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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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3]
2. 생애[편집]
2.1. 군인 시절[편집]
콜린 루터 파월은 1937년 미국 뉴욕 주 맨해튼의 할렘에서 자메이카 출신 이민자인 아버지 루서 시오필리어스 파월(Luther Theophilus Powell)와 어머니 모드 애리얼 매코이(Maud Arial McKoy) 사이에서 태어났다.
파월은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에서 지질학을 전공하였으며, ROTC 과정에 입교하여 현역으로 소집[4] 되었다.
서독에 주둔해있던 제3기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군생활을 시작한 파월은 미 본토에 주둔해있던 제5보병사단으로 자리를 옮겼고, 아내 앨마 비비안 존슨(Alma Vivian Johnson)과 결혼했다.
결혼식을 올린 뒤 파월은 베트남으로 파병을 떠난다. 남베트남군 1사단에서 군사 고문[5] 으로 근무하던 파월은 행군 중 베트콩의 덫에 걸려 발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베트남 파병에서 돌아온 파월은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에서 보병 장교 상급 코스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뒤, 보병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보병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도중 지휘참모대학에 입교해 우수한 성적으로 교육과정을 수료했다.
지휘참모대학 과정을 마친 파월은 베트남으로 재파병되어 제23보병사단에서 근무한다.[6] 예하 대대에서 부대대장으로 근무하던 도중 기존에 내정했던 작전참모를 데리고 오지 못하게 된 사단장이 지휘참모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파월을 주목해 작전참모로 데려왔다. 당시 주월미군 사령관이었던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대장에게 브리핑을 할 일이 생겼는데, 브리핑을 들은 에이브람스 대장의 반응이 "저 젊은 소령은 누구인가?" 하며 흡족했다고 한다.
파월은 사단 작전참모로 일할 당시 사단장과 함께 헬기를 타고 순시를 하던 도중, 헬기 추락 사고로 인해 발목에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후 사단장이 기존에 내정했던 작전참모가 새로 발령받자, 파월은 작전참모에서 물러나 작전 부참모을 맡았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 조지 워싱턴 대학교 행정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한 파월은 육군참모차장 보좌관인 윌리엄 드푸이 중장[7] 의 사무실에 배속받게 된다. 육군참모차장 보좌관실에서 일하던 당시 백악관 특별 연구원 프로그램에 선발된 파월은 백악관 행정관리예산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행정관리예산국장은 캐스퍼 와인버거였고, 부국장은 프랭크 칼루치였는데,[8] 파월이 행정관리예산국에서 일하게 된 직후 이 둘은 보건교육복지부로 떠났지만 파월의 군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군으로 복귀한 파월은 주한미군에 배속되어 제2보병사단 예하 대대에서 대대장을 맡았다. 주한미군 근무를 마치고 국립군사대학을 수료한 파월은 제101공수사단 제2여단장이 되었는데, 당시 사단장이 존 위컴 소장[9] 이었다.
여단장을 지내던 도중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에게서 국가안보회의의 방위프로그램 참모진에 합류할 것을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국방장관과 부장관의 특별 보좌관 존 케스터의 군사 보좌관을 맡으면서 파월의 펜타곤 생활이 시작된다.
존 케스터의 군사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중, 파월은 국방부 부장관 찰스 덩컨의 군사 보좌관이 되었다. 덩컨은 파월을 중용해 에너지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도 파월을 인수팀으로 데려갔다. 에너지부에서 복귀한 파월은 펜타곤을 떠나길 원했지만, 덩컨의 후임인 그레이엄 클레이터 2세 역시 파월을 자신의 군사 보좌관으로 기용했고, 파월은 클레이터의 후임으로 프랭크 칼루치가 부임한 뒤에도 국방부 부장관 군사 보좌관을 지낸다.
칼루치에게 야전으로 복귀하고 싶다고 청원한 파월은 4보병사단 작전부사단장을 맡아 다시 야전으로 복귀했지만, 사단장이었던 존 허다첵 소장과 갈등을 빚어 진급이 좌절되는 듯 했다.[10] 하지만 파월을 주목해오던 육군전력사령관 리처드 카바조스 대장[11][12] 에게 구제받아 육군훈련교리사령부 예하 전투병기합동개발처 부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파월의 야전 생활도 끝나고 만다. 육군참모총장 부임을 앞두고 있던 존 위컴 대장이 파월을 국방장관 캐스퍼 와인버거의 선임 군사보좌관으로 추천한 것이다. 결국 파월은 국방장관 선임 군사 보좌관으로 펜타곤에 돌아오게 된다.
펜타곤에서 지내던 중 기존의 임기를 끝마치면서 파월은 8보병사단장으로 이동했고 8보병사단을 방문해 브리핑까지 받았는데, 와인버거가 파월을 붙잡으면서 사단장 부임이 좌절되었고, 대신 연장 근무의 대가로 군단장 영전을 약속받는다.
국방장관 선임 군사보좌관으로 연장 근무를 끝마친 파월은 약속대로 5군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다시 야전으로 복귀하게 된 파월이었으나 이란-콘트라 사건이 폭로되면서 공중분해된 국가안보회의를 맡게 된 옛 상관 프랭크 칼루치가 파월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국가안보 부보좌관으로 기용한다. 당초 본인은 5군단장으로 남는 걸 원했지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전화로 부보좌관을 맡을 것을 요청하면서 결심을 굽혔다고 한다. 그리고 칼루치가 와인버거의 후임 국방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파월은 현역 군인 신분으로 공석이 된 국가안보보좌관을 맡는다.
정권이 바뀌고 국가안보보좌관 직을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13] 에게 이임한 파월은 흑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대장으로 진급[14] 해 육군전력사령관에 부임한다.[16]
그러나 육군전력사령관으로 부임한지 반 년도 안 된 상황에서 파월은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국방장관의 선택을 받아 합동참모의장에 임명된다.
합동참모의장에 임명된 파월은 흑인 최초의 합동참모의장이었으며, 최초의 ROTC 출신 합동참모의장이었다. 또한 합동참모의장이 보통 대장으로서 2, 3차 보직임을 감안하면 1차 보직인 육군전력사령관을 반 년도 지내지 않은 파월의 합동참모의장 임명은 더욱 주목받는 일이었다.[17][18][19]
합동참모의장으로 부임한 직후 파월은 남부사령관 맥스웰 서먼[20] 대장과 합을 맞춰 파나마 침공[21] 을 지휘했으며, 이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냉전이 끝나면서 적수가 사라졌던 미군의 재편을 주도하던 파월은 걸프 전쟁이 일어나자 중부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과 합을 맞춰 이라크군을 상대하게 된다. [22]
걸프 전쟁 후에 뉴욕에서 퍼레이드를 하던 파월 장군.
걸프전쟁의 승리 이후 약 8개월 후인 1991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모습. 오른쪽은 대한민국 국군 합참의장이던 대한민국 육군대장 정호근 장군[23] 이다.
걸프전 직후 파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미국 여론과 공화당에서는 그를 노먼 슈워츠코프와 함께 원수로 진급시키려고 했다. 만약에 성사됐으면 오마 브래들리 장군에 이어 11번째 원수로 진급했을 텐데, 빌 클린턴 정권인수위에서는 이를 거부했다.
2.2. 국무장관[편집]
1993년 8월에 퇴역했다. 전쟁 영웅으로 1996년엔 공화당에서 빌 클린턴을 견제할 대항마로 떠오르기도 했으나 밥 돌이 나갔고 졌다. 파월 본인은 35년간 군인으로 봉직한 뒤에 인생을 여러 모로 돌이키는 단계라 출마가 어렵다고 밝혔다.
괜한 박수가 아니었다. 한 여론 조사는 다음해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클린턴과 공화당의 보브 돌이 대통령 후보로 나와 맞서는 선거판에 파월이 무소속으로 끼여들어 3파전을 펼칠 경우, 유권자의 3분의 1이 파월을 찍겠다고 했다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았다. 또 파월이 만약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될 경우 클린턴을 근소한 차로 물리친다고도 했다. 공화당 내에서도 파월은 22%의 지지율을 보였다. 보브 돌의 43%에는 못 미쳤지만 워싱턴 정치판의 고참들인 팻 뷰캐넌이나 필 그램이 얻은 지지율 6%에 비하면 놀라운 수치였다. 출처
그 후 조지 W. 부시의 행정부에서 흑인 최초의 국무장관을 맡았으나 이라크 전쟁 등에서 딕 체니나 도널드 럼즈펠드 등과 의견 차이를 보였다. 파월이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탓이다.[24] 그의 이런 모습은 딕 체니의 일생을 전반적으로 다룬 블랙 코미디 영화 바이스에서도 잘 드러난다. 부시와 체니가 이라크를 침공을 논의할 때, 럼즈펠드는 이라크 침공을 어떻게든 해야한다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파월은 이라크 침공에 대해 엄청난 회의감을 드러낸다. 이라크가 주권국가인 것을 감안하는 것은 물론 이라크 침공 이후 벌어질 사태에 대한 출구전략에 대해서도 물어보는데, 극중에선 이런 입장차에 의해 럼즈펠드와 말다툼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파월은 럼스펠드, 체니, 울포위츠 등의 강경파들과는 달리 유엔과 합의를 해서 외교적으로 이라크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유엔이랑 엮이면 토론으로 시간만 질질 끌다 행동할 타이밍을 놓칠거라고 주장한 체니와 큰 갈등을 겪었다.[25] 결국 부시한테 마지막으로 부탁해서 모든 무기 규제와 무기감독단 재도입에 관한 유엔 결의안을 내놓을 것을 요청했고 부시가 이를 받아들여 유엔에서 한 연설에 넣었다. 하지만 감독관 한스 블릭스의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보고서에도 불과하고 부시와 강경파들은 전쟁을 감행하면서 파월의 속을 썩이게 된다.[26]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조지 부시 2기 행정부에서는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가 국무장관직을 승계했다. 4년 후 2008년 대선에서는 공화당 지지자임에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이유는 세라 페일린 때문에(...)[27]
그 외에도 파월은 딕 체니를 매우 경계하고 싫어했다.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부통령이 실세로 군림하며 모든 각료들에게 간섭해댔으니 싫어할 수 밖에. 부시 정부 측근이었던 사람치고 체니 부통령을 좋아했던 사람은 사실 몇 없다.
2.3. 말년과 사망[편집]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워싱턴주에 배당된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인단 3명이 콜린 파월을 찍었다.
2020년 6월 7일에는 조 바이든을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2021년 1월 10일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이후 있었던 인터뷰에서 공화당을 탈당했다고 한다.#
2021년 10월 18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84세. 그 이전에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치료를 2~3년간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3. 어록[편집]
Get mad, then get over it.
화를 내되 뒤끝은 남기지 마라.
Never let your ego get so close to your position that when your position goes, your ego goes with it.
당신의 지위에 당신의 자아가 휘둘리지 않도록 하라.
Giving back involves a certain amount of giving up.
보복은 어느 만큼의 포기를 포함하고 있다.
Command is lonely.
지휘란 외로운 것이다.
I have seen what war can do.
전쟁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보아 왔지.
Pottery Barn Rule. Once you break it, you are going to own it.
포터리 반[28]
의 법칙. "당신이 부순 것은 당신이 사들여야 한다." [29]
The commander in the field is always right and the rear echelon is wrong, unless proved otherwise.
반증되지 않는 이상, 현장의 지휘관이 항상 옳고 후방(의 상급 지휘관)은 그르다.
Our stragedy to go out after this army is very very simple, first we’re gonna cut it off, and then we’re gonna kill it
이라크군에 대한 전략은 아주 간단합니다. 일단 차단한 다음 공격하는 것 입니다.
3.1. 파월 독트린[편집]
군사력을 동원해야 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파월이 제시한 8대 기준. 다만 파월 장군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고, 기본적인 사상은 손자병법 시계편, 작전편과 모공편에 제시되어있었고, 이후 레이건 행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캐스퍼 와인버거가 제시한 '와인버거 독트린'(이건 6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을 바탕으로 보완, 발전시킨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와인버거-파월 독트린이라 불리기도 한다.
- 핵심적 국익이 위협받고 있는가? (Is a vital national security interest threatened?)
- 가능한 모든 비군사적 조치들을 끝까지 시도하였는가? (Have all other non-violent policy means been fully exhausted?)
- (군사력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는 구체적이며 실현 가능한가? (Do we have a clear attainable objective?)
- (군사력 사용에 따른) 결과는 확실히 고려된 상태인가? (Have the consequences of our action been fully considered?)
- (군사력 동원에 따르는) 비용과 위험은 정확히 분석되었는가? (Have the risks and costs been fully and frankly analyzed?)
- 군사적 개입의 무분별한 연장을 막기 위한 출구 대안이 세워져 있는가? (Is there a plausible exit strategy to avoid endless entanglement?)
-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가? (Is the action supported by the American people?)
- 광범위하고 검증 가능한 국제적 지지를 받고 있는가?(Do we have genuine broad international support?)
위의 내용들을 기준으로 맞춰봐도 걸프전(1991년)은 왜 성공했고, 반대로 이라크전(2003년)은 왜 실패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4. 기타[편집]
초급 장교 시절의 콜린 파월
소장 시절에 국회에서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을 보좌하고 있는 콜린 파월
걸프전 당시의 콜린 파월과 노먼 슈워츠코프
말년의 파월 부부[30]
본인이 흑인으로서 정체성을 강하게 갖고 있고, 할렘과 브롱크스 등 흑인 문화권에서 자라서 미국 흑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스코틀랜드계이기도 하다. # 영국에서 명예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는데 덕분에 개인 문장도 갖고 있다. 여기서 교차하는 두 자루의 칼날이 그의 스코틀랜드 혈통을 반영한 상징이다. 혼혈이다 보니 그를 히스패닉이냐고 물어 보는 질문도 간혹 야후 등에 올라온다.
예전에는 보수주의 성향이 강했지만 딕 체니와의 갈등이후로 오바마, 클린턴을 지지하면서 친민주당 성향을 보이거나 트럼프와 2021년 백악관 폭동을 비판하는 등 공화당하고는 거리를 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RINO 취급을 받기도 했다.
영화 더 프레지던트(W)에서는 제프리 라이트, 바이스에서는 타일러 페리가 연기했다. 훤칠하고 잘 생긴 미남 파월의 느낌을 볼 수 있다. 대중매체에서, 콜린 파월은 보통 부시 행정부의 백악관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어 네오콘 전쟁광 사이에 둘러 쌓여 고통받는 인물(...)로 그려진다.
2003년에 일어난 이태원 금성장 살인사건의 용의자 켄지 스나이더는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이 주한미군의 범죄를 숨기기위해 자신에게 뒤집어 씌었다고 주장했다. 켄지는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확정 됐고, 사건은 미제사건이 되버렸다.
5. 군사 경력[편집]
- 제3기갑사단 제48보병여단 제2기갑소총대대 B중대 소대장
- 제3기갑사단 제48보병여단 제2기갑소총대대 D중대 부중대장
- 제3기갑사단 제48보병여단 제2기갑소총대대 D중대 중대장
- 제5보병사단 제2보병여단 제4보병연대 제1전투단 연락장교
- 제5보병사단 제2보병여단 제4보병연대 제1전투단 A중대 부중대장
- 제5보병사단 제2보병여단 제4보병연대 제1전투단 A중대 중대장
- 제5보병사단 제2보병여단 제1보병대대 부관
- 베트남 공화국군 제1보병사단 제3보병연대 제2보병대대 군사고문
- 육군보병학교 교관
- 제23보병사단 제11보병여단 제1보병연대 제3보병대대 부대대장
- 제23보병사단 작전참모
- 제23보병사단 작전참모 보좌관[31]
- 육군참모차장 보좌관실 계획프로그래밍분석과 작전연구분석가
- 백악관 행정관리예산국 부국장 특별 보좌관
- 제2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제1보병대대장
- 제101공수사단 제2공수여단장
- 국방장관 및 국방부 부장관 특별보좌관실 군사보좌관
- 국방부 부장관 선임 군사보좌관
- 에너지장관 특별 보좌관
- 제4보병사단 작전부사단장
- 육군훈련교리사령부 전투병기합동개발처 부장
- 국방장관 선임 군사보좌관
- 제5군단장
- 대통령실 국가안보부보좌관[32]
- 대통령실 국가안보보좌관
- 육군전력사령관
- 합동참모의장
6. 가족 관계[편집]
젊은 시절의 콜린과 아내, 자녀들의 가족사진
- 루터 테오필러스 파월 (父)
- 마우드 아리얼 맥코이 파월 (母)
- 알마 존슨 파월 (부인)[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