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 레이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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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 레이트너의 수상 이력




크리스천 도널드 레이트너
Christian Donald Laettner

출생
1969년 8월 17일 (54세)
뉴욕주 앵골라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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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듀크 대학교
신장
211cm (6' 11")
체중
107kg (235 lbs)
포지션
파워 포워드 / 센터
드래프트
199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지명

소속 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1992~1996)
애틀랜타 호크스 (1996~1998)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99~2000)
댈러스 매버릭스 (2000~2001)
워싱턴 위저즈 (2001~2004)
마이애미 히트 (2004~2005)
지도자
포트 웨인 매드앤츠 코치 (2012)
등번호
32번 - 미네소타 / 애틀랜타 / 디트로이트 / 댈러스
44번 - 워싱턴 / 마이애미
4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1. 개요
2. 커리어
2.1. NBA 데뷔 이전
2.2. NBA 데뷔 이후
3. 수상 내역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전 농구선수. 그 유명한 1992년 올림픽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었던 선수이기도 하다.


2. 커리어[편집]



2.1. NBA 데뷔 이전[편집]



고화질 영상은 이쪽

듀크 대학교 소속으로 4년 연속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 Final Four에 진출했으며 91년, 92년 2년 연속으로 NCAA 우승을 견인한 대학농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이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잘생긴 백인 미남이었기 때문에 흑인들이 지배한 농구계에서 당시에는 폭발적인 인기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버저비터로 듀크의 우승을 확정지은 것이 압권[1]. 이 활약을 바탕으로 드림팀 1기에 대학생으로서는 유일하게 선발되었다.[2]

파일:크리스찬레이트너2.jpg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1기 시절

그러나 드림팀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 유일하게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아예 드림팀 안에서는 "College kid" 라고 불렸다. 실제 드림팀 멤버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College kid" 라고 부른다. 1992년 드래프트에서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에 이은 3순위로 지명되었지만 안타깝게도 NBA에서는 대학 시절의 포스를 이어가지 못하고 올스타 경력 1회의 수준급 빅맨 정도로 성장하는 데 그쳤다. 드림팀 내에서 유일하게 개인자격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한 선수이며[3] All-NBA Team에 선정되지도 못했다. 말 그대로 신들의 전쟁에 혼자 끼어든 민간인 수준(...) 오히려 대학 시절 동료이자 후배였던 그랜트 힐이 짧은 전성기였지만 NBA의 스타플레이어로 자리잡아서 레이트너는 국내에선 "쟤 누구?" 정도의 인지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원래 예정대로 대학팀들이 올림픽에 출전했다면 팀의 에이스가 됐을 인물이었다. 그래도 나름 4.8점을 기록하며 팀내 득점 순위에서 탈꼴찌는 했다. 꼴찌는 2.8점을 넣은 존 스탁턴. 물론 이 팀에서 개인기록은 큰 의미가 없었다.

2.2. NBA 데뷔 이후[편집]



2.2.1.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시절[편집]


1992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지명을 받아 데뷔했다. 대학 시절의 포스에 잘생긴 외모까지 갖춰 아직 신생팀 딱지를 벗지 못한 미네소타의 간판 스타가 될 것이라 여겼으나 아쉽게도 생각보다 성장세가 더뎠다. 사실 미네소타 시절 경기당 평균 대략 17득점에 8리바운드 3어시스트에 스틸과 블락도 평균 1개 이상씩 기록해줬기 때문에 결코 나쁜 활약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교 대상이 하필 앞서 지명된 샤킬 오닐알론조 모닝인 덕택에... 게다가 이후 케빈 가넷이 입단하여 알력이 생기자 거의 내쫒기다시피 애틀란타 호크스로 트레이드됐다.


2.2.2. 애틀랜타 호크스 시절[편집]


그래도 이적 직후 당시 강팀이었던 애틀랜타의 한 축으로 활약했으며, 커리어에서 유일한 올스타 선정도 이 시절. 무키 블레이락, 스티브 스미스 등의 가드들과 뛰어난 센터 디켐베 무톰보 등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했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애틀랜타에서의 2년차인 1997-98시즌에 부진에 빠지고 만다.


2.2.3. 이후[편집]


디트로이트 이적 후 부상을 당한 뒤 그나마 준 에이스급의 기량마저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댈러스, 워싱턴, 마이애미를 거치며 롤 플레어로 활약하다가 2005년에 은퇴했다.

커리어 전반을 한줄 요약하면 대학 농구계에서는 위대한 선수로 꼽히며, NBA에서도 수준급 자원이었지만 대학 시절 기대치와 위상을 그대로 이어가지는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아예 별볼일 선수로 기억되기는 뭣 한게, 나름 올스타 선정이라는 경력을 남겼고 통산 기록 자체도 썩 나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대학 시절의 업적 및 기대치나 드림팀 1기 멤버라는 출신 성분에 비하면 아쉬운 족적이라는 것.

레이트너는 스타급은 아니었지만 다방면에서 공헌할 수 있는 선수였으며, 전성기 기준으론 약팀의 에이스나 중위권팀의 주축 중 한명 정도의 위치까진 가능했던 선수였다. 어찌보면 한때 같이 뛰었던 톰 구글리오타, 후대 선수인 키스 밴 혼과 비슷한 정도의 위상[4] 당시 빅맨 중 슛거리가 상당히 긴 편으로 슈팅터치도 괜찮아 4할 후반대 야투율, 8할이 넘는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했으며, 패스나 시야를 포함한 농구센스도 나쁘지 않았다. 수비에서도 파워가 강한 편이 아니어서 림프로텍팅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만 꾸준하게 해준 편. '센터급 장신에 적당한 파워, 수비나 골밑장악능력보다는 공격 위주'란 점에서 좀 거칠게 표현하면 보급형 케빈 맥헤일 정도 되는 선수인데, 시대에 따라 빅맨들 스타일이 달라져 밀레니엄 시대 빅맨 중에는 비교가 애매하다. 대략 올스타급과 주전 사이 키 큰 공격형 빅맨들인데, 보통 현 세대에 이 정도 위상을 지닌 빅맨들은 3점슛 능력을 지닌 스트레치 빅들이 많다. [5]

종합적으로 '괜찮았다'로 정리되는 선수인데, 사실 두드러지는 약점은 하나도 없는데 그렇다고 엄청나게 뛰어난 점도 하나도 없는 선수였다. 이 때문에 사실 팀 입장에서 애매한 상황을 정리할 때 보내기도 쉬운 선수였다. 보내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에이스급은 아닌데, 기본 실력이 있어서 시장에서 가치 있는 매물이었기 때문. 이 때문인지 3순위 지명선수임에도 꽤 일찍 팀을 옮겼고[6] 이후에도 팀을 꽤 옮긴 편이다. 재밌는 건 위에 언급된 구글리오타와 밴혼 역시 팀을 꽤 옮겼다. 사실 팀을 비교적 자주 옮기는 선수들 중엔 1) 스타급인데 성격이 거지같아서 감당못해 자주 옮기거나 2) 레전드급인데 팀에 별다른 애착이 없고 우승이나 돈 등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 자주 옮기거나[7] 3) 평범한 롤플레이어여서 팀들의 필요에 따라 조각 맞추기하듯이 이리저리 팔려가거나, 4) 실력은 꽤 괜찮은데 스타급이라고 하긴 애매해서 팀에서 언터쳐블 위상까진 못 가는 경우가 있는데, 저 세 선수는 딱 4)번에 해당된다.


3.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NBA-Allstar2021.png NBA 올스타 (1997)
파일:오륜기(여백X).svg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4. 관련 문서[편집]



[1] 위의 영상은 결승이 아니라 8강전(Elite Eight)에서 켄터키 대학을 침몰시킨 영상이다.[2] 당시 후보는 레이트너 외에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 지미 잭슨, 해롤드 마이너가 있었는데, 초대형 유망주인 오닐을 제치고 선발되었기에 후대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당시로서는 그리 납득 못할 결과도 아니었는데, (프로에서 오닐이 훨씬 대성할 것으로 여겨졌더라도) 오닐의 팀은 2라운드 탈락한 반면 레이트너는 우승+네이스미스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차지할 정도로 최고의 대학선수였기 때문.[3] 1992 드림팀은 "팀" 자체로 2012년에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4] 다만 저 둘과 달리 밴 혼은 멘탈 면에서 지나치게 유약한 면이 있었다.[5] 레이트너의 외곽슈팅력은 3점슛이 '가능은 했다' 수준으로, 시대상 많이 쏘지도 딱히 부각되지도 않았다. 다만 자유투 성공률에서 볼 수 있듯 빅맨치고 슈팅터치는 매우 안정적이었고, 확률높은 롱2 능력을 자랑했는데, 사실 이런 선수들이면 3점 장착하는게 상당히 용이하다. 장신이라 3점을 세트슛으로 쏠 수 있기 때문.[6] 레이트너와 구글리오타는 비슷한 수준과 플레이스타일을 지닌 선수였고 장단점도 비슷한 선수였지만, 당시 실력이 무섭게 올라오고 있던 케빈 가넷을 주전으로 올림으로 인해 7피트 언저리에 행동반경이 비슷한 세 명이 동시에 주전으로 동시에 뛰는 핵무리수 라인업이었기에 정리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당시 가넷을 포함한 어린 선수들에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하던 레이트너가 타깃이 된 것.[7] 르브론 제임스나 샤킬 오닐, 케빈 듀란트나 윌트 체임벌린 같은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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