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하이트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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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하이트캄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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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1965~1970).svg

16대, 23대


콘라트 하이트캄프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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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축구인


파일:conny-heidkamp003.jpg

이름
콘라트 하이트캄프
Konrad Heidkamp
본명
콘라트 "코니" 하이트캄프
Konrad 'Conny' Heidkamp
출생
1905년 9월 27일 /
독일국 뒤셀도르프
사망
1994년 3월 6일 (향년 88세) /
독일 바이에른뮌헨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신체
미상
직업
축구선수 (풀백 / 은퇴)
소속
선수
뒤셀도르프 SC 99 (1925~1928)
FC 바이에른 뮌헨 (1928~1936)
FC 바이에른 뮌헨 (1943~1945)
감독
FC 바이에른 뮌헨 (1943~1945)
국가대표
9경기 1골 (독일 / 1927~1930)

1. 개요
2. 생애
2.1. 선수 경력
3. 여담
4. 수상
4.1. 클럽
4.2. 개인



1. 개요[편집]


독일의 전 축구선수로 나치 독일 시기에 뒤셀도르프 SC 99와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했다.


2. 생애[편집]



2.1. 선수 경력[편집]



2.1.1. 클럽[편집]


하이트캄프는 뒤셀도르프 SC 99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하며 성장했다. 이때는 분데스리가가 없었기에 지역리그로 나눠져 있었다. 그 당시 베르그마르크 지역리그에는 두 라이벌 팀인 TuRU 뒤셀도르프포르투나 뒤셀도르프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의 데뷔 시즌인 1924/25시즌, TuRU 뒤셀도르프가 우승을 차지했고, 뒤셀도르프 SC 99는 3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SSV 엘버펠트와 포르투나 뒤셀도르프가 결승전에 올라갔다.

1925년 9월, 하이트캄프는 퓌르트에서 열린 서독일리그 대 남독일리그 대항전에 수비수로서 참가했다. 그리고 1928년에는 서부 독일리그[1] 대 북부 독일 리그 대항전 4강에서는 무려 3경기가 치러졌다. 첫 경기가 연장전 후 4-4로 끝나자 재경기가 치러졌고 또 2-2로 비기고 말았다. 2차 재경기에서 2-1로 승리를 거머쥐며 팀을 결승으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그는 뒤셀도르프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1927년의 우승과 1928년의 리그 2위 이후 올림픽에서 만난 바이에른 뮌헨 선수 루트비히 호프만의 도움으로 남독일의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다.

바이에른으로 이적한 뒤 '라인(Rhine)의 수류탄병사'[2] 라는 별명을 얻으며 1928/29시즌 바이에른 리그를 우승하며 남독일 컵에 진출했고, 결승에서 승리하며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출전하게 된다. 리하르트 호프만이 이끌던 드레스드너 SC를 3-0으로 완파하며 8강에 올라갔지만 8강에서 브레스라우어 SC 08에게 3-4로 패배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1930년과 1931년에는 바이에른 리그를 2연속 우승했으나 남독일 컵에서 연속 탈락하며 고배를 마셨다.

그의 클럽 경력 커리어 하이는 1931/32시즌에서였다. 바이에른 뮌헨은 남독일컵에서 TSV 1860 뮌헨을 상대로 승리해 우승했고, 남/동독일 컵에서 1. FC 뉘른베르크를 상대로 승리 후 북/서독일 컵에서 우승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또 승리했다. 1932년 4월 24일에는 VfB 슈투트가르트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했고, 5월 1일의 최종전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0대2로 패했지만 남부 독일리그 준우승팀 자격으로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참가할 수 있었다.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서는 주장으로 나서 미네르바 베를린 93을 상대로 4-2 승리를 챙겼다. 준결승전에서는 1.FC 뉘른베르크를 상대로 2-0으로 승리, 6월 16일에 치러진 결승에서는 리처드 돔비 감독이 팀을 이끌었고 주장 하이트캄프와 하링어가 수비 듀오를 결성했다. 이 승부수는 성공적이었고 팀은 무실점과 동시에 로흐와 크룸이 한골씩 넣어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2-0으로 완파하며 복수에 성공함과 동시에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그 해 바이에른 뮌헨은 55,000명의 팬들에게 바이에른 뮌헨 클럽 역사상 최초 독일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다음날 모든 대중매체는 평범한 경기에도 불구하고 뮌헨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잡지사들은 일제히 하링어, 하이트캄프, 골트브루너바이에른 뮌헨 최고의 선수로 뽑으며 이렇게 전했다.

독일 최고의 팀 바이에른 뮌헨이 챔피언이 되었다! 현재 독일 최고의 팀이 챔피언이다!"

'푸스발' 지


그 후 몇 년동안은 1. FC 뉘른베르크가 가울리가[3] 바이에른에서 우승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고 하이트캄프는 1936년 선수 은퇴 후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잠깐 BC 아우크스부르크의 코치직을 역임했다. 1943년에 38살의 나이로 깜짝 복귀하여 1945년까지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 겸 감독으로 일하다 은퇴함으로서 커리어를 마감했다.


2.1.2. 국가대표[편집]


1927년 11월 20일, 하이트캄프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쾰른에서 독일 국가대표팀에 데뷔했고 경기는 2-2로 비겼다.

1928년 올림픽에 명단에는 올라갔지만 게오르그 크뇌플레, 한스 칼브와 루트비히 라인베르게에 밀려 뛰지 못했고, 하이트캄프의 그 다음 경기는 1928년 9월16일의 덴마크전이었다. 독일이 덴마크를 상대로 2-1로 승리하는 과정에서 그는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에서 유일한 골을 후반 13분에 1-1 동점골로 터뜨렸다.

하이트캄프의 국가대표 최고의 경기를 꼽자면 1930년 5월 10일 베를린에서 열린 그의 8번째 경기, 잉글랜드전이었다. 그의 팀동료인 조제프 베르크마이어, 루트비히 호프만과 조제프 푀팅거와 함께 수비진에서 팀케미를 과시했고 리하르트 호프만의 해트 트릭에 힘입어 독일은 3-3으로 비겼다.

하이트캄프는 드레스덴에서 헝가리를 5-3으로 격파한 경기를 끝으로 대표팀에 더 이상 발탁되지 못했다. 통산 9경기 출전, 1골의 기록을 남겼다.


3. 여담[편집]


  • 1940년 나치 독일 국가원수 헤르만 괴링의 무기 제조를 위한 '금속 기부 캠페인' 당시 팀이 보유한 트로피메달들을 순순히 바친 다른 클럽들과 달리 바이에른 뮌헨은 모든 트로피들을 뮌헨 중앙에 위치한 클럽 사무실에 숨겼다. 하지만 뮌헨이 나치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하이트캄프의 아내 막달레나가 아이디어를 짜내 자신이 어릴때 별장으로 사용했던 볼프라츠하우젠 근교 아쉬홀딩에 있는 농장에 이 트로피와 메달들을 숨기기로 했다. 하이트캄프와 그의 아내는 이 클럽 보물들을 나무 박스에 구겨 담고 직접 트럭으로 극비리에 운송해 마구간 근처 방에 넣어놓았다. 1945년 미군들이 바이에른을 탈환할때까지 이 보물들은 안전하게 보관되었으나, 미군들의 약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한번 더 구출 작전을 펼쳐 다른 농장으로 옮기고 땅에 박스를 묻었다. 이 트로피들은 후에 바이에른 뮌헨 수뇌부들에 의해 발굴돼 다시 클럽으로 송환됐다. 25년 뒤 하이트캄프의 아내는 새로 지은 바이에른 뮌헨 수뇌부 건물에 찾아와 박스로서만 보았던 트로피들이 전시된 것을 보니 기쁘다고 전했다.
  • 하이트캄프의 아들도 이름이 같은 콘라트 하이트캄프이다. 아버지가 42살에 본 늦둥이였고, 기자비평가로 활동했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1회: 1932(바이에른 뮌헨)
  • 베르키슈-마르크스 지역 리그 우승 1회: 1925(뒤셀도르프 SC 99)
  • 베르치르크스리가 바이에른 우승 5회: 1928–29, 1929–30, 1930–31, 1931–32, 1932–33(바이에른 뮌헨)


4.2. 개인[편집]


  •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 헌액

[1] 에른스트 알브레흐트, 프리츠 스체판, 에른스트 쿠초라 등 많은 레전드들이 참가했다.[2] 수비수이면서도 정확하면서 강력한 슈팅으로 얻은 별명이다.[3] 나치 독일 시기의 독일 지역리그. 여기에서 우승해야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진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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