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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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플라비우스
3. 역사
3.2.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306~337)
3.3.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후의 혼란(337~350)
4. 평가
5. 역대 황제



1. 개요[편집]


Constantinian dynasty
Neo-Flavian dynasty

로마 제국의 세습 황조로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와 그의 아들인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를 시조로 삼는 왕조이다. 로마 제국의 이전 세습 황조들과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누스 왕조(Constantinian dynasty)라는 명칭은 정식 명칭이 아닌, 학계의 편의상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이 붙여진 로마 제국의 지배가문에게 붙여진 학칭일 뿐이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가족 및 친척들이 모두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네오 플라비우스[1] 왕조(Neo-Flavian dynasty)로 서술되는 경우도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두정의 내전으로 분열된 제국을 다시 통일시켰으나 이후 후계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서 로마 제국의 혼란상을 제대로 막지 못하게 되었고 왕조도 단명하게 되었다. 허나 로마 제국의 역대 세습 황조들 중 그 영향력이 대단한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오현제로 유명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함께 그 영향과 상징성은 로마 제국의 멸망 직전까지도 대단했다. 따라서 이 황조에서 대대로 개인 이름 및 제호에 넣어 사용한 이름이었던 플라비우스는 왕조가 단절된 이후에도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와 황후, 그리고 권세가들이 자발적으로 사용했으며, 이 황실의 예법, 칙령, 용인술 등은 이후 로마 제국의 공식 법제에 편입되었다.

2. 플라비우스[편집]


서기 3세기 로마 제국의 혼란(3세기의 위기)을 완전히 잠재우고, 제국의 대대적인 변화에 이정표를 세운 콘스탄티누스 왕조 이래, 로마 황제와 황후들은

"황금색의 밝은 금발"

이라는 뜻을 지닌, 플라비우스[2]를 개인 이름과 제호에 넣어 사용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왕조 혹은 서기 1세기의 플라비우스 왕조와 대비되는 신 플라비우스 왕조[3]라고 불린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 콘스탄티누스 1세 마그누스와 그 후계자들의 영향력은 1세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카이사르 가문), 2세기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안토니누스 가문)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비우스는 황조의 두 창건자였던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 마그누스 부자의 개인 이름이었고, 그 후계자들이 모두 사용한 이름을 넘어 정통성을 뜻하는 이름과 같았다. 즉, 개인 이름 내지 황제의 칭호로서의 아우구스투스카이사르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이후의 안토니누스 등과 같이 황제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칭호로 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깝다.

이런 이유로 콘스탄티누스 왕조 이후의 왕조 개창자들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는 물론 명장들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같은 유력자들까지도 '플라비우스'를 칭했기에 왕조 구분으로서의 의미는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3. 역사[편집]


  • 자세한 내용은 각 황제의 개별 항목 참조.


3.1. 시조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305~306)[편집]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는 혁혁한 군사적 공적을 바탕으로 달마티아 총독에 취임한 이후,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사두정치(테트라키아)를 개시할 때 그로부터 서방 부제(카이사르)의 직위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은퇴하자 막시미아누스의 자리를 이어 받아 서방 정제(아우구스투스)에 올랐다. 하지만 1년 만에 병사하게 되었고, 그의 이른 죽음이 사실상 사두정치 붕괴의 서막이 되었다.


3.2.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306~337)[편집]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의 서자였다. 306년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붕어하자 군대에 의해 서방 정제(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당시 극심한 내전을 피하고자 했던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에 의해 한 단계 낮은 부제(카이사르) 직위를 제의받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서 자라면서 그의 통치를 지켜봤었기 때문에 사두정치를 인정하고 카이사르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서자 출신인 그의 서방 부제 즉위로 인해 전임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적자 출신이었던 막센티우스가 불만을 터뜨리게 되면서 막센티우스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서방 정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막센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오히려 패배하고 처형당하게 되면서 서방의 혼란은 극심해졌다. 308년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및 막시미아누스 등과 회합을 갖고, 자신의 동료였던 리키니우스를 신임 서방 정제로 삼았다. 하지만 리키니우스가 무명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서방 부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의 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불만을 갖게 되었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붕어하자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한 단계 높은 동방 정제를 칭하게 되었고, 이에 서방 정제였던 리키니우스가 다이아를 제압하고자 콘스탄티누스 1세와 혼인동맹을 맺고 그를 서방 정제로 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동방으로 가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때부터 명실공히 서방의 정제가 되었고, 반역자였던 막센티우스를 역사상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제압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을 발하며 기독교를 공인했다.

리키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정복한 이후, 두 사람이 광활한 로마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게 되었으나 결국 서로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32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대군을 동방으로 보내 리키니우스를 정복하면서 사두정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 제국을 재통일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중심의 정책을 펼쳐 로마 제국의 방향성을 바꾸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천도를 통해 동방 중심의 제국 경영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대제의 실수는 유능한 장남이었던 크리스푸스를 처형했다는 점에 있었다. 이후 후계자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그의 사후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3.3.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후의 혼란(337~350)[편집]


콘스탄티누스 1세의 붕어 이후 로마 제국은 대제의 세 아들인 차남 콘스탄티누스 2세, 3남 콘스탄티우스 2세, 4남 콘스탄스가 3분할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원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사후 조카들에게도 제국의 일부분을 넘기려고 했으나 세 아들들은 그러한 점을 무시하고 서로 공모하여 숙부와 사촌들을 대거 살해했다.(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이로 인해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율리아누스 이후 콘스탄티누스 왕조가 이어지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세 아들 중 맏이였던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두 동생들에게 불만을 표시하며 이탈리아를 다스리고 있었던 막내동생인 콘스탄스를 공격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죽음으로써 로마 제국은 동방의 콘스탄티우스 2세와 서방 및 중부의 콘스탄스 두 사람이 나눠 가지게 되었다. 서방 대부분에 일리리쿰과 마케도니아까지 받은 콘스탄스는 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를 압박하면서 사실상 선임황제의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부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마그넨티우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후 콘스탄스의 영역에서 두 명의 대립황제가 나오게 되었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가 모두 제압하면서 결국 제국은 다시금 한 명의 황제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3.4. 콘스탄티우스 2세율리아누스(350~363)[편집]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1년 오랜 유폐생활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 콘스탄티우스 갈루스[4]를 카이사르로 삼으면서 동방을 맡겼다. 하지만 354년 난정을 일삼은 갈루스는 처형당했고, 곧바로 그의 이복동생인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으면서 서방의 통치를 맡겼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황족 학살 사건 이후, 혈혈단신으로 버려진 상황에서 서방 통치를 맡은 상황이었고, 거기다가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에게 상당히 부담되는 병력을 요구했다. 이에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우스 2세를 공격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제국은 내전으로 다시 치닫게 될 위기에 처했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1년에 붕어하기 직전, 율리아누스를 정식 후계자로 삼음에 따라 율리아누스로 제위가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유폐 기간 동안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게 된 율리아누스가 다신교 신앙을 부흥시키고, 반기독교 정책을 펼치면서 당시 제국의 주류 세력이 되어가던 기독교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이후 율리아누스는 황권 강화를 위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지만 중간에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후계자를 못 얻음에 따라 콘스탄티누스 왕조는 단절되고 말았다. 다만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생아였던 플라비아 막시미아 콘스탄티아가 후대 황제인 그라티아누스의 첫 번째 황후가 되었다. 물론 그라티아누스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젊은 나이에 죽어서 왕조는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4. 평가[편집]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며 제국을 통일시켰고, 또한 <밀라노 칙령>이나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제국의 종교적 방향도 바꿨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천도를 통해 제국의 정치적인 분위기도 확실하게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 선정이 부실했던 관계로, 제국은 이후에도 잦은 내전에 빠지게 되었고, 게다가 서거 직후 아들 3형제가 숙부와 사촌 등 방계 친족을 대거 살해하면서 남성 황족이 전멸하게 되어 율리아누스의 사후, 왕조가 더이상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만약 콘스탄티누스 1세가 과거 아우구스투스의 사례처럼 제대로 된 후계자를 선정했다면, 또 대제의 후계자들이 상당히 똑똑한 인물이었다면, 제국은 좀 더 안정적인 지휘하에 게르만족의 침입 등에 대해서도 잘 막아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제국은 이후에도 잦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항구적인 동•서로마 제국의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


5. 역대 황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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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新) 플라비우스[2] Flavius/플라비아(Flavia)[3] Neo-Flavian dynasty[4] 뒤에 단독황제에 오르는 율리아누스의 이복형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