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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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국 총리
오스트리아 제국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Klemens von Metternich


본명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1]
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작위
후작
출생
1773년 5월 15일
트리어 선제후국 코블렌츠
사망
1859년 6월 11일 (향년 86세)
오스트리아 제국
직업
외교관, 정치인
학력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마인츠 대학교
배우자
엘레오노레 폰 카우니츠 (1795년 ~ 1825년, 사별)
앙투아네트 레이캄 (1827년 ~ 1829년, 사별)
멜라니 치히페라리스 (1831년 ~ 1854년, 사별)
자녀
14명
서명
파일:Signatur_Klemens_Wenzel_Lothar_von_Metternich.png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안정이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외교관,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등장 이전에 프랑스탈레랑과 함께 19세기 전반기 유럽의 국제 질서를 정립한 주인공이자 백년 평화를 이룩하게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는 복고적, 반자유주의적인 빈 체제를 구상해 낸 인물이지만, 국제정치학에서는 수많은 전쟁으로 점철된 나폴레옹 시대 이후, 국가 간 '협력'과 '세력 균형'을 통해 보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유럽 질서를 창출하여 외교사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 뽑히는 등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혁명이라는 사상과 그 이념의 확산을 막기 위해 빈 회의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구(舊) 체제로 되돌리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그리하여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빈 체제의 성립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럽 각 지역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의 이념들이 퍼져 있었다. 결국 메테르니히는 에서 일어난 혁명에 의해 재상 자리에서 실각하여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었다.


2. 생애[편집]


신성 로마 제국 트리어 선제후국의 실질적인 수도 코블렌츠[2]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속한 메테르니히 가문은 몇몇 트리어 선제후마인츠 선제후를 배출했을 정도로 유서 깊은 명문가였다. 1795년,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오스트리아 재상(Staatskanzler)이었던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의 손녀 엘레오노레와 결혼했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국가 재상직을 역임한 인물은 카우니츠와 메테르니히 둘 뿐이었다. Staatskanzler는 현대의 오스트리아에서는 총리를 의미하지만 전제 왕정 시절에는 당연히 군주가 모든 결정권을 쥐었으며 실무는 관례적으로 외무장관이 최선임 장관이었다. 특별히 국가 재상직을 만들어 역임한 건 두 인물에 국한된다. 게다가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비롯한 자신의 전성기가 아니라, 정적과 프란츠 2세에 밀려 실세에서 멀어졌던 관직 말기에야 국가 재상을 역임했다. 그는 상당히 높은 교양을 갖추고 여러 나라의 언어도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본인 스스로를 세계시민귀족주의자라고 생각했다.

1806년, 나폴레옹 통치하의 주(駐) 프랑스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한 후, 1809년부터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으로서 1810년의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결혼 실현에 힘썼다. 그 후 1813년 이후 러시아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체제 타도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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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 가운데의 인물이 메테르니히다.

1814 ~ 15년의 빈 회의를 주재하고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를 열강 간의 세력 균형에 기초하여 재건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모든 개혁혁명이 안정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죽어가는 구(舊) 체제를 다시금 살리려 하였다. 그러므로 외교관으로서 그의 목표는 전 시대의 정치 유산인 국가 간의 견제와 균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패전국인 프랑스에 대해서 그리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고 그 결과만 보면 프랑스는 전범 취급은 당했지만 아주 큰 손해는 보지 않은 편이었다. 그 이유는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명분 때문에 프랑스 자체를 쪼갤 수 없었고[3] 무엇보다 프랑스를 패전국이라고 아주 개박살을 내버리면 세력의 균형은 커녕 다른 국가들이 제2의 프랑스가 되어 또 다시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거나, 혹은 프랑스가 복수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독일에게 가혹했던 베르사유 조약또 다른 전쟁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아주 적절한 처사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회의에서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획득하고 달마티아라구사도 차지하여 이탈리아 반도에서 실리를 챙기고 대신에 부유하지만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있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4]네덜란드에게 넘겼다. 또한 옛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을 정리하여 38개의 연방국가를 모아 독일 연방을 창설하고, 연방의 의장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맡도록 하며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5]를 포기하고 바덴 대공국뷔르템베르크 왕국에 각각 넘긴 대신 바이에른 왕국으로부터 티롤잘츠부르크를 회복하였다. 이탈리아 중북부의 토스카나 대공국모데나 레조 공국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 집안이 북이탈리아 지역에 다시 복귀하면서 사실상 북이탈리아 지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권이 되었고 이 역시 메테르니히의 수완이 크게 작용했다. 또한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 국내의 검열제도, 국경에서의 엄격한 출입국 관리, 마인츠에 거점을 둔 국외 정보망으로 이루어지는 정보 조작 시스템을 만들어 제국에 속한 의 독립 주장을 힘으로 누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메테르니히가 구축한 빈 체제벨기에그리스의 독립으로 균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정치적인 억압에 대한 반발은 1848년 혁명으로 폭발했다. 그 여파로 메테르니히 자신은 3월 혁명으로 실각하고 영국으로 망명했다.[6] 혁명 후인 1851년, 메테르니히는 공무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빈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는 상당한 유명인이어서 오스트리아의 국내 정치에서는 일정한 정치력을 유지하였고 어린 황제이던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여러 정치적 조언을 해주기도 하였다.[7] 이후 1859년 빈에서 노환으로 8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었다. 그 덕분에 말년인 1850년대에 사진을 2장 남길 수 있었다.

파일:old_metternich.png
말년의 메테르니히.[8]


3. 기타[편집]


1970년대 닉슨 행정부에서 미국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 소련과의 군비 경쟁 제한 등 데탕트를 실현해낸 20세기 세계 외교계의 거목 헨리 키신저는 메테르니히를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열렬히 칭송했다. 본인의 하버드대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가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였고, 이후 자신의 여러 저작들에서도 존경심을 자주 드러냈을 정도였다.

반면 영국의 역사학자 A. J. P. 테일러는 "메테르니히의 소위 '업적'이란 건 일반인들이 면도하면서도 이룰 수 있는 일들이다."라면서 온갖 음험한 정치공작에는 능해도 장기적인 비전이 부재한 전형적인 협잡꾼으로 폄하했다. 이와 비슷하게 현대의 역사학자였던 토니 주트 (1948년 ~ 2010년)[9]는 헨리 키신저를 욕하면서 그가 메테르니히를 숭상했다는 점을 꼽아내며 "키신저와 같이 자칭 '현실주의자'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정국을 말아 먹는 근시안적 바보들의 원형이다."라 키신저와 덩달아 깐 바도 있다.

나폴레옹 시대를 종결짓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답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유일한 적자 나폴레옹 2세가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를 견제했다. 물론 나폴레옹 2세는 나폴레옹의 아들이지만 자신들의 황제인 프란츠 2세의 외손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큰 제재를 가하지는 못 했지만 그가 철저히 독일식 교육을 받도록 했고 프랑스어를 배우거나 프랑스 책을 읽는 것을 엄금했다.[10] 이 조치가 지나쳤는지 나폴레옹 2세는 어릴 때부터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독일에는 메테르니히의 이름을 딴 질좋은 보급형 젝트인 퓌르스트 폰 메테르니히(Fürst von Metternich)[11]가 있다. 양조장은 헤센 주의 주도비스바덴에 있으며 헨켈(Henkell)[12]의 자회사이다. 리슬링 품종으로 만든 것과 샤르도네 품종으로 만든 것, 그리고 로제 버전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특산 디저트인 자허토르테의 탄생과 관계가 있다. 메테르니히가 어느 날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직속 요리사에게 디저트를 준비할 것을 명령했는데, 그 요리사가 몸이 좋지 않아서 도제마냥 밑에서 일하던 요리사의 아들인 프란츠 자허(Franz Sacher)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초콜릿 스펀지 케이크를 만들었다. 메테르니히는 "중요한 손님이 입맛을 버려 자신의 명성이 떨어지는 사태가 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단단히 경고했는데, 단단히 긴장한 자허가 내놓은 초콜릿 케이크는 다행히 손님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메테르니히도 자허를 칭찬했다고 하며 이후 이 케이크는 그의 성씨를 따서 '자허토르테'(자허의 케이크)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란츠 자허는 훗날 빈에 '카페 자허'를 열어서 정식으로 자허토르테를 만들어서 팔기 시작해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자허토르테를 제조 및 판매하고 있다.


4. 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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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1995년작 영화 <불멸의 연인>에도 단역으로 나온다. 베토벤을 접견한 자리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자유주의 성향 청년, 학생들의 투서를 읽어주면서 "재상 노릇 못 해먹겠네..."라고 토로하는 장면. 이에 베토벤이 메테르니히를 위한 곡을 헌정해 주겠다며 위로해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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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방영된 TV 시리즈 <나폴레옹>의 종반부에 단역으로 등장한다. 러시아 원정의 참패로 내리막에 접어든 나폴레옹을 방문하여 그동안 프랑스가 전쟁으로 차지해 온 유럽 각지의 점령지들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거부할 경우 오스트리아가 다른 동맹국들과 함께 프랑스에 선전포고한다는 최후통첩을 전달하는 모습.[14]

  • 2023년 나폴레옹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 '오스트리아 대사'가 나오는데, 톰 고드윈이 분했다. 하지만 생긴것만 봐선 메테르니히와 닮지도 않았고, 그냥 탈레랑을 통해 나폴레옹의 협박이나 받는 단역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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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폰메테르니히'가 되지만 '메테르니히'로 알려져 있어서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2] 옆나라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트리어 선제후들은 17세기 이후 프랑스와 가까운 트리어를 버리고 코블렌츠에서 머물렀다.[3] 빈 회의로 결정된 프랑스의 국경은 혁명 이전인 부르봉 왕조 대에 거의 확정된 상태였다.[4] 현재 벨기에룩셈부르크.[5] 알자스슈바벤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랜 월경지. 알자스는 프랑스에게 지속적으로 잠식당해 프랑스 혁명 무렵에는 슈바벤 지역만 남았다. 대표적인 곳이 프라이부르크.[6] 이 기간 향수병에 시달렸다고 한다.[7] 다만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너무 고집이 세서 조언이 영향을 많이 주지는 못했다.[8] 다른 한 장은 1855년에 찍었다고 전해진다. #[9] 루게릭병으로 죽었다.[10] 당시 프랑스어는 현재의 영어처럼 국제 공용어 역할도 했다. 단순히 아버지 나라의 언어를 금지한 것 뿐만 아니라 타국의 외교관들과도 교류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11] 해석하면 '메테르니히 후작'이다.[12] 쌍둥이 칼을 비롯한 가정용품으로 유명한 헨켈은 Henkel으로 표기한다.[13] 물론 베토벤의 정치 성향은 메테르니히와 정반대였다. 영화에서도 진짜로 곡을 헌정하지는 않는다.[14] 그 다음 장면에서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엘바 섬으로 유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