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바다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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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바다오리(큰바다쇠오리[1])
Great auk


파일:Pinguinus impennis.jpg

학명
Pinguinus impennis
Linnaeus, 1758
분류

동물계(Animalia)

척삭동물문(Chordata)

조강(Aves)
하강
신악하강(Neognathae)
상목
신조상목(Neoaves)

도요목(Charadriiformes)
아목
갈매기아목(Lari)

바다오리과(Alcidae)
아과
바다오리아과(Alcinae)

바다오리족(Alcini)

†큰바다오리속(Pinguinus)

†큰바다오리(P. impennis)


파일:큰바다오리.jpg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켈빈그로브 아트 갤러리 앤드 뮤지엄에 전시된 박제
1. 개요
2. 생태
3. 수난사
4. 멸종
5. "원조" 펭귄
6. 기타



1. 개요[편집]


멸종된 새의 하나. 도요목 바다오리과에 속한 바다새의 일종.


2. 생태[편집]


북반구의 뉴펀들랜드 섬,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영국,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해안까지의 북쪽 대서양 및 북극해에 분포하며, 무리를 지어 생활했다.

크기는 75~85cm로 큰 조류였으며, 체중은 5kg, 날개는 15~20cm, 깃털은 10cm 정도 된다. 낮은 소리로 '까악, 까악'하고 울었다고 하며, 불안할 때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고 한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대신 펭귄 못지 않게 수영이 뛰어났으며, 15분간 숨을 참고 1km 깊이까지 잠수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고, 수중에서 가속하여 물 밖으로 튀어올라 바다 표면 위의 바위 절벽에 착륙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먹이는 어패류와 두족류, 갑각류였다. 짧은 다리 때문에 이동속도가 느려서 육지에서는 천천히 걸었다.

5월 초에서 중순에 암수가 서로 머리와 목을 흔들고 입을 맞추는 등의 구애를 하면서 짝짓기하고[2] 해안에서 100m쯤 떨어진 맨땅이나 절벽 기슭에 둥지를 틀고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매년 한 개의 알을 낳았으며 만약 먼저 낳은 알을 잃어버리면 대체로 알을 더 낳았다. 다만 먹이가 부족한 해에는 알을 낳지 않았다. 부모는 알이 부화하기 전 39일에서 44일 동안 교대로 직립 자세로 알을 품었는데, 알은 8월 말까지 깨어나지 않은 경우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6월에 부화했다. 암수는 교대로 새끼를 돌보는데 새끼는 둥지에서 나와 물속에서 잠수와 헤엄, 그리고 육지에서 상륙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성숙하는데 2~3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일반적으로 7월 중순경이었다고 한다.

6주가 지나면 새끼들은 둥지를 떠나지만 부모는 계속 새끼를 돌보았고 새끼를 등에 업고 헤엄칠 정도로 자식 사랑이 뛰어나며 4~7살에 성적으로 성숙한다.

알은 잘 구르지 않도록 길쭉한 배 모양이며 평균12.4cm,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는 7.6cm였고 황백색에서 옅은 황토색이었고 다양한 패턴의 흑색, 갈색 또는 회색 반점과 선이 큰 끝에 모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알의 줄무늬의 변화 덕분에 암수가 광대한 번식지에 있는 자신들의 알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걸로 보인다.

전체적인 특징으로 목은 자유자재로 구부리거나 꺾을 수 있었으며 입안은 노란색, 등은 주로 광택이 나는 검은색, 배는 흰색이었고 목과 다리는 짧고 머리와 날개는 작았으며 수컷과 암컷은 깃털이 비슷했지만 크기, 특히 부리와 대퇴골 길이에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발과 짧은 발톱은 검은색,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는 피부는 갈색을 띈 검은색이었다.

큰바다오리는 무리와 소통할 때 낮게 삐걱거리는 울음소리와 쉰 울음소리를 냈었다. 또한 번식지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이동했고 늦가을과 겨울 동안 한쌍 또는 소규모 무리가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전체적인 둥지 번식지에 사는 무리와는 함께 이동하지는 않았고 주로 남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위협받을 땐 부리로 쪼아댔으며 수명은 20~25년으로 추정된다.

새끼는 솜털 같은 회색 털에 뒤덮여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오늘날에는 표본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생김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부리는 성체보다 눈에 띄는 홈이 더 적었고 목에는 흰색과 검은색 반점이 있었지만 성체에서 볼 수 있는 눈의 반점은 없었고 대신 회색 반점이 흰 반점의 눈을 통해 귀 바로 아래까지 이어졌다.

여름 동안에는 양쪽 눈에 흰 반점, 턱과 목 색깔이 흑갈색이었고, 겨울에는 목이 흰색으로 변했으며 겨울 동안에는 털갈이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눈 근처의 흰 반점은 눈 사이에서부터 귀까지 뻗어 늘어나 있는 넓은 회색으로 바뀌었다. 또한 일부 개체는 옆구리에 회색 깃털이 있었다고 한다. 두껍고 큰 부리는 무겁고 구부려졌으며 윗턱과 아랫턱 표면에 깊은 흰색 홈이 있었는데 여름에는 위턱에 최대 7개, 아래턱에 최대 12개가 있었지만 겨울에는 더 적었다.

천적으로는 북극곰, 범고래, 상어, 흰꼬리수리, 기각류 등이 있었다고 한다.


3. 수난사[편집]


아메리카 원주민, 이누이트족, 바이킹은 큰바다오리의 뼈로 목걸이를 만들었을 정도로 겨울 동안의 식량 공급원이자 중요한 문화적 상징으로 높이 평가했고 100,000년 전엔 네안데르탈인들도 이 동물을 많이 사냥했었다.

호기심이 많아 사람을 봐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오는 습성이 있어 사냥하기 쉬웠기 때문에 멸종했다.[3] 그리고 번식기 때 알을 하나씩만 낳는 낮은 번식력도 멸종 원인 중 하나이다. 유럽인들이 본래 쥐가 없었던 큰바다오리의 번식지에 외래종인 쥐를 가져온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수백만 마리의 큰바다오리가 서식한 천국 같은 섬들은 곧 생지옥이 되었는데, 유럽과 미국의 어부[4]와 선원들은 막대한 숫자의 큰바다오리를 죽이고 뼈[5]와 고기와 깃털[6]과 알[7]과 가죽과 기름을 얻었다. 아주 맛이 좋았다고 알려진 고기는 사람의 식용만이 아니라 낚시 미끼로도 쓰였다.

알려진 7개 번식지 중 가장 큰 번식지였던 뉴펀들랜드 앞바다의 펑크섬은 16세기부터 줄기차게 습격당했다. 미국독립전쟁 시기까지만 해도 아직 번식지로 남아있었으나 1800년경에 완전히 전멸했다. 1841년에 뒤늦게 이 섬을 찾은 어떤 박물학자는 산더미처럼 쌓인 뼈 무더기만 볼 수 있었다.

선원들은 큰바다오리를 그저 잡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재미를 위해 산 채로 가죽을 벗기거나, 알을 부수기도 했다. 큰바다오리가 서식하던 섬들은 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식사를 위해 큰바다오리를 여러마리 잡아 일부는 산 채로 냄비에 넣고, 나머지는 그 냄비에 들어간 큰바다오리를 익히기 위한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워낙에 살에 지방 기름이 많아 불을 붙이기 아주 좋았다고 한다. 당시 선원들은 사회에서 가장 질 나쁜 자들이 몰려갔던 직업군 중 하나였고, 그래서 심심풀이 용으로 이처럼 잔인하게 새들을 죽였다.

1553년에 처음으로 법적인 보호 시도가 있었다. 뉴펀들랜드의 세인트 존스에서는 1775년부터 깃털과 알을 채취하기 위해 큰바다오리를 잡는 자들은 공개 태형을 가하는 금지규정을 제정했지만 낚시 미끼용으로는 계속 잡을 수 있었다. 1794년에는 영국에서 깃털을 얻기 위해 사냥하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학살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4. 멸종[편집]


유럽 쪽 서식지는 16세기에 거의 사라졌다. 북대서양과 북극해 전역에 살던 이들의 서식지는 1820년경에는 아이슬란드의 섬인 가이르풀라스케어(Geirfuglasker)[8] 하나로 줄어들고 만다. 다행히 그곳은 주변에 항상 강한 파도가 치는데다 경사가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화산암으로 된 섬이라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었으나, 불행히도 1830년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인해 섬이 가라앉고 말았다.

살아남은 큰바다오리들은 가까운 엘데이 암초로 피난했지만 그 개체수는 소수였다. 1835년에 발견되었을 때 이 무리는 약 50마리에 불과했다. 그러자 오히려 프리미엄이 붙었고, 희귀한 표본을 얻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돌아간 채집가들이 선원들을 고용해 표본을 구해 오게 했다. 선원들은 새는 목을 비틀어 죽이고, 알은 부화가 불가능해 형태가 보존되는 무정란만 취하고 유정란은 그냥 그 자리에서 깨버렸다.

영국에 남은 마지막 큰바다오리는 1840년 7월에 죽었다. 스코틀랜드 세인트 킬다(St Kilda, Scotland) 섬의 스택 안 아르민(Stac an Armin)이라는 바위섬에 살던 개체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배가 사흘 뒤에 큰 폭풍우에 휩쓸리는 바람에 당시 세인트 킬다에서 이 개체를 생포한 세 명의 선원이 큰바다오리가 마법을 부려 풍랑을 일으키는 마녀라고 생각해 곤봉으로 때려 죽였다.

1844년 6월 3일 혹은 4일, 한 채집가 상인이 보낸 선원 세 명이 이 섬에 도착했다. 이들은 큰바다오리 한 쌍이 알을 품고 있는 걸 발견했는데, 이들이 이 종의 마지막으로 생존한 큰바다오리들[9]이었다. 암수는 바다 속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한 마리는 바위 틈새에서, 나머지 한 마리는 바닷가에서 잡혔다. 이 둘 모두 그 자리에서 선원인 존 브랜드쏜(Jón Brandsson)과 세그두르 이슬레이프쏜(Sigurður Ísleifsson)에 의해 목이 졸려져 죽고 남은 알은 채집되는 과정에서 실수로 일부가 깨지는 바람에 나머지 선원인 케틸 케틸슨(Ketill Ketilsson)이 장화로 으깨버린 다음,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 채집가와 세 선원들은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 사실을 안 도도새와 큰바다오리를 연구하던 조류 전문가이자 박물학자였던 존 울리(John Wolley)가 그들이 있는 감옥으로 직접 가서 면회 인터뷰를 통해 남은 개체들은 어떻게 포획했는지를 당시 상황에 대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큰바다오리의 보호 정책이 강화되고 있을 무렵 1852년에 살아있는 큰바다오리의 목격담이 나왔고 IUCN에서 인정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1852년에 포착된 이 개체가 진짜 마지막 생존자이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목격담이 보고되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78점의 박제, 24점의 해골 표본과 75개의 알들 뿐이다. 살아남은 표본 중 4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름 깃털로 되어있으며 이 중 2개만 미성숙하고 새끼를 낳는 표본은 없다. 마지막으로 죽은 두 마리는 내장까지 포르말린 액침 표본으로 덴마크 코펜하겐 동물학 박물관에 남아있다.

5. "원조" 펭귄[편집]


과거 유럽에서 '펭귄'이라 하면 이 새를 의미했다. 이 이름의 어원에 관한 가설 첫번째는 뉴펀들랜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영국 사투리와 신조어를 섞어서 어디에도 없는 말을 양산해 내었는데, 이 중에 살아남은 표현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지역을 항해하던 영국 어선의 선원들이 웨일스어로 '흰머리'를 의미하는 단어 'pengwyn'를 가져와서 붙였다는 것이다.[10] 또한 속명 역시 이 명칭에서 기인했다.

한편, 펭귄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 새와는 달리 살아남았다. 16세기에 들어서 남반구의 바다를 접한 유럽인들이 이 새와 비슷하게 생긴 바다새들에게 큰바다오리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고, 생김새만 비슷하고 완전히 다른 동물인 이 바다새들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으면서 현대에 펭귄이라고 하면 당연하게도 이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멸종해버린 "오리지널 펭귄"은 자연스레 일반인들 사이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6. 기타[편집]


  • 현재 영국에서 수집된 표본을 통해 추출하여 보존 중인 유전자 DNA를 이용하여 큰바다오리를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며, 또한 큰바다오리의 유전자 DNA 분석 결과 레이저빌이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친적으로 밝혀져 아마 복원 결정이 된다면 레이저빌을 이용하여 복원할 듯 싶다. 과학자들의 목적은 큰바다오리의 DNA를 사용해 레이저빌의 게놈을 변경하는 방식을 활용하여 일단 큰바다오리와 매우 유사한 특성을 가진 잡종을 만들고 순혈이 나올 때까지 그 잡종들을 큰바다오리 서식지에 방사하여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 큰바다오리의 멸종으로 '북유럽의 구아노 생산이 급감했으며 그로 인해 북유럽 구아노로 돈버는 이들은 파산해버렸고, 그나마 남미나 오세아니아, 극지방으로 구아노를 찾으러 가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신빙성이 낮다. 애초에 유럽에서는 새똥을 비료로 쓰지도 않았고, 큰바다오리가 멸종된 뒤에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물새들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물새들은 여전히 물고기를 먹고 똥을 사고 있으므로 당연히 새똥도 쌓이고 있다.

  • 2017 수능특강 영어독해연습에 이 새의 멸종 과정을 주제로 한 지문이 있었고, 2017 수능 6월 모의평가에서 해당 지문을 연계하여 32번 빈칸 문제로 출제하였다. 지문 자체도 어렵지 않았고 연계문제였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매력적인 오답 선지 덕분에 무려 70% 이상의 오답률을 기록하며 오답률 2위에 올랐다.

  • 뉴욕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에도 큰바다쇠오리가 전시되어 있다. 잠수하는 모습과 헤엄치는 모습까지 잘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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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우리말 이름이 바다쇠오리인 새들과는 아주 가까운 관계는 아니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오역으로 볼 수 있다.[2] 암수가 한 평생을 함께 지냈다고 한다.[3] 공교롭게도 모리셔스에 살았던 도도새도 이런 습성을 가지고 있었고, 현존하는 펭귄도 판박이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하늘을 날지 못한다.[4] 어부들이 소금에 절인 새고기와 알을 저장식량으로 삼았기 때문이다.[5] 박제나 도구, 장식용에 쓰였다.[6] 솜털이 베개, 이불 따위의 충전재로 쓰였다. 본래 유럽에서는 솜털오리(eider)의 솜털이 훨씬 인기가 좋았지만, 솜털오리가 격감하자 사냥 대상이 큰바다오리로 바뀐 것이다.[7] 빵과 과자, 푸딩을 만드는데 많이 쓰였다고 한다.[8] '큰바다쇠오리 바위'라는 뜻이다.[9] 밑에 마지막 개체가 따로 있으나 이 큰바다오리이 더 중요한 이유는, 암수가 있어야 번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10] 다만 이 설에는 새들이 배설물로 허옇게 만들어 놓은 섬에 붙인 이름에서 새 이름이 나왔다는 설과, 이 새들의 머리 부분에 있는 하얀 부분 때문에 이 이름을 붙였다는 설로 다시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