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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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198대 교황. 아비뇽 시대의 네 번째 교황이다.
그는 재임기간(1342~1352) 동안 흑사병(1346~1353) 사태를 겪었다.
2. 생애[편집]
클레멘스 6세 재위 시기에는 흑사병이 유럽 대륙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교황은 일단 공식적으로 흑사병은 하느님의 진노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했으나 의사들과 점성술사 등에게도 발병 원인 등을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당시 교황의 주치의들은 횃불에 둘러싸이면 흑사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조언하지만 클레멘스 6세는 이를 의심했다. 대신 그는 아비뇽에 계속 머물면서 감염자 관리와 사망자 매장을 감독했다. 그는 수많은 감염자들과 사망자들을 접촉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에 걸리지는 않았다. 또한 당시 유럽에서는 흑사병의 원인은 유대인이라는 여론이 우세해서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폭행하는 일들이 빈번했는데, 교황은 흑사병의 원인을 유대인으로 몰아세우고 폭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향해 '악마라는 거짓말쟁이에 유혹당한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비판했다.
채찍질 고행단을 비롯한 광신도들은 유대인을 불법 감금해 고문으로 자백을 이끌어냈다. ‘악마의 사주를 받아 남몰래 공공 우물에 병균을 탔다’는 자백이 유럽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쏟아지고, 어린 아이와 여자를 포함한 수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천문학자들의 자문을 구하고 론강을 축복했던 교황 클레맨트 6세는 유대인 학살이 한창이던 1348년 7월 6일 교황칙령을 내렸다. 훗날 ‘아무리 불충하더라도(Quamvis Perfidiam)’라는 이름을 얻게 된 교황칙령의 골자는 유대인 박해 금지였다.
‘흑사병의 원인을 유대인에 돌리고 학살하는 행위는 거짓말일 뿐 아니라 악마에게 유혹당한 결과’라는 교황 칙서는 극히 일부의 군주들만 따랐다. 오늘날 클레맨트 6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아비뇽 교황청을 지나치게 프랑스화했으며 조카들을 추기경에 임명하고 재산을 모았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지만, 문학과 음악을 후원한 르네상스형 교황이었다는 긍정론이 존재한다.
클레멘스 6세는 공적으로는 착실히 교황 업무를 수행하는 인물이었으나 사적으로는 좋게 말하면 짠돌이가 아닌 지출에 관대한 인물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사치스럽고 낭비벽이 심한 인물이었다. 그는 1348년 당시 나폴리 왕국의 여왕이자 아비뇽이 위치한 프로방스 지방의 영주였던 조반나 1세로부터 아비뇽을 매입한 뒤 다양한 미술 작품들을 사들이고 예배당을 축조하는 등 교황궁을 프랑스 왕국의 궁전 못지않게 호화스럽게 꾸며 교황으로서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한 열성적인 음악 애호가로서 프랑스 왕국 북부 지역의 음악가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전도유망한 작곡가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는데 이로 인해 아르스 노바 음악이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자신 스스로가 파격적이며 교양 있는 군주로 비춰지길 원했으며 세속적인 권력을 효과적으로 누리고 싶어했다.
클레멘스 6세는 신장결석과 더불어 종양까지 지니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윽고 교황은 1352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카르멜회 성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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