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덤프버전 :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Константин Циолковский | Konstantin Tsiolkovsky


파일:치올코프스키.jpg

본명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
Константин Эдуардович Циолковский
Konstantin Eduardovich Tsiolkovsky
출생
1857년 9월 17일
러시아 제국 랴잔현 이젭스코예
사망
1935년 9월 19일 (향년 78세)
소련 러시아 SFSR 칼루가
국적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display: none; display: 러시아 제국"
행정구
]]
→ [[소련|

소련
display: none; display: 소련"
행정구
]]

직업
물리학자
종교
무종교(유신론)[1]
서명
파일:Konstantin_Tsiolkovsky_signature.svg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지구는 인류 문명의 요람이다. 그러나 누구도 요람에서 평생을 살 수 없다.

Земля - это колыбель разума, но нельзя вечно жить в колыбели.

-

우주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의 유명한 말.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2]러시아 제국-소련물리학자이자 로켓 이론 기초, 국제우주정거장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로켓의 아버지이다.

세계 최초 인공위성스푸트니크도 1957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발사된 것이다.


2. 생애[편집]


그는 10세 때 성홍열로 청각을 잃었다. 도서관 등을 다니며 거의 독학으로 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했으며, 교사 검정 고시에 합격하여 자기 고향의 중등학교 교사가 됐다.

우주항법(cosmonautics)의 이론적 정립, 발전에서 많은 공헌을 했고, 인간이 다른 행성들의 환경을 재설계할 수 있게 되는 시대, 즉 행성의 지구화가 가능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일찍이 예견했다. 1896년 외계 지능과의 교신에 관한 책을 집필했고, 또 1903년에는 다단계 액체 연료 로켓으로 인간이 지구의 대기 바깥으로 여행할 수 있게 하는 방법에 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에펠탑에서 영감을 얻어 궤도 엘리베이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기도 했으며 추력방향의 변경이 가능한 로켓엔진, 우주정거장, 연소실의 설계, 자이로스코프를 이용한 자세제어, 우주와 출입가능한 에어록의 설계 등 로켓이 발명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현대에도 쓰이는 이론적 배경을 설계했다. 참고로 1903년은 라이트형제가 세계최초로 비행에 성공했던 시기다. 인류가 비행을 처음 시작할 때 치올코프스키는 우주여행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고, 현재도 큰 틀에서는 이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제정 시절에는 그의 연구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공산혁명 이후 중용되어 활발히 연구를 진행시켰다. 이 시기에 다단 로켓, 심지어는 우주정거장의 이론적 가능성까지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소련 공산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사후 국장까지 치러주었다.

비록 그가 살아 생전에는 로켓을 만들기는 커녕 실물을 보지도 못했지만, 이러한 이론적 기초를 닦아주었기에 로켓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 등이 주도한 냉전 초기 러시아의 우주과학기술 성과물들(예: 스푸트니크, 가가린)도 치올코프스키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생전에 직접 로켓을 만들어 발사할 기회가 없다보니, 이후 최초의 액체 로켓 발사를 성공시킨 로버트 고다드, 이 기술을 발전시켜 잘 써먹은 베르너 폰 브라운, 코롤료프 등 후대의 우주과학 기술자들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못한 편.

아들은 자살하고 딸은 반동으로 몰려죽고 본인도 병상에 누워있던 나이 60에 인정받았다. 삶은 좋았다고 보기힘들다.


3. 기타[편집]


쥘 베른이 쓴 달 세계 여행을 보고 완전히 엉터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3] 사실 쥘 베른도 이걸 알았기에 이 소설에서도 대포 안에서 온갖 완충 장치를 하고 설계되었지만 달에 도착할때 같이 탄 개는 머리가 으스러져 죽었으며 사람들도 한참을 기절해야 했고 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미의 컴퓨터 여행에서 한 에피소드 주역으로 나왔다. 밈에게 달 세계 여행을 보고 너무 허구가 많다고 지적하고 우주로 배를 만들어 직접 쏴 올리는 게 더 현실감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밈과 같이 현실화된 우주선을 우주복 차림으로 타고 이게 언젠가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1957년 그의 동상이 스푸트니크 1호가 쏴 올라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밈이 1957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인류는 세계 최초 인공위성을 쏘아 우주로 올렸습니다라고 에피소드가 끝난다.

1950년대 소련이 무인 우주선을 이용해 달의 뒷면 촬영에 성공했을 때, 한 분화구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수식이 바로 치올코프스키 로켓 방정식이다. 이 로켓 방정식을 통해 다단 로켓 구성이 사용연료 대비 적재량(payload)의 비율을 높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련과 현대 러시아에서 우주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을 꼽으라면 반드시 포함되는 인물이다. 나머지 둘은 세르게이 코롤료프, 유리 가가린이다. 로스코스모스 설립 이전 구 소련 우주국 청사 로비엔 이 세 인물의 대형 초상화가 치올코프스키, 코롤료프, 가가린 순으로 걸려 있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1 00:16:43에 나무위키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Georgy Manaev, "How are religion and Russian space science connected?", 「Russia Beyond」, 2021.5.27.[2] 현행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치올콥스키"[3] 거대한 대포로 사람이 속에 탄 포알을 달로 쏴서 간다는 줄거리인데, 실제로 그렇게 쏘면 엄청난 압력으로 포알 속 사람은 발사 순간 끔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