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도 키미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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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도 키미야스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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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 파일:1999다이에.png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 파일:2002 JS 우승로고.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82
1983
1986
1987
1988
1990
1991
1992
1999
2000
2002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7.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8.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9.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10.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11.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감독

2015
2017
2018
2019
2020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블루웨이브)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마쓰이 가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마쓰나카 노부히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7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니시자키 유키히로
(닛폰햄 파이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이라부 히데키
(치바 롯데 마린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0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쿠도 키미야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지이 슈고
(야쿠르트 스왈로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4, 1995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노다 코지
(오릭스 블루웨이브)

쿠도 키미야스
(1994:세이부 라이온즈)
(1995: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니시자키 유키히로
(닛폰햄 파이터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0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쿠도 키미야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5, 1987, 1993, 1999년 퍼시픽 리그 최우수 방어율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6, 1999년 퍼시픽 리그 최다 탈삼진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7, 1991, 1993년 퍼시픽 리그 최고 승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0년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파일:NPB 로고.svg 1986년, 1987년 일본 시리즈 MVP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보유 기록(NPB)
역대 최장 프로 활동
29년
1이닝 4탈삼진
1996년 8월 2일, 롯데전
통산 최다 일본시리즈 탈삼진
102탈삼진
일본시리즈 1경기 최다 탈삼진
13탈삼진
최다 연속 볼넷
5연속
연속 시즌 승리 기록
23년 연속
연속 시즌 탈삼진 기록
29년 연속
최고령 홀드 기록
46세 4개월
최다 최고 승률상 수상
4회
최다 쇼리키 마쓰타로상 수상
5회


쿠도 키미야스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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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47번
와다 히로미
(1979~1981)

쿠도 키미야스
(1982~1994)


테라모토 히로후미
(1995~2001)
{{{#ff6b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번호 21번}}}
이케다 치카후사
(1991~1994)

쿠도 키미야스
(1995~1996)


데이비드 웨스트
(1997)
{{{#ff6b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번호 47번}}}
도널드 라이디
(1996)

쿠도 키미야스
(1997~1999)


브라이언 뱅크스
(2000)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47번}}}
오노 히토시
(1999)

쿠도 키미야스
(2000~2006)


마츠모토 테츠야
(2007)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번호 47번}}}
츠츠미우치 타케시
(2003~2006)

쿠도 키미야스
(2007~2009)


맛카 타카유키
(2010~2013)
{{{#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55번}}}
히람 보카치카
(2008~2009)

쿠도 키미야스
(2010)


아키야마 쇼고
(2011~2019)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81번
아키야마 코지
(2009~2014)

쿠도 키미야스
(2015~2021)


후지모토 히로시
(2022~)





쿠도 키미야스
工藤公康 | Kimiyasu Kudo

생년월일
1963년 5월 5일 (60세)
아이치현 나고야시 쇼와구
(現 아이치현 나고야시 텐파쿠구)[1]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학력
나고야전기 고교 (아이치)[2]
신체
176cm, 80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1년 드래프트 6라운드 (세이부)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82~1994)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5~1999)[3]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0~2006)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7~2009)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10)
지도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2015~2021)

1. 개요
2. 플레이 스타일
3. 선수생활
3.1. 세이부 라이온스
3.2.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3.3. 요미우리 자이언츠
3.4.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3.5. 세이부 라이온스 2기
4. 은퇴
5. 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
6. 기타
7. 연도별 주요 성적
8. 감독 성적



1. 개요[편집]


일본의 前 야구 선수이자 前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투수.

통산 635경기 3,336.2이닝 224승 142패 ERA 3.44의 성적을 기록한 투수로, 그가 거둔 통산 224승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1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또한 일본프로야구의 제이미 모이어라 불릴 정도로 선수생활을 오래 지속한 것으로 유명한데, 40세가 넘는 나이로 두자리수 승수를 기록하고, 2009시즌에는 46세의 나이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승리투수 기록을 갈아치웠다.

'우승청부사'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선수와 감독으로 기록한 우승 횟수가 무려 16번에 달한다. 세이부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다이에20년짜리 비밀번호를 끊고 퍼시픽 리그의 강자로 거듭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요미우리에서는 노장의 관록으로 요미우리가 센트럴 리그 정상을 되찾는 데 한몫을 했다. 일본시리즈 MVP도 두 번이나 차지했고 현역시절에 획득한 우승반지만으로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우승복도 많았다. 지도자로서도 소뱅을 이끌며 일본시리즈 5회 우승 및 4연패를 달성[4]했는데 이는 V9을 달성했던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 시대의 요미우리 외엔 어느 팀도 달성하지 못했던 고지로 명선수도 명감독이 될 수 있다의 예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2. 플레이 스타일[편집]







정면에서 본 투구폼
측면에서 본 투구폼

최고 149km까지 나오는 포심 패스트볼과 손가락을 튕기며 던지는 커브가 주 무기였고 슬라이더와 싱커도 던졌으며, 말년에는 기교파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3. 선수생활[편집]



3.1. 세이부 라이온스[편집]


파일:external/japanbaseballnews.info/kudou.jpg
영광의 1980년대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1981년 고3 때 코시엔 여름대회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 해 드래프트에서 6순위로 지명받아 1982년에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하였다.[5]

1980년대 세이부 황금시대 당시 와타나베 히사노부, 곽태원과 중심투수로 활동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85년 8승3패 평균자책점 2.76을 기록하며 평균자책점 부문 리그 1위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6], 1986년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상대로 4차전까지 1무 3패 후 치러진 5차전에서 1대1 동점 상황에서 연장 12회까지 역투하고 답답해서 직접12회말에 끝내기 안타를 쳐 팀에 승리를 거둬, 1무 3패 후 역스윕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 주역으로서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한다.[7] 1987년 일본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6차전을 선발로 나서 헹가래 투수까지 되는 완투승으로 장식하는가 하면풀영상[8], 그 해에 팀 선배인 히가시오 오사무와 평균자책점 1위 쟁탈전을 하여 결국 여기서 승리하기도 했다.


3.2.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편집]


파일:external/www.jiji.com/588347.jpg
팀의 중심투수로 활약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김민식?

이후 FA를 선언해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였으며, 당시 만신창이였던 팀 분위기를 개선하는데 일등공신[9]이 되면서 1999년에는 팀에 35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주게 된다. 당시 상대는 본인의 고향팀이자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등의 한국인 삼총사가 있었던 주니치 드래곤즈. 1차전에 선발로 나서서 13탈삼진 완봉승을 거두면서 일본시리즈 우승경력 7번의 관록이 허세가 아님을 증명했다.


3.3. 요미우리 자이언츠[편집]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c1c4c244.jpg
우승 청부사로 불린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다만 한국에서는 특히 대구아재들에겐 이승엽 동료로 인지도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호크스를 우승으로 이끌며 다이에의 과감한 투자에 보답한 뒤, 2000년 NPB 선수들 가운데 최초로 2번째 FA 선언을 하여[10],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2000년2002년에도 리그 우승 -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여 최초로 3개구단에서 우승을 차지한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2004년 8월 17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도쿄돔 홈경기에서는 통산 200승 달성을 7회말 원스트라이크 쓰리볼 상황에서 2점 홈런[11]을 날려 결국 그 홈런이 결승타점이 됐고, 4-2 완투승을 거두며 통산 200승을 본인 손으로 달성했다. 당시 영상 https://youtu.be/RNflIydAn1s. 쿠도가 친 홈런은 자신의 프로생활 첫 홈런이었으며, 이는 일본프로야구 데뷔 후 최고령 및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첫 홈런 기록이기도 하다. 데뷔 22년차, 41세.[12] 이 시즌에 10승 7패를 평균자책점 4.67을 기록, 40대 나이로는 역대 세번째로 시즌 두자리 승수를 거둔 투수가 되었으며,[13] 2006년까지 요미우리에서 뛴 후, 요미우리로 이적한 카도쿠라 켄의 보상선수로 2007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3.4. 요코하마 베이스타스[편집]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3297bdab.jpg
나름 열심히 뛰었던 그러나 팀을 구제하진 못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 쿠도가 유일하게 우승 반지를 먹는 데 실패한 팀이다. 이혜천?

2009년 5월 26일 교류전에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전에서 구원등판하여 승리투수가 돼 센트럴리그 최고령 승리투수(46세 20일) 기록도 세웠으며, 이후 이 기록은 2009년 7월 1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전에서 승리투수가 되면서 46세 1개월 25일로 다시 경신하였다. 이후, 팀이 3년 연속 꼴찌가 확정되자, 팀 리빌딩 차원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방출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현역에서 계속 뛰기를 희망 중. 다만 고령이라는 점도 있고 구위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 타팀에서 오퍼가 올 가능성은 적어보였으나 처음 프로에 입단했던 팀이였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 복귀하는 쪽으로 확정되었다. 실로 16년만의 친정 복귀. 그리고 만 47세의 현역으로 일본 기록을 또 갈아치우게 생겼다(…). 분위기 상으로는 은퇴 직전 친정팀 유니폼이라도 입혀서 은퇴시켜주자는 세이부 팬들의 분위기가 반영된 듯. 당시 감독은 현역 시절 팀 후배(2살 연하)였던 와타나베 히사노부 였다. 세이부의 전성기 시절 배번호 47번은 같은 좌완 투수 호아시 가즈유키가 달고 있어서[14] 대신 55번을 달았다.


3.5. 세이부 라이온스 2기[편집]


파일:external/www.suruga-ya.jp/g8833568.jpg
16년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결과적으론 유증의 미를 거두지 못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그러나 2010 시즌에는 왼쪽 팔꿈치와 허리 부상으로 10경기에만 등판하여 2패 평균자책점 10.50으로 부진하면서 세이부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다만 본인은 50세까지 뛸 것이며, 일본에서 안 된다면 한국 등 타국리그에 가서라도 뛰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4. 은퇴[편집]


그러나 그도 결국 선수생활에 한계를 느끼고, 2011년 11월 24일 자로 선수생활을 접고 베이스타즈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이례적으로 코치 경력 없이 즉시 감독 내정이 된 케이스. 베이스타즈가 다음 시즌 리그 참가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감독 활동 여부는 불확실하나 베이스타즈의 매각협상에서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 과감하게 베이스타즈 출신인 쿠도를 낙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코치진 선임 문제와 선수 겸 감독의 허용 문제로 구단과 이견차를 보이다 끝내 협상이 결렬되었고, 요코하마 측에서는 요미우리 OB 출신의 나카하타 키요시를 선임하였다.[15] 다만 쿠도 키미야스도 감독직에 대한 큰 집착 없이 선수생활 연장과 감독직 수락 사이에서 고민하던차에 협상에는 들어갔는데, 서로 맞지 않아서 결렬되었으니 크게 아쉬울 일은 없는 셈.

2011년 12월 25일 공식적으로 현역 은퇴를 발표하였다.


5. 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편집]


은퇴 후 3년 동안 야인생활을 했다. 야인생활을 하면서도 쓰쿠바 대학 대학원에 등록하여 운동생리학과 컨디셔닝 등에 대한 강의를 수강하는 등 지도자가 되기 위한 준비는 꾸준히 해왔다. 아내의 병간호 문제로 2014년 시즌 종료 후 사임을 발표한 예전의 동료 아키야마 코지의 뒤를 이어 소프트뱅크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전년도 일본시리즈 우승팀을 이어 받아서 부담이 엄청난 상황임에도 불구, 선수들을 잘 활용하면서 직전 해보다 더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퍼시픽리그 사상 최고속 리그 우승 기록을 세우면서 팀을 리그 2연패로 이끌었다.

타 팀으로 가면 1군 주전으로 뛸만한 선수들이 벤치와 2군에서 줄줄이 대기하면서 기회가 없어서 뛰지를 못하는 등 남아도는 선수들을 주체할 수 없는 거대 전력을 받은 데다, 경기 시작부터 철저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경기가 승리로 끝나야 비로소 웃는 표정을 짓던 전임 감독아키야마 코지와는 달리 경기 도중에도 상황이 의도대로 풀리면 기뻐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덕분에 타 팀의 팬들로 부터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덕아웃에 앉아있는 팔자 좋은 팬 아저씨라는 야유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지도자 경력없이 갑작스럽게 감독자리를 맡은 초짜라는 취임 당시의 우려와는 달리 마치 감독생활을 10년은 넘게 한 듯한 통찰력과 안목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 하세가와, 혼다 등 주전급이 시즌 아웃 수준으로 빠진 자리에 후쿠다, 다카타, 다카야[16], 가와시마, 아카시 등 백업급 선수들을 기용하면서 완벽하게 메워왔고, 고비나 승부처마다 기용하는 대타는 할 때마다 성공을 거두는 등 절대로 그냥 최강급 전력을 이어받아 편하게 놀고 먹는 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게다가 투수 출신이라서 로테이션과 불펜 운용의 정교함에 있어서는 전임 감독보다 훨씬 나은 수준이며 전년도까지 유망주 수준에 그치고 있던 투수들을 줄줄이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선발 로테이션을 3개를 꾸려도 될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투수진을 구축하면서 본인이 괜히 명투수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소프트뱅크의 2015년 시즌을 보면 이 사람을 단순히 감독 데뷔부터 막강 전력을 받은 운 좋은 감독으로 평가하는 것은 본인에게는 상당히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이제 남은 것은 페넌트레이스와는 모든 면에서 양상이 달라지는 포스트 시즌의 단기전에서의 운용 능력을 증명하는 것뿐. 그리고 2015년 일본시리즈에서 혼자서 팀타선 멱살잡고 이끈 이대호를 제외한 중심타선이 부진했으나 적절한 테이블 세터의 기용 등으로 우승에 성공하면서 단기전에서도 충분히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명장의 자질을 지녔음을 증명해보였다. 오토나리 겐지의 수술, 호아시 가즈유키의 은퇴로 좌완 선발진이 약해진 것은 고민

2016년 1월 18일, 9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였던 사이토 마사키와 더불어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발표되었다. 후보자격 1년차만에 한번에 통과. 헌액식은 2016년 올스타전 중에 있을 예정. 감독 개인으로서는 그야말로 인생의 최절정기를 맞은 느낌.

그러나 집권 2년 차인 2016년, 현역 시절 모셨던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2년차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다. 교류전에서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는 등 6월 30일까지 2위 지바 롯데 마린스와 8.5게임 차, 3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9.5게임 차를 내면서 퍼시픽 리그 3연패가 유력한 듯 싶었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이 후 5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는 등 DTD를 시전하면서 교류전을 기점으로 연승 행진을 거듭한 니혼햄에게 8월 25일 자로 선두 자리를 내줬고, 끝내 9월 28일 자로 리그 2위가 확정되었다(...) 아직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남아있긴 하지만 일본시리즈 3연패에 실패할 경우 지도력 문제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을 피하기 힘들 듯 싶다. 그러나 결국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닛폰햄에게 2승4패로 패하며[17] 3연패의 꿈은 사라지면서 시즌을 마감했다. 특히나 패배가 결정된 5차전에서 1회 4득점으로 크게 앞서나갔다가 이후 선발 셋츠 타다시와 후속투수 히가시하마 나오의 대방화7점이나 내주는 와중에도 시즌 마지막 경기인데도 불을 지르는 선발과 두번째 투수를 밀어 붙이는 고집을 부리다 대역전극을 허용하는 바람에, 한동안 까여도 할 말 없게 되었다.

2017년에는 다시 절치부심 2015년의 압도적인 모습을 되찾으면서 최단기 리그 우승을 1경기 더 갱신하고, 61년만에 시즌 90승을 돌파해서 91승을 찍었다. 물론 NPB 시즌 세이브 신기록을 세운 마무리 데니스 사파테의 팔을 갈다시피 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선발에서 다케다와 와다가 부진과 부상에 신음하고 타선에서도 우치카와가 장기이탈 하는 등 전력누수가 있는 상태에서도 히가시하마 나오를 한사람 몫을 할 선발투수로 성장시켰고, 필승조에서 이와사키 쇼를 발굴했다. 호소카와가 빠진 포수자리에는 육성선수 출신인 카이 타쿠야를 발탁해서 주전으로 성장시켰고 외야에서는 2년 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우에바야시 세이지가 완전히 우익수 자리를 꿰차는 등 2017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면서 세대교체도 차근차근 진행시키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혼다의 은퇴 후 여전히 안정이 되지 못한 2루수 자리의 주인을 찾는 것과 노쇠화의 조짐을 보이는 우치카와와 역시 나이를 먹어가는 마쓰다, 그리고 근속피로가 걱정되는 마무리 사파테의 후계자를 발굴하는 일이 될 듯.

2018년 1위 세이부와 3위 니혼햄에게 위협을 받으며 클라이막스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니혼햄에게 1승을 내줘 고비를 겪었으나 그후 상승세로 세이부를 스윕하고 2018년 일본시리즈까지 진출시키는데 성공. 이마미야와 데스파이네등 주축 전력들이 부상으로 병실에 누워있고 야나기타와 마츠다같이 부진한 선수들이 삽질하며 고전하는듯 했으나 혼다의 후계자로 등장한 마키하라외에 아카시등 백업 선수들이 의외의 활약과 적장 오가타 감독의 똥고집이 운좋게 맞물려 4승 2패로 또다시 한번 우승에 성공한다.

2019년 세이부와의 1위 경쟁끝에 1위를 내줬으나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 또다시 스윕에 성공. 역대급 현질을 하면서 하라 감독을 복귀시키는 카드까지 꺼내든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2019년 일본시리즈에서 4:0 스윕 떡실신을 시키며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면서 그야말로 2010년대를 소프트뱅크의 시대로 마무리시킴과 동시에 왕조를 세웠다.

2020년에는 다소 위태롭긴 했으나, 시즌 내내 1위를 지켜내며 결국 파리그 우승을 기록했다. 그동안 후보였던 슈토와 구리하라까지 주전급으로 발돋움하게 한 것은 덤. 여세를 몰아 33-4를 연상시킬 정도의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2020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2년 연속 4연승의 기세로 쓰러뜨리면서 일본시리즈 4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제까지 일본시리즈를 4년 이상으로 연속 우승한 것은 1965년~1973년까지 V9을 달성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외엔 없었는데, 바로 그 요미우리를 희생양 삼아 금자탑을 쌓아올리게 됐다. 그리고 2021년에도 요미우리 상대로 스윕우승 달성하면 요미우리의 파이널스테이지 세계 최다연패 갱신을 안기게 된다.[18]

2021년은 그의 계약 마지막 해인데, 8월 31일 현재 소프트뱅크는 리그 4위를 기록중이고 10월 현재도 4위에서 순위가 변동되지 않고 있어서 우승은 고사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런 와중에 10월 10일자로 구단의 재계약 요청을 거부한 뒤,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이번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렇게 7년간의 임기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후임 감독은 2군 감독인 후지모토 히로시. 팬들은 소뱅 왕조를 만든 감독의 사퇴를 아쉬워하는 반응이 많다.


6. 기타[편집]



  • 노무라 카츠야가 세운 기존 1군 시즌 연속 출장기록인 26시즌을 넘어선 무려 29시즌 동안 활약하면서도[19] 승리를 거두지 못한 시즌은 단 3시즌(1984년, 2008년, 2010년)뿐일 정도로 철저한 자기 관리로 유명하다. 선동열과 같은 1963년생인데 선동열이 은퇴한지 10년을 넘어서도 계속 현역에 있었으니.[20]

  • 하지만 정말 의외의 사실은 이 사람 지독한 골초다(...). 물론 투수라서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21] 그래도 46세까지 프로 생활하는 사람치고는 대단히 놀라운 일. 본인도 몇 번이나 '담배를 끊어야지' 하고 결심하고 실행한 적이 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결국 그냥 포기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대신 다른 쪽으로 몸관리는 철저해서 이미 1984년 시즌 종료 후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갔다온 이후 농가와 직접 계약해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야채만 주문해서 먹는가 하면 웨이트 트레이닝에도 큰 공을 들이는 등, 버는 만큼 자기 몸에 투자하는 것도 아끼지 않았다.

  • 이러한 몸 관리에 대한 관심은 은퇴 후에도 이어져, 야인 생활 동안 츠쿠바 대학 대학원에 등록해서 주로 수강한 과목이 스포츠 생리학과 컨디셔닝 관련 과목이었으며 감독이 된 현재도 가장 최우선시 하는 것이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이다. 감독으로서의 지론 중 하나가 "부상을 당하면 아무리 좋은 기량을 가지고 있더라도 소용 없다."이며 "1군 레벨의 선수쯤 되면 기술 향상보다 본인이 다치지 않고 한 시즌을 치르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감독 취임 첫 해 투수 운용과 관련하여 "불펜 투수가 한 시즌에 60경기 이상 등판 하는 것은 무리다. 내가 재임하고 있는 동안에는 불펜 투수의 등판을 시즌 60경기 내로 제한하겠다"라고 선언하고 그대로 실천 중이며 부상이 잦은 선수들에게는 트레이닝 방법의 전환이나 식생활 개선법을 직접 고안해서 추천하는 등 본인 괜히 현역 시절 장수만세의 커리어를 쌓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 "감독은 경기를 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상을 당하는 것도 아니라서 쉴 필요가 없다"면서 휴식일에도 1, 2군을 오가면서 정력적으로 선수들의 컨디션과 부상 여부를 부지런하게 체크하고 있다. 선수들이 특별한 부상이 없더라도 피로의 조짐이 보이면 과감하게 엔트리에서 제외해서 휴식을 주고 그 기간 중에 2군에서 기회를 엿보며 노력하는 선수들로 하여금 그 빈 자리를 채우게 함으로써 컨디션 관리와 선수단에의 동기부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중이다. 컨디션 관리에 관해서는 "(구단에서 돈질로 선수들을 긁어 모아서) 선수층이 그렇게 두터우니까 가능하지"라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까'들도 선수들에 대한 동기부여에 대해서는 다들 인정할 정도. 그러한 선수단 운영이 그 전까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깜짝 스타들이 속속들이 등장하여 물샐 틈 없는 시즌 운영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 정규시즌 통산 타격성적은 타율 .081/OPS .204, 1홈런[22] 10타점으로 별로 좋진 못하지만 세이부에서 프로 초창기를 보낼 적에 일본시리즈에서 끝내기 안타를 쳐내거나 요미우리에서 현역 후반기를 보낼 때 선발 타자들이 부진할 동안 혼자 3타수 3안타를 기록하는 등 의외의 한 방을 종종 보여준 바 있다. 사실 저 통산 타격성적도 선수로써의 전성기가 지난 30대 후반에서야 투수도 타석에 서는 센트럴리그에 와서 기록한 거라 나이를 감안하면 그럭저럭 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 아이치 현 출신이지만 제일 좋아하는 팀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이고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하라 타츠노리라 할만큼 거인의 열혈 팬이었다. 그게 얼마나 지나쳤나면 맞대결때마다 타점을 선물해줬고 요미우리 시절때 하라보살의 감독 첫 커리어 우승인 2002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3차전에 선발로 등판하여 8이닝 2실점으로 호투한데다 롸끈한 타선지원에 힘입어 당연히 승투를 챙겼다. 다만 1회 오제키 타츠야[23]의 땅볼타구때 불알타(...)를 맞기도 하면서 선취점을 허용했다. 하지만 감독이 되고선 하라보살의 교진군을 상대로 매우 무자비한 JS 8연승을 선보이고 말았다.[24]

  • 본인과 함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세이부 왕조를 이끌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한솥밥을 먹기도 했던 기요하라 가즈히로와는 선수 시절 내내 원만한 관계였지만 기요하라가 은퇴 후, 마약 혐의로 인해 몰락하면서 그와 연락이나 상종을 하지 않고 있다.

  • 다이에 후배 후지이 마사오의 장례식 때 운구조 중 1명이었다. FA권을 행사해 거인으로 떠난 뒤라 다이에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 1986년, 1987년, 1991년 3번의 일본시리즈에서 우승을 확정짓는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투수였다. 각각 유격수 땅볼, 중견수 플라이, 삼진이었다.

  • 1985년 일본시리즈에서 랜디 바스에게 3점홈런을 2경기에 걸쳐서 2방이나 쳐맞고 역적질한[25] 흑역사가 있고 요미우리 첫해 일본시리즈때도 옛날 친정팀이자 현재 본인이 감독하고 있는 팀에게 아낌없는 홈런조공질로 패전을 쳐먹은 적이 있다.[26]


  • 이대호 은퇴식에 영상편지를 보냈는데, 편지를 한국어로 읽어주었다. 감독 데뷔 첫해 우승을 안겨준 선수라는 좋은 인연이 있어서 무려 한국어로 편지를 보낸듯 하다.

  • 감독 퇴임이후 야구관련 강연이나 후쿠오카 지역 방송국에서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방송인으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7.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기록(NPB)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82
세이부
27
28.2
1
1
0
0
3.41
22
22
29
1.50
1983
23
33.1
2
0
0
0
3.24
30
13
24
1.29
1984
9
12.1
0
1
0
0
2.92
10
11
8
1.62
1985
34
137.0
8
3
0
0
2.76
84
75
104
1.15
1986
22
145.1
11
5
0
0
3.22
111
57
138
1.15
1987
27
223.2
15
4
0
0
2.41
181
66
175
1.10
1988
24
159.0
10
10
1
0
3.79
164
71
94
1.47
1989
33
118.0
4
8
2
0
4.96
126
78
94
1.71
1990
13
85.2
9
2
0
0
3.36
58
48
89
1.21
1991
25
175.1
16
3
0
0
2.82
124
75
151
1.13
1992
25
150.2
11
5
0
0
3.52
140
72
133
1.39
1993
24
170.0
15
3
0
0
2.06
129
67
130
1.14
1994
24
130.2
11
7
0
0
3.44
120
47
124
1.26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95
다이에
22
163.0
12
5
0
0
3.64
137
48
138
1.13
1996
29
202.2
8
15
0
0
3.51
207
71
178
1.37
1997
27
161.1
11
6
0
0
3.35
153
51
146
1.25
1998
15
93.2
7
4
0
0
3.07
90
30
65
1.26
1999
26
196.1
11
7
0
0
2.38
143
35
196
0.90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0
요미우리
21
136.0
12
5
0
0
3.11
127
17
148
1.05
2001
5
21.1
1
3
0
0
8.44
35
7
8
1.97
2002
24
170.1
9
8
0
0
2.91
157
28
151
1.07
2003
18
117.0
7
6
0
0
4.23
117
25
115
1.19
2004
23
138.2
10
7
0
0
4.67
160
34
128
1.39
2005
24
136.0
11
9
0
0
4.70
159
45
130
1.49
2006
13
70.0
3
2
0
0
4.50
69
22
52
1.26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7
요코하마
19
103.2
7
6
0
0
3.91
118
32
73
1.41
2008
3
13.2
0
2
0
0
5.27
21
6
7
1.90
2009
46
37.1
2
3
0
10
6.51
53
14
24
1.79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0
세이부
10
6.0
0
2
0
0
10.50
11
4
7
2.50
통산
29시즌
635
3336.2
224
142
3
10
3.45
3056
1195
2859
1.25


8. 감독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2015
소프트뱅크
143
90
49
.647
리그 1위
JS 우승
2016
143
83
54
.606
리그 2위
CS2 탈락
2017
143
94
49
.657
리그 1위
JS 우승
2018
143
82
60
.577
리그 2위
JS 우승
2019
143
76
62
.551
리그 2위
JS 우승
2020
120
73
42
.635
리그 1위
JS 우승
2021
143
60
62
.492
리그 4위
-
총계
978
558
378
.596
JS 5승 1CS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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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신지는 이곳이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도요아케시에서 다녔다.[2] 현 아이치 공업 대학 메이덴 고교. 흔히 '아이치 메이덴'으로 불리는 고교야구의 강호로, 후배로 양대리그 홈런왕인 야마사키 타케시와 NPB, MLB 레전드인 스즈키 이치로가 있다.[3] 같은 팀 선배이자 호크스 전 감독인 아키야마가 1994년 트레이드로 이적한 후 94년 시즌 종료후 FA를 선언하여 95년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였다.[4] 2016년 시즌은 오타니 쇼헤이가 활약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일본시리즈에 진출했다.[5] 당초 사회인 야구팀 쿠마가이구미(熊谷組, 일본 내 대형 건설사) 입단을 천명했으나 네모토 리쿠오 단장이 강행 지명했다고 한다. 지명에 회의적이던 네모토에게 지명 강행을 관철한 것은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였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세이부의 1순위는 쿠도와 배터리를 이루게 될 이토 쓰토무였다.[6] 하지만 이해 일본시리즈 역적 원톱으로 찍힐 정도로 랜디 바스, 카케후 마사유키, 오카다 아키노부. 이 전설의 클린업 트리오를 중심으로 한 호랑이 핵 타선에 우주관광을 당했다.[7] 카프가 1점만 냈더라면 끝날 상황에서 끝내기 안타로 기적처럼 시리즈 스윕을 면했음에도, 정작 락커룸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다들 '뭐하러 히로시마까지 가서 남의 잔치 구경이나 해야하냐'고 생각했다고. 이 기적같은 승리 하나가 리버스 스윕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못했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 했다.[8] 후배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9회초 수비 도중 울음이 터진 사건, 그리고 8회말 공격에서 워렌 크로마티의 수비 약점을 간파한 주루 플레이 등 여러 화제가 많은 게임이다. 그리고 아키야마 코지가 우승을 확정 짓는 중견수 플라이 아웃으로 시리즈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는 광경을 본 쿠도가 모자를 벗으면서 만세를 한 세리머니도 유명하다.[9] 특히 자신의 승수를 포기해가면서 웬 당돌한 신인급 포수를 조련한데 큰 공을 들인 것으로 유명하다.[10] FA를 최초로 선언한 선수는 마츠나가 히로미한신 타이거스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다. 사실 쿠도 본인은 잔류를 희망했으나 당시 막장으로 치닫던 프런트에 등 떠밀리며 FA를 선언했다. 그리고 팀 후배 코쿠보 히로키는 3년 뒤 거인으로 전대미문의 무상트레이드라는 황당한 일을 겪는다.[11] 당시 2루주자가 본인의 200승 완투때 포수를 보던 아베 신노스케.[12] 그도 그럴게 퍼시픽리그에서만 17년을 뛰었으니 17년동안은 투수인 쿠도가 타석에 들어설 일은 없었기 때문.[13] 1번째는 한신 타이거스와카바야시 타다시, 2번째는 롯데 오리온즈무라타 쵸지.[14] 호아시는 쿠도에게 양보하겠다고 했으나 쿠도가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리고 현역 시절에는 와타나베가 후배였지만 지금은 감독이니만큼 정중하게 감독으로 대하겠다고 밝혔다.[15] 나카하타가 요코하마 감독직을 수락한 게 화제였는데 나카하타는 요미우리 감독직만 노리고 타 팀의 코치직 제안도 뿌리친 채 TV 해설자 활동만 하고 있었다. 나카하타 키요시 문서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순수혈통주의 문서 참조.[16] 일본 사회인야구에서 하쿠오 대학을 거쳐 프로에 진출, 주전포수 자리를 잡지 못하고 통산 타율도 1할대에 머물러있으나 2008년 이후 무려 2504일만에 홈런을 기록하였다.[17] 닛폰햄은 2016년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에게 승리를 거두고 10년만에 일본제일의 자리에 올랐다.[18] 세계기록은 요미우리의 자매구단이자 쿠도 소속팀 구단주의 본적지를 연고로 두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12연패(86코시 3차전~93코시 1차전).[19] 세계 프로스포츠를 둘러봐도 29년차는 엄청난 경력이다. 그런 쿠도 옹의 29년차 기록을 뛰어넘는 이가 있으니 체코의 전설적인 아이스하키 골리인 도미니크 하섹의 31년차(실제로는 2010년 말 기준 28시즌 째 활약 중). 그리고 주니치 드래곤즈야마모토 마사가 2014시즌에 31번째 현역 시즌을 맞아 선발투수로 뛰었다. 오오오.[20] 당시 선동열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다.[21] 물론 하체 발달을 위해 그만큼 러닝을 많이 하겠지만, 그걸 빼곤 투수가 경기 중에 전력을 뛰어야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그런데 타자인 경우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있다. 사토자키 토모야는 타자도 사실 많이 뛰어야 현실적으로는 50M 정도가 최대로 오래 뛰는 것이기 때문에 타자도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사토자키는 정작 비흡연자다.[22] 위에서 서술한 본인의 200승 경기 때 나왔던 그 최고령 홈런이다.[23] 2006 시즌 한솥밥을 먹게 되는데 공과누의 오심으로 이승엽의 홈런 도둑이 일어나게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당시 선발투수였던 우에하라 고지의 멘탈이 개발살나면서 우에하라는 결국 패전을 쳐먹게 되었다.[24] 참고로 요미우리의 자매구단이자 쿠도의 소속팀 구단주 본적지를 연고로 두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도 갓끼리사마가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 상대로 86코시 3차전~93코시 1차전까지 8연패를 시원하게 쳐먹은적 있다.[25] 1차전은 셧아웃당했고 3차전은 역전승. 요미우리 시절 고쿠보와 함께 주니치 담당일진 노릇을 제대로 했지만 한신만 만나면 개털리기 바빴다.[26] 2차전은 고향팀 주니치사랑이 개쩌는 고향직속후배인 마키하라 히로미가 시원하게 불지르고 패전쳐먹은채 도카이도-산요신칸센 타고 후쿠오카로 갔다. 물론 역전우승 성공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