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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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글뤽스부르크 왕조 제7대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
Κωνσταντίνος Βʹ[1]


파일:콘스탄티노스 2세.jpg

출생
1940년 6월 2일
그리스 왕국 아테네 프시히코 궁전
사망
2023년 1월 10일 (향년 82세)
그리스 아테네
재위기간
그리스 국왕
1964년 3월 6일 ~ 1973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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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글뤽스부르크 가문
아버지
파블로스
어머니
하노버의 프리데리케
형제자매
소피아, 이리니[1]
배우자
덴마크의 아네마리[2] (1964년 결혼)
자녀
알렉시아, 파블로스, 니콜라오스, 테오도라, 필리포스
종교
정교회 (그리스 교회)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재위 배경과 퇴위
2.3. 군주제 폐지
2.4. 이미지 회복
2.5. 사망
3. 가족 관계
3.1. 조상
3.2. 자녀
4. 기타



1. 개요[편집]



파일:콘스탄티노스2세재위.jpg

국왕 재위 시절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 펠리페 6세의 외삼촌이다.[2]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아테네 근교 프시히코(Ψυχικό)에서 태어났다. 출생한 지 4개월 되는 때에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략했고, 이듬해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공하며 유년기를 피난지인 이집트남아프리카 연방에서 보내야 했다. 1946년 귀국하였으며, 1947년 아버지 파블로스 1세가 즉위하면서 태자가 되었다. 뛰어난 스포츠맨이기도 하며 1960 로마 올림픽 요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2.2. 재위 배경과 퇴위[편집]


1964년 3월 부왕이 암으로 승하하자 즉위하였으며, 9월 덴마크의 아네마리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아네마리 공주와의 결혼식 기록영화

그가 국왕이 된 때에는 그리스 정치에서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즉위 한 달 전 열린 총선거에서 11년간 그리스를 이끌던 우파 내각이 패하고 중도연합당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가 총리가 됐다. 처음에는 젊은 왕과 노(老)수상이 잘 이끌어갈 거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1965년 7월 그리스 군부 내 우익세력을 거세하려던 움직임이 있어 국방대신의 진퇴 문제가 나왔을 때 오히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 총리를 해임하고 같은 당 소속의 요르요스 노바스를 총리로 임명하자, 그리스는 그리스 좌파와 우파 간의 다툼이 심각해졌다.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국왕을 공공연히 부정하던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극심해졌고, 국왕이 총리를 지명하면 중도연합당이 장악한 의회가 거부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군부의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은 좌파들을 쓸어버려야 한다며 1967년 4월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당시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엔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듯 보였으나, 그해 12월 13일 근왕파 장교들과 손잡고 역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이 쿠데타가 실패하자 그는 일단 북부 그리스의 카발라로 파천하였다가, 이탈리아로마로 망명한다.

파파도풀로스는 왕만 쫓아냈지 측근인 요르요스 조이타키스를 섭정으로 임명하면서 왕정을 없애지는 않았으나, 이후 왕당파는 민주화 세력과 연대하여 반군사 정권 투쟁을 벌여 정권의 눈엣가시가 된다. 결국 파파도풀로스는 1973년 7월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을 폐지하는 것으로 응답했으며, 이로서 그는 공식적으로 폐위된다.


2.3. 군주제 폐지[편집]


그리스 군사정권 퇴진 이후 새로 들어선 카라만리스 총리의 과도 정부는 군사 정권의 왕정 폐지(헌법 개정)를 무효화했지만 그렇다고 1952년 제정된 민주헌법으로 복귀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1974년 12월 왕정 복고 국민 투표가 있었으나 콘스탄티노스 2세는 입국 금지된 상태로 TV연설로만 지지를 호소할 수 있었다. 결국 7:3으로 왕정 복고가 부결되면서, 콘스탄티노스 2세는 왕위를 되찾지 못했고, 75년 헌법이 제정되어 현 제3공화국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1946년 국민 투표에서 7:3으로 왕정이 유지된 것과는 대조적. 그래서 여전히 입국 금지를 먹은 채 돌아오지 못하고[3]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했고, 당시 정치인들로부터도 '멍청이', '암덩어리' 등의 비난을 들었다.

그는 결국 굴복하고 공화정을 인정했지만 그리스에서 그에 대한 여론은 굉장히 냉담해서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2세 총리 시절인 1994년에는 아예 국적 박탈을 당한다. 당시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유럽 왕들과 마찬가지로 성씨를 쓰지 않았는데[4] 그리스 정부에서 적법한 성씨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 국적을 부정한 것이다. 또한 왕실 재산과 관련해서도 그리스 정부와 소송을 벌였는데 그리스 정부는 "제대로 된 이름도 없는 사람이 뭔 소송이냐"면서 소송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소송을 위해 Κωνσταντίνος της Ελλάδας(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을 등록했다. 그리스 법원에서는 그의 소송을 기각했으나,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유럽인권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소송 끝에 2000년에 그리스 내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인정받았다. 자산은 그리스 정부 소유로 인정하고 대신 그리스 정부가 보상금을 옛 왕가에 지급하는 방식이다. 그리스 정계는 이를 비웃었는데, 그가 탈세한 금액이 많다고...기사


2.4. 이미지 회복[편집]


2004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Constantino de Grecia(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스페인어식)라는 이름으로 덴마크에서 외교관 여권을 발급받아 IOC 위원의 자격으로 입국하였다.[5] 이 방문을 계기로 그리스 정계와의 사이가 개선되었고 이후 런던과 그리스를 오가다가 2013년에 영구 귀국을 허락받아 그 뒤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포르토 헬리(Πορτοχέλι, Porto Cheli)에 거주하다가 2022년 초 아테네로 이사했다.

2000년대 이후 그리스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현 그리스 공화국 정부에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이미지가 매우 나빠지자 그 반대급부로 구 왕실에 대한 호감이 좀 높아졌다. 그리스 왕국 시절에는 그리스의 경제 기적이라고 할 만큼 견실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기도 했고. 그러나 입헌군주제왕정복고까지 갈 정도로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다. 그냥 현재 상황이 너무 안 좋다 보니 반대로 그 시절이 차라리 좀 더 나았다는 정도의 평.


2.5. 사망[편집]


나이가 있다 보니 201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었고, 2021년과 2022년에는 폐렴 및 코로나 19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2022년 9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사망과 장례 당시 가까운 친척(팔촌누나이자 친당숙모) 임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부인과 자식들만 참여했다. 바로 직전에 열린 큰처형(부인의 큰언니)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의 골든 주빌리(즉위 50주년) 기념 행사나 3월에 열린 필립 공 1주기 추모 예배도 불참했다.

결국 2023년 1월 5일에 호흡기 질환 등을 이유로 입원했다가 1월 10일 밤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그리스 정부에서는 공식 장례가 아닌 개인 장례로 치룬다고 발표했는데, 다음날 대변인이 애초에 국장 요구는 없었으며 총리가 개인적으로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했다고 밝혔다. 다만 장례식 당일 오전에 비공식적으로 유해 공개 및 참배(Lying-in-state)가 이루어졌다.



장례식은 1월 16일 낮(현지시간 기준)에 아테네 성모 희보 대성당에서 치루어졌다. 아테네 대주교 이에로니모스 2세가 집전했다. 스페인[6][7], 덴마크[8], 벨기에(필리프 국왕과 마틸드 왕비), 네덜란드(빌럼알렉산더르 국왕과 막시마 왕비, 베아트릭스 상왕), 스웨덴(칼 16세 구스타프, 실비아 왕비, 크리스티나 공주(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의 넷째 누나)), 룩셈부르크(앙리 대공), 모나코(알베르 2세), 노르웨이[9], 영국[10], 요르단, 리히텐슈타인 등 각국의 왕실 대표들(루마니아[11], 불가리아[12], 러시아[13] 등, 옛 왕가와 공가들도 포함)이 참석했고, 이후 유해는 그리스 왕족들이 묻혀있는 타토이 옛 궁전 왕실 묘지에 안치되었다.

참고로 미초타키스 내각에서는 문화부 장관만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이후 추가로 부총리도 같이 참석하는 것은 물론 다른 정부 인사들도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실제 장례식에는 정부 공식 대표 외 몇몇 신민주주의당 국회의원들이 참석했다.

3. 가족 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콘스탄티노스 2세
(Constantine II)
파블로스
(Paul)
콘스탄티노스 1세
(Constantine I)
요르요스 1세
(George I)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na of Russia)[14]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
(Princess Sophia of Prussia)
프리드리히 3세
(Frederick III)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15]
하노버의 프리데리케 공주
(Princess Frederica of Hanover)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Ernest Augustus, Duke of Brunswick)
하노버의 왕세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Ernest Augustus, Crown Prince of Hanover)[16]
덴마크의 티라 공주
(Princess Thyra of Denmark)[17]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
(Princess Victoria Louise of Prussia)
빌헬름 2세
(Wilhelm II)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Augusta Victoria of Schleswig-Holstein)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 / 자녀
1녀
알렉시아 공주[18]
(Princess Alexia)
1965년 7월 10일
카를로스 모랄레스 킨타타
슬하 1남 3녀
1남
파블로스 왕세자
(Pavlos, Crown Prince of Greece)
1967년 5월 20일
마리 샹탈 밀러[19]
슬하 4남 1녀[20][21]
2남
니콜라오스 왕자
(Prince Nikolaos)
1969년 10월 1일
타티아나 블라트니크
2녀
테오도라 공주
(Princess Theodora)
1983년 6월 9일
[22]
3남
필리포스 왕자
(Prince Philippos)
1986년 4월 29일
니나 플로어


4. 기타[편집]


본인이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인지라 영국 왕위 계승권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600여번째 순위인지라 의미가 없긴 하지만.[23]

아내는 프레데리크 9세의 3녀이자 현 덴마크의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의 동생 아나마리아로, 부부는 크리스티안 9세 기준으로 부계 8촌 관계이다. (빅토리아 여왕 기준으로도 친척으로, 콘스탄티노스 2세의 어머니 프레데리카 왕비 기준으로 하면 9촌, 아버지인 파블로스 기준으로 하면 8촌이다.) 아나마리아 왕비는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와 사촌관계이므로,[24] 스웨덴 왕실과도 가까운 인척이 된다.

미하이 1세와 고종사촌[25]이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 공과는 5촌지간[26]이며, 또한 찰스 3세와는 재종형제(6촌)이자 친구 사이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도 친척으로 빅토리아 여왕 기준으로 8촌 또는 9촌,[27] 크리스티안 9세 기준으로 8촌이다. 스페인 왕실과도 친척인데, 펠리페 6세의 외삼촌이다.

그리스의 전 왕이지만, 동시에 뛰어난 운동선수이기도 했다. 20살 왕자 시절인 1960 로마 올림픽 요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래서 왕정 폐지 이후에도 IOC 명예 위원으로 활동하여 여러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1994년부터 노르웨이 국왕이자 먼 친척인 하랄 5세[28] 함께 국제요트연맹 공동 명예회장을 맡았었다.

셋째이자 차남인 니콜라오스는 2010년 8월 25일 그리스의 스페체스 섬에서 베네수엘라 출신 이벤트 플래너 타티아나 블라트니크[29]와 결혼했다. 기사

다섯째이자 막내인 필리포스는[30] 비스타젯 창립자의 외동딸 니나 플로어와 2020년 12월 스위스에서 시민예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2021년 10월 23일 아테네 성모 희보 대성당(메트로폴리스 성당, 1964년에 부모가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 장소)에서도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손녀인 마리아 올림피아 공주[31]의 생일이 화제가 되었다. 기사

탈모였던 아버지, 큰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와는 다르게 본인과 아들들은 머리숱이 풍성한 편이다.

[1]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ντ(nt)가 붙어 있을 경우 τ에서 d 발음이 난다.[2] 어머니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의 남동생.[3] 1981년 2월 어머니 프레데리카 왕비 장례식 참석으로 당일치기 방문을 했었고, 1993년 여름에 미초타키스 총리의 배려로 일가족과 휴양으로 방문한 적 있다.[4] 없는 건 아니다. 평소에는 쓰지 않고 공식적으로 이름을 써야 할 때도 쓰지 않는 것이다. 보통 가문 명이나 영지의 이름이 성으로 사용된다.[5] 덴마크는 덴마크 왕가 후손에게 자국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 준다. 하지만 이때 "성이 데그레시아냐"면서 그리스어식으로 "콘스탄티노스 데그레치아스"(Κωνσταντίνος Ντεγκρέτσιας)라고 비꼬는 이들도 있었다.[6] 누나 소피아 왕대비, 매형 후안 카를로스 1세, 조카 펠리페 6세레티시아 왕비 부부 등.[7] 여동생 이리니는 미혼이지만 스페인으로 귀화했다.[8] 큰처형 마르그레테 2세, 작은 처형 베네딕트 공주, 마르그레테 2세의 아들들로 처조카 프레데리크 왕세자, 요아킴 왕자 등. 덴마크 왕족은 아니지만 베네딕트 공주의 큰딸로 또다른 처조카 알렉산드라도 참석했다.[9] 하랄 5세의 자녀들인 메르타 루이세 공주호콘 왕세자, 호콘의 아내 메테-마리 왕세자비.[10] 앤 공주 부부가 찰스 3세의 대리인 자격으로 왔다. 앤과 찰스 모두 콘스탄티노스 2세의 재종형제다. 또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의 손녀인 레이디 가브리엘라 킹스턴이 윌리엄 왕세자를 대표하여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는 콘스탄티노스 2세의 당고모이고, 가브리엘라 킹스턴과 윌리엄 왕세자 모두 콘스탄티노스 2세의 대자녀이다.[11] 루마니아 왕실의 현 수장인 루마니아의 마르가레타의 남편 라두 두다.[12] 시메온 2세[13] 러시아의 왕위요구자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14] 니콜라이 1세의 손녀이다.[15]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이다.[16] 게오르크 5세의 장남이다.[17] 크리스티안 9세의 3녀이다.[18] 남동생 파블로스가 태어날 때까지 2년 간 그리스 왕가의 추정상속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현재는 결혼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계승권이 없다고 한다.) 또한 프레데리크 9세의 손주들 중 가장 맏이이기도 하다.[19] 본인의 이름을 내건 아동복 브랜드도 있다. 링크[20] 27세 마리아 올림피아 공주, 25세 콘스탄틴 알렉시우스 왕자, 23세 아킬레아스안드레아스 왕자, 19세 오디세아스키몬 왕자, 15세 아리스티디스스타보로스 왕자.[21] 1960년대생 이후의 왕족들 중에서 파울 블라디미르 폰 올덴부르크 왕자와 더불어 거의 유이하게 아들을 4남 이상 낳은 왕족이다. 그래서 파블로스의 증손자 수가 필립 마운트배튼보다 1명 더 많으며, 처남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보다 2명 더 많다.[22] 2020년부터 매튜 쿠마르라는 인도계 미국인과 약혼 중이다.[23] 참고로 왕비인 아나마리아도 영국 왕위 계승권에 포함되어 있는데, 콘스탄티노스 2세보다 순서가 더 앞서기 때문에(150위권) 콘스탄티노스 2세의 자녀들은 아버지보다 계승 순서가 훨씬 앞에 있다. 이는 아나마리아는 빅토리아 여왕의 3남 아서의 후손이라 빅토리아 여왕의 (남계, 여계를 모두 포함한) 후손들 중에서 계승 서열이 비교적 앞서지만, 콘스탄티노스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의 후손이라 빅토리아 여왕의 4남 레오폴드의 후손이나 빌헬름 2세의 아들, 외손자의 후손보다 뒷 순서에 있기 때문이다.[24] 아나마리아의 모후이자 콘스탄티노스 2세의 장모인 잉리드 왕비와 칼 16세 구스타프의 부친인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손이 남매간이다. 한편 칼 16세 구스타프의 조모 마거릿이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므로, 콘스탄티노스 2세에게는 빅토리아 여왕 기준으로 8촌 또는 9촌이 되기에 먼 친척이기도 하다.[25] 고모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의 아들이다.[26] 아버지 파블로스 1세와 사촌 관계[27] 아버지 파블로스 기준으로 8촌, 어머니 프레데리카 왕비 기준으로 9촌이다.[28] 하랄 5세 역시 요트 선수로 활동했다. 콘스탄티노스 2세와는 8촌, 그 왕비인 아나마리아와는 6촌관계이다.[29] 본인은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슬로베니아 태생이고 어머니는 독일계이며 스위스에서 성장했다.[30] 영국에서 망명 생활 중일 때 낳은 아들로, 프레데리크 9세의 손주들 중에서도 가장 막내이다. 참고로 프레데리크 9세의 손주들 중 맏이는 콘스탄티노스 2세의 장녀 알렉시아 공주이니, 프레데리크 9세의 맏손주와 막내 손주가 모두 콘스탄티노스 2세의 자식인 셈.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21살이며, 필리포스는 콘스탄티노스 2세의 맏손주이자 프레데리크 9세의 맏증손주가 되는 조카 마리아 올림피아(필리포스의 큰형 파블로스 전 왕세자의 장녀)보다 10살 위이다.[31] 파블로스 왕세자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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