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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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특징
3. 줄거리
3.1. 크림으로 가는 길
3.2. 크림과의 첫 만남
3.3. 기레이족의 수도
3.4. 죽은 도시
3.5. 말라호프 쿠르간의 그림자
3.6. 가슴 아픈 과거
3.7. 트라헤이의 성지들
3.8. 인케르만
3.9. 사막과 바다
3.10. 카스텔산으로의 여정
3.11. 산과 숲속에서
3.12. 차티르다그산의 동굴
3.13. 구름 속의 밤
3.14. 수로지의 고대
3.15. 남부해안
3.16. 고트인들의 옛 수도
3.17. 체르케스케르멘에서 추푸트까지
3.18. 크림의 마지막 동굴도시까지 여행을 이어가며
3.19. 아가는 길과 새로운 인상들
3.20. 여행편지 — 남부해안으로부터


1. 개요[편집]


크림반도 견문록은 예브게니 마르코프가 1873년 크림반도 지역을 여행한 후 서술한 기행문학이다.

2. 특징[편집]


  • 일반적인 기행문과 다른 특징
마르코프의 <크림반도 견문록>은 1866년부터(또는 1865년) 1870년까지 크림 반도의 행정 중심지인 심페로폴의 김나지야 교장으로 그곳에 머물기 시작한 저자 마르코프가 크림에 관한 많은 기록을 섭렵하며 동시에, 크림에 당시 살고 있던 그가 크림 내 여러 지역을 지속적으로 답사하며 남긴 기록이다. 즉, 특정 지역을 여행의 대상으로 삼고, 그 지역을 단선적이며 일회적으로 여행하며 남긴 통상적인 여행 기록이 아니라, 대상 지역에 머무는 동안 일관되지는 않지만 여러 방문 등을 통해 남긴 기록이다. 또한, 1866년부터 크림에 머물기 시작한 작가가 글을 완성, 출간하는 시점이 1872년이며, 이후 1911년까지 4번이나 재간행 되었지만 1873년의 초판본에서 변한 부분이 없다. 우리말 번역의 저본으로 채택된 1902년본의 경우, 컬러 사진과 삽화가 다수 삽입되었을 뿐, 책의 내용 자체는 저자 마르코프가 의식적으로 초판본부터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고 있다.
  • 저자의 이동 경로와 역사적, 문화적 경로의 연관성
19세기 후반, 특히 크림 전쟁(1853~1856) 이후 러시아 내에서 관심이 높아진 크림에 대한 일반인을 위한 ‘관광 안내서’(путеводитель)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강조처럼, 특정 지역, 특정 도시, 특정 장소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크림 반도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에 따른 이동 경로를 저자는 선택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의 이 <크림 반도 견문록> 초판이 출간된 1873년보다 한 해 전인 1872년에 마르코프가 편집한 <크림 여행 가이드>(Путеводитель по Крыму)가 출간되었다. 마르코프 입장에서는 같은 내용의 책을 두 번 쓸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 한 권은 정말 말 그대로의 여행 안내서로, 다른 한 권은 좀더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크림에 대한 총체적 기록으로 나누어 집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환언컨대, 우리가 읽고 있는 이 <크림 반도 견문록>은 크림 반도로 여행을 온 외지인이 사전에 잘 짠 노선을 따라 이동하며 크림을 집약적으로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 크림에 오래 살았었던 인물이, 당시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크림 반도에 대해 여러 문헌 탐구 및 주민들과의 접촉을 통한 직접적인 증언 등을 바탕으로 사후에 재배열한 기록이다.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감안해, 크림 반도를 잘 모르는 일반적인 러시아 교양층을 위해 러시아인들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들을 그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당대 사회적 측면과 결부시켜 소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어 책 제목 '크림반도 견문록'을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 상상하고 동참할 수 있는 크림으로의 첫 여행 코스를 설정한 점
러시아 독자의 독서 흥미를 위해, 저자 마르코프는 크림반도로 들어서는 러시아 여행자의 동선과 시선을 감안하고 설정한다. 크림 반도와 이미 그렇게 많이는 멀지 않은 쿠르스크 출신의 마르코프는 육로로 크림 반도로 입성하는 가장 보편적인 코스를 설정한다. 즉, 모스크바를 출발, 툴라(Тула)를 거쳐 오룔(Орёл) 그리고 쿠르스크(Курск)에서 하리코프(Харьков)를 거쳐 예카테리노슬라블(Екатеринослав, 2023년 현재는 Днепр로 도시 이름 변경)를 지나, 크림의 입구인 페레코프(Перекоп)를 통과해 크림반도로 들어가고, 이후 크림의 행정 중심지인 내륙의 심페로폴(Симферополь)로 다다르는 경로이다.
  • 종합적인 체류기
마르코프의 <크림반도 견문록>은 한번 또는 단속적인 몇번의 이방인의 자격으로서의 크림 여행을 통해 크림에 대한 인상과 감상을 남긴 글이 아니라, 크림에 5년 정도 거주했던 인물이 크림을 떠나고(1870) 난 뒤, 자신의 크림 체류에 대한 종합적인 기록을 남긴(1872)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3. 줄거리[편집]



3.1. 크림으로 가는 길[편집]


“국내 여행 - 호홀과 호홀들의 나라 - 스텝”

글쓴이는 크림으로 여행길을 나선다. 글쓴이 눈에 비쳐진 소러시아는 진창과 눈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정도로 소러시아 땅은 순결하고 정직하며 순박하다. 소러시아는 러시아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더 단순하며, 더 변함없고 더 시적이라고 느꼈다.
글쓴이는 여행을 하는 도중 호홀과 마주치게 된다. 호홀은 긴 장화를 신고, 양가죽 모자를 쓰고 어깨에 흰 외투를 걸치고, 손에는 긴 채찍을 든 큰 키를 가지고 있다. 천성이 선하며, 장사하는 법에 있어서 서두르지 않고, 복잡하지 않지만 모든 면에서 견실했다.
글쓴이가 페레세핀 역참에서 절반 정도 길을 나오자 스텝이 시작되었다. 스텝은 오래되고 수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고트족부터 타타르족까지 유럽으로 이동하는 수많은 종족들이 거쳐간 곳이기도 하며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의 뒤를 이어, 아니면 한 종족이 다른 종족과 싸우며 거쳐간 넓은 도로이기도 한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며 자신들의 뼈를 묻은 거대한 전쟁이다.

3.2. 크림과의 첫 만남[편집]


“크림의 봄 - 타타르인들 - 크림의 계곡들 - 낙타 - 낯선 땅의 고향 사람”

글쓴이는 스텝을 관통하면서 타타르인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들은 천성적으로 말을 타고 다니는 것에 익숙하기에 안장에 앉으면 마치 집처럼 편안하게 느꼈다. ‘아얀(аян)'이라고 불리는 타타르 특유의 승마법이 존재하는데 이 승마법은 말의 구보보다 빠르고 가벼워서 말이 훨씬 빨리 달리면서도 훨씬 덜 지치는 승마법이라고 한다.

3.3. 기레이족의 수도[편집]


“타타르 넵스키 거리 - 칸의 궁전 - 이슬람 사원과 묘지”

글쓴이는 바흐치사라이로 여행을 계속 이어 나간다. 그곳에서 바흐치사라이의 궁전을 발견하는데 그곳은 크림에 동양의 생활이 번성했을 때를 보여주는 몇 개 되지 않는 건축 기념물 중 하나이다. 밖에서 보면 그렇게 멋있어 보이지 않고, 별것 없을 것 같아 보이고, 동양 궁전이 다 그러하듯 담장처럼 궁전 건물이 마당을 삥 둘러싸고 있었다.
칸의 궁전을 구경한 뒤 글쓴이는 칸의 무덤을 방문하게 된다. 묘지에 있는 관들은 터번으로만 장식된 것이 아니라, 돌로 만든 여자의 모자로 장식된 칸의 부인들의 관들도 있었다. 각 관에는 «코란»의 구절이 새겨져 있고 몇몇 관에는 무기 형상이 조각되어 있기도 하다. 멘글리 기레이 관에는 무시무시한 아랍식 칼이 새겨져 있었다.

3.4. 죽은 도시[편집]


“집시들의 마을 - 우스펜스키 수도원 - 추푸트칼레와 고대 유적 - 여호사밧 골짜기”

글쓴이는 솔론추크의 집시들의 집단거주지인 집시들의 마을은 방문하게 된다. 작은 마을들은 산 아래 한쪽 방향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집단거주지를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고, 돌과 타일로 만든 거의 허물어진 수많은 작은 방들이 밀집하여 내리누르듯이 자리 잡고 있다. 황량한 절벽, 바위 틈에서 사는 것은 집시들에게는 따뜻하고 아늑하겠지만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무서웠다.
그 후 무덤 같은 작은 도시인 추푸트칼레를 방문하게 된다. 이곳에는 아직도 학교와 시나고그가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여호사밧 골짜기로 이동하는데 이곳은 죽은 자들이 부활한 골짜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묘지, 산, 산 위에 있는 페어, 그 모든 것은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글쓴이는 느꼈다.

3.5. 말라호프 쿠르간의 그림자[편집]


“파괴된 세바스토폴의 모습 - 외국인 안내자 수병 - 전장 방문”

글쓴이는 현재는 죽어버린 도시인 세바스토폴을 걸음을 옮긴다. 과거 채광이 잘되는 창문들과 멋진 기둥을 가지 아름다운 건물들은 이제 여기저기 칠이 벗겨지고 부서지고 검게 그을린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또 창문은 닫힌 채로 안은 텅 비어있었다. 석조 골조를 드러낸 건물이 늘어선 거리와 폐허 속에 파묻힌 구역들뿐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산 남쪽 경사면에서 시장 가까운 곳인 도시의 그 부분만 일부 복구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3.6. 가슴 아픈 과거[편집]


“바다 건너 서쪽과 정교도 루스 - 러시아 병사 - 우리는 어떻게 적을 기다렸는가 - 누가 우리의 진정한 적이었는가 - 타타르의 배신”

글쓴이는 크림전쟁 당시 적들의 병영, 참호, 포대가 있던 지역과 러시아군의 숙영지를 방문하였다. 전쟁터는 한쪽으로는 카미셰바 만, 게오르기 수도원, 발라클라바가 있고, 다른 쪽으로는 초르나야 강이 있는 곳에 위치해있다.
글쓴이는 전쟁터를 둘러보며 여러 사람과 크림전쟁 당시의 외국군에 대해 이야기한다.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군과 싸운 것은 영국군, 프랑스군, 터키군, 사르데냐군이지만, 진정한 적은 터키군이었다고 언급한다. 유럽인들은 적군 측 사람들과 재산에 대해 인도주의적 태도를 보였지만, 터키군은 아시아적 특징인 무분별한 적대감을 가지고 행동했다며 주장했다.

3.7. 트라헤이의 성지들[편집]


“트라헤이 반도 전체 모습과 역사 - 헤르소네스 수도원 - 게오르기 수도원 - 바다와의 만남”

글쓴이는 세바스토폴 인근으로 이동했으며, 트라헤이반도, 헤르소네스 수도원, 게오르기 수도원, 피오렌트 곶을 방문하였다.
트라헤이 반도(Трахейский полуостров)는 카메니 반도(Каменный полуостров)의 19세기 이름이다. 트라헤이 반도는 ‘돌이 많은 반도’라는 뜻이며, 헤르소네스(Херсонес)를 건설한 헤라클레스 정주민의 이름을 따 ‘헤라클레스 반도’라고도 불린다.
글쓴이는 헤르소네스 수도원을 ‘헤르소네스에서 가장 뛰어난 수도원’으로 불렀다. 헤르소네스 수도원은 1850년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고대 도시의 잔해가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망가진 병영과 섞여있어 어떤 특별한 외형을 하고 있지 않다고 언급한다.
게오르기 수도원은 세바스토폴에서 12 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있으며, 891년에 기초가 놓였다. 글쓴이는 초반에는 게오르기 수도원의 모습에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후에는 완전히 풍경에 압도되는 모습을 보인다.
피오렌트 곶은 ‘파르테니움’이라고도 불린다. 피오렌트 곶의 높게 솟아 있는 절벽 아래로는 파도가 특히 무섭게 들이친다고 한다.
  • 게오르기 수도원 전설
전설에 따르면 수도원의 기초가 놓이기 1년 전, 그리스인 몇 명이 항해중에 들이닥친 폭풍으로 해변에서 120 미터 떨어진 선바위 위로 피신했다. 이들이 성 게오르기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자마자 폭풍이 가라앉고 선바위에 성인의 이콘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후 선바위는 ‘성스러운 출현의 바위’ 혹은 ‘게오르기 바위’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구원에 대한 답례로 그리스인들은 선바위 맞은편 해변에 동굴수도원을 건립했다.

3.8. 인케르만[편집]


“러시아군의 골고다 언덕 - 10월 24일 - 고대 인케르만 - 인케르만의 동굴들과 키노비야 - 《구약성서》의 꿈”

글쓴이는 세바스토폴에서 인케르만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이동하였다.
인케르만(Инкерман)은 터키어로 ‘동굴들의 요새’라는 뜻이며 수도원과 채석장 등으로 유명하다.
글쓴이는 인케르만으로 향하는 길에 인케르만 전투(1854.10.24)를 언급한다. 전투는 새벽 6시에 시작되어 오후 3시에 끝이 났지만, 러시아군에 1만 2천여 명의 손실을 입혔다. 글쓴이는 해당 전투를 언급하면서 당시의 실책을 비난하며 본인의 의견을 덧붙이기도 했다.

3.9. 사막과 바다[편집]


“해안 풍경 - 바다의 삶 - 돌고래 - 빛을 발하는 바다 - 바닷가의 밤 - 해안의 역사적 의미 - 바다가 사람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 - 해수욕”

토학자의 추측에 따르면, 글쓴이가 살던 곳은 현재 라보치 우골로크(Рабочий Уголок) 지역에 위치한 슬라비치(М. Славич, Сосногорова)의 다차(дача, 시골풍 별장)이다.
글쓴이는 사방이 황야로 둘러싸인 곳에 머무는 감정을 서술한다. 이곳은 카스텔(Кастель) 산이라는 커다란 돌로 된 병풍이 바다로 향한 길을 제외한 모든 길을 막고 있는 곳이다.
이후로 글쓴이는 주변 자연풍경에 관한 감상, 해수욕을 하며 돌고래를 만난 일을 서술한다.

3.10. 카스텔산으로의 여정[편집]


“아침 산책 - 카스텔의 성벽과 거대한 돌 건축물 - 테오도라 여왕에 대한 전설 - 카스텔에서 바라보는 전경 - 분화구 - 매미 - 아토스의 운둔자 - 카미쉬부룬”

마르코프는 절벽과 돌산이 많고, 카스텔산의 분화구에서 떨어져 나온 돌이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 테미르하푸에 방문하였다. 또한 해안에서 돌들이 무너진 곳을 의미하는 카미쉬부룬에 방문하여 조면암과 석회암 동굴을 관람하였다. 다양한 식생과 타타르인들이 나무를 베는 카스텔 산을 방문하였다. 그 다음 천연 요새로 고대 산성의 일부를 구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곰의 산’, 낙타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아유다그(Аю-Даг)에 방문하였다. 아유다그는 튀어오른 등과 짐승의 주둥이 같은 모습이며 바다 깊숙이 뻗어 있는 산으로, 고대 요새로 사용됐다.
마르코프가 방문한 산에는 거주지의 흔적이 존재했는데, 많은 그릇조각과 유럽의 최초 거주자들의 양식으로, 수도원의 흔적으로 보인다고 마르코프는 평가했다. 해당 지역에서 마르코프는 테오도라 전설에 대해 알게 된다.
  • 테오도라 전설
테오도라는 수다크 여왕(대공비)이다. 수도원이 있는 카스텔산을 그녀가 좋아했는데, 카파(페오도시야의 옛 이름) 사람들이 그녀의 땅을 정복하자 카스텔산으로 은둔했다. 미모의 여성이었기에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복수를 위해 적에게 카스텔 산성 문을 열어주었고, 여왕은 전투를 치르다가 사망했다는 전설이다.

3.11. 산과 숲속에서[편집]


“고대 알루스톤의 의미 - 코르베클르 마을 - 타타르인의 집안 생활 - 너도밤나무 숲 - 차이르 - 타타르인의 가축 - 차티르다그산 입구”

글쓴이는 알루슈타(Алушта), 코르베클르(Корбеклы), 데메르지산을 방문하였다.
알루슈타는 바다와 남부해안에서 크림반도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역으로 크림반도 내륙으로 들어가는 거의 유일한 중심도로가 위치해 있다. 유목민족들이 식민지와 바다로 접근하는 것을 골짜기를 통해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남쪽으로 만이 있는데, 선박들이 쉽게 정박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또 다른 이점이었다.
코르베클르는 알루슈타보다 더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차티르다그로 올라가는 길에 자리 잡은 마지막 마을. 허리를 피기 어려울 정도의 낮은 집(움막)들이 많고 동양식 지붕을 가지고 있어 이국적 분위기를 풍긴다.
데메르지산은 마르코프에게 크림반도에서 햇빛이 변덕스럽고 예쁘게 아른거리는, 아주 아름다운 산이었다고 한다. 데메르지 산 뒤로는 카라비야일라가 위치해 있다.
글쓴이는 다른 고대 유적보다 더 잘 보존되어 있는 옛 알루스톤 성, 알루스톤 요새, 데메르지산 기슭 옆 타타르인들의 요새 유적인 이사르치크 (현 푸나 요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남부해안 요새와 성벽 건설에 참고한 전설로 기록된 방어벽의 일부인 타쉬하바흐를 방문하였다.

3.12. 차티르다그산의 동굴[편집]


“밤바쉬코바 - 천 개 머리의 동굴 - 당황한 우리들 - 추운 동굴 혹은 술루코바”

글쓴이는 빔바쉬코바, 술루코바에 방문하였다.
  • 빔바쉬코바(Бимбаш-Коба)
천 개 머리의 동굴’이라 불린다. 좁고 복잡한 통로와 유해, 유골 등이 있는 동굴이다. 동굴 내 글자를 새겨 놓은 기둥, 돌과 크리스털로 만든 샹들리에, 오르간, 성찬대 등 지하사원이 있다. 타타르인들은 이 동굴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과거 빔바쉬코바에 타타르인들 천 명이 숨어들어온 것을 알아낸 터키인/코자크인들이 이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동굴 입구에 불을 지폈고, 연기로 인해 동굴에 숨어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질식사해 동굴이 ‘천 개 머리의 동굴’이라고 불리게 됐다.
  • 술루코바(Сулу-Коба)
'추운 동굴’이라는 의미이다. 입구가 빔바쉬코바와 다르게 매우 넓고, 은신처로 적합하다고 마르코프는 평가했다. 바로 광대한 궁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종교적 장소라 추정할 수 있는 물건이 없고, 오히려 지하 신령 궁전처럼 보인다고 마르코프는 이야기 했다.

3.13. 구름 속의 밤[편집]


“구름 저편 나라의 뇌우 - 목자들과 개 - 치즈 삶기 - 한밤중 공격 - 백파이프 - 알림 도적 이야기 - 양유짜기 - 카르코바 - 트라페주스산에서 먹는 아침 - 귀환"

글쓴이는 차티르다그산과 근처 카르코바 동굴에 머무르며 신뢰를 중요시하는 해당 지역 목자들의 문화와 크림반도에서 의적으로 평갑다는 알림카 이야기에 대해 알게 되었다.
  • 알림카 이야기
크림반도의 로빈후드 이야기. 장사이자 도둑. 도적질로 바부루이스크 요새로 보내졌는데, 이곳에서는 착하게 지냄. 다시 고향 카라수바자르로 보내려고 하자 고향 주민들이 반대했고, 이에 모욕을 느껴 자신이 진짜 도둑이 될 것이라고 마음을 먹고 강력한 초원의 도적이 됐다. 그를 위해서 주민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길을 내어주었다. 그는 애국의 도적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애로운 보호자였다고 한다. 타타르인 한 명도 다치지 않게 했고 가난한 사람에게 돈과 옷을 주었다고 한다. 알림카는 어느 한 장군에게 돈을 강탈했고, 장군이 수치를 느껴 알림카를 잡으려 했다. 타타르인들이 그를 도와준다는 것을 알자 후원하지 못하도록 더욱 엄격하게 지역을 통치하였다. 결국 술을 마셔 취한 상태로 도망치다 공원에서 술주정뱅이를 단속하는 경찰에게 잡혔다.

3.14. 수로지의 고대[편집]


"수다크산의 특징 - 수다크 와인 제조법 - 수로지의 유적들 - 수로지의 역사와 고고학 자료 - 카파 역사의 요약 - 제노아 식민지의 내부 환경 - 터키에 의한 파괴"

글쓴이는 크림반도의 중부 도시 수다크를 방문하여 이곳의 유적을 둘러보고, 수로지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다.
크림의 산악 지역은 발라클라바 옆에서 직선으로 뻗은 해안 절벽에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나아갈수록 넓어지고 납작해진다. 바이다르부터 키네이즈까지의 산맥은 험하고 빈틈없으나, 알루슈타를 지나 페오도시야까지의 산은 기묘한 모양의 돌탑과 바위들이 얽혀 있다. 수다크 산에서 기묘한 모양의 날이 솟아 있는 돌담인 빗절벽을 볼 수 있으며, 그 사이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인 ‘타라크타쉬’가 위치해 있다. 모크리엔돌 계곡은 페오도시야 쪽 산을 돌아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계곡으로, 풍요로운 자연환경이 펼쳐져있다. 수다크 산의 남쪽 골짜기는 포도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포도들은 저렴한 와인을 만들기에 적합하다. 북쪽 골짜기는 채소밭이 있다.
수다크는 시대에 따라 수그다야, 수로지, 시다가오즈 등의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대부분의 동양 민족들의 언어에서 수다크는 물산, 즉 물이 풍부한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그리스인에 의해 건립되어, 다민족 다종교의 거주자들이 섞여 있는 곳이다. 과거 크림해안의 중심 항구이자 인도 등을 통하는 거래의 중심지였으나, 1322년 타타르인에 의해 정복된 이후, 제노아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고, 1577년부터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합병될 때까지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3.15. 남부해안[편집]


“발라클라바 – 바이다르 대문 – 남부해안 – 메르드벤, 남부해안 바위들, 뇌우, 크림반도의 별장지대, 오레안다, 리바디아, 얄타, 우찬수폭포, 포도밭, 구르주프, 아유다그 주변, 알룹카의 정원과 성”

글쓴이는 크림반도의 남부해안의 발라클라바와 미스호르를 방문하였다.
발라클라바는 크림반도의 남부 도시로, 여러 고대 신화와 역사적 사건의 배경지로 추정된다. 리테르는 발라클라바가 호머의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거인족, 레스트리고네스 식인종들이 사는 곳이었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크림의 고고학자들은 발라클라바가 고대 스키타인의 요새, 팔라키온이었다고 말했다.
미스호르는 1830년대 알렉산드르 1세에 강한 영향을 미친 신비주의 저명 인사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콜리친 공, 안나 세레게예브나 대공녀, 크류드네르 남작 부인 등이 있다.
글쓴이는 이 챕터에서 예카테리아 2세의 남부여행을 언급한다. 러시아는 오스만터키와의 전쟁(1768-1774)에서 승리한 후 현재 우크라이나 남부지역을, 1783년에는 크림반도까지 획득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1764년 이 지역을 러시아의 행정단위에 포함하여 ‘새러시아 지방’이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1787년에는 1월에서 7월에 거쳐 이 지역을 시찰여행했다.
글쓴이는 남부해안 여정 중 아우트카 폭포, 알룹카성 등 많은 장소를 방문하였다.
아우트카 폭포는 ‘공중을 나는 물’이라는 뜻을 가진 ‘우찬수 폭포’로도 불린다. 원시인, 은둔자라는 별명과 예카테리나 2세의 시찰 여행 기록은 이 폭포의 거대함을 암시한다.
알룹카성은 2개의 궁전과 별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림의 이슬람 문화에 내재한 동양적 양식이 돋보인다.

3.16. 고트인들의 옛 수도[편집]


“야일라를 넘어가는 고개 – 타타리아에서의 하룻밤 – 만구프의 아브라함 – 고대에 만코피야였던 만구프칼레: 그곳의 유적지와 역사적 기억들”

글쓴이는 야일라 고개를 넘어 만구프를 여행하였다.
만구프는 높은 산에 위치한 도시로 근방 지역 생활 및 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만구프칼레라고도 불린다. 만구프에는 카라임인이라고 불리는 유대교 신봉 종족이 13세기 이후 정착하여 이 지역이 사라지기 전까지 거주했다. 하지만 이들이 만구프를 건설한 것은 아니며 만구프 건설에는 많은 논란이 있다.
만구프에는 성이 하나 있는데, 이 성에는 동양 혹은 그리스 그림으로 추정되는 석제 조각이 남아 있다. 과거 만구프의 칸들은 모스크바에서 온 사신들을 이 성에 감금하곤 했다. 이반 4세의 측근이였던 바실리 그랴즈노이는 감금된 후 “술에 취해 다친 것도 아니고 페치카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혀 다친 것도 아니지만 타타르인들로부터 혹독한 취급을 받았고, “폐하를 다시 뵐 때까지 살아 있기만 할 수 있다면, 굶주리고 입을 것이 없어도 죽지만 않았으면 합니다”라는 편지를 차르에게 보냈다

3.17. 체르케스케르멘에서 추푸트까지[편집]


“체르케스케르멘의 유적들 – 에클리세, 에스키케르멘의 동굴들, ‘혈거인’들의 도시들 – 타타르 여공후의 객실 – 바흐치사라이 커피숍 – 칸의 모스크 – 신부의 납치 – 마리안폴 – 고대 키르코르인 추푸트칼레 – 추푸트칼레의 은둔자”
글쓴이는 만구프에 이어 요새 도시 체르케스케르멘, 에스키케르멘, 추푸트를 방문하였다.
체르케스케르멘과 에스키케르멘은 거의 하나를 이루는 동굴도시로, 과거에 타타르인들은 이 두 지역을 칭기즈케르멘으로 엮어서 불렀다.
에스키케르멘 교회는 에클리세의 절벽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콘과 여러 비잔틴 벽화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지역에 위치한 우스펜스키 수도원은 크림반도 그리스인들의 신앙적 중심지였다. 아직도 크림에는 고대 성지를 모시는 옛풍습이 남아 있어서 8월 15일 성모안식제 때 많은 순례자가 마리안폴이었던 이곳을 방문한다.

3.18. 크림의 마지막 동굴도시까지 여행을 이어가며[편집]


“야간 여행 — 고트바 묘지의 묘비 — 테페케르멘의 동굴 — 카치칼리온과 성 아나스타시아 — 바보의 집 — 마지막 동굴도시 바클라 — 림산”

글쓴이는 비아살라 마을 맞은편에 위치한 고트바(Готва) 묘지에 방문하였다. 고트인들의 묘지인 고트바묘지의 무덤은 석회암을 깎아 만들었으며, 판판한 돌 위에 무덤 주인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는 도구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글쓴이는 테페케르멘(Тепе-Керман) 산에 방문하였다. 테페케르멘은 비아살라로부터 아래쪽으로 5베르스타 떨어진 카차 골짜기 북쪽 강변의 마을이다. 글쓴이는 테페케르멘 산은 꼭대기가 민둥산인 피라미드 모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테페케르멘은 터키어로 ‘산꼭대기의 요새’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글쓴이는 이름을 통해 테페케르멘 산 꼭대기에 요새가 있었음을 유추하였다. 테페케르멘 산 정상의 남쪽, 동쪽 면은 작은 동굴이 빽빽하게 있는 고대 동굴 도시이다. 100개 이상의 동굴이 있으며, 각각의 동굴에는 궁륭, 수조, 기둥, 계단 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글쓴이는 테페케르멘 동굴 교회에 대한 인상도 남겨 두었다. 동굴 교회는 다른 동굴들보다 공간이 넓고 높으며,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강당이 존재한다. 창문 쪽 벽의 작은 제단 뒤 공간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매장한 무덤을 발견할 수 있다.
글쓴이는 카치칼리온(Качи-Кальон)에 방문하였다. 카치칼리온은 카차 강변의 돌 낭떠러지 위에 위치한 동굴 도시로, 아나스타시아 수도원이 유명하여 아나스타시아라는 지명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카치칼리온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붉은 색조의 돌들은 카차 강줄기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글쓴이는 아나스타시아 수도원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아나스타시아 수도원은 성 아나스타시아의 샘물 위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과거 그리스인들에게 약수의 샘으로 여겨지며 많은 순례자들을 불러 모았다.
글쓴이는 만구쉬(Мангуш)에 방문하였다. 글쓴이가 방문했을 당시 만구쉬에는 타타르인들보다 우크라이나 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만구쉬는 지역 전체가 암석과 나무와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보드라크 강변을 석회암 채석장으로 삼았다. 이곳에서 채석된 석회암은 과거 바흐치사라이, 심페로폴 등에서 고가의 건축 재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글쓴이는 크림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바클라(Бакла) 절벽에 방문했다. 대부분의 동굴이 파괴되었는데, 동굴들 중 큰 것은 에클리세라고 불렸다.

3.19. 아가는 길과 새로운 인상들[편집]


“동굴도시 나라 안의 고대 방어시설 — 동굴도시의 키클롭스식 특징과 의미 — 추첼산 위에서의 방황 — 사슴들의 울부짖음 — 성 코스마스다미안 원형 수도원에서의 숙박 — 남부해안으로의 귀환”

글쓴이는 여행을 마치며 성 코스마스다미안 원형 수도원에서 숙박을 한 뒤 남부해안으로 귀환하였다. 글쓴이는 고트인과 그리스인의 통합에 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글쓴이의 서술에 의하면, 4세기 말부터 고트인들은 종교적으로 비잔틴의 영향을 받았으며, 6세기에 제국의 보호를 필요로 하였다고 한다. 이후 여러 민족의 지배를 거치며 고트인들은 그리스인의 민족생활과 종교생활을 가지게 되었다.
글쓴이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성 코스마스다미안 수도원은 성 코스마스다미안 샘물 주위에 지어졌는데, 이 샘물은 타타르식으로 사블루흐수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3.20. 여행편지 — 남부해안으로부터[편집]


“동굴도시 나라 안의 고대 방어시설 — 동굴도시의 키클롭스식 특징과 의미 — 추첼산 위에서의 방황 — 사슴들의 울부짖음 — 성 코스마스다미안 원형 수도원에서의 숙박 — 남부해안으로의 귀환”

글쓴이는 1년간 유럽여행을 한 뒤 1879년 크림으로 다시 돌아와 21장을 추가로 집필하였다. 글쓴이는 21장에서 크림 반도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글쓴이는 크림 남부해안에는 끝없는 장래성과 풍요가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남부해안을 포도원으로 만들어 러시아에서 크림반도를 가지고 마실 것을 공급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글쓴이는 이때 필요한 것은 자본과 국민 경제의 합리적 시스템이라고 썼다.[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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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크림반도 견문록, 예브게니 마르코프, 나남, 2020.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