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폰 쾨펜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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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폰 쾨펜힐러
Christopf von Köfenhiller · クリストフ・フォン・ケーフェンヒラー

파일:external/pds26.egloos.com/e0006522_572df3d9643e2.jpg
OVA
인물 정보
신체 정보
남성, ???cm, ?형
생몰년
SE 717. ??. ??. ~ SE 789. 1. 1. (71세)
가족 관계
???(배우자)
국적 및 소속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 은하제국군자유행성동맹
최종 계급
은하제국군 대령[1]
최종 직책
에코니아 포로수용소 자치위원회장
최종 작위
남작
기함
없음
미디어 믹스 정보
성우
파일:일본 국기.svg OVA 야지마 마사아키
1. 개요
2. 생애
2.1. 내무성 관료 시절
2.2. 군인 시절
2.3. 포로 시절
2.4. 위기와 석방
2.5. 죽음
3. 그 외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은하영웅전설 외전 5권 <나선미궁>의 등장인물.

인물 이름을 일본어 발음과 영어 발음으로 뒤섞어 오역, 편역한 을지서적 해적판에서는 케펜힐러로 잘못 번역했으나 서울문화사와 이타카 정식판에서 제대로 독일어 발음인 쾨펜힐러로 번역했다.

은하제국남작 작위를 가진 귀족가문 출신이며, 원래는 행정관료였으나 모종의 사건 때문에 스스로 군대에 지원했다. 그리고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자유행성동맹군포로로 붙잡혔고, 그 뒤 무려 43년간 송환을 거부하며 자유행성동맹에코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괴짜 노인이다.

OVA의 죄수번호는 05023.

2. 생애[편집]




2.1. 내무성 관료 시절[편집]


쾨펜힐러 남작가를 계승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지방행정 쪽이 전문인 내무성의 행정관료였다. 신분제 사회인 은하제국에서 귀족의 경우 공직 진출에 특혜가 있으며, 개념 없는 명문귀족가 자제들이 들어와서 월급도둑질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쾨펜힐러의 경우에는 유능한 관료였다. 그리고 22세가 되던 해에 결혼한다. 원래대로라면 문벌귀족 정도는 아니더라도 작위가 있는 귀족이자 제국 내무성의 공무원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었을 인물이다.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23세가 되던 해에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이 들통났고, 아내가 도리어 잘못된 만남을 주장하면서 그와의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에서부터였다. 그리고 쾨펜힐러가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아내는 아예 대놓고 내연남과 함께 살림을 차려 집을 나가버렸다.[2]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분쟁이긴 한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국은 신분제 사회이고, 쾨펜힐러는 남작이었지만 내연남이 은하제국 명문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즉, 급수가 다른 상대였다. 백작가에서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쾨펜힐러에게 금전, 출세와 같은 조건들로 회유하면서 어떻게든 이혼을 시키려 들었다. 하지만 법적으로 남편이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고, 쾨펜힐러가 꿈쩍도 안 했던 관계로[3] 결국 이혼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분노한 백작가에서는 내무성에 압력을 넣어 쾨펜힐러를 변경으로 좌천시키려 했다.

쾨펜힐러는 백작가에서 무슨 짓을 하건 동요하지 않았지만 아내가 내연남의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자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백작가의 뒷공작이 성사되어 변경으로 좌천되기 전에 선수를 쳐서 내무성에 사표를 내고, 25살의 나이로 군대에 지원해버렸다.

2.2. 군인 시절[편집]


간부 후보생을 거친 쾨펜힐러는 바로 소령 계급을 받고 복무하기 시작했다. 작중에서 귀족은 특혜가 있어 임관을 신청하면 우대를 받는다는 서술이 있고, 쾨펜힐러의 경우 행정관료 경력까지 있다 보니 특별임관[4] 제도나 혹은 경력직 임관 같은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관한 이후 쾨펜힐러는 공을 세워나가며 빠른 승진을 한 끝에 28세에 대령까지 진급했다. 주요 보직은 나오지 않지만 통수본부에서 크리스토프 폰 미켈젠 장군의 밑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미켈젠 장군은 서로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쾨펜힐러에게 잘해줬다는 서술이 나온다.

이후 배치가 바뀌어 전선근무를 나가게 됐고 함대 사령관 코젤 대장 밑으로 배속됐다. 하지만 그 전투가 하필 제2차 티아마트 회전이었고, 제국군이 브루스 애쉬비가 이끄는 자유행성동맹군에게 신나게 털린 "군무성이 눈물을 흘릴 40분" 사이에 코젤 대장도 전사했다. 생존한 제국군 지휘부와 참모 일원은 아직 교전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음에도 동맹군이 항복권고를 보내자 자신들이 불리한 상황이 몰렸다는 것을 느끼고 순순히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쾨펜힐러는 자신이 포로가 된 뒤, 동맹군 병사들이 전투에서 이겼는데도 브루스 애쉬비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맹군이 마치 진 것과 같은 분위기에 빠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자유행성동맹은 장교라도 장성급 포로와 비장성급 포로를 별도로 수용하게 되어 있었는데, 대령이었던 쾨펜힐러는 장성급 장교들과 분리되어 에코니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2.3. 포로 시절[편집]


에코니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28세의 쾨펜힐러 대령은 처음에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으나, 조국에 돌아갈 장소도 없고 자신이 확실하게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 덕분에 아내는 평생 내연남과 불륜의 관계만을 가질 수 있으니 자신의 힘으로써 가장 잔인한 복수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초연하게 마음을 비웠다.

포로가 된 쾨펜힐러는 대령임에도 탁월한 지도력 인품으로 포로들을 규합하여 통일된 자치위원회의 장이 되었다. 보통 포로들의 조직은 장교와 사병으로 나뉘어져 부사관이나 병사가 실권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쾨펜힐러는 장교와 사병을 합쳐 하나의 조직을 만들고, 에코니아 포로수용소의 진정한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수용소장은 겨우 2~3년마다 교체되지만 쾨펜힐러는 40여년이나 있었고, 유창한 동맹공용어는 물론 수용소측도 잊어버린 포로 수용구역과 기지 사령부를 잇는 폐기된 통신관리터널의 존재와 이용 방법까지 파악할 정도로 수용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수용소 인물들은 쾨펜힐러에 한 수 접어줄 뿐만 아니라 수용소장도 쾨펜힐러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고, 부임한 사람들은 쾨펜힐러에게 부임 인사를 하러 가는 등 말이 포로지 수용소의 1인자나 다름 없는 대우를 받았다.

수용소에서 난동을 피우지도, 포로들을 선동하지도 않고 수용된 포로들을 잘 다독여 사건사고도 일어나지 않으며 자치위원회를 통해 수용소측과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데다가 본인의 성품까지 훌륭한 편이다보니 역대 수용소장들의 절반은 쾨펜힐러에 우호적이었고, 포로교환 리스트에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쾨펜힐러는 돌아갈 곳도 없으니 매번 거절하였다. 쾨펜힐러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고향에 돌아가도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이 아닐 수 있다며 이해하지 못했지만 최대한 그들을 위해 노력하였다. 포로교환으로 해방된 전우들을 배웅해주고, 죽은 전우의 유품에 애도하는 편지를 담아 페잔 자치령을 통해 제국 본토로 전해주기도 했다. 이러기를 여러번, 장장 43년의 세월을 포로수용소에서 보내며 28세의 젊은이였던 쾨펜힐러는 71세의 노인이 되었다.

수십 년을 수용소에서 보내면서 쾨펜힐러는 미켈젠 제독 암살사건지크마이스터 제독 망명사건에 대한 진실을 파헤쳤다. 신임 소장이나 참사관이 부임할 때마다 같은 소리를 해서 혼을 빼놓았다고. 부족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자료를 수집한 쾨펜힐러는 불완전하지만 두 사건을 잇는 개연성이 높은 이론을 고안할 수 있었다.


2.4. 위기와 석방[편집]


그런데 장장 43년간의 포로 생활에 위기가 닥친다. 수용소장 버나비 코스테아 대령은 수용소의 예산을 횡령하여 최대 360만 디나르에 달하는 자금을 모았다. 그런데 '엘 파실의 영웅'으로 유명한 양 웬리 소령이 덜컥 변경 수용소의 참사관으로 발령나자 중앙에서 보낸 비밀 감찰관으로 착각하여 애송이 프레스부르크 중위를 이용하여 양 웬리를 죽이고, 표도르 파트리체프에게 공금횡령 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쾨펜힐러는 포로 폭동이 터지자 인질을 자처하였고, 궁지에 몰린 코스테아가 박격포 포격으로 눈엣가시인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들자 버려진 통신용 정비통로로 안내하여 양 웬리와 파트리체프, 그리고 프레스부르크를 구했다. 모든 것을 파악하고 움직이는 모습에 파트리체프와 양 웬리는 포로가 되지 않았다면 제국군 중추에 올라 동맹군을 농락했으리라고 경탄했고, 양 웬리는 수용소장이 아니라 쾨펜힐러야말로 진정한 수용소의 왕이라고 생각했다. 비밀통로로 탈출한 쾨펜힐러 일행은 양 웬리를 죽이려 드는 코스테아를 찾아가 단번에 제압하고 사태를 진정시켰다.

사태가 종료되자 쾨펜힐러의 행위는 처벌할 이유가 없어 불문에 부쳐졌다. 쾨펜힐러는 프레스부르크를 고국으로 송환시켜 달라고 요구했지만 성사되었는지는 미지수. 그리고 양 웬리와 파트리체프를 위기에서 구하고, 수용소의 부정을 파헤치는데 공헌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쾨펜힐러는 어차피 나가봤자 직업이 없어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고, 원하지도 않는 자유를 왜 타인이 강요하나며 항의했지만 무라이는 쾨펜힐러는 퇴역대령에 걸맞은 연금이 지급된다고 타이르며, 불만이 있어도 차츰 해결해 가라고 타일렀다. 그렇게 하여 쾨펜힐러는 43년만에 자유인이자 자유행성동맹의 시민이 되어 에코니아를 떠나게 되었다.


2.5. 죽음[편집]


쾨펜힐러의 석방과 함께 알렉스 카젤느의 노력으로 양 웬리 역시 하이네센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파트리체프도 인사순환의 일환으로 에코니아를 떠나게 되어 두 사람이 하이네센으로 돌아갈 때까지 쾨펜힐러를 돌보게 되었다. 쾨펜힐러는 40여년만에 포로복을 벗고 에코니아에서 유일한 신사복 전문점에서 맞춘 정장을 입은 채로 에코니아를 떠나 하이네센으로 갔다.

그러나 우주력 789년 1월 1일, 중간 경유지인 행성 마스지드의 우주항에서 쾨펜힐러는 숨을 거두었다. 평소처럼 맥주를 가지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1월 1일이 되자 파트리체프, 양 웬리와 함께 건배를 나누다가 마치 잠들듯 조용히 사망했다. 의사 말로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사망 직전에 마시고 있던 맥주의 취기가 올라 있었던 탓에 고통없이 마치 잠들 듯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라고.[5] 자유의 몸으로 첫 새해를 맞이하면서 중간 경유지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뭔가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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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만에 입어본 양복차림. 그리고 죽기 바로 몇 분전.

사후 그의 시체는 우주항 시체보관실에서 잠시 보관되었다가 알렉스 카젤느의 수배로 마스지드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가 남긴 유품은 양이 하이네센으로 가져오며, 일부는 제국에 있는 유족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B급 중요사항으로 지정되어 25년간 봉인되었다. 상록수가 우거진 공동묘지에서 쾨펜힐러의 시신은 그가 애용하던 펜과 손목시계 등과 함께 땅에 묻혔다. 모비명은 양 웬리가 썼는데, 제국 공용어로 새긴 까닭에 150디나르 정도 비용이 더 들었다고 한다. 묘비명은 크리스토프 폰 쾨펜힐러. 제국력 408~480년. 생전 몇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3. 그 외[편집]


그냥 장기간 포로생활을 한 괴짜 노인네 정도로 취급됐는데 가면 갈수록 드러나는 진상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더불어 양 웬리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 인물. 브루스 애쉬비의 숨겨진 부분에 대해서도 연구했으며 제국과 동맹 사이에 있었을지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개연성 높은 설을 발굴해내기도 했다.

참고로 양이 브루스 애쉬비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된 계기는 이미 작고한 애쉬비 제독의 부인 명의로 애쉬비 제독이 모살당했다고 주장하는 투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투서의 정체나 목적, 그리고 발송한 사람의 정체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는데 에코니아 포로수용소 사건이 마무리된 이후 양은 쾨펜힐러에게 당신이 투서를 보낸 것이냐고 캐물었다. 이때 쾨펜힐러 노인의 반응을 보면 양의 추측이 맞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쾨펜힐러가 수집하고 1차로 정리한 자료는 사후에 양 웬리가 완전히 정리했고, '쾨펜힐러 문서'로 명명된 이 자료는 주요사료로 지정되어 봉인조치에 들어갔다. 카젤느는 만약 해당 연구자료를 양의 이름으로 발표했다면 능력을 인정받아 전사연구쪽으로 빠질 가능성도 있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양은 쾨펜힐러가 다 해놓은 것을 자신은 그저 자료를 정리하고 엮은 입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봉인된 자료는 자유행성동맹이 신 은하제국에 합병당한 이후 공개됐을 것으로 보인다.

43년이나 포로로 있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온 제국군 장교들 중 귀족도 꽤 있었을 것이고 그들 입을 통하여 자신의 아내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명을 달리하기 전에 말해주었는데, 아내는 그가 죽지 않아 이혼도 못 해서 애를 낳은 뒤에도 결국 결혼할 수 없었으며, 저절로 사생아로 남게 되어버린 아이의 존재가 귀족계에서 쭉 입소문을 타고 흥미거리로 언급되고 있기에 여전히 고생한다고 한다. 제국의 힘이 미치는 범위라면 백작가의 권위를 내세워 어떻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쾨펜힐러는 동맹에 포로로 잡혀 있고 버젓이 포로 명단에 있는 인물이다. 결정적으로 하위귀족이긴 해도 쾨펜힐러도 남작 작위를 이어받을 몸이었기에 별다른 권위도 없는 제국기사같은 말만 귀족인 경우나 평민과 확실히 다르다. 공문서 위조 등을 통해 사망으로 처리해버리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다른 귀족의 약점이 될 만한 건이 있으면 그걸 트집 잡아서 공격하는 동네가 은하제국이다 보니 아무리 힘 있는 백작가라도 그건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황제의 칙명이나 관료 귀족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는다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6]이다.

그래도 일단 쾨펜힐러가 결국 죽었으니 전 아내는 비로소 내연남과 결혼할 수 있게 되긴 했다.[7] 하지만 이미 무려 43년이나 흘렀고, 적게 잡아도 60대 후반인 몸으로 정식 결혼 및 혼인신고를 할 수 있게 되어봤자 이미 꽃같은 세월은 다 지나버렸다. 그 오랜 기간 동안 결혼도 못 하는 어정쩡한 관계로 지내는 데 지쳐 헤어졌을 가능성도 있고 말이다.[8][9] 게다가 그 오랜 시간 실컷 귀족계에서 입소문이 나고 흥미거리로 언급되었으니 쉽게 잊혀지기도 힘들 것이고, 결국 평생을 계속 고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쾨펜힐러 본인은 이런 점을 언급하지도 않으며 아내를 용서한다는 암시는 전혀 비치지 않았으니 끝까지 용서하지 못한 듯. 어떻게 보면 복수귀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포로들이 고향에 남겨둔 아내나 약혼자를 그리워하다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두고 "그녀가 배신할 수도 있잖아?"라며 삐딱하게 또는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했다.[10]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으로만 했을 뿐이라 고향에 둔 이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탓하거나 자신의 예를 들며 비꼬거나 하진 않았다. 또 자신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포로로 죽었을 경우 다른 이들처럼 그리워하고 슬퍼하며 죽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포로생활 중 죽은 사람들의 편지와 유품을 제국으로 보내는 일도 솔선수범으로 맡았는데 1년쯤 지나 죽은 다른 포로의 미망인이 쓴 감사의 답장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이걸 받곤 포로의 부인들이 다 배신하는 것은 아니구나 생각도 했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지하세계의 거물이라고 평가해도 될듯하다. 에코니아 포로수용소 사건당시 에코니아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던 양 웬리는 이 노인이야말로 진정한 에코니아의 주인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장면도 있다.

4. 관련 문서[편집]



[1] 이후 동맹군 퇴역 대령 예우[2] 물론 아내 입장에서는 그가 마음에 안 들만 한 게 이 결혼이 사랑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서 아내와 나이 차이가 꽤 났다. 키 차이부터가 얼굴 하나이상 났을정도. 하지만 자기가 먼저 잘못해놓고,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하는 건 확실히 문제다. 이혼을 해주면 내연남과 합법적으로 재혼해 뻔뻔하게 잘 먹고 잘 살 텐데 어느 남편이 그 꼴을 보고싶어할까?(현실에서도, 바람을 피운 배우자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으로 재결합 의지가 없음에도 이런 이유로 이혼을 해주지 않는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김민희와 바람난 홍상수의 아내)[3] 일반 평민이나 하급 귀족같다면야 압박만으로도 가능했겠지만 쾨펜힐러는 그래도 오등작을 가진 귀족이라 설득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4] 비슷한 사례로 백작가의 아들인 칼 마티아스 폰 포르겐이 있다. 비사관학교 출신이고 그저 군무성 행정직 경험밖에 없는데 나이 서른에 대령 대우로 강제전출됐다.[5] 원래 심장마비는 심각하게 아프게 죽는 병이다.[6] 베네뮌데 후작부인에게 정치적인 역공을 가할 당시 로이엔탈이 말하듯이, 또는 클롭슈톡 사건 당시 미터마이어를 구하기 위해서 로이엔탈이 '미터마이어가 죽는다면 암살로 규정하고 곳곳에 소문내버리겠다'고 하자 그 브라운슈바이크가 섣불리 미터마이어를 죽이지 못한데서 보듯 제국 귀족계에서 가장 큰 무기가 바로 입소문이라고 나온 걸 보면 이러한 사생활 관련 추문은 귀족계에서 절대로 암묵적으로 넘어가기 어렵다. 지존인 제국 황제조차도 온갖 입소문이 떠돌고 있는 와중이니. 황실 입장에서도 참 꼴사나울 일이니, 아무 문제없는 남편과 이혼하고 내연남과 결혼을 하라고 칙명을 내줄 이유가 없다.[7] 일단 제국에는 소식이 전해질듯 하다. 그의 유품의 일부는 페잔을 경유해 제국으로 갔기 때문이다.[8] 더군다나 헤어졌다고 해도 계속 고생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정식으로 혼인한 남자가 있는 만큼 다른 사람과 재혼한다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고, 어찌어찌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해도 또다른 불륜일 뿐인데다가 한번 불륜을 저질러 입소문 잔뜩 난 여자 (심지어 애까지 딸린 여자. 그것도 그냥 아이도 아닌 불명예스러운 사생아로 말이다.)를 거둬줄만한 귀족이 있을지도 의문.[9] 심지어 지쳐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남자쪽이 버렸을 가능성도 높다. 어차피 남자쪽은 백작가인 만큼 여자를 내치려고 하면 얼마든지 내칠 수 있고 백작가에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입소문이 나게 되면 불리하므로 백작가의 당주가 아들을 타박하든 꼬시든 해서 여자를 내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전 아내가 내연남과 결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다. 바로 쾨펜힐러가 의도적으로 은하제국으로 돌아오는걸 거부한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 하지만 은하제국으로부터 수천~1만 광년은 떨어진 에코니아에서 벌어진 일까지 다 알턱이 없고 에코니아에서 온 포로들을 통해 알아내려고 한다고 해도 쉬울지가 의문, 그리고 그걸 하면서까지 전 아내의 가치가 백작가에게서 대단할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사망한 셈 치고 결혼하기에도 뭣한게 아무리 그래도 쾨펜힐러는 엄연히 오등작의 반열에는 드는 인물이다. 때문에 백작가의 힘이 아무리 세도 같은 오등작 안에 드는 인물을 그렇게까지 매장시킬 수 있을지 의문. 또 원래 불륜을 하는 인간들은 배덕감에서 오는 스릴을 즐기는 거라, 이렇게 맺어진 커플은 원래 배우자를 쫓아내고 나면 곧 식어서 얼마 못 가 헤어진다고 하는데 이럴 가능성도 있다.[10] 외전 3권인 <율리안의 이제르론 일기>에서 포로교환 당시 포플랭이 제국군 포로들을 두고 "마누라가 도망가거나 집이 불타 없어졌거나 하는 놈들도 있을걸"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정말 그 꼴이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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