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안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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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
(Marcus Aurelius Cleander)
출생
미상
사망
190년
직위
근위대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근위대장. 해방 노예 출신으로 매관매직을 공개적으로 벌여 제국의 공직 체계를 혼란에 빠뜨렸고, 행정을 마비시키다시피 했다가 190년 몰락했다.


2. 생애[편집]


라틴어식 표기에 따라 클레안데르로 알려져 있으나,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헬라어로는 클레안드로스(Κλέανδρος)[1]로도 불린다. 프리기아 출신이다. 동시대 원로원 의원이자 같은 아나톨리아 반도 출신인 디오 카시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는 짐꾼 노예로 로마에 팔려갔다가 운 좋게 황실에서 사들여 황궁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영리하고 성실한 까닭에 궁정의 노예였다가 해방된 후, 옛 주인이자 파트로누스인 안토니누스 가문에게 프라이노멘 '마르쿠스'와 노멘 '아우렐리우스'를 하사받고, 로마 라틴식 이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를 취하게 됐다.[2] 해방인이 된 이후부터는 대개의 황궁 해방노예들처럼 황궁 관료 생활을 했는데, 그는 콤모두스 황제의 비서로 일했다.

182년경 콤모두스의 애첩 중 하나인 다모스트라티아와 결혼했다. 185년 근위대장 페렌니스가 반역죄로 자식들과 함께 처형된 뒤, 새 근위대장에 발탁되었다. 그는 주군의 향략을 돕고 개인적으로도 막대한 돈을 벌기 위해 원로원, 군 지휘관, 총독, 집정관 등 수많은 관직을 공개적으로 판매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몰락하기 직전이던 190년 한해에만 25명에 달하는 집정관이 선임되었다고 한다.

190년 4월 로마 시는 화재에 이어 곡물부족에 시달렸다. 전염병과 기근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클레안데르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모든 곡식을 사들여 곡물 부족을 조장했다는 소문에 격분했다. 후대 학자들은 실제로는 당시 곡물 담당관이었던 파파리우스 디오니시우스(Papirius Dionysius)가 곡물 부족 상황을 악화시킨 뒤 그 책임을 클레안데르에게 뒤집어씌웠을 거라고 추정한다. 시민들은 소문에 격노해 봉기를 일으켜 콤모두스가 머물고 있던 퀸틸라 빌라까지 들이닥쳤다. 클레안데르는 기병대에게 군중을 축출하라고 명령했지만, 군중은 힘으로 밀어붙여 기병대를 격파했다.

급기야 군중이 옥상에 올라가 기와를 던지고, 수도 경찰대까지 민중의 편에 서자, 콤모두스는 클레안데르를 참수하고 수급을 군중에게 던져줬다. 군중은 환호하며 클레안데르의 시신을 짓밟고, 수급을 장대에 매달아 들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후 콤모두스는 이제부터는 직접 나라를 통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애첩 마르키아, 해방노예 에클렉투스, 단독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에게 위임하다시피 하고 자신은 검투사질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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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léandros[2] 대개의 노예들은 주인에게 자유를 얻고 난 뒤, 주인의 개인이름과 씨족 성씨를 하사받아 그 가문에 클리엔테스로 예속됐다. 가령,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때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서 자유를 얻은 나르키수스의 경우, 관습에 따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르키수스가 됐으며, 공화정 말 카이사르에게 갈리아 전쟁 중 해방된 갈리아인 포로 출신 리키누스는 자유를 얻은 즉시 가이우스 율리우스 리키누스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