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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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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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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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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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할린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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슘슈 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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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및 결과)는 개별 문서 확인




타라와 전투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arawa.jpg
[1]
날짜
1943년 11월 20일 ~ 11월 23일
작전명
Operation Galvanic(충격 작전)
장소



길버트 제도, 타라와 환초 베티오 섬
교전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display: none; display: 일본 제국"
행정구
]]

지휘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줄리안 C.스미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해리 W. 힐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홀랜드 스미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데이비드 M. 샤우프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시바자키 케이지[2]
결과
미군의 승리
영향
미군의 중부 태평양 전역 첫 상륙전, 그러나 막대한 희생자가 나옴.
병력
35,000명
해병대 18,000명
5,500명
전차14대
피해규모
1,696명 전사
2,101명 부상
호위항공모함 1척 침몰
3000여명 이상 전사
700명 포로
한국인 강제징용자 1000여명 사망#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마킨 전투
5. 이후 이야기



1. 개요[편집]


Battle of Tarawa(영어)
タラワの戦い(일본어)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 중 1943년 11월 20일~23일까지 타라와 환초에서 진행된 미군의 상륙작전. 그리고 양국의 해병대(일본 해군 육전대)간의 전투.

일본 본토로의 진공을 위한 길닦기 작업의 일환으로 일본군이 점령한 주요 환초에 대한 탈취 작전 중에 하나였는데, 타라와 전투만큼은 미국에서는 비극이란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엄청난 사상자가 난 전투였기 때문에 미국 역사를 비롯하여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 역사서 등에서 비중 있게 다룬다.

거의 모든 전투는 타라와 환초 베티오 섬에서 벌어졌지만 그냥 이 지역을 대표하는 환초의 이름을 따서 타라와 전투라 부른다.


2. 배경[편집]


1943년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본격적인 반격 작전을 구상 중이던 미군은 진격 방향을 놓고 의견 통일이 되지 않고 있었는데, 일단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던 미국 정치쪽의 고관대작들은 태평양의 주요 환초들을 점령한 다음 대만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방안을 강력하게 밀고 있었으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일선 사령관들은 배후에 적을 두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지역을 확보한 다음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주장하고 있었다.[3] 결국 수뇌부의 의견 통일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고 어쨌든 어느 방향으로 진격을 하건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는 반드시 점령하고 넘어가야 하는 곳이었고, 일본군도 주요 요소에 병력과 물자를 파견하고 토치카와 비행장을 건설하는 등 방어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다 보니 일단은 점령해야 되는 곳은 먼저 하고, 정치계와 군부 수뇌부 사이간의 의견 충돌은 일단은 잠시 멈춘 뒤 나중에 보기로 합의한다.

이에 따라 미 해군은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 부타리타리 환초[4] 등지에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파견하여 대대적인 공습을 가하여 기지와 항공병력을 무력화시켰고 이후 미 육군 27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상륙전이 시작되어 점령에 들어갔고 이어서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 환초에 대한 상륙작전에 들어갔다. 타라와 환초는 훗날 마리아나 제도로의 진격을 위한 해군 함대의 중간 거점이자 육상에서 운용 가능한 중폭격기들의 항공기지로 활용될 계획이었다.

한편 일본군 역시 가만히만 있지 않았다. 일본군의 수뇌부가 전쟁 도중에 갈수록 이해불가능한 행위로 대다수의 병력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소모하는 등 최악의 실책들을 저지르긴 했지만, 적어도 길버트 제도의 전략적 가치를 모를 정도로 무능하지 않았다. 일단 일본 본토에서 스가이 다케오 중좌의 정예부대인 제 7 특별 육전대 병력과 시바자키 소장이 직접 지휘하던 병력, 그리고 타라와 비행장을 운영하는 제 755항공대 기지 지상요원 30명을 모두 합쳐서 합계 2,601명 그리고 95식 경전차 하고를 배치하였으며, 방어 진지 구축을 위해 해군 제 111 설영대 소속 건설 인력이 1,247명, 그리고 제 4함대 설영 파견대가 970명, 합계 2,217명 가량의 노동자들을 투입하였다. 그리고 해안 방어를 위한 해안포들을 설치하였고, 러일전쟁 당시 노획한 8인치 대포까지 가져와서 설치하였다. 여기에 500개에 달하는 견고한 벙커토치카를 설치하였으며, 섬의 모든 거점과 연결된 참호를 구축하였다. 거기다 초호에서 육지로 이어지는 얕은 지대에는 통나무나 쇠로 된 꼬챙이들을 박아놓아 앰트랙과 같은 상륙용 주정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방해 작업까지 해둔 상황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철저한 대비에 비해 미 해군의 경우에는 전함의 함포와 항공모함 함재기공습으로 일본군을 싹 쓸어 버리고 해병대 병력을 투입하여 잔군들을 정리하면 끝이라는 다소 안일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여담으로 타라와에 파견된 1,300명의 노동자 중에는 강제로 징집된 조선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타임라이프 시리즈의 <남태평양 전투>에 따르면 전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도 1천명 가량 있었고 이들은 모두 옥쇄했다.

그리고 시바자키 소장은 틈틈히 조선인 노무자들에게 군사훈련도 병행하여 전투시에 보조전력으로 투입될 수 있게 준비하였고 실제 이후 벌어지는 전투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이 일본군과 함께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들중 전사자들은 이후 야스쿠니 신사에 강제 합사되는 또 다른 비극이 발생하게된다.

3. 경과[편집]


미 해군은 2척의 정규항공모함, 1척의 경항공모함, 5척의 호위항공모함, 3척의 전함, 8척의 순양함, 14척의 구축함, 17척의 수송선에 미 해병 2사단을 대동하고 타라와 환초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선 수상함들이 포문을 열고 1시간 반 가량 섬 전역에 포격을 가하였고,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날아다니며 일본군이 구축한 방어 시설에 폭격을 가하였다. 이 정도 했으면 틀어박힌 일본군은 전멸했을 거고 방어 시설은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상륙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일이 초장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상륙 작전을 추진한 날짜가 조수 간만의 차가 최소가 되는 시기인 조금[5]이었음에도 수심이 전혀 깊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미 해군의 정보 부족 때문이었는데, 본디 베티오 섬 지역은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조금 시에도 수심이 상당히 낮아지는 날이 하루에서 이틀 정도 있었다. 그런데 미군 측에서 이걸 모르고 하필 상륙하는 날을 그날로 잡아 버렸다.

한편 미 해군의 포격이 중지되고 해병들이 상륙을 준비하자 깊게 판 방공호 속에 숨어 있던 일본군은 즉시 빠져나와 반격 준비를 하였다. 미 해군의 포격으로 대부분의 화포가 상실되었지만 운 좋게 살아 남은 대포들을 즉시 확보하여 해변을 향해 오고 있는 해병들에게 정확한 사격으로 환영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심도 예상보다 낮은 상황에 일본군이 설치한 각종 장애물에 걸려 앰트랙 및 상륙주정들이 퍼지기 시작했고 소수의 앰트랙만이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결국 최초로 상륙한 부대는 곳곳에 설치된 통나무와 장애물로 인해 소수만이 살아 남았을 정도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전차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이 설치한 장애물을 밀어 버리려 했으나, 일부 전차는 상륙주정과 함께 바다속으로 잠기고 간신히 상륙한 전차들도 적 75mm 대공포 사격에 피격되고 보병 지원없이 단독으로 싸우다가 파괴되고 아군 항공기에 오폭 당하는 등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전투를 지속해야 했다.

이런저런 악조건 속에서 미군은 정오 무렵 해변을 점령하였고 전열을 가다듬은 후, 활주로를 비롯한 주요 거점 장악을 위해 병력을 전진시키기 시작했다. 이 무렵 몰래 숨어 있던 일본군이 격파된 채 여기저기 퍼져 있던 앰트랙에 잠입하여 앰트랙에 부착된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으로 미 해병대 후방에서 기관총탄을 갈겨대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발생했고, 병력을 재규합한 해병대가 반격을 가하여 앰트랙을 다시 탈환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륙 이틀 차에 섬 서쪽 끝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은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으나, 정작 나머지 지역에서 진격한 미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단순히 잔병들이 벌이는 최후의 발악이 아니라 토치카와 벙커, 참호를 이용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게다가 밤 사이 일본군이 몰래 주요 거점에 중기관총을 설치하고 마구 긁어대는 바람에 해변과도 떨어지게 되었고, 상륙한 해병대끼리도 서로 떨어져 고립되는 사태를 빚기도 하였다. 결국 계속되는 고전으로 미 지상군 지휘부는 해안가에서 지원을 위해 대기 중이던 해군 함대에 무전을 넣어 항공모함의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항공모함에 대기 중인 함재기가 발진하고 전함의 주포가 불을 뿜으면서 지상군이 요청한 장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중기관총들을 급히 수배하여 일본군이 설치한 기관총 포대와 맞불을 놓은 것으로 응수했다. 그 결과 일본군이 방어선을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일부 진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일본군 일부가 인접한 바리키리 섬에서 베티오 섬으로 지원 차 접근하고 있었으나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기다리고 있던 해병대가 항공 지원과 전차, 곡사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섬에 상륙하려는 순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리고 이날 타라와 환초 방어를 지휘하던 시바자키 케이지[6] 소장이 전사하였다. 정확히는 시바자키 소장이 진두지휘하면서 일부 병력들에게 부상자들을 방공호로 옮기도록 명령을 내리고 본인도 자신이 명령을 내린 부하들과 함께 부상자들을 옮기다가 포탄에 맞았다.

비록 일본군 사령관이 전사하긴 했어도 일본군이 구축한 방어선이 건재하고, 워낙 맹렬히 저항하고 있던 까닭에 전투가 끝나진 않았고, 중장비와 탱크를 동원해서 공세를 퍼부으면서 일본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결국 수적으로 열세였고 미군의 공세에 밀린 일본군은 차츰차츰 물러나기 시작했고 미군은 그 뒤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몇 차례 미 지상군에 반격을 가하기도 하였지만 번번히 미군의 포격에 밀려 좌절되었고 몇 차례 반자이 어택도 감행하지만 당연히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의 전투는 미군이 진격하고 그럼 미리 구축된 토치카나 벙커에서 일본군이 맹렬히 저항하고 이를 뚫기 위해 군함이나 곡사포를 가져와서 날려 버리는 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그렇게 4일만에 베티오 섬에서 맹렬히 저항 중이던 일본군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후 일부 병력이 나머지 섬들을 싹 정리하면서 타라와 환초에서의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5,000명 중에서 겨우 145명의 생존자(17명의 일본 군인, 128명의 조선인 노동자)만 남긴 채 전멸하였다. 그러나 미국 역시 지상군에서 3,3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4. 마킨 전투 [편집]


타라와 전투와 마킨 전투는 미 해군의 Galvanic 작전의 일환으로 실시된 지상전투이다. 제5상륙군단(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 소장) 예하에 2해병사단(사단장 줄리안 스미스 해병 소장)과 27보병사단(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이 각각 타라와 전투(1943.11.20일~23일)와 마킨 전투(1943.11.20일~23일)에 참여했다. 일본군의 주력은 타라와에 있었기 때문에 완편된 현역 부대인 2해병사단이 타라와를 맡고, 마킨 섬에는 소수의 일본군만 있었기 때문에 감편된 주방위군 부대인 27보병사단이 마킨섬을 맡았다.

타라와에서는 18,000명이 4,800명의 일본군을 잡으면 됐고, 마킨에서는 6500명이 800명을 잡으면 됐다. 병력 비율상 타라와는 26%의 적을 잡는 것이고, 마킨은 12%의 적을 잡는 것이었다. 5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 소장은 마킨섬 전투가 하루면 끝날 것으로 예상을 하고 마킨섬 전투를 참관한 후 27보병사단과 함께 타라와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배위에서 기다리다 보니 전투가 아주 지지부진 했다. 평소 성미가 급해 울부짖는 미친놈(Howling Mad) 스미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스미스 군단장은 결국 호통을 치기 위해 일부러 배에서 내려와 27사단장을 찾았다. 사단사령부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어서 전진이 늦어진다는 말을 듣고 스미스 군단장은 직접 지프차를 타고 전방으로 향한다. 전방을 둘러본 후 그는 격전지가 마치 "일요일 월스트리트처럼 조용하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기본적으로 이런 갑갑증은 미 육군과 해병대의 전술적 개념 차이에서 오는 것이었는데, 미 육군은 평소 인명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신중히 전진하며, 배후를 위협하는 잔존병력을 완전히 소탕 후 전진하는 전법을 교육받았고, 미 해병대는 교리상 육군 기병대나 기갑부대처럼 피해가 크더라도 어떻게든 일단 뜷고 나가면 알아서 따라온다는 닥돌 전법을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상륙작전에서는 해안교두보에서 길이 막히면 모든 일정이 늘어지고 공격 받아 피해을 입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안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공수작전에서도 마찬가지로 후발대를 위해 최대한 빨리 랜딩존에서 벗어나야 한다.

결국 마킨섬에서도 해병대의 방식이 옳다는 것이 며칠 뒤 큰 피해를 치른 뒤 증명되었다. 전투의 마지막 날 해안에 있던 미 해군 호위항모 USS 리스컴 베이 함이 일본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한 것이다.[7] 이 항공모함의 침몰로 마킨섬 육상 전투 사망자의 10배나 되는 병력이 바다에서 전사했다. 물론, 항공모함의 침몰은 호위 구축함들의 배치에 구멍이 뚫려 어뢰 공격을 받은 것이었지만 전투를 빨리 끝냈더라면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항공모함과 항공기의 장비 손실은 물론이고 인력손실도 휠씬 컸기 때문에 차라리 상륙병력이 큰 인명피해를 감수하고라도 닥돌을 했다면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투 결과 마킨 섬의 육군은 전사율 1.0% 전사상률 4.4%을 기록했고, 타라와의 해병대는 전사율 5.1% 전사상률 17.3%를 기록했다.


5. 이후 이야기[편집]


이 전투는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서 일본군의 생존자 비율이 0.6%로 가장 낮았던 전투였다. 그 잔혹했다는 이오지마가 생존률 1.2%를 기록했고, 과달카날이 2.8%, 오키나와가 12%를 기록하였다는 점을 보면 일본군은 정말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셈.

미군 역시 피해가 상당했다. 이기기는 했지만 상륙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자 미군 수뇌부는 할 말을 잃었으며 미국 본토 역시 들끓었다. 언론에서는 이 작전을 주도한 미군 수뇌부와 태평양 함대 사령부를 씹어대기 시작했고, 국민들은 물론 정치가들까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라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호되게 데인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상륙작전 절차를 재검토하였다. 특히 미군을 가장 고전하게 만들었던 것이 일본군이 건축한 콘크리트 토치카 및 벙커란 점에 주목하고 하와이 근처에 이를 완전히 똑같이 재현한 시설을 구축하고 다방면으로 공격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를 통해 타라와 전투 수준의 상륙준비 포격을 해봤자 아무 성과가 없음을 파악하게 되었고, 토치카와 벙커를 파괴하려면 전함 주포에 철갑탄을 장전해서 정확하게 명중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따라 이후 전투에서는 상륙 준비 사격의 양과 기간을 크게 늘렸는데, 상륙을 시작하기 며칠 전부터 전함과 순양함을 동원하여 철갑탄과 고폭탄으로 섬을 아주 콩가루로 만들어놓고, 구축함의 근접사격과 항공기 공습으로 나머지 잔챙이를 정리한 다음 지상병력이 들어가는 순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지원 사격 방식도 기존의 무차별사격에서 사격 후 목표의 파괴 정도를 확인하고 재차 사격해서 확실하게 끝장낸 후 다음 표적으로 이행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태평양 방면 전선에서 미 해군의 상륙전 FM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러한 방향성 변경이 표준형 전함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준 것은 아니었다. 이미 타라와 전투에서 고속 전함들은 전부 항모 전단에 배속되어 작전하고 있었고[8], 표준형 전함들은 상륙시의 화력 지원을 위한 함대[9]에 배속되어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표준형 전함들에게 주어진건 기회라기보다는 더 빡세게 하라는 갈굼(...)에 가까웠다.

그리고 상륙장갑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비록 초기의 앰트랙들이 빈약한 장갑으로 인해 개박살난 경우가 많지만, 그런 앰트랙마저 없었다면 상륙 자체가 불가능했으리라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장 산호초 등의 장애물에 걸려서 기존의 상륙주정은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상륙주정만으로 대부분 상륙한 제2파나 제3파 상륙부대도 제1파 상륙부대만큼 큰 손해를 입게 된 것이다. 안 그래도 무거운 짐을 들고 최소한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을 뚫고 심하면 1km 이상 떨어진 해안에 상륙하는 것 자체가 엿같은 일인데,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까지 가해지면 그야말로 답이 없었다. 그래서 앰트랙의 장갑과 화력이 강화되고, 수량도 크게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상륙전 시 통신 상태가 불량해서 근접 지원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전황 보고가 힘들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지휘함으로 불리는 통신과 지휘만 담당하는 군함을 새로 만들게 되었으며, 근접항공지원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해당 임무에 맞는 훈련을 이수한 전담 부대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또한 상륙하기 전에 상륙 지역을 실제로 정찰하고 장애물을 폭파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므로 UDT 같은 특수부대가 창설되었다.

전략에도 다소 변화가 생겨서 거점들을 일일이 공략하는 대신 필요한 곳만 골라서 점령하고 거점 마련을 빨리하여 주변을 제압하는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이는 솔로몬 전역의 미군이 하던 방식과도 같다. 다만 지리적으로 섬들이 적었던 중부 태평양의 특성상 우회할 여지는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이 전투에 이어진 마셜제도 침공과 마리아나 제도 침공에서도 상당한 격전을 피할 수 없었지만 타라와 전투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목표 지역 일대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마셜제도와 마리아나 제도 역시 일본군이 많은 섬들을 방어거점으로 만들었으나, 미군은 필요한 곳만 점령해 버리고 남은 곳은 그냥 고립시켜 버렸다. 일본함대의 진주만인 트럭환초를 비롯한 캐롤라인 제도 일대는 아예 폭격만으로 무력화 시켜버리고는 지나쳐 버렸다. 때문에 이들 지역은 종전때까지도 일본군 점령지로 남아 있었지만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또한, 미군의 전략 변경과 신속한 진격은 전쟁 후반기 일본군의 방어 전략을 뒤흔들고 말았다.

한편, 마킨섬 전투에서의 에피소드는 전쟁 내내 지속된 미 육군과 해병대의 유대관계가 심각하게 붕괴된 촉매제가 되었다. 서로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던 육군과 해병대는 이 전투를 시작으로 태평양 지역에서 계속 갈등을 빚었다. 특히, 마킨섬 전투에서 지지부진한 진격으로 해군의 대량 사상자를 유발시켰다고 여긴 해군과 해병대 사이에서 육군 27사단은 무능한 놈들로 낙인이 찍혔다. 7개월 뒤 사이판 전투에서도 27사단의 진격속도는 다른 곳에 비해 느렸고, 이를 참다 못한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대 중장이 직접 배에서 내려 27보병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해임시키는 미군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벌이기도 했다(…)[10]

미군은 이러한 지옥도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지만 현실은 시궁창. 일본군이 더 이상 우회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던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타라와보다 더 심한 지옥도를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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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괴된 일본군의 진지와 상륙하는 해병대[2] 해군 소장, 사후 중장 추서[3] 맥아더의 주장인 '배후에 적'은 사실 핑계 거리이고, 자신이 필리핀에 돌아가겠다는 약속도 있고 필리핀에서의 여러가지 정치적 영향력을 감안하여 내린 결정이란 설도 있다.[4] 마킨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마킨은 부타리타리 환초에 있던 섬이다.[5] 조수 간만의 차가 최소가 되는 만큼 썰물 때에도 물이 그리 많이 빠지지 않는다.[6] 柴崎恵次 [7] 호위항모부대 지휘관을 비롯하여 687명이 전사했고, 전사자 중에는 진주만 공습에서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흑인 수병 사상 최초로 훈장을 받은 도리스 밀러 해군상병(PO3)도 끼어있다.[8]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워싱턴,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 다코타가 에식스급 항공모함 요크타운, 렉싱턴 및 경항모 1척과 작전중이었고,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노스 캐롤라이나와 사우스 다코타급 전함 인디애나, 메사츄세츠는 엔터프라이즈와 경항모 2척을 에스코트하고 있었다.[9]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펜실베이니아, 뉴멕시코급 전함 뉴 멕시코, 미시시피, 아이다호[10] 단, 이 경우는 해병대 스미스 장군의 잘못도 크다. 통합군 지휘관으로서 양군의 교리 차이가 있음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고 육군 부대를 해병사단의 중간에 배치했고 27사단이 일본군의 주방어선을 담당하느라 진격이 멈춘 것인데,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 성질에 못이겨 해임한 것. 이 사건으로 니미츠와 킹 제독은 스미스 해병대 중장이 통합군 지휘관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사이판 전투가 끝난 직후에 그를 태평양 함대 해병대 사령관으로 영전시키는 형식으로 제5상륙군단장에서 해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