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다카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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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2대 내무경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 | Kido Takayoshi


파일:Takayoshi_Kido_suit.jpg

출생
1833년 8월 11일
나가토아부군 고후쿠초
(現 야마구치현 하기시 고후쿠초)
사망
1877년 5월 26일 (향년 43세)
교토부 교토시
재임기간
제2대 문부경
1874년 1월 25일 ~ 1874년 5월 13일
제2대 내무경
1874년 2월 14일 ~ 187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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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다카요시(孝允)[1]
통칭[2]
고고로(小五郎)
→ 간지(貫治)
→ 준이치로(準一郎)
성씨
와다(和田)
→ 가쓰라(桂)
→ 기도(木戶)[3]
아호
쇼기쿠(松菊)
기케이(木圭)[4]
기도(鬼怒)[5]
신체
174cm
학력
명륜관(明倫館)[6]
유파
신도무념류
부모
양부 가쓰라 다카후루
생부 와다 마사카게
배우자
기도 마쓰코[7]


1. 개요
2. 생애
2.1. 줄행랑 고고로
3. 관련항목



1. 개요[편집]


파일:가몬kogoro.jpg
카쓰라 가몬

일본정치가이며,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삼걸 중의 하나이다.


2. 생애[편집]


파일:attachment/기도 다카요시/kido.jpg
가쓰라 고고로 시절
기도 다카요시는 지금의 야마구치현조슈 번하기에서 무사 집안인 와다 마사카게(和田正影)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쓰라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1849년 요시다 쇼인이 번교 명륜관에서 강의를 할 무렵 병학을 배운 적이 있다. 일단 제자이기는 하지만 나이는 3살 차이라 동생 뻘이고 선후배 관계였다.

1852년에는 에도 3대 도장 중 하나인 신도무념류의 연병관에서 수련하여 면허개전을 받았다.

1862년 영주에게 미일수호통상조약 반대 정책을 진언하였다가, 곧 개국·도막(倒, 에도 막부를 쓰러뜨림) 정책으로 전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슈 번의 존황양이 운동의 리더적 존재로 활동했다. 혈기넘치는 과격파 젊은 양이지사들을 달래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이케다야 사건 이후 교토를 떠나 다지마에서 숨어 살고 있던 그를 시모노세키 거병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타카스기 신사쿠가 찾아내 조슈번의 정치적 리더의 자리로 모셔온다. 본인은 정계 은퇴를 결심해서 평범한 상인의 삶을 살려고 했지만, 애인인 게이샤가 찾아가 한 달이나 졸라 승락했다.

1866년 조슈 번의 대표로 금문의 변으로 원수지간이었던 사쓰마번삿초 동맹을 맺은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되자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정치적 식견을 인정받고, 여러 고위직을 거치면서, 판적봉환, 폐번치현, 단발령, 구시대의 악습 폐지, 사민평등, 헌법 제정과 삼권분립의 확립, 교육 제도, 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법전 편찬과 법치주의 확립, 도쿄 천도 등 신정부의 거두로서 정책 결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871년에는 서양 여러 나라를 순방, 내치(內治)의 긴급성을 통감하여 정한론에 반대하고 입헌정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정작 처음엔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영향으로 정한론을 주장했다. 이때 반대한 게 아이러니하게도 사이고 다카모리. 단, 정말 본심에서 한국을 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라 치긴 쳐야하나 사이고의 주도 하에 사쓰마번의 공으로 넘길 생각이 없기 때문에 후일을 도모하자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우리가 타당한 이유 없이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논리적 근거를 개진하고 싶은 것뿐이다. 내가 내세우는 싶은 논리적 근거란 우리의 우월한 국가 정책을 그 땅에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 1869년 7월에 남긴 기도 다카요시의 일기 중


이에 대해 저명한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인 매리어스 잰슨 교수는[1]은 "이보다 더 조잡하고 편협한 '정당화'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 많은 일본인이 바로 이 환상 때문에 고생했지만, 1869년에 이런 환상이 보편적으로 수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은 더더욱 대경실색할 일이다. 1870년 7월 기도는 조선에 파견될 특명대사는 자임했으나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라고 '현대 일본을 찾아서' 1권에 서술하기도 했다.

1874년 타이완 출병(出兵)에 반대하여 요직에서 물러났다가 요인들의 설득으로 복직했다. 이후 서구식 헌법의 제정에 일익을 담당했지만 건강의 악화로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했다.

세이난 전쟁 중이던 1877년 5월 26일, 지병으로 향년 43세에 사망했다. 이때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자중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먼저 죽어 간 동지들의 남은 가족들을 금전적으로 도와주고 보살피고, 적이었던 아이즈번에게도 관용적이었던 휼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2]

정식 부인으로 들인 게이샤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여동생의 아들 구루하라 다카마사를 양자로 삼았으며, 다카마사의 아들 기도 고이치는 내대신이 되었으나 1945년 항복선언에 연루된다. 집안 자체가 유신체제의 시작과 끝을 본 셈이다.


2.1. 줄행랑 고고로[편집]


막부말기 무렵 도망을 하도 잘쳐서 줄행랑 고고로(逃げの小五郎)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센구미에게 붙잡혔을 때는, 똥이 급하다고 볼 일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못 믿었는데, 진짜로 똥을 지려서 냄새가 나 볼 일 보라고 했는데 그 틈을 타서 도망친 지저분한 일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숨어다니면서 만든 이명만 10개가 넘는다.

桂小五郎(가쓰라 고고로)

和田小五郎(와다 고고로)

新堀松輔(니보리 마쓰스케)

広戸孝助(히로에 고스케)

広戸屋孝助(히로에야 고스케)

臼田幸助(우스다 고스케)

木戸松菊(기도 쇼기쿠)

木戸貫冶(기도 간지)

木戸準一郞(기도 준이치로)

木戸孝允(기도 다카요시)


3. 관련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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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일본을 찾아서' 1~2권과 료마가 간다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던 '사카모토와 메이지 유신'의 저자이다.[2] 평소 인품이 훌륭했던 건 맞지만 아이즈번에 대해서는 상당히 가혹한 처분을 내렸다. 번의 주민 대부분을 추운 홋카이도로 강제이주 시키려고 했으나, 이들의 상당수가 여자와 노인들이라 홋카이도를 개척시킬 수 없다는 구로다 기요타카의 만류에 따라 대신 혼슈 섬 최북단인 두남 번(아오모리현 무쓰시)으로 이주시킨다. 홋카이도 바로 아래에 있는 곳이니 이곳도 추위가 매섭기는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