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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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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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라 미케티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현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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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스티나키르치네르.png

본명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Christina Fernández de Kirchner)
생년월일
1953년 2월 19일 (69세)
국적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라플라타
직업
전직 아르헨티나 대통령, 현직 부통령
대통령 임기
2007년 12월 10일 ~ 2011년 12월 10일
2011년 12월 10일 ~ 2015년 12월 9일 (퇴임)
부통령 임기
2019년 12월 10일 ~ (현임)

1. 개요
2. 초기 활동
3. 부부 대통령
4. 대통령 재임
5. 대통령 퇴임 이후
6. 부통령
7. 기타
8.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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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정치인. 전직 대통령으로, 1기 집권시엔 전임 대통령이자 남편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와 함께 2천년대 아르헨티나를 괴롭혔던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뤄내면서 군부독재 잔재 청산까지 나선 인물이었지만, 남편이 사망한 2기 집권기엔 나사가 하나 빠진마냥 경기침체를 초래하고 각종 구설수에도 오르면서 욕을 먹은 두 얼굴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다만 퇴임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가 현상 유지는커녕 되레 추락하면서 일각에선 재평가론도 나왔고사실 현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가운데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정도만 되어도 양반으로 평가된다는 것이 아르헨티나의 비극이다, 그래서인지 2019년 12월부턴 다시 정권을 되찾아 부통령도 역임하고 있다.[1]


2. 초기 활동[편집]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라플라타에서 태어났다. 아르헨티나의 명문대학인 국립 라플라타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학창 시절부터 페론주의 활동을 했다. 법대 재학 중 같은 학교 학생으로 역시 페론주의자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를 만나 연애를 하고 1975년 결혼했다. 부부는 변호사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활동할 계획을 가졌다. 그러나 1976년, 이사벨 페론이 축출되고 호르헤 비델라의 군부 독재가 시작되자, 남편의 고향인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에 있는 산타크루스 주 리오가예고시로 이주하여, 이 곳에서 지역 변호사로 일했다.

이후 군사정권이 종식되자 남편과 같이 페론주의 계열의 정의당 소속으로 다시 정치를 시작했다. 1987년, 남편은 리오가예고스 시장에 당선되었다. 1989년, 정의당 소속의 카를로스 메넴이 당선되어 정의당이 여당이 되어 그들의 정치활동은 더욱 유리해졌다.[2] 남편은 1991년에는 산타크루스 주지사에 당선되어 2003년 대통령이 될 때 까지 재직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주지사의 부인으로 남편을 내조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여성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1995년 산타크루스 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여당 정의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2001년에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지방 주지사인 남편보다 전국적으로 더 알려진 정치인이 되었다.


3. 부부 대통령[편집]


2001년 급진시민연합 정부가 경제난의 혼란속에 물러나고 페론당이 재집권하게 되었으나, 여러번 대통령이 교체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주요 도시 지역에서 예금동결과 페소화 가치의 폭락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등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는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2002년에 정의당의 두알데가 잔여임기를 행사하는 조건으로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여전히 혼란은 가속화 되었고, 급기야 200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의당은 노선 대립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키르치네르 분파는 '승리를 위한 전선'으로 나왔다. 사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처음 대선에 나온다고 했을땐 상황을 좋게 보지 않은 크리스티나도 네스토르가 대선에 나오는 것을 만류했지만 결국 네스토르는 대선에 출마하게 되었고, 키르치네르 부부는 함께 승리를 위한 전선을 이끌며 활발한 선거운동을 했다. 1차 투표에서는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이 1위,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2위를 했으나, 2차 투표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역사적인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여론조사가 속속 발표되자 메넴[3] 전 대통령이 사퇴하면서 남편이 당선된다. 이때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남편 당선의 1등 공신으로 호평받았고,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남편의 정책 집행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뛰어난 언변과 능숙한 대인관계도 덤.

이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를 극복하며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2007년 재선에는 도전하지 않기로 했으며, 대신 아내인 크리스티나가 출마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선 당시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키르치네르 부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관계로 출마를 강행했다. 결국 그녀가 대선에서 당선되면서, 이 부부는 세계 최초로 부부가 연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또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이사벨 페론[4] 이후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대통령과 영부인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 되었다. 거기에 이제는 부통령까지. 무슨 클레어 언더우드도 아니고..


4. 대통령 재임[편집]


2007년 12월 10일에 취임식을 갖으며, 아르헨티나 역사상 두 번째의 여성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재임 초기부터 여러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수출세를 신설하겠다고 하다가 부통령으로부터 비토를 먹었으며 마라도나로 부터도 까였고 이후로 불성실한 근무태도 논란도 벌어진데다가 2008년 하반기부터 2009년까지의 경기침체로 한동안은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지기까지 했다.

외교적으로는 포클랜드 제도(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라고 하는)의 조차반환 협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처음에는 영국과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영국이 강하게 반발하며 반환을 거부한데다 2013년에는 포클랜드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대부분이 영국 잔류를 희망했고, 곧이어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장례식에도 포클랜드 전쟁 영국 유족들의 반발로 초청받지 못하는 등 다시 냉각 관계로 접어드는 분위기.

다행히도 2010년부터 2012년 상반기까지 다시금 급속한 경제성장을 기록했으며 2010년 10월에는 전 대통령인 남편을 심장병으로 잃는 슬픔을 겪었다. 2011년 대선에서는 남편에 대한 추모열기에다 경제성장의 호조로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며, 입지를 굳혔다. 페론주의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계속 좌파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아예 이제는 키르치네르주의라는 페론주의를 계승한 신개념 정치철학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대중영합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바탕으로[5] 언론통제(그루포 클라린[6]에 대한 재제조치)와 동원된 친정부조직이 배경에 있다는 의혹이 있어[7]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8] 또한 인기가 있다는 이유로 4년 임기에 재선까지만 가능한 대통령 임기를 3선이 가능하도록 하는 개헌을 하여, 2015년 이후에도 더 집권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차츰 독재로 흘러간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의혹에도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시위에 대해서 관대해서 집권기간 내내 정권차원에서 정권에게 비판적인 시위라도 강제해산같은 조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며, 오히려 후임임 마크리 정부가 시위권 제한 얘기를 적극적으로 꺼낸다는 점이다.

이러한 논란에다가 성장둔화와 급격한 물가상승으로 재선 후에는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져 30%대에 머물고 있고 이 와중에 우루과이 대통령이 크리스티나를 성질 더럽고 정치감각도 떨어지는 마귀할멈이라는 내용의 비아냥을 해[9] 각종 패러디물의 소스거리가 되고 있다(...).[10] 2013년 총선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목표인 개헌선 확보에 실패하면서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 되었고, 이때부터 의욕이 없어진 모양인지 조언자인 남편이 사망한 여파 때문이지 이때부터 국정운영에 다소 소홀한 모습을 보여주어서 비판을 사고 있었기도 했다.

2015년 1월, 아르헨티나 유대인친선협회(AMIA) 폭탄 테러 사건[11]을 수사하던 알베르토 니스만 검사가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되었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는 자살로 결론지었지만 니스만 검사의 아파트 쓰레기 수거함에서 작성중이던 대통령 체포 영장이 발견되면서 이란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조사를 방해했던 아르헨티나 정부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손을 쓴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1월 18일 검찰에서 대통령이 사건 조사를 방해했다고 주장하며 대통령을 기소했는데, 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각되었고, 오히려 2015년 2월 아르헨티나의 좌파단체 회원들이 니스만 검사의 사건 조사에 미국 정부가 개입했다고 주장했고, 미국 대사관 앞에서 미국 대사 추방을 촉구하며 반미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자신을 둘러싸고 제기된 1990년대 폭탄테러 사건 조사 방해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2015년 2월, 뜬금없이 트위터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의 발음을 조롱하는듯한 트윗을 올려서 욕을 먹기도 했다.# 3월 19일에는 미국과 영국이 크림을 러시아 일부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이 곳이나 크림반도나 주민투표를 해서 압도적인 표차이로 결과가 나온 것은 같은데 한 쪽의 결과는 인정하고 다른 한쪽은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중기준(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다고 오히려 미국과 영국을 비난했다. 관련기사 참조.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2015년 4월 22일~24일 러시아를 방문할 예정이다. 그리고 23일 블라디미르 푸틴과 러시아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로 끌어올리기로 합의했다. 푸틴은 "러시아는 말비나스 섬과 관련한 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양자 협상을 추진하려는 아르헨티나의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 한편 아르헨티나는 2015년 1월 2일 러시아로부터 12대의 전투폭격기를 임대하기로 합의했다. ##

여하튼 2014년 들어 미국 헤지펀드와 갈등으로 디폴트 선언후 경제성장률이 0%대로 떨어지고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침체가 심해진데다가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높아서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정권재창출에 성공할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는데 경기침체가 심하다고 하지만 현대 아르헨티나를 기준으로 한다면 디폴트 선언한거 치고는 양호한 수준인데다가(...)[12] 남편대부터 내려온 지지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이고 이때까지만 해도 마크리 후보의 지지기반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이었으며 세르지오 마사가 과거 키르치네르 정부 시절에 같이 일한 적이 있던 페론주의자이기 때문이었다.[13] 그러나 크리스트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자체가 시올라 후보를 적극적으로 밀어준 것도 아닌데다가 세르지오 마사와도 관계가 나빠진채라 결국 시올라 후보는 결선투표에서 마끄리 후보에서 3.2% 차이로 근소하게 패하며 허무하게 정권을 내주었다.

이후에 마크리 정부가 집권하면서 비리 혐의로 구속될 것이라는 식의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막상 마크리 정부도 장기 경기침체와 공공요금 폭등, 구조조정과 중소기업 연쇄부도에 따른 실업률 증가 등으로 난맥상을 보이면서 2017년 중간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복귀를 선언했고, 말이 많기는 해도 빈민층들에게는 그나마 나라를 덜 망쳐먹었다는 점(...) 때문에 인기가 좋기는 해서, 여론조사상으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상원 의원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와 별개로 크리스티나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냐면 임기 후반기보다는 조금 좋아졌기는 하지만,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데 임기 후반기의 삽질과 난맥상도 있고 주류 언론과도 사이가 영 안 좋은 것도 있기 때문에 아직은 비호감도가 더 높은 상황이다. 그나마 임기 후반기에 개판스러운 일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래도 후안 페론 이후의 아르헨티나 대통령 가운데서는 그나마 나은 축에 드는 대통령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크리스티나가 중소기업 보호를 주 공약으로 내걸며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여론조사가 속속 나오자 크리스티나에게 반감이 큰 투자가들이[14] 달러를 대량으로 사들이면서 2017년 상반기 이후로 한 동안 오르는 듯[15]하던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가치가 급속히 떨어져가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예비선거에서 몇천표 차이로 승리하는데 그친데다가 공식 선거전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여당후보가 우세하다는 여로조사가 나오고 있기 때문에 낙선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선거 끝나서 휘발유값이나 공공요금이 급등하면 언론사 욕하면서 크리스티나 찍어야 될 걸 하는 유권자들이 많이 나오겠지


5. 대통령 퇴임 이후[편집]


아르헨티나는 전직 대통령은 정치에서 완전히 은퇴하는 한국과 달리 전직 대통령이 내각제 총리마냥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게 가능한데[16], 그래서 퇴임 후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2017년 12월, 1990년대에 유태인에게 가해진 폭탄테러 혐의의 공범으로 지목되어 체포당했다.(...) 이후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에 대해 구속 영장을 발부했고, 아르헨티나 법원에서는 이 혐의에 대해 반역죄를 적용했다.

헌데 이후 별 일 없었는지(...), 2019년 10월에 예정된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로 했다. 대통령 후보는 남편과 자신의 총리였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때문에 당선되면 대통령은 허수아비고 크리스티나가 상왕 노릇을 하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예비 선거에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후보가 47.7%를 득표해 당선 가능성이 높아졌고, 실제 대선에서 승리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6. 부통령[편집]


2019년 12월, 자신과 남편이 대통령이던 시절 총리를 역임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대통령이 되자 부통령이 되었는데 같은 편이긴 하지만 이제는 상하관계가 역전된 상태이다. 다만 본인부터가 전직 대통령으로 네임드다 보니 실권자는 그녀 아니냔 우스갯소리도 있다.

2020년 8월에 자신을 '아르헨티나 도둑'이라고 소개한 구글 검색 결과로 인해 구글에 소송을 걸었다.# 크리스티나 부통령측은 이에 대해 "구글이 나에 대한 거짓되고 모욕적인 정보를 발표해 손해를 끼쳤다.", "구글의 책임 아래 표기된 거짓 정보로 이름과 이미지, 명예가 훼손됐다." 라고 주장했다.


7. 기타[편집]


크리스티나가 대통령이 되자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2003년 ~ 2007년까지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하던 중에 국정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아내의 조력자로 최선을 다했다. 2007년~2009년에는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로도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2009년 ~ 2010년도에 지병인 심장마비로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에 사망했다. 향년 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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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담에서 다른 국가들의 정상들은 다들 웃는 얼굴인데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키르치네르만 울상을 짓는 모습으로 찍힌 사진이 있다. G20 정상회담을 하기 직전 남편이 심장발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각국의 정상들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위로해줬다고 한다.

인권 탄압에 맞선 인물이지만, 입이 방정이라(...)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있다. 중국인의 영어 발언을 조롱하는듯한 농담 때문에 물의를 빚기도 했다. 본인은 논란이 되자 해당 트윗에 대해 "자신의 아르헨티나 비판 세력들의 우스꽝스러움과 부조리함이 지나쳐 이런 유머로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며 사과했다. 또 2007년 영부인 시절 당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를 칭송하고 삼국 동맹을 제국주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배신이라고 폄하하며 삼국 동맹이 아닌 삼국 배신이라 불러야 한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때 아르헨티나 육군 한 포병부대 이름을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부대"로 바꿔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아르헨티나 신문사 라 나시온의 사주가 격분해서 아예 자기가 사설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비판하고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를 남미의 히틀러라고 맹비난을 퍼붓기도 했다.[17]

그래도 과거 정부와는 다르게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일어났던 "더러운 전쟁"의 진상을 밝히는데 적극적이었고,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성사시키는 등 성소수자의 권리 향상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18] 그렇지만 본인이 상당히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평도 있어서(이른바 "K그룹"과 관련해서 뒷얘기가 많다.) 평이 상당히 미묘하다. 또한 남편이 살아있었을때는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찰떡궁합으로 경제를 발전시킨 인물이라는 평이었는데 남편이 사망하고 나서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인물이 없어져서 다소 막장화(?) 되었다는 평도 있다.

후에 교황이 된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과는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사이가 그닥 좋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제2의 에비타, 제2의 이사벨, 남미의 힐러리라는 별칭이 있다. 대통령인 남편의 정책에 관여하면서 국민들의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에비타와 비슷하고, 남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점에서 이사벨과도 닮았다. 남편과는 법대 재학 중 만났고, 대도시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었는데도 시골 지역인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가 지방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며 경력을 쌓고 남편이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정치적 동지 역할을 한 것은 힐러리 클린턴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리고 남편이 비서와 내연관계였다

2011년 말,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으나, 암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정되었다.# 암은 아니었지만, 계속 건강 이상설에 시달렸으며, 우고 차베스가 사망한 후에도 베네수엘라에 오래 있을 수 없어 장례식까지는 지켜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결국, 2013년 10월, 뇌수술을 받기로 하여 1개월 간 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대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뇌수술을 받겠다고 발표한 것이 총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라서 동정표를 노린 꼼수라는 논란이 있기도 했다.

위 사진에서 보듯, 젊은 시절에는 꽤 미녀였다. 그렇지만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을 수 없는 모양인지 보톡스를 많이 맞아 안티들에게는 '보톡스의 여왕'(...)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기도 하다.#


8. 가족 관계[편집]


  • 에두아르도 페르난데스 (父)

  • 오펠리아 에스더 빌헬름 (母)

  •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배우자)
    • 막시모 키르치네르 (장남)
    • 플로렌시아 키르치네르 (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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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직 대통령이다 보니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얼굴 마담일 뿐이고, 실권자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다.[2] 그래서 아르헨티나 좌파 일각에서 당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민영화를 추동하는 정치인으로 여기며 까기도 했다. 사실 1990년대 당시의 페론당은 메넴 대통령의 영향으로 신자유주의를 적극 추진하던 정당이었고,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는 당시만 해도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론 메넴의 노선에 딱히 대항적인 정치인이 아니었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들이 반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내세운건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가 온 메넴 말기 이후부터다.[3] 대통령 재임 당시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서 빈부격차가 급속히 커지고 실업률이 증가한데다가 무엇보다도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당시에도 저환율 정책(1달러=1페소 이는 당장의 물가안정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 뒤에 아르헨티나 상품의 대외적인 가격이 크게 높아지면서 수출이 줄어들어버리는 바람에 부메랑이 되어버렸다.)을 펴서 19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라 이미지가 영 좋지 않았던게 컸다.[4] 후안 페론의 세 번째 부인으로, 1973년 선거를 통해 부통령이 되었고, 1974년 남편이 취임 몇달만에 사망한 이후에 세계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다만 정치면에선 막장이어서 실정을 거듭하다 결국 쿠데타로 쫓겨났다. 후임 군부가 더 막장이었던건 함정이지만 넘어가자. 여담으로, 이사벨은 아르헨티나가 민주화되고 난 이후에도 그닥 좋은 소리는 못 든는 모양. 오히려 재임 시절 있었던 인권운동가 실종 사건으로 2007년에 스페인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그나마 그녀에게는 다행히도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지는 않고 가택 연금으로 그친 듯.[5] 다만 특별히 포퓰리즘적인 정책만을 한 것은 아니다. 환전 제한 조치를 사실 포퓰리즘 정책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묘한 정책이기 때문. 애초에 키르치네르주의가 신페론주의라는 말도 들을 정도로 페론주의 계승을 표방하지만 내용은 기존 페론주의와는 다른 점도 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아르헨티나의 에너지 보조금 정책을 적절히 손보지는 않고 물가가 올라가는 와중에 인플레율을 억제하겠다고 전기요금과 가스요금, 전철요금, 철도요금 등 주요 공공요금을 동결한건 사실이기에(손을 아예 안댈려고 한건 아닌데 객관적으로 보면 미봉책인 수준이었다.) 재정에 상당한 부담이 된건 사실이다.[6] 아르헨티나에서 영향력이 강한 언론재벌로 TV방송사와 출판사, 신문사 등을 소유하고 있다. 논조는 한국으로 친다면 중앙일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7] 다만 이 부분은 단순히 논조를 통제하려기보다는(애초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시절에도 보수논조의 언론이 멀쩡히 운영하고, 노조의 파업에도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배신감때문에 손을 봐주는것이라는 평도 있기는 하다. 사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으로 재임했을때는 그런대로 사이가 괜찮았으나, 2007년 수출관세 인상 파동을 계기로 사이가 급속히 틀어졌고 이후로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된 셈이라는 것.[8] 다만 후임 마끄리가 취임후에 언론노동자를 해고한다거나 텔레수르의 송출을 제한한다거나, 주요 보수언론에서 정리해고로 실업률이 증가하고 공공요금도 급속히 오르고 있음에도 노오력 드립을 쳐서인지 이부분은 부분적으로 재평가 되고있는 듯하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9] 웃긴건 이 말을 한 호세 무히카 대통령(2010~2015)도 좌파 정치인이다. 자긴 말년까지 잘했는데 이쪽은 남편과 달리 못해보이니 답답해서 한소리 한듯. 다만 무히카 대통령이 진짜 서민 출신으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란 별칭도 있는데 반해,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식 강남좌파 비슷해서 부유한 편이라는 차이는 있다.[10] 근데 그럴 소리를 들을만도 했던게, 남편은 집권기 동안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8~9%대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또 물가상승률도 크게 낮춘데 반해, 페르난데스 들어선 물가상승률이 상당히 높아진데다가 2기 집권기부터는 성장까지 저조해지고 통계 조작 얘기도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헬게이트 시기였던 80-90년대에 비하면 임팩트가 좀 약하지만) 상당한 분잡스럽긴 하다. 이에 비해 무히카 대통령은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있다.[11] 1994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서 일어났던 폭탄 테러로 85명이 사망했고 300명이 다쳤다.[12] 과거 세차례의 경제난이 닥쳤을 시절에는 수백%-수천%대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었다. 그런것에 비하면 물가상승률 30%는 양호한 수준이고 월급도 같이 올라가기는 해서 고통이 덜한편이다. 물론 그래봐야 인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이다[13] 정확히 말하자면 우파 페론주의에 속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 같은 정의당(페론당)아래에서 한솥밥 먹던 사이였지만 2000년대 초중반 시기를 거치며 페론당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서 따로 정당을 차린 것.[14] 사실 IMF와의 채무조정이 완료 된 이후로도 채무 비율을 낮추겠다고 대놓고 인플레율 조작을 시전한 덕택에 일단은 정부 채무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졌기는 했다만, 그 대신에 채권자들이 많이 손해를 봤던 것이 크기는 하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경제통계와 관련한 신뢰도는 말 그대로 안드로메다로 날라간건 덤. 그리고 후임이 외채를 대거 늘리면서 다른 부문에서 말아먹고 있다[15] 물론 그렇다고 아르헨티나 국내물가가 싸진건 전혀 아니기는 하다. 단지 수입물가가 좀 싸졌을뿐이고 공공요금 인상과 중간이윤, 세금 인상등의 요인으로 아르헨티나 국내물가는 여전히 고공행진하고있다.[16] 사실 엄밀히 따지면 한국도 사례가 없을 뿐 법적으로는 전직 대통령도 국회의원 선거 출마 가능하다.[17] 라 나시온의 사주는 과거 아르헨티나 대통령인 바톨로메 미트레의 후손이고 바톨로메 미트레는 라 나시온의 창립자이기도 하다.[18] 중남미 자체가 동성애에 비교적 관대한 흐름이 나타나곤 있지만, 그중에서도 중남미 첫번째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국가는 아르헨티나다. (이전에 멕시코 일부 주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바 있지만 전국에서 합법화된건 2015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