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오 아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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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칠레 출신의 피아니스트.
2. 생애[편집]
1903년, 칠레의 칠란이라는 도시에서 안과의사인 아버지와 피아노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승마사고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후 3세 무렵 베토벤의 소나타를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고 암보로 연주했다고 하며, 5세로 최초의 리사이틀을 열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재능을 인정한 칠레 정부의 원조로 1911년에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옮겨, 베를린에서 슈테른 음악원의 교수이자 리스트의 제자였던 마르틴 크라우제에게 사사했다. 크라우제는 어린 아라우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무보수로 그를 가르쳤다고 한다. 11세인 1914년에 베를린에서 정식으로 데뷔했으며 순식간에 독일 내에서 그 명성을 높여, 2년 연속해서 리스트 상을 비롯한 각종 상을 수상했다. 니키시 무크, 멩겔베르크, 푸르트벵글러 등의 대지휘자들에게 인정되어 자주 협연했다.
이후 1918년, 스승이던 크라우제가 사망한 후 아라우는 일체의 가르침을 거부한 채 독학에 전념한다. 1921년부터는 조국 칠레를 비롯하여 남미 각지, 영국, 북미 등 세계 각지를 오가며 10대에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25년에는 22세의 젊은 나이로 슈테른 음악원의 교수로 취임하고, 1927년, 24세에는 제네바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40년대 나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활동의 본거지를 옮겼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유럽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칠레 정부에서도 특별한 외교관 여권을 주고, 수도인 산티아고에 '아라우 거리'를 만드는 등 국보급 영예를 보내기도 했다.
88세가 되던 1991년, 유럽 연주여행을 진행하던 아라우는 오스트리아의 뮈르츠쉴리크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3. 연주[편집]
연주 성향은 1800년대 후반 피아니즘의 낭만적 성향을 현대로 계승하는 동시에 1900년대 초반에서 중후반으로 넘어오는 현대적 해석의 계기를 마련한 연주로 평가된다. 베토벤과 리스트 두 작곡가에 천착하여 많은 음반(베토벤 소나타 전곡, 주요 리스트 작품)을 남겼고, 모짜르트, 슈만, 쇼팽 등 고전, 낭만 주요 작곡가의 작품에 두루 능했다. 러시아 피아니즘에 대비되는 유럽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본인이 남미 출신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해석과도 차별점을 지닌다.
기교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리스트 작품에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교에만 함몰되지 않고 낭만성을 충분히 표현하기 때문에 그의 초절기교연습곡 음반은 음악사적으로도 명반으로 꼽히며, 기교가 전혀 부족하지 않으면서도 낭만적으로 흘러가는 음악의 흐름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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