거들의 출전을 불허함에 따라 강력한 자국리그를 보유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은 단숨에 우승후보 1순위로 평가받게 되었다.[17] 세간의 예상대로 고쿠보 호는 대회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들은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개막전 5:0 완승을 시작으로 5전 전승으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도 승리하며, 대회 총 6전 전승 파죽지세로 4강에 진출했다. 4강전 역시 선발투수 오타니 쇼헤이[18]의 호투에 힘업어 8회까지 3:0 리드를 가져갔지만 9회초 이른바 도쿄 대첩을 허용하며 대회 초대 우승의 영광을 안방에서 놓치게 되었다. 이후 멕시코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3,4위 결정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비판적인 여론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대회 후 그에 대한 경질설이 연일 불거지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 야구계는 이번 대회가 그가 감독으로서 치룬 첫 대회라는 점과 정말 중요한 대회는 다가올 2017 WBC2020 도쿄 올림픽이라는 점을 이유로 그를 연임시켰다.


3.2.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운 고쿠보 히로키 감독의 임기 마지막 대회로 이번 대회의 성적에 따라 2019 WBSC 프리미어 122020 도쿄 올림픽까지 그가 지휘봉을 잡을 수 있을지 결정되는 대회였다. 고쿠보 히로키 감독 개인적으로서 역시 지난 2015 WBSC 프리미어 12에서의 부진[19]의 치욕을 한번에 되갚을 수 있는 대회이기도 하였다.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쿠바, 호주, 중국과 1라운드 B조에 배치되었다. 고쿠보호는 아마 최강 쿠바전 11:6 대승을 시작으로 호주전 4:1 승, 중국전 7:1 승, 최종 3전 전승을 거두며 2라운드에 진출했다.

2라운드 역시 네덜란드전 8:6 승, 쿠바전 8:5 승, 이스라엘전 8:3 승, 최종 3전 전승을 거두며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WBC 전 대회 4강 이상 진출에 성공했다.[20]

이어진 4강전, 메이저리거 올스타들로 중무장한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을 만났지만 2:1 석패를 거두며 8년만의 세계 야구 패권 탈환은 4년 후로 미루게 되었다. 하지만 단 한명의 메이저리거[21]만을 포함한 채 전원 자국리거로 미국을 상대한 고쿠보호는 실력면에서 전혀 뒤쳐지지 않는 명경기를 선보이며 세계 야구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스가노 도모유키는 메이저리거 올스타 타선을 상대로 6이닝 비자책 호투를 펼치며 일본프로야구의 높은 수준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결국 당초 목표로 삼았던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일본인 메이저리거들의 연이은 불참[22] 속에서 WBC 4대회 연속 4강이라는 호성적, 세계 최강 미국과의 호각으로 고쿠보 히로키는 지난 대회에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는 것에 성공하였고, 처음에는 재계약을 통해 2020 도쿄 올림픽까지 지휘봉을 잡게 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오퍼를 고사하고 스스로 감독직을 그만뒀다. 후임은 야쿠르트, 니혼햄 캡틴 출신인 이나바 아츠노리.

그러나 고쿠보 감독의 WBC 성적으론 애당초 올림픽까지는 무리였다는 의견이 많은데, 애당초 WBC 4강은 일본 입장에서는 큰 성적도 아니기 때문인게 고쿠보 감독 이전 감독인 야마모토 고지 감독이 이끄는 2013 WBC 대표팀도 큰 무리 없이 4강은 갔기 때문이다.[23] 고쿠보 감독의 4강도 지난번 프리미어 12에서 일본을 쓰러뜨린 한국이 1라운드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 한 언플이란 것이다. 자국 리그가 탄탄한 일본 입장에서는 4강 정도는 사실 본전치기인 성적인 것이다. 그래서 실제론 일본야구협회도 언플은 했지만 협회가 원하던 성적은 프리미어 12 우승, 그리고 WBC 준우승 정도의 성적이었기에 프리미어 12 3위와 WBC 4강의 성적을 이끈 고쿠보 감독은 애초에 재계약은 무리였다는 게 평론이다.


3.3.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편집]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뒤 2021 시즌부터 데뷔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수석코치로 돌아와 쿠도 키미야스 감독을 보좌하게 되었다. 쿠도 감독과는 요미우리 시절인 2006년 이후 15년 만의 재회.

하지만 현장 복귀 이후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다. 취임 1년차부터 호크스 팬덤 내에서 금지어화가 진행중으로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벤치를 싸늘하게 만드는가 하면 오로지 자신의 야구 철학만을 가지고 팀 운영에 관여,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24] 팀을 망치는 1등공신으로 찍혔다. 오죽했으면 쿠도 감독이 타격에 대한 전권을 고쿠보에게 맡겼음에도 결과가 신통치 않아 다시 본인이 타격에 재차 관여하자마자 팀 타선이 나아지는 등 명색이 2000안타-400홈런을 기록한 대타자 출신 코치가 투수 출신 감독보다 타선 운영을 못하는 희한한 광경을 보여줬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올드스쿨식 반복 훈련을 도입하는가 하면 선수 개개인의 성향이나 특징도 파악하지 못해 무작정 작전을 남발하다 실패하여 기껏 만든 찬스를 날리는 등 호크스 팬들의 뒷목을 수도 없이 잡게 만들었으나 차기 감독직이 유력한 1군 수석 코치라는 자리에 있는 데다 2021년 시즌 종료 후 쿠도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확정되면서 호크스 팬들은 차기 감독으로 고쿠보가 승격되는 참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며 매우 불안해했었다.

그러나 구단 수뇌부가 고쿠보의 능력 부족을 뒤늦게나마 인지한 듯 2군 감독이었던 후지모토 히로시를 1군 감독으로 승격시키고 공석이 된 2군 감독에 고쿠보를 보냈다. 그리고 후지모토는 비록 시즌 막판 중요한 경기를 연달아 놓치며 오릭스 버팔로즈에게 우승을 내줬지만 하위권을 전전했던 지난 해와는 달리 최후반까지 우승 경쟁을 벌이는 등 팀을 상위권으로 재차 올려놓으며 감독 선임은 그럭저럭 맞았던 선택이라 평가받는 중이다.

그러나 23시즌 후지모토가 연패를 거듭한 끝에 3위 턱걸이로 광탈을 확정짓자 탈락한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후임 감독 취임 사실이 발표되었다.

4. 기타[편집]


파일:external/baseballking.s3.amazonaws.com/465662190.jpg
파일:external/pds.joins.com/2015091221443348548_1.jpg
2015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았던 이종운 감독과 상당히 비슷하게 생겼다.
노래를 엄청 잘 한다고 한다. 그리고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아 성적이 뛰어났고, 은퇴한 지금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다만, 옷을 엄청 못 입는 것으로도 유명해 현역 시절엔 일본 야구계를 대표하는 패션 테러리스트 소리를 듣기도 했다.

소프트뱅크의 전신인 다이에 호크스 입단 시절 자신보다 2살 연상이자 7년 선배인 당시에만 해도 호크스의 거포 유망주로 키워지던 오미치 노리요시세계에서 가장 배트를 짧게 잡는 사나이 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물론 고쿠보 본인이 의도한건 아니고 신인시절 프리배팅에서 무지막지한 괴력을 뽐내자 그걸 지켜보던 오미치가 혀를 내두르면서 "장타자로 경쟁해서는 밥벌어 먹고 살기 힘들겠다." 라고 결심하고 극단적으로 배트를 짧게 잡는 컨택 히터가 된 계기를 주게 된것.

흑역사로 1997년 시즌오프에 프로야구 선수들[25]이 허위지출을 만들어 소득을 은폐함으로써 탈세를 꾀했던 프로야구 탈세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과 벌금 700만엔을 선고받고 커미셔너 징계로 제재금 400만엔, 8주간의 출장정지에 처해진 적이 있다. 이 당시 연루된 선수들 중 가장 탈세액이 많았기 때문에(2833만엔) 그만큼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받은 출장정지와 어깨 부상이 쌍으로 겹치면서 1998년 시즌을 거의 날렸고[26] 이듬해인 1999년 시즌에도 후유증이 가시지 않으면서 부진한 성적에 그쳤다.[27]

주니치에겐 저승사자 그 자체였는데[28] 요미우리 시절 가장 많은 홈런을 주니치에게 뽑아냈다. 2011년 일본시리즈를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룸메였던 이승엽은 한신 킬러...였지만 정작 둘이 한솥밥을 먹은 2006년 팀은 2년 연속 B클래스로 추락했다. 그것도 올스타전까지 꼴찌였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모리야스 하지메와 행보가 비슷하다. 먼저 고쿠보 히로키가 이끄는 야구 국가대표팀은 2015 WBSC 프리미어 12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연달아 3위를 기록하고, 모리야스 하지메가 이끄는 일본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2019 EAFF E-1 풋볼 챔피언십에서도 연달아 2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콩라인 게다가 2020 AFC U-23 챔피언십 태국에서 조별리그 꼴찌로 탈락하는 변수를 보여주면서 경질설과 해임설 등이 많았고, 고쿠보 히로키가 이끄는 일본이 다시는 보고싶지 않을 대참사를 당하고 멕시코3·4위전에서 홈런 5방을 포함해 11점으로 대거 난타하면서 콜드승을 거두었는데도 그에 대한 경질설이 연일 불거지게 되었다. 게다가 얼추 비슷한걸 또 뽑자면, 고쿠보 히로키가 이끄는 일본야구는 2015 WBSC 프리미어 12 준결승 한일전에서 패해 3·4위전에 대승을 거둬 3위에 머물고, 모리야스 하지메가 이끄는 일본축구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결승 한일전2019 EAFF E-1 풋볼 챔피언십 결승 한일전에서 패해 2위에 머물며 양쪽 감독 모두 한일전에 진 감독이 되었다. 고쿠보 감독이 충격이 더 클 것이다. 그래도 고쿠보는 개막전 조별리그 한일전에서 5:0으로 완봉승하고 모리야스는 2021년 한일전에서 3:0으로 떡실신시켜 설욕해서 두 감독 역시 한일전에 이긴 전적이 있게됐다. 또한 2022년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 한국을 3:0으로 완파하고 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콩라인을 벗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모리야스 재팬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첫경기에서부터 세계적인 강호인 독일을 잡고, 코스타리카전에서는 패배했지만 또 다른 최강팀 스페인을 잡아내면서 조별리그 1위를 차지하고 16강에 진출하는 어마어마한 이변을 일으켰다.[29] 그 후,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은 월드컵 대회 종료 후 2026 FIFA 월드컵까지 재계약을 했다. # 결정적으로 위의 모리야스 하지메가 고쿠보 히로키보다 확연하게 더 나은 성적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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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원외고에선 옛날에 일본어과가 이 학교와 교류를 맺어서 수업중 이 사람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역지명] [2] 전주:我等の旗の下 集いし戦士よ 力の限り 大きく羽ばたけ 小久保!(우리의 깃발 아래 모인 전사여 있는 힘껏 크게 날개쳐라 고쿠보!×4)[3] 千の夢を 胸に秘めた 勝利の申し子 その叡智と その力で 我等を導け(천개의 꿈을 가슴에 간직한 승리의 신이 내린 아이 그 지혜와 그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라)[4] 鷹のプレイグラウンドに 帰ってきたんだ 小久保戦えよ 勝利の為に(매의 플레이그라운드에 돌아왔다 고쿠보 싸워라 승리를 위해서)[5] 과거 NPB에 존재하던 제도로, 선수가 자신이 원하는 팀을 골라서 입단할 수 있었던 제도였다. 다른 지명구단은 본인이 주장으로도 몸담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6] 참고로 이 해에는 스즈키 이치로가 무려 타격 6관왕(타율, 타점, 득점, 최다안타, 출루율, 도루)을 달성했는데, 고쿠보가 이치로의 25홈런보다 3개 많은 28홈런을 치고 장타율도 다소 높게 나와서 타격 전부문 타이틀 획득을 저지한다. 이 해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이치로와 같은 홈런 수를 기록하면서 무관의 제왕 전설의 한 페이지를 쓴다.[7] 홈런왕 치곤 30홈런에도 미달했는데, 30홈런 미만의 홈런왕이 나온 건 1961년 나가시마 시게오, 노무라 카츠야, 나카타 요시히로(29홈런) 이후 무려 34년 만이었다. 다만 이해 퍼시픽 리그는 1980년대~2011년 이전을 통틀어 리그 전체 OPS가 6할대에 그친 유일한 해였을 정도로 심한 투고타저에 빠졌었다. 스즈키 이치로를 제외하면 3할 타자가 불과 3명에 그중 .310을 넘긴 타자는 단 1명도 없었으며, 심지어 타점왕은 고작 80타점에 이치로를 포함해 무려 3명이나 나왔을 정도.[8] 참고로 이해 3루타도 9개로 리그 1위를 차지했는데, 3루타+홈런왕 공동 1위는 단일리그 시절인 1947년의 오오시타 히로시 이래 무려 48년 만으로 양대리그 최초 기록이었다.[9] 이 정도 기록이면 홈런+타점왕은 따놓았겠지만.. 이때는 NPB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 시즌이었고 하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특유의 이테마에(쳐부숴라) 타선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때라, 당시 킨테츠의 중심타선을 맡고 있던 터피 로즈(홈런왕, 55홈런)와 나카무라 노리히로(타점왕, 132타점)에게 홈런, 타점왕 타이틀을 내줘야 했다. 그밖에 NPB데뷔하여 49홈런 124타점을 기록한 알렉스 카브레라도 있었다.팀도 리그 3연패를 놓친 건 덤이다[10] 홈플레이트 접전 도중 상대팀 포수와 충돌하며 무릎 전방 십자 인대 파열+내측 인대 손상+외부 반월판 연골 손상+경골 과 대퇴골 타박상 등 완치까지 최소 6개월이 필요한 중상을 입었다.[11] 이 해 고쿠보의 부상으로 인한 3루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콜업된 선수가 가와사키 무네노리다.[12] 당시 고쿠보 대신으로 4번 타자를 맡았던 마쓰나카 노부히코"구단에 "웃기지 마!!" 라고 말하고 싶다. 어째서 고쿠보 씨를 그렇게 공짜로 교진에 넘겨버린단 말인가?! 열심히 한 사람을 그렇게 간단히 방출했다면 다른 선수들도 (고쿠보 씨와) 똑같은 눈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닌가? 이 구단(다이에)은 이기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나 보다. (이 구단은 이제) 끝장이다. 팬들에겐 죄송하지만 내년에 리그 연패를 하겠다는 의지가 급격히 떨어져 버렸다." 라고 말하며 구단을 거세게 비난했고, 이해 긴 부상을 이겨내고 팀의 에이스로 활약한 사와무라상 수상 투수 사이토 카즈미"지금은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트레이드를 한 다이에 구단이) 부끄럽습니다. 아무리 봐도 일본 제일의 구단이 할 짓이 아닙니다. 선수를 모욕하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구단 비난에 동조했을 정도다. 그런데 결국 마츠나카의 말처럼 이듬해인 2004년, 다이에는 페넌트레이스 1위 달성에 성공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해 리그 연패에 실패했고, 이해 시즌 종료 후 다이에 구단은 소프트뱅크에 매각된다.[13] 공교롭게도 다이에는 경영난으로 인해 2004년 시즌 종료 후 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되고,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가 호크스 구단을 인수하게 된다.[14] 위에 나와 있듯이 호크스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1998년 이후(사실 이미 몰락의 조짐은 보였지만) 다이에는 자신들의 전성기를 만든 버블경제의 붕괴로 인해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 그래서 당연히 후쿠오카 돔을 자비로 짓기까지 한 다이에의 전성기에 비해(팀은 암흑기였지만) 구단에 대한 지원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어 저런 막장짓을 할 정도로 구단 자금사정이 악화된 것.[15] 고쿠보 이전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 기록은 1999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아키야마 코지였다. 2011년 아키야마는 소프트뱅크의 감독.[16] WBC, 올림픽, 프리미어12를 중점으로 준비할 것으로 예상된다.[17] 당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역시 메이저리거들을 전부 제외했다고는 하지만 마에다 겐타, 오타니 쇼헤이, 마키타 가즈히사 등의 예비 메이저리거들을 포함한 상당한 력이었다.[18] 이미 한국과의 개막전에서 6이닝 0실점 완벽투로 승리투수가 된 경험이 있었다.[19] 최종 성적은 3위로 낮다할 수 없지만 미국,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 네덜란드 등의 야구 강국들이 메이저리거들을 전원 제외한 채 치룬 대회에서의 성적이기에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20] 2006년 우승, 2009년 우승, 2013년 4강, 2017년 4강.[21] 아오키 노리치카 [22] 마에다 겐타, 다나카 마사히로, 다르빗슈 유, 타자와 준이치, 우에하라 고지 등이 대표팀 불참을 선언했다. 아오키 노리치카 만이 유일하게 메이저리거 신분으로서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23] 심지어 이 당시에는 메이저리거 차출에 실패해서 국내파로만 대회를 치렀었다.[24] 일례로 팀에서 가장 잘치는 타자를 4번으로 써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서 야나기타 유키를 무작정 4번으로 기용했는데 오히려 성적이 떨어지는 부작용만 초래했다. 전임 수석인 히라이시 요스케가 철저한 분석을 통해 타순 변동에 관여한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25] 코쿠보 외에도 팀 동료 후지이 마사오미야모토 신야, 타네다 히토시 등이 마찬가지로 탈세가 발각되어 기소 처분이나 커미셔너 징계를 받았다.[26] 17시합 타율 .225 2홈런[27] 130시합 타율 .234 24홈런 77타점. 당시 홈런과 타점은 팀 내 1위였지만 어깨 부상의 후유증이 타격에 영향을 미치면서 풀타임 4번타자로썬 썩 좋지 못한 성적을 남겼다.[28] 특히 50살 투수로 유명했던 야마모토 마사가 고쿠보의 홈런자판기 노릇을 했다.[29] 그리고 크로아티아와의 16강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보여줬고 아깝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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