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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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워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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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파일:번리 FC 엠블럼.svg

26대





크리스 워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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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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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1984-85 · 1988-89

1991 Onze d'Or
Onze d'Or
장피에르 파팽
Onze d'Argent
크리스 워들
Onze de Bronze
로타어 마테우스


영국방송공사
BBC SPORT

파일:Waddle_Profile.jpg

이름
크리스 워들
Chris Waddle

본명
크리스토퍼 롤랜드 워들
Christopher Roland Waddle
출생
1960년 12월 14일 (63세) /
잉글랜드 타인 위어 펠링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
신체조건
187cm | 체중 82kg
직업
축구선수 (윙어[1] / 은퇴)
축구해설자
방송인
가수[2]
소속
선수
토 로 타운 (1978~1980)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80~1985)
토트넘 홋스퍼 FC (1986~1989)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9~1992)
셰필드 웬즈데이 FC (1992~1996)
폴커크 FC (1996)
브래드포드 시티 AFC (1996~1997)
선덜랜드 AFC (1997)
번리 FC (1997~1998)
토키 유나이티드 FC (1998)
워크솝 타운 FC (2000~2002)
글랩웰 FC (2002)
스톡브리지 파크 스틸 FC (2002)
할람 FC (2013~2014)
지도자
번리 FC (1997~1998 / 선수 겸 감독)
국가대표
파일: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62경기 6골 (잉글랜드 / 1985~1991)

1. 개요
2. 플레이 스타일
3. 클럽 경력
4. 국가대표 경력
5. 은퇴 이후
6. 여담
7. 기록
7.1. 대회 기록
7.2. 개인 수상




1. 개요[편집]



파일:Waddle_Magic_Chris.jpg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출신 해설가.

1980년대 잉글랜드가 뻥축구를 대표하던 시기에 시대를 거슬렀던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당대 자국을 대표했던 축구선수 중 한명이었다.

2. 플레이 스타일[편집]


앞서 진술했지만 그가 활동하던 70~80년대에는 잉글랜드는 뻥축구를 구사하며 자국민들에게 자조섞인 놀림을 받던 시기였다. 그러나 워들은 투박했던 자국 선수들과 달리 187cm라는 위압감 넘치는 피지컬에 파괴적인 스피드와 발군의 드리블 능력 그리고 뛰어난 테크닉을 선보이며 잉글랜드의 테크니션으로 불렸고 당시 삼사자군단의 몇안되는 드리블러로 활약했다. 또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용되며 천부적인 패스 센스와 박스 바깥에서 때리는 슈팅 또한 아주 일품이었다.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에 일각에서는 그를 두고 남미 선수들 처럼 플레이하는 영국인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워들 이후 잉글랜드의 테크니션 계보는 폴 개스코인이 계승했고 이후 조 콜을 거쳐 현재는 필 포든이 잉글랜드의 테크니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3. 클럽 경력[편집]


워들은 경력 초기에 펠로 주니어스, 화이트하우스 SC, 마운트 플레전트 SC, HMH 프린팅, 펠로 SC, 림 레인 SC 및 클라크 채프먼 등 아마추어 리그에서 활약했으며 1978-79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토 로 타운에 입단했다.


3.1. 뉴캐슬 유나이티드[편집]



파일:Waddle_Newcastle.jpg


워들은 식품 가공업(조미료 공장)에 종사하면서 선덜랜드 AFC코번트리 시티와의 입단 테스트를 봤지만 탈락했다. 그러다 1980년 7월, 로컬팀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천만 파운드의 금액으로 입단에 성공했다.

그는 1980년 10월 22일, 슈루즈버리 타운과의 홈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으며,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로 빠르게 정착하였고, 1983-84 시즌 말미에는 케빈 키건, 피터 비어슬리와 함께 뉴캐슬의 1부 승격을 이끌었다.

워들은 1984년 9월 22일에 로프터스 로드에서 있었던 퀸즈 파크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전반전에만 해트트릭을 하며 4:0의 리드를 가져왔으나 QPR의 믿을 수 없는 반격으로 경기는 5:5로 끝났다.


3.2. 토트넘 홋스퍼[편집]



파일:Waddle_Tottenham.jpg


워들은 뉴캐슬에서 170경기 46득점의 기록을 남긴 후, 1985년 7월 1일 59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통해 토트넘 홋스퍼에 입단했다. 그는 리그 개막일에 벌어진 왓포드와의 홈 경기에서 리그 데뷔전을 치르며 두 개의 득점을 기록하며 4:0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3위로 마친 이전 시즌과는 달리 10위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피터 슈리브스가 감독에서 해임되고 루턴 타운에서 온 데이비드 플릿이 후임자로 임명됐다.

토트넘에 입단한 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류 멤버로 활약하게 됐고, 멕시코에서 있었던 1986 FIFA 월드컵에서 함께 활약한 비어슬리와 다시 연이 닿았다. 그는 월드컵 이후 가장 유익한 시즌을 보냈다. 1987년 FA컵에서 코번트리에게 결승에서 패했지만 준우승 메달을 획득했고, 리그에서는 3위로 마감했으며, 풋볼 리그 컵에서는 준결승에 올랐다.

1985년 헤이젤 참사의 영향으로 잉글랜드의 클럽의 유럽 대항전 출전이 금지되면서 워들이 해외 팀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해외로 이적하기 전까지 네 시즌을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보냈다.


3.3.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편집]



파일:Waddle_Marseille.jpg


1989년 7월 1일, 토트넘에서 138경기 33득점의 기록을 남긴 워들은 4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통해 프랑스의 클럽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했고, 이는 당시 역대 이적료 중 세 번째로 높은 금액이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클럽은 리그 1 우승 3회(1990, 1991, 1992)의 업적을 일궈냈다.

1991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며, 상대는 츠르베나 즈베즈다였다. 경기는 연장전까지 득점없이 승부차기로 흘러갔고,[3]팀은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1991-92 시즌에는 레인저스 FC에서 이적해서 한 시즌을 보내고,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춘 잉글랜드의 미드필더 트레버 스티븐과 함께 뛰기도 했다.

그리고 팀이 1993년에 마침내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했을 때는 워들은 이미 클럽을 떠난 상황이었다.(...)

마르세유에서 있었던 몇 년 동안, 팬들은 그에게 '매직 크리스(Magic Chris)'라는 별명을 붙여줬으며, 1970년대 마르세유에서 활약했던 전설적인 외국인 선수 로예르 마그누손의 후계자다운 플레이를 보여주며 팬들을 매료시켰다. 또한 1998년에는 클럽의 10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역대 최고의 선수 선정 투표에서 장피에르 파팽에 이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워들의 3년간 있었던 마르세유 시절은 짧지만 강렬했고, 팬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3.4. 셰필드 웬즈데이[편집]



파일:Waddle_S.Wednesday.jpg


워들은 1992년 7월에 1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통해 셰필드 웬즈데이로 이적하면서 자국으로 복귀했다. 32살의 워들은 베테랑이자 에이스로 팀을 이끌고 1992-93 시즌에 두 개의 국내 컵 대회 결승에 진출했으며[4], 1993년 축구기자협회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황혼기에 접어든 시점[5]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셈.

1993-94 시즌에는 웬즈데이의 리그 컵 준결승 진출을 도왔지만, 우승 트로피를 향한 마지막 도전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의해 좌절되었고, 웬즈데이는 그 다음 두 시즌을 중하위권으로 마쳤으며, 1995년에는 프랜시스가 해임되고 워들과 함께 했었던 전직 토트넘 감독 데이비드 플릿이 이어받았다.

1996년 1월, 당시 뉴캐슬의 감독이었던 케빈 키건은 징계를 받은 다비드 지놀라의 대체를 위해 50만 파운드를 주고 그를 재영입하려고 했지만, 제의는 거절됐고, 셰필드측은 100만 파운드를 받기를 원했으나 35살 고령의 나이였던 워들을 100만 파운드에 사기에는 꺼렸던 키건은 영입을 포기했다. 이 시기에 셀틱 FC, 리즈 유나이티드, 선덜랜드 역시 워들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이적은 성사되지는 않았다. 또한 번리 FC가 그를 선수 겸 감독으로 선임하는 데 관심을 드러냈지만 무산됐다.

109경기에 출전해서 10개의 득점과 그보다 더 많은 도움을 기록한 그는 힐즈버러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고, 1996-97 시즌에는 5경기를 뛰고 방출되었다.


3.5. 폴커크 FC, 브래드포드 시티[편집]


1996년 9월, 그는 스코틀랜드 퍼스트 디비전폴커크 FC에 입단했지만, 한달만에 디비전 1브래드포드 시티에서 뛰기 위해 국경의 남쪽으로 돌아왔다. 짧았지만 시티에서의 시간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팬들에게 확실한 지지를 받았다. 허더즈필드 타운전에서 코너킥 상황에서 직접 득점을 넣기도 했다. 또한, 그가 구디슨 파크에서 있었던 3:2로 승리를 거둔 에버턴과의 FA컵 경기에서 넣은 골은 1997년 2월 '매치 오브 더 데이 이달의 골(Match of the Day Goal of the Month)'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는 브래드퍼드에서 뛰는 동안 팀의 잔류에 기여했다.


3.6. 선덜랜드 AFC[편집]


1997년 3월, 7만 5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통해 어렸을 때 응원했던 로컬팀 선덜랜드로 이적했다. 그리고 에버튼을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팀이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3.7. 번리 FC[편집]


1997년 5월, 그는 자유 이적으로 로커 파크로 적을 옮겼고,번리의 선수 겸 감독으로 선임됐다. 번리는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고, 간신히 강등을 면했을 뿐이었다. 그는 1997년 10월에 있었던 본머스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했다.


3.8. 이후 [편집]


번리를 나온 워들은 하부리그의 토키 유나이티드와 워크솝 타운, 클랩웰 FC, 스톡브리지 파크 스틸에서 선수생활을 마친 뒤 2002년, 42살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4.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Waddle_National_1.jpg

그는 25세의 나이임에도, 잉글랜드 U-21에 발탁되었고 1985년 3월에 있었던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A대표팀에 데뷔했다.

1986 FIFA 월드컵UEFA 유로 1988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삼사자 군단의 레귤러 멤버로 정착한 워들은 1990 FIFA 월드컵 준결승에서 잉글랜드 소속으로 6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그는 서독과의 준결승에서 연장전에 날린 슛이 포스트를 강타했다. 또한 승부차기에서 키커로 나섰으나 볼은 바 위로 넘어갔으며 서독을 결승에 보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이탈리아의 3위 결정전에서 후보로 경기를 시작했고 팀은 1:2로 패하며 4위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는 게리 리네커, 폴 개스코인과 더불어 잉글랜드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선수 중 하나였고, 월드컵에서의 퍼포먼스는 많은 자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1991년 10월 16일 1:0으로 승리한 튀르키예전이 그의 마지막 국대경기였으며, 1994년, 테리 베너블스 감독이 부임한 뒤 덴마크와의 경기를 앞두고 그를 명단에 포함시키려고 했으나 부상으로 무산됐다.


5. 은퇴 이후[편집]


현역 은퇴 후 워들은 BBC와 계약을 맺고 현재까지 해설과 축구전문가로 바쁘게 보내고 있다.


6. 여담[편집]


  • 선수시절 음반 작업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1988년, 스퍼스와 잉글랜드 대표팀 동료인 글렌 호들과의 듀엣으로 제작한 싱글 'Diamond Lights'가 UK Top 20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마르세유에서 뛰던 시절, 팀 동료인 바질 볼리와 함께 We've Got a Feeling 이라는 노래를 발매했다.


7. 기록[편집]



7.1. 대회 기록[편집]





7.2. 개인 수상[편집]



[1] 공격형 미드필더도 소화했다.[2] 여담 참조.[3] 워들은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지 않았다.[4] 모두 아스날에게 패배했고, 워들은 FA컵 결승전 재경기에서 웬즈데이의 득점을 기록했다.[5] 지금과 다르게 90년대 초반까지는 30살 초반에 은퇴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황혼기에 해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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