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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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시 존스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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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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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퀸시 존스
QUINCY JONES

헌액 부문
아멧 어터건 상[1] (Ahmet Ertegun Award)
멤버
(개인 자격)
입성 연도
2013년



















퀸시 존스
Quincy J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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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퀸시 딜라잇 존스 주니어
Quincy Delight Jones Jr.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생
1933년 3월 14일 (91세)
일리노이 주 시카고
직업
음악가, 작곡가, 편곡가, 음반 프로듀서, 경영자
장르
R&B, 펑크, 소울, 빅 밴드, 스윙, 보사노바, 재즈, 힙합, 락앤롤, , 디스코
악기
트럼펫
활동
1952년 ~ 현재
학력
버클리 음악대학 (학사 · 명예박사)
배우자
제리 콜드웰 (1957년 ~ 1966년, 이혼)
울라 존스 (1967년 ~ 1974년, 이혼)
페기 립튼 (1974년 ~ 1989년, 이혼)
파트너
나스타샤 킨스키 (1992년 ~ 1995년)
자녀
7명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서명
파일:퀸시 존스 서명.jpg

1. 개요
2. 활동
3. 기타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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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시 존스는 미국의 음악 프로듀서로 마이클 잭슨, 레이 찰스, 제임스 잉그램, 레슬리 고어를 비롯한 인기 가수들의 성공에 기여를 하였다. 또한, 그래미 어워드에서 80회 노미네이트 되며 총 28회 수상한 천재 프로듀서다. #

마이클 잭슨Off the Wall, Thriller, Bad의 총괄 프로듀서였으며, 그의 기여가 없었다면 이 세 명반들은 다른 형태를 띄고 있었을 것이다.


2. 활동[편집]


1933년 3월 14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트럼펫을 배우고 밴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51년 버클리 음악대학을 졸업한 뒤, 악단에 참가 그 후 편곡자로서의 재능을 발견하였다. 1957년 파리로 건너가 작곡과 음악 이론을 배운 뒤 프랑스 레코드 사장의 사인을 얻고 유럽에서 수 많은 밴드를 이끈다.

1963년에 레슬리 고어의 곡들을 프로듀싱하며[1] 대중음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영화 음악 분야에서도 활동했으며 미국 사람들은 모를 리가 없는 TV 프로그램 Root의 OST를 맡기도 하였다.

1960년대부터 프로듀서로 시작했으며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유명 가수들과 일을 함께 하였다. 자신의 작품에서도 Stuff Like That, Ai No Corrida, One Hundred Ways, I'll Be Good to You, The Secret Garden (Sweet Seduction Suite), Tomorrow (A Better You, Better Me)를 포함한 수많은 명곡들을 낳았다.

마이클 잭슨과는 1978년 영화 The Wiz 촬영 현장에서 처음 만나게 됐는데 뜻이 맞아 그는 마이클과 함께 일을 하게 된다. 퀸시는 마이클을 재능이 매우 풍부하지만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마이클의 자서전 문워커 속에서 보면 퀸스 존스와의 협력 과정은 마이클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뒤 퀸시에게 들려주고 퀸시가 이 부분을 수정하라고 하면 수정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했다고 한다.

위에도 서술했듯이 퀸시는 마이클 잭슨Off the Wall, Thriller, Bad의 총괄 프로듀서였다. "Billie Jean" 제작 과정 중 마이클 잭슨과 갈등이 있었는데, Billie Jean은 마이클 잭슨이 단독 작사 작곡/편곡까지 한 노래이지만 퀸시 존스가 프로듀서진에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넣지 않으려고 했다. 당연하게도 빡친 마이클 잭슨은 바로 퀸시 존스에게 강하게 항의했고, 이는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가 훗날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컬러 퍼플을 연출할 때, 그의 음악적 파트너 존 윌리엄스보다도 흑인인 퀸시 존스야말로 흑인들이 주역인 이 영화 음악을 잘 그린다고 여겨 퀸시 존스에게 오리지널 스코어 작곡을 맡겼고 그가 맡은 영화음악도 호평을 받았다.

1983년에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전설적인 모델 나오미 캠벨이 퀸시를 아버지처럼 생각한다고 한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클라우스 킨스키의 딸인 나스타샤 킨스키와 동거했으며, 1993년에 태어난 케냐 킨스키-존스 라는 딸이 있다.

퀸시는 2013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부분에 헌액됐다. 타임지는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재즈 뮤지션으로 선정했다.

2006년에 이방카 트럼프와 데이트를 했다고 주장하며 도널드 트럼프를 깠다. 링크 1, 링크

제 2의 마이클 잭슨의 자리는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겠으나, 이 라인에 꼽히는 여러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현 세대 최고의 슈퍼스타 The Weeknd의 새 앨범 Dawn FM에 참여한 것으로 공개되었다.


3. 기타[편집]


  • 할아버지가 웨일스 출신으로, 퀸시의 할머니가 되는 흑인 하녀와의 사이에서 퀸시의 아버지를 낳았다. 어머니는 프랑스계 위그노를 조상으로 둔 흑인 혼혈이라고 한다.[2]


  •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레이에서 레이 찰스와의 친분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그려졌다.

  • 일본의 작곡가 히사이시 조의 이름은 퀸시 존스의 이름을 일본어로 변형하여 지어낸 예명이다.

  • 딸인 키다다 존스가 투팍의 약혼녀였다.

  • 아들 퀸시 존스 3세는 QDIII라는 예명으로 힙합 프로듀서, 영화 제작자로 활약했다. 90년대엔 아들과 같이 앨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 퀸시의 대표 가수인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 프린스가 퀸시를 유난히도 싫어했다. 그가 공로상을 받았을 때도 탐탁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프린스가 진짜로 존경하는 인물인 제임스 브라운을 실제로 보자 모자를 벗고 깍듯이 모신 것을 보면,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유명한 헤드폰 제조업체인 AKG와 시그니처 모델 N90Q를 만들었다. #

  • 항상 주머니에 블랙윙연필 한자루를 꼽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 음악적으로 성공한 이후 주로 금발 미인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그의 자녀들도 그래서 대부분 미인에 혼혈로 연예계 활동을 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백인 여성들과의 관계에 집착하는 모습에 대해 투팍은 거칠게 비난 했고 이것을 계기로 퀸시 존스의 딸과 4달간 동거하게 된다.

  • 2018년 GQ 인터뷰에서 84살의 나이에 22명의 여자친구들을 유럽 아시아 미국 각지에 두고 만난다고 이야기 했다. 여자친구들끼리도 서로 알고 지내며 딸들이 자기들 보다 어린 여자랑은 만나지 말라고 부탁 했기 때문에 28살 이상만 만날수 밖에 없고 그래서 여자친구들 나이는 28살에서 42살 사이라고 답했다. 이런 딸들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덧붙혔다.

  • 2013년 80세 생일 기념으로 내한 공연을 가진적 있는데, 주최측의 준비 미비나 졸속 진행으로 평이 안 좋았다. 게다가 퀸시 존스도 당시 워낙 나이가 많아서 콘서트를 진행하기엔 체력적으로 힘들어 보였고, 너무 늦게 내한했다는 반응. 그러나 국내 반응과는 별개로 이때 공연한 제임스 잉그램의 Just Once 라이브는 유튜브에서 반응이 무척 좋은편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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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t's My Party, Judy's Turn to Cry, She's a Fool, You Don't Own Me[2] 자신의 음악성은 프랑스인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3] 안타깝게도 제임스 잉그램은 이 공연 6년 후 뇌암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