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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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크스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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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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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킹크스
THE KINKS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레이 데이비스, 데이브 데이비스, 믹 애버리, 피트 콰이프
입성 연도
1990년
후보자격 연도
1990년
후보선정 연도
1990년














킹크스
The Kinks


파일:the kinks.jpg

▲ 왼쪽부터 레이 데이비스, 믹 애버리, 데이브 데이비스, 피트 콰이프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결성
1962년
잉글랜드 북 런던 피흘리 머스웰 힐
데뷔
1964년 2월 7일
싱글 Long Tall Sally
데뷔 음반
해체
1996년
재결성
2008년
멤버
레이 데이비스 (보컬, 리듬 기타)
데이브 데이비스 (리드 기타)
피트 콰이프 (베이스)
믹 애버리 (드럼)
장르
로큰롤, 하드 록, 팝 록, 라가 록, R&B, 프로토 메탈, 프로토 펑크, 챔버 팝
링크
파일:kinkslogo.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트위터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역사
2.1. 결성과 데뷔
2.2. 미국 공연 금지 사태
2.3. 음악적 변화기
3. 평가
4. 샘플곡
5. 디스코그래피
6. 여담


1. 개요[편집]



파일:the-kinks.jpg

킹크스(The Kinks)는 1963년 레이 데이비스(보컬, 리듬 기타), 데이브 데이비스(리드 기타) 형제를 주축으로 결성된 영국록밴드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킹크스'라고 불리지만 실제 발음은 킹스에 가깝다.[1]


2. 역사[편집]



2.1. 결성과 데뷔[편집]


킹크스는 레이 데이비스. 데이브 데이비스 형제에 의해 결성되었다. 북런던 출신의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으며, 로큰롤 열풍이 불자 기타를 배우고 곧 밴드를 결성하고자 했다. 이들의 밴드는 처음에는 '레이 데이비스 쿼텟'이라는 이름에서 '레이븐스'라는 이름을 거쳐 1964년 '킹크스'라는 이름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데이비스 형제와 드럼의 믹 애버리, 베이스 기타의 피트 콰이프로 구성된 이 밴드는 1963년 미국 출신의 프로듀서 셸 타미의 발탁을 받고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이들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는데, 파이 레코드(Pye Records)와 간신히 계약하기까지 수십 번 오디션 탈락의 쓴맛을 맛봐야 했으며 데뷔 싱글과 후속 싱글이 연이어 실패하자 "3번째 곡도 망하면 그대로 짤라 버리겠다"는 음반사의 협박을 받기도 했다.

당대 많은 브리티시 밴드가 그랬듯 킹크스 역시 미국의 기존 로큰롤, 리듬 앤 블루스 등을 커버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1964년 2월 발매된 밴드의 데뷔 싱글은 리틀 리처드의 'Long Tall Sally'의 커버였는데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미미한 반응만을 남기고 실패, 2번째 싱글은 레이 데이비스의 자작곡 'You Still Want Me'로 정했지만 이 역시 미지근한 반응을 얻으며 실패했다. 이 시기는 킹크스에게 상당히 힘든 시기였는데, 음반사에서 끊임없이 히트곡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멤버 구성도 일정치 못해 원 드러머 믹 애버리 대신 바비 그레이엄이 드럼을 레코딩하는 등 여러모로 밴드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한편 프로듀서 셸 타미는 이들의 노선을 '고출력의 리듬 앤 블루스' 이른바 'Maximum R&B'로 잡았다. 당대 인기 밴드들이던 비틀즈가 팝적인 멜로디와 자작곡으로 히트를 거두고, 롤링 스톤스가 보다 '흑인 음악'에 가까운 블루스 록을 선보였다면 킹크스의 지향점은 거칠고 알기 쉬운 록이었다. 비틀즈의 듣기 쉬운 멜로디를 가져오면서도 단정한 사운드 대신 보다 거칠고 원초적인 사운드로, 스톤즈의 자유분방함을 가져오면서도 블루스의 필 대신 직선적인 리프 구조를 더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셸 타미의 노선이 제대로 히트한 것이 3번째 싱글 'You Really Got Me'였다. 이 곡은 밝고 멜로딕한 사운드 대신 거칠고 강렬한 리프와 훅 중심의 개러지 록 곡이었으며, 이 곡이 큰 히트를 치며 킹크스는 비로소 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이 곡은 영국 차트 1위를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빌보드 핫 100 차트 7위까지 오르며 킹크스를 비틀즈, 롤링 스톤즈, 애니멀즈 등과 함께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한 주역으로 인정받게 했다. 'You Really Got Me'는 단순히 상업적인 성공 뿐만이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상당한 위치를 갖는 곡인데, 강렬한 리프 중심의 사운드, 단순한 가사와 거친 창법, 기타 솔로 등 후대의 하드 록헤비 메탈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곡이기 때문이다. 밴 헤일런이 후일 이 곡을 커버했는데, 보컬 톤과 기타 사운드만 조금 수정했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전형적인 메탈 곡으로 탈바꿈했다.[2] 레이 데이비스의 자작곡이라는 것 역시 고무적인 요소였는데, 정작 레이 본인은 이 곡이 너무 거칠다고 여겨 좀 더 부드럽고 얄팍한 사운드로 재녹음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후 킹크스는 'All Day and All of the Night'이 영국 차트 2위, 빌보드 차트 7위, 'Tired of Waiting for You'를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차트 6위에 올리며 승승장구한다. 'Kinks', 'Kinda Kinks'같은 스튜디오 앨범도 TOP 40 안에 안착하는 등 준수한 성과를 올렸고, 밴드 내에서 각종 히트곡을 써낸 레이 데이비스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1965년 밴드는 결성 이후 처음으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를 시작지로 해 아시아를 거쳐 미국에서 끝나는 월드 투어를 돌게 된다. 이렇게 성공가도를 달리던 킹크스였지만 한편으로는 밴드원 내의 갈등이 심해지고 멤버들이 각종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등 여러 논란에 휘말리게 된다. 이러한 사건 사고들에 의해 미국 투어 도중 미국 음악가 조합(American Federation of Musicians)에 의해 미국 내 공연이 4년간 금지되며 사실상 미국 시장에서 퇴출되고 만다.

2.2. 미국 공연 금지 사태[편집]


1965년 킹크스의 미국 공연 금지 사태에 대해서는 킹크스 측과 미국 음악가 조합(American Federation of Musicians) 모두 정확한 이유를 밝힌 적이 없다. 정설은 킹크스가 벌인 여러 사건사고들과 당대 미국의 보수적이었던 분위기가 합쳐져 발생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당시 킹크스는 현대의 기준으로 봐도 파격적인 사고를 수 차례 저질렀다. 밴드는 활동 초기부터 공연이 끝나면 늘 숙소 호텔에서 거나하게 파티를 벌이고 온갖 난장판을 만들며 호텔 측을 난감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밴드 멤버 간의 갈등도 문제였는데, 특히 1965년 5월 19일 영국 카디프 공연에서 벌어진 사건이 유명하다. 이미 전날 밤 술자리에서 데이브 데이비스와 믹 애버리 간의 싸움이 있었고 냉랭한 분위기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첫 2곡을 연주한 뒤 데이브 데이비스가 드럼 쪽으로 다가가 "차라리 네 으로 스네어를 치는 게 어때? 그게 더 낫겠는데."라며 시비를 걸었고 이에 분을 참지 못한 믹 에버리는 그대로 하이햇을 들어 데이브 데이비스의 머리를 찍어 버렸다. 데이브 데이비스는 바로 쓰러졌으며 병원으로 실려가 16바늘을 꿰메야 했다. 믹 애버리는 사건 직후 도망쳐 근처 술집에서 "내가 사람을 죽였다"며 벌벌 떨고 있었다. 이후 믹 애버리는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레이 데이비스의 "퍼포먼스였다"(...)는 궁색한 변명과 더불어 피해자인 데이브 데이비스가 처벌을 원치 않았기에 곧 풀려났다. 이 외에도 데이비스 형제 간의 다툼을 비롯해 멤버들 간의 크고 작은 싸움이 거의 활동 내내 있었으며, 서로 치고 박고 싸우다가 눈덩이에 멍이 들어 선글라스를 끼고 공연한 적도 있었다.

당시 킹크스의 무리한 투어 일정 역시 한 원인이 되었다. 킹크스는 당대의 인기 밴드 중 하나였지만 비틀즈와 같은 거대한 공룡 밴드는 아니었는데도 매니지먼트 측에서 비틀즈 급의 밴드나 할 수 있던 거대한 규모의 투어를 잡은 것이다. 물론 매니지먼트 쪽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라서 킹크스 단독이 아닌 맨프레드 맨, 허니컴즈, 야드버즈 같은 밴드들과의 합동 투어로 기획했지만, 이들이라고 킹크스보다 더 관객 동원력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결국 투어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밴드는 거의 텅텅 빈 공연장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공연 수익으로 인해 투어 중반이 지나자 매니지먼트 측에서 밴드에게 공연료를 지급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제대로 보수를 지급받지 못한 킹크스 측은 'You Really Got Me'같은 히트곡만 10분 이상 길게 연주하고 퇴장해 버리는 무성의한 태업을 일삼았다.[3] 이러한 태업으로 인해 밴드는 결국 공연 프로모터 측에게 고소당하게 된다.

이러한 사건사고들로 밴드에 대한 여론이 점점 악화될 즈음, 또다른 큰 사건이 터진다. 킹크스는 당대 인기 쇼였던 ABC의 "Where the Action Is"에 출연할 예정이었는데, 그만 지각을 해버렸다. 이에 크게 분노한 스태프는 뒤늦게 나타난 킹크스에게 "너희가 비틀즈인줄 아느냐, 비틀즈가 성공했다고 해서 너희 같은 바가지 머리 꼬맹이들도 성공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다음번에 소련이 쳐들어오면 구해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내가 경위서를 작성하면 너네들은 다시는 미국에서 활동 못할 것이다. 미국이 얼마나 강력한지 똑똑히 보여주겠다."등의 폭언을 날렸고, 이에 레이 데이비스는 말 대신 레프트 으로 대답했다(...). 이는 곧 난투극으로 번졌고, 밴드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미국 음악가 조합에서는 킹크스에게 미국 공연 허가를 내리는 것을 거부했으며, 킹크스는 4년 간 미국 시장을 잃게 된다.

이러한 당시 킹크스의 무법자적인 행보는 당대 음악 신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으며, 지금 일어났어도 논란이 될 만한 사건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현대에 일어났다면 대중의 비난과 가십거리로 소비되고 말겠지만 당시는 1960년대 중반이었다. 천하의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도 정장을 차려입고 예의바른 척하던 시절에 킹크스의 거친 행보는 당시 보수적이었던 미국 대중들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후 1969년 4월 킹크스는 다시 미국 음악가 조합에게 미국 공연 허가를 받게 되지만 이미 시대는 크게 변화해 있었다. 레이 데이비스는 이에 대해 "우리가 돌아왔을 때에 미국은 이미 우드스톡 시대였고 킹크스는 거의 잊혀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킹크스는 다시금 미국에서 어느 정도 히트하긴 했지만 초창기의 성공가도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음악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만약 킹크스가 미국 공연 금지를 받지 않고 꾸준히 활동했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떡밥이 돌기도 한다.

2.3. 음악적 변화기[편집]


한편 레이 데이비스는 점차 음악적으로 원숙해져가며 기존의 셸 타미 주도의 'Maximum R&B'식 노래에서 한계를 느꼈다. 레이는 이 시기를 시작으로 'Set Me Free', 'A Well Respected Man'과 같은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난 새로운 곡을 쓰기 시작했다. 1965년 7월 30일에는 인도 봄베이에서의 공연에서 영감을 받은 최초의 라가 록(Raga Rock) 곡 'See My Friends'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는 비틀즈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보다 몇 개월 더 빠른 것이었다. 1965년 후반이 되자 킹크스의 스타일 변화는 점차 뚜렷해져 갔다. 같은 해 11월에 발표한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 'The Kink Kontroversy'는 그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앨범으로, 기존의 강렬한 로큰롤 곡이 몇 곡 실려 있으면서도 리듬이 아닌 선율 중심의, 심플하지 않고 섬세한 편곡이 된 새로운 스타일의 팝 록이 다수 수록되어 있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밴드의 주도권이 프로듀서 셸 타미에서 레이 데이비스에게로 넘어왔고, 음악성 역시 크게 달라지게 된다.[4]

새롭게 변신한 킹크스는 1966년의 'Face to Face'를 시작으로 음악적 전성기를 맞이한다. 'Face to Face'는 전곡이 레이 데이비스의 자작곡으로 이뤄진 첫 앨범으로, 음악적으로 큰 진화를 이룬 작품이었다. 활력있는 로큰롤 곡부터 기품 있는 바로크 팝 곡, 우울한 발라드, 라가 록 곡에 더해 다양한 스튜디오 음향 효과를 실험한 이 앨범은 또한 앨범 내의 통일성을 갖춘 첫 번째 킹크스 앨범이었다. 이는 명백히 비틀즈의 Rubber Soul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나 Rubber Soul이 사운드적으로 통일감을 이뤘다면 Face to Face는 가사로 통일감을 조성한 앨범이었다. 이 시기 레이 데이비스의 작사가로서의 재능이 본격적으로 개화했으며, 그의 세상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과 일상에 대한 관찰로 이루어진 가사는 당대 록 음악에 없었던 신선한 스타일이었다. 밝은 제목과는 다르게 풍자적이고 뒤틀린 가사를 담은 'Sunny Afternoon'이나 동생 데이브 데이비스의 와일드한 라이프스타일을 담은 'Dandy', 당시 점차 상업화되어가던 하와이를 비꼰 'Holiday in Waikiki'는 앨범의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러한 가사 때문에 'Face to Face'는 록 음악 초기 컨셉트 앨범의 원형을 제시한 앨범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킹크스의 이러한 변화에 사람들은 당황스러워했으나 결과적으로 앨범은 영국에서 그럭저럭 히트를 쳤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죽을 쑤었다.

'Face to Face'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킹크스는 더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당대 런던 하류층의 절망적인 삶을 조망한 싱글 'Dead End Street'[5]와 다리를 거니는 두 연인을 중심으로 템스 강런던 워털루 역의 정경을 우울하게 묘사한 Waterloo Sunset'은 큰 히트를 거두었고, 특히 'Waterloo Sunset'은 킹크스를 상징하는 밴드의 대표곡이 되었다.[6] 1967년 발표된 5집 'Something Else by the Kinks'는 전작에 비해 밝은 로큰롤 성향이 줄어들고 영국적인 멜로디가 있는 서정적인 곡들 위주로 짜여진 앨범이었다. 이 앨범의 작업 도중 그동안 킹크스 음반의 프로듀싱을 맡았던 셸 타미가 하차하고, 그 빈자리는 레이 데이비스가 채우게 된다. 'Something Else by the Kinks'는 영국의 뮤직홀 음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챔버 팝, 리듬 앤 블루스, 심지어 보사노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시도했고, 당시 영국 사회를 바라보는 레이 데이비스의 냉소적인 시선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이로서 여러 뮤지션이나 평론가, 프로듀서들이 이른바 킹크스 사운드(Kinks Sound)로 지칭하던 타 밴드들과 다른 킹크스만의 독창적인 사운드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앞서 나온 싱글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영국에서 상업적으로 그리 성공하지 못하며 밴드의 앞날에 암운을 드리웠다. 미국에서도 발매되었으나 역시 크게 실패했다. 한편 이 시기 레이 데이비스는 음악적 압박, 멤버들 사이의 불화, 각종 법적 문제들과 빡빡한 스케줄에 거의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 되었으며, 베이시스트 피트 콰이프는 교통사고를 내고 밴드를 잠시 이탈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등 밴드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1968년에 들어 킹크스는 일체의 공연 활동을 중단하고 스튜디오에서 새 앨범 'Village Green'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당시 레이 데이비스는 밴드가 맞닥뜨린 여러 문제들과 상업적인 히트 싱글을 요구하는 음반사 상층부와의 갈등,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 킹크스의 인기 등에 치여 살았고, 정작 본인은 런던 밖에선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도시 촌놈이었지만 혼란스러운 도시 생활에서 벗어난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전원 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레이의 심정이 반영된 'Village Green' 프로젝트는 1968년 11월 22일 'The Kinks Are the Village Green Preservation Society'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이 앨범은 영국 전원에서의 한적한 생활을 다룬 컨셉트 앨범이었으며, 곧 밴드의 최고걸작으로 불리게 된다. 음악적으로는 전작의 영국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있는 팝 록이라는 노선에 충실하며 뛰어난 멜로디와 더욱더 세련되고 섬세한 편곡, 다양한 실험을 가미하면서도 통일된 분위기로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보여줬다. 가사는 전작의 날카로운 냉소와는 달리 시골 생활에 대한 찬가와 좋았던 어린 시절과 친구들 간의 우정 등에 관한 따스하고 애수가 어린 아름다운 가사를 보여주며 레이 데이비스가 상상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교외의 삶의 미학을 그려냈다. 이 앨범은 영국과 미국 양 측 평론계에서 모두 극찬을 받았고, 평론가들과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컬트 클래식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이 앨범의 판매량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The Kinks Are the Village Green Preservation Society'는 단 한 곡의 히트 싱글도 배출하지 못하고 차트 밑바닥만을 맴돌다가 얼마 못가 광탈했다. 그나마 따로 내놓은 싱글 'Days'만이 영미권에선 여전히 망했지만 간신히 유럽에서 중박을 친 것이 이 시기 킹크스의 유일한 상업적 성과였다. 당시 베트남 전쟁68운동이 거대한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고 사이키델릭 록하드 록 같은 화려한 록 음악이 차트를 지배할 때 등장한 킹크스의 이 소박한 앨범은 당시 대중들에게는 뜬금없는 과거 회귀로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킹크스의 최고작이라 불리는 'The Kinks Are the Village Green Preservation Society'는 발매 50년이 지난 2018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판매고 10만 장을 넘길 정도로 크게 실패했지만, 이후의 영국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69년이 되자 킹크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베이시스트 피트 콰이프가 멤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밴드를 떠났으며, 안 그래도 멋대로 투어를 중지해서 열받아 있던 레코드사에서는 앨범이 실패하자 이를 계기로 밴드를 더욱 압박해 왔다. 밴드 입장에서도 미국 시장은 그렇다 쳐도 홈그라운드였던 영국 시장에서의 대실패는 충격적이었다. 같은 해 4월에는 다시 미국 공연 허가를 받으며 미국 시장이 해금되었으나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려 흥행은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레이 데이비스는 침착하게 새 베이시스트 존 달튼[7]을 영입하고 다음 앨범을 준비했다. 킹크스는 69년 1월 영국 그라나다 TV의 스페셜 TV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의뢰받은 상태였고, 레이 데이비스는 극작가 줄리안 미첼과 함께 새 앨범 'Arthur (Or the Decline and Fall of the British Empire)'를 제작한다. 런던 교외에 사는 주인공 아서 모건 가족의 삶을 그린 이 앨범은 당대 평범한 영국인 가정이 점차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한때 '대영제국'이라 불리던 영국 사회의 몰락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밴드는 기본적으로 전작의 사운드를 그대로 이어가되, 세부적인 부분을 다듬고 정교한 스토리텔링을 도입했다. 앨범은 1969년 10월 10일에 발매되었으며 전작에 이어 평론가들의 큰 호평을 받았다. 'Arthur (Or the Decline and Fall of the British Empire)'는 뛰어난 멜로디와 섬세한 편곡, 풍자적이고 뛰어난 스토리로 평론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으며 같은 해 5월에 나온 더 후Tommy와 함께 그 해 최고의 컨셉트 앨범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후의 'Tommy'가 상업적으로도 뛰어난 성과를 올린 반면 'Arthur (Or the Decline and Fall of the British Empire)'는 전작과 도긴개긴인 처참한 판매고를 올렸다. 밴드는 새 앨범 발매 이후 오랜만에 전미 투어에 나섰으나 반응은 싸늘했다. 관객은 밴드의 예상보다 더 적었고 티켓 판매 부진으로 인해 많은 공연이 취소되었다. 공개될 예정이던 TV 영화는 한때는 감독까지 선임되고 본격적인 제작 직전까지 갔으나 여러 어른의 사정들로 인해 점점 연기되다가 결국 "밴드의 인기가 너무 낮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는 그라나다 TV 고위층의 판단에 의해 제작이 무산되었다. 이는 밴드 멤버들에게 큰 실망으로 다가왔고 특히 이 프로젝트에 1년간 창작열을 쏟아부었던 레이 데이비스는 TV 영화의 무산에 크게 절망하게 된다.

3. 평가[편집]


나는 내 마음에 안 드는 킹크스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

I've never heard a Kinks song that I didn't like.

데이비드 보위


롤링 스톤스와 비견될 정도로 장수한 밴드이고, You Really Got Me[8][9]나 'Waterloo Sunset' 'Lola' 'Celluloid Heroes' 'All Day and All of the Night' 'Tired of Waiting for You' 같은 노래도 히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대접이 영 시원치 않은 편. 1996년 해체했다가 2008년 재결성됐다.

음반 중에서는 Face to Face, Something Else by the Kinks, The Kinks Are the Village Green Preservation Society, Arthur (Or The Decline and Fall of the British Empire)가 명반으로 평가 받는다.

1964년부터 4년 동안 미국 공연을 금지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10] 음악성이 확연히 변했다.

서정적인 멜로디, 서사가 있는 신랄한 가사 등 나름대로 재평가 받을 만한 구석이 있는 밴드.[11] 비틀즈는 아예 영국스러움을 넘은 음악 전체를 정의하는 아이콘이 되었고, 롤링 스톤즈가 블루스와 컨트리를 받아들이며 거칠고 끈적한 록의 표준을 완성시키고, 더 후가 컨셉 앨범과 극적인 요소를 통해 로큰롤의 예술화를 추구했다면 킹크스는 영국 포크 음악과 전통을 추구하면서 팝 멜로디를 만들어 '영국스러움'이나 '팝 멜로디', '서사가 있는 가사'를 추구하는 뮤지션들의 모범이 되었다. 엘비스 코스텔로, 더 잼(과 폴 웰러), 더 스미스, XTC, 오아시스, 블러[12], 리버틴즈가 이들의 추종자로 유명하다.

이들이 한국에서 듣보잡 취급 받는 이유는 미국에서 크게 히트하지 못한 점도 있을 것이다. 음악성이 영국적으로 변해서 영국 외에서는 서서히 잊혀진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13] 영국에서는 그래도 대접이 준수한 편이다. 여전히 비틀즈롤링 스톤즈에겐 밀리지만. 그래선지 영국에서도 부침을 반복하다가 90년대 초반엔 MCA 레코드사에서 쫓겨나는 굴욕을 당했다. 90년대 중반의 브릿팝 열풍으로 재평가 받았는데 [14]다른 브리티쉬 인베이전 밴드에 비하면 주목을 조금 늦게 받은 셈.

한국에서 정규 앨범 구하기 힘든 편이다. 베스트 앨범이 라이센스로 나왔지만 알라딘 80% 할인 행사에서도 아무도 사가지 않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그래도 뜨거운 녀석들, 다즐링 주식회사, 갓 블레스 아메리카 같은 영화에 곡이 여러 곡 수록 되면서 전의 푸대접에서는 점점 벗어나는 중. 다즐링 주식회사의 오프닝에서 흘러 나오는 This time tomorrow도 들을 만하다.

특히 웨스 앤더슨 감독이 킹크스를 좋아하며 킹크스의 노래를 영화에 굉장히 많이 삽입한다.

4. 샘플곡[편집]




초창기 대표곡.
You Really Got Me, All Day and All of The Night[15]. 밴드 초창기의 거친 개러지 록의 특징이 도드라진다.


음악성 변화 이후의 대표곡.
Waterloo Sunset. 사운드가 확연하게 부드러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5. 디스코그래피[편집]






6. 여담[편집]


밴드의 주축인 레이와 데이브 데이비스 형제는 90년대의 갤러거 형제 저리가라 할 정도로 굉장히 사이가 안좋았다고 한다. 레이 데이비스도 한 성격 하는 편이지만 특히 동생인 리드 기타리스트 데이브 데이비스가 여성팬들을 몰고 다닌 당대의 꽃미남 비주얼에도 불구하고 곱상한 용모와 달리 사생활이 거친 편인데다가 밴드 멤버고 형이고 가리지 않고 욕과 주먹이 나가는 싸움닭(...)으로 유명했다.

리더 레이 데이비스는 2017년에 기사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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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에서 자음이 3개 올 때 중간 자음이 탈락되는 일은 흔하다. 전부 발음하는 게 표준이긴 하지만.[2] 이에 대한 부작용(?)인지 현재 이 곡은 킹크스 원곡보다 밴 헤일런 커버 곡이 조금 더 유명하다.[3] 당시에는 1~2시간이 넘어가는 긴 콘서트의 개념이 없었고 대부분의 로큰롤 뮤지션들은 30분 정도로 짧게 공연하는 게 정상이었다. 비틀즈부도칸이나 셰이 스타디움 공연도 30분 내외로 끝났다. 물론 그렇다고 킹크스의 행동이 태업이 아닌 건 아니지만[4] 셸 타미는 자신의 이 'Maximum R&B' 아이디어를 포기하지 않았고, 런던 출신의 밴드 '하이 넘버스'와 계약한 뒤 아예 'Maximum R&B'를 표어로 삼고 본격적으로 이 노선을 밀어 붙이게 된다. 이후 하이 넘버스는 더 후로 이름을 바꾸고 전설적인 밴드가 된다.[5] 더 클래시의 곡 'London Calling'은 이 곡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곡이다.[6] 2012 런던 올림픽 폐회식에서 레이 데이비스가 등장해 부른 곡도 'Waterloo Sunset'이었다.[7] 전 베이시스트 피트 콰이프가 교통사고로 잠시 밴드에서 떠났을 당시 임시 베이시스트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8] 이 노래의 기타 리프는 롤링 스톤즈(I Can't Get No) Satisfaction이나 딥 퍼플Smoke on the Water와 함께 록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타 리프로 꼽힌다. 은근히 이 리프를 따라한 노래가 종종 나오는 일이 있다.[9] 후일 까마득한 후배 밴드인 밴 헤일런이 무려 1,200만장이나 팔린 전설적인 데뷔 앨범 Van Halen에 이 곡의 커버 버전을 실은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라이트한 리스너들은 이 곡을 밴 헤일런의 오리지널 곡으로 아는 경우가 왕왕 있다.[10] 자세한 이유는 아직도 불명. 짐작가는 이유로 투어중 무대 위에서 두 멤버 간 큰 싸움이 났던 것이 원인으로 보고 있다.[11] 음악평론 사이트인 mojo에서는 가장 저평가된 밴드로 킹크스를 뽑았다.[12] 실제로 데이먼 알반이 존경하는 뮤지션 중 킹크스의 레이 데이비스가 포함되어 있다.[13] 다만 1980년대 짧게나마 미국에서도 주목받아 차트 성적이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4년 정도여서 문제지.[14] 특히 블러가 이밴드에 영향을 많이 받은 편.[15] 이 곡 역시 메탈리카 같은 여러 밴드들이 커버한 적이 있는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