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내무성 정보관리국 제5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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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쿠바 정보부의 행동 부대인 작전부내 군사정보과.

이 부서에서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소위 혁명 열기가 강한 지역에 군사 고문을 파견하는 일을 담당하기에 용병이나 다름없었다.

사회주의 공산국가에 웬 용병인가 하니, 쿠바는 공산 혁명 이후 경제개발에 노력했으나 바로 위에 있는 미국의 맹렬한 견제와 이를 막아 줄 이 있는 소련의 무관심 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결국 '외화 벌이'의 수단으로 자국군을 용병으로 삼아 여러 공산주의 국가 혹은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국가들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자국군을 대놓고 파견하기 힘든 아프리카 같은 지역에 사회주의 확대를 위해 쿠바에 자금과 장비 등을 지원해가며 용병 파견을 독려한 영향도 있다.

2. 역사[편집]


1965년 체 게바라가 이끄는 쿠바 용병들이 콩고 동란에 참가했던 것이 최초지만 이때는 정부 주도로 체계적인 용병부대를 꾸린 것은 아니고 지원자들을 받아간 것이었다. 이나마도 마오주의자들에 의해 구성된 콩고의 공산세력이 중국-소련 국경분쟁으로 소련과 중국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자 친소 성향의 쿠바 용병들을 쫒아내듯 내보내어 전투에 얼마 참가하지도 못했다. 다만 이 짧은 체류 기간 중 쿠바 용병대와 와일드 기스가 전투를 벌였는데 이들은 쿠바 용병대를 상당한 투사들이었다고 평가했다.

라울 카스트로가 정보관리국 국장에 오른 뒤 정보관리국의 주도로 쿠바 정규군에서 인원을 차출하여 본격적인 돈을 위한 군대의 수출에 나서게 되었다. 1975년에 있었던 르완다 내전에서 쿠바는 소련의 협조 요청에 따라 '군사 고문단'을 파견했는데 말이 고문단이지 무려 연 인원 35만명에 이르는 전투 병력을 파견하여 싸웠고 남아공군과의 격전으로 2,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당시 미국 정부UN에서 쿠바 용병들을 '소비에트 제국구르카병'이라고 비난했으나 소련과 쿠바는 미국이 중남미에서 똑같은 짓을 하고 있지 않냐며 맞받아쳤다. 미국은 특히 쿠바에 피그만 침공을 주도했던 전력도 있었고[1] 동시기에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온두라스 등지에서 단순히 반공주의 성향을 띄고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사독재 정권을 지원하고 있었던지라 미국의 비난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UN 미국 대표는 이에 할말이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3.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영화 부시맨2에서 쿠바군 1명과 남아공 산림관리원이 뒤엉키며 소동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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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에 망명한 쿠바인들 중 지원자를 모아 부대를 만들어 훈련시키고 무기에 장비까지 쥐어주어 쿠바 침공을 감행했으며 심지어 미 공군 공격기를 위장시켜 쿠바 공군에 폭격까지 가했다. 쿠바 입장에서 미국의 비난은 들어줄 가치도 없는 헛소리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