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츠나미 카즈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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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bgcolor=#003570> 감독 || 73 타츠나미 카즈요시 ||
||<bgcolor=#003570> 1군 || 88 카타오카 아츠시(수석코치) · 76 오츠카 아키노리(투수코치) · 83 야마이 다이스케(투수코치)
75 와다 카즈히로(타격코치) · 86 우에다 요시노리(타격코치) · 80 오다 코헤이(포수코치)
71 도노우에 나오미치(내야수비·주루코치) · 79 오오니시 타카유키(외야수비·주루코치) ||
||<bgcolor=#003570> 2군 || 89 이노우에 카즈키(2군감독) · 77 오치아이 에이지(투수코치 겸 육성코치) · 82 아사오 타쿠야(투수코치)
78 모리노 마사히코(타격코치) · 84 후쿠다 노부마사(타격코치) · 72 오노 쇼타(포수코치)
81 모리코시 유토(내야수비·주루코치) · 87 나카무라 유타카(외야수비·주루코치) · 85 와타나베 히로유키(육성코치) ||
||<-2><bgcolor=#003595,#003595>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외야수육성선수 ||
||<bgcolor=#003570><:><-3>틀:주니치 드래곤즈로 돌아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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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츠나미 카즈요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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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츠나미 카즈요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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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7주니치.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7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우수 신인
아라이 유키오
(야쿠르트 스왈로즈)

타츠나미 카즈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토마시노 켄지
(야쿠르트 스왈로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타츠나미 카즈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4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스즈키 켄
(야쿠르트 스왈로즈)

타츠나미 카즈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이마오카 마코토
(한신 타이거스)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히라타 카츠오
(한신 타이거스)

타츠나미 카즈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카와이 마사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5~199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와다 유타카
(한신 타이거스)

타츠나미 카즈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이와무라 아키노리
(야쿠르트 스왈로즈)

타츠나미 카즈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이와무라 아키노리
(야쿠르트 스왈로즈)

파일:NPB 로고.svg 일본프로야구 보유 기록
통산 최다 2루타 (487개)
최다 끝내기 만루홈런 (2개)
최다 포지션 골든글러브 수상 (유격수, 2루수, 3루수 3개 부문)



타츠나미 카즈요시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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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3번}}}
히라노 켄
(1983~1987)

타츠나미 카즈요시
(1988~2009)


요시카와 다이키
(2011~2014)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등번호 81번
아키야마 코지
(2012)

타츠나미 카즈요시
(2013)


타테야마 요시노리
(2017~2021)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73번}}}
쿠리하라 켄타
(2020~2021)

타츠나미 카즈요시
(2022~)


현역




주니치 드래곤즈 No.73


타츠나미 카즈요시
立浪和義 | Tatsunami Kazuyoshi

출생
1969년 8월 19일 (54세)
오사카부 스이타시[1]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학력
PL학원고등학교 (오사카)
신체
173cm, 70kg, A형
투타
우투좌타
포지션
2루수, 3루수, 유격수, 좌익수
프로입단
1987년 드래프트 1라운드 (주니치)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1988~2009)
지도자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타격코치 (2008~2009)[2]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코치 (2013)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2022~)

1. 개요
2. 선수 생활
3. 은퇴 이후
4.1. 2022년
4.2. 2023년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주니치 드래곤즈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로 줄곧 주니치에서만 선수생활을 했다. 별명은 '미스터 드래곤즈'[3]. NPB 통산 최다 2루타 기록(487개) 보유자이기도 하다.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 이병규가 이 팀에 진출했을 때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


2. 선수 생활[편집]


키요하라 카즈히로, 쿠와타 마스미 등을 배출한 야구명문 PL학원고등학교 출신으로 2학년 때 주전 유격수로써 모교 춘계 코시엔 진출, 3학년 때인 1987년에는 주장으로써 모교의 춘하계 코시엔 연패에 공헌하였으며 이 활약으로 프로의 주목을 받으면서 같은 해 드래프트에서 난카이 호크스, 주니치 드래곤즈의 1위 지명을 받았고 경합 끝에 주니치가 교섭권을 획득하면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의 에피소드로, 본래 타츠나미는 고향팀인 난카이 호크스 입단을 희망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센트럴리그-퍼시픽리그 간 극심한 인기 격차나 오 사다하루에 대한 동경 때문에 가능하다면 센트럴리그에서도 뛰고 싶다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었는데, 주니치가 본래 1위로 지명할려고 했던 게이오기주쿠대학의 투수 스즈키 테츠서울 올림픽 출장을 위해 사회인야구 진출을 선언하면서[4] 드래프트 이틀 전에 급히 타츠나미 지명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타츠나미는 별똥별을 보면서 주니치 입단을 기원한 끝에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5]

주니치에 입단한 타츠나미는 1년차 시즌인 1988년부터 이전의 주전 유격수이자 지옥같은 수비를 선보였던 우노 마사루2루수로 밀어내며 유격수 자리를 차지했고, 타격에서는 타율 .223/OPS .626 4홈런 18타점 22도루로 그닥 돋보이진 못했지만 고졸신인으로썬 훌륭한 주루, 수비와 더불어 주니치를 6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그 해 리그 신인왕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화려한 데뷔 시즌을 보냈다. 이 골든글러브 수상은 고졸 신인 선수로써는 사상 최초 기록이기도 했다.

다음 해인 1990년에는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30경기 출장에 그치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으나, 3년차 시즌인 1990년 이후부터는 2005년까지 주니치 내야 중 어느 한 자리의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1992년에는 2루수로 전향하였고, 1993년 당시 2루수로서는 연속 무실책 기록을 작성하였다.[6] 이후 2000년대에는 3루수로 전향하였으며, 말년에는 좌익수로 출장하기도 하는 등 어느 포지션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선수 시절에는 유격수(1988), 2루수(95,96,97), 3루수(2003) 부문에서 모두 골든글러브를 차지한 이력이 있는 수비의 달인으로 평가받았다. 단 세이버메트릭스적인 분석에 의하면 타츠나미의 수비 지표는 주축 내야수로서는 상당히 좋지 못했으며, 특히 수비범위 관련 지표가 매우 낮아 현재에 와서는 과거만큼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출처출처2 즉, 자신이 잡을 수 있는 범위의 볼은 확실하게 처리하지만, 조금이라도 힘들 것 같다면 나머지는 흘려보냈다는 것.[7] 당시에도 타츠나미의 수비에 대한 호평은 포구, 풋워크, 송구 안정성 등 '기술적 측면'에 집중된 경향이 있었다. 냉정히 말해 골든글러브도 받을 정도로 수비에서 평가가 나쁘지 않은 선수가 한 포지션을 지키지 못하고 점점 수비 난이도가 낮은 포지션으로 옮겨갔단 것은 당시 현장에서도 타츠나미의 수비범위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게 한다.[8]

타격에서는 1990년부터 2005년까지 16년 연속으로 세자리수 안타를 기록할 만큼 꾸준한 모습이 강점이었다. 또한 독보적인 2루타 생산능력과 더불어 매년 두 자릿수 안팎의 홈런을 때려낼 만큼 일발장타력도 보유한 타자였다.

2003년에는 33세의 나이에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으며 이듬해인 2004년에는 타율 .308, 5홈런 70타점의 성적으로 3루수 부문 베스트나인에 올랐다.[9] 거기다 고졸로 데뷔했기 때문에 워낙 빠른 페이스라 통산 3000안타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지만, 2006년 이후 급격히 찾아온 노쇠화로 인해 기량이 하락하며 나카무라 노리히로, 모리노 마사히코 등에 의해 주전 자리에서 밀려난다. 말년에는 대타 요원으로 출장하다가 2007년에 선수 시절의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하는 기쁨을 누렸고, 2009년 40세를 끝으로 은퇴하였다.


3.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에는 현장 코칭스태프로 일하지 않고 방송 해설위원을 맡았다. 해설위원을 맡던 도중 2013 WBC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코치로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프로 코치 경험을 쌓게 된다.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상징성 등을 감안할 때 다카기 모리미치의 뒤를 이을 차기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감 1순위로 점쳐졌으나, 오치아이 히로미츠 전 감독이 GM으로 복귀한 뒤 포수 다니시게 모토노부를 선수 겸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일단 몇 년간은 해설자로 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 2016시즌 도중에 다니시게의 사임사실상 경질으로 공석이 된 2016년 오프시즌에도 다시 한번 프랜차이즈 출신 타츠나미를 감독으로 밀자는 이야기가 주니치 팬들에게서 나왔다. 반면 대부분의 언론은 주니치에서 2년 뛴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를 후임 감독으로 예상하면서 감독 취임이 또 한번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오가사와라는 아니었지만 선수시절 코치인 모리 시게카즈에게 감독직이 넘어갔다. 모리 감독 사임 이후에도 후보군으로 언급되었지만 결국 다시 주니치 출신인 요다 츠요시에게 자리가 넘어가면서 무산되었다. 저 언젠가는 감독할 수 있겠죠....?

2018년 7월에는 주니치 시절 팀 동료이자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를 맡고 있는 오치아이 에이지를 격려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왔고 2019년에는 기자단 투표로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인 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

결국 2021시즌, 4456555를 탈출한 지 1시즌만에 다시 한번 B클래스에 그친 요다 츠요시 감독이 사임의사를 밝히자 비로소 타츠나미가 2021년 시즌 종료 후 1군 감독으로 취임하는 게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일본 내 여러 언론들은 '타츠나미 신감독 체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사실상 타츠나미의 취임을 기정사실화한 상황.


4.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편집]


파일:타동님.webp
취임식에서

4.1. 2022년[편집]


마침내 10월 29일. 타츠나미가 공식적으로 주니치의 감독직 제의를 수락하면서 감독 취임이 확정되었다. 취임하자마자 선수단에 장발, 염색, 수염금지령을 내렸으며, 신죠 츠요시 닛폰햄 감독과 좋지 못한 의미로 비교되었다.[10] #

스프링캠프에서도 기강을 확실하게 잡기위해 훈련 도중 잡담 금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조성 또한 금지시키며 진지하게 캠프에 임할 것을 요구했다.

캠프 도중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으며 고생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요구한대로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스프링캠프를 마무리했다. 시즌 구상 또한 캠프 기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면서 구단의 오래 묵은 숙제이자 현재진행형인 세대교체에 박차를 가하고 취약 포지션인 2루[11]와 코너 외야[12]는 백지화를 선언하며 무한 경쟁체제를 통해 적임자를 찾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무한히 바뀌는 건 네오 아키라의 포지션이었다

3월 27일 도쿄돔 요미우리 전에서 극적으로 감독 데뷔 첫 승을 얻어냈다.

시즌 초반에는 의외로 터지는 홈런포에 더해 한신의 부진이 겹쳐서 순위싸움에서 선방 중이었다. 감독 본인도 요코하마 원정에서 실책성 플레이를 저지른 교다 요타를 경기 도중에 빼 버리고 바로 2군으로 보내버리는 등[13] 팀 분위기와 기강을 다잡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5월 중후반부터 팀이 부진에 빠졌다. 아무도 이해를 못하는 나카무라 노리히로 1군 타격코치의 2군행[14]과 더불어 팀 타격이 다시 2021년 수준으로 나락으로 빠졌고, 그 사이에 5할을 넘어가던 성적도 어느새 적자가 되어 교류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교류전에서 7승 11패로 별 재미를 못 보고 무너져내렸고, 교류전에서 정신 차리고 대박을 친 한신[15]과 본전치기에 성공한 요코하마[16]에게 추월당하면서 교류전을 끝으로 센트럴리그 최하위에 등극했다. 잠깐 요코하마를 최하위로 밀어낸 적도 있었지만 불과 1주일 만에 한신에 스윕당하며 도로 최하위로 돌아왔다. 여기에다가 시즌 중 번트 남발, 9월 1일에는 다얀 비시에도가 23타석 연속 무안타를 기록하고 새 외국인 선수 페드로 레비라가 1할을 기록하는 등 타격에서도 나쁜 평을 받고 있으며, 조언을 구한답시고 야구계의 대표적 꼰대로 악명높은 히로오카 타츠로에게 조언 요청을 하는 등 시대착오적인 구식야구 마인드가 문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주니치 팬들에게는 팀 레전드임에도 불구하고 민심이 상당히 험악한 편이다. 지역 방송국에서 타츠나미를 응원한답시고 '타츠나미 감독에게 제안합니다(立浪監督提案です)' 해시태그 메시지 기획을 했는데, 응원보다 사임하라는 메시지가 훨씬 더 많이 나왔다고 한다. 같은 1년차 감독인 신죠 츠요시는 신인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등 리빌딩 측면에서 이해를 받고 있으나[17], 타츠나미는 오히려 네오 아키라의 포지션 전향이나 쿄다 요타 트레이드 루머까지 겹쳐서 비판만 받고 있다.

이러다 보니 2022 시즌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타츠나미 감독 잔류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으며 그러한 예언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든 26경기 영봉패를 기록하며 성적 추락이 이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 "내년에도 여러분들이 뜨거워지는 시합을 늘려나가겠다"라는 코멘트를 남겨 다른 의미로 팬들을 뜨겁게 만들었고, 경기에서 지면 선수를 탓하는 인터뷰까지 해서 안 그래도 좋지 못한 평가를 더욱 떨어지게 하고 있다. 또한 시즌 내내 장타 생산능력이 쥐약이라 팀 전체가 무라카미 무네타카와 홈런왕 경쟁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나마 최종적으로 62홈런으로 무라카미의 56개를 제치면서 2011년 치바 롯데 마린즈와 같은 참상을 겪는 것은 면했다. 그거 자랑 아니야..[18]

결국 9월 27일 올 시즌 주니치의 천적이 되어버린 요코하마와의 경기에서 지면서 B클래스가 확정되었고, 9월 29일에는 6년 만의 최하위도 결정나고 말았다. 팬들은 타츠나미가 빨리 물러나는 것을 기원하고 있지만 내년에도 타츠나미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정해졌다. 1년차의 처참한 성적에 대해 최하위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며 팬들에게 스트레스가 쌓이는 시즌이 된 데 대해 사과드린다는 말을 남기고, 쿄다 요타를 대한 방식이 문제가 있다면서 후회했다.

리그 대전성적은 야쿠르트 14승 1무 10패, 히로시마 15승 10패, 한신 및 교진 모두 12승 13패 등 대부분의 팀을 상대로 생각보단 준수한 성적을 마크했으나, 요코하마를 상대로 6승 1무 18패, 승률 .250으로 완전히 폭망한 데 이어 해결되긴 커녕 더 나락으로만 떨어지는 팀 타격 저하가 결국 최하위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시즌 종료 후 주니치의 빈타에 큰 역할을 했던 하루 토시오 1군 타격코치는 오릭스 육성 치프코치로 갔다. 하루의 후임은 와다 카즈히로. 안 그래도 타자들이 부실하여 퍼시픽리그 팀홈런 꼴찌를 기록한 오릭스에서도 하루의 한심한 타격코치 능력을 보고 보직전환을 한 듯(...). 또한 타츠나미가 투수들에게 스플리터를 기본적으로 장착할 것을 요구한 것도 패스트볼 위력 저하의 우려가 있어서 팬들은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11월 3주차에 아베 토시키교다 요타를 트레이드로 연달아서 보내 버리며 팬덤을 한바탕 뒤집어놓았다. 교다는 본인이 거의 전력외 취급을 했기에 그러려니 하지만 팀 공수 모두에서 상당 지분을 차지하던 아베의 트레이드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특히 교다는 선수회장까지 했기에 차기 선수회장을 맡은 야나기 유야도 이제 타팀으로 갈 거라는 루머가 있다.

또한 2022년 시즌 종료 뒤 팬 감사제에 모습을 비추지 않는 것은 물론, KT 위즈에서 부실한 워크에씩으로 비판을 받은 조일로 알몬테를 다시 영입하고 알몬테를 4번타자로 쓰겠다고 밝혀서 비판을 받고 있다. 구현모나도현에게 비자금장부를 털렸나 보다 하지만 팬들은 팬감사제에 대해서는 시즌 내내 웃는 모습이 없었던 선수들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오히려 좋아하고 있다(...).

또한 포수 영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포수 트레이드 유력 상대였던 히로시마에서도 트레이드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결국 롯데로 트레이드 시켰던 카토 타쿠마를 무상 트레이드로 받아와서 어찌저찌 영입을 하긴 했지만...


4.2. 2023년[편집]


개막전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선발투수 오가사와라 신노스케에게 145구나 던지게 하는 운영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19] 상대 감독 하라 다쓰노리와의 구식야구 맞대결의 절정으로 야구팬들은 혀를 내둘렀다.

공격에서 장타가 터지지 않으며 점수가 안 나는 변비야구의 끝에 개막 4경기만에 최하위로 처졌다. 하지만 요미우리도 같이 하위권에 처진 덕분에 한 때 요미우리를 잡고 최하위 탈출을 하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4월에 분전했다. 그러나 117이닝 무홈런, 8차례의 영봉패, 팀 홈런 겨우 6개(...)에 빛나는 초라한 타선과 전년도에 이어 요코하마에게 0승 5패로 또 호구를 잡힌 상대전적으로 인해 4월을 최하위로 마감했다.

5월에도 투수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못하는 타선과 수비가 말썽을 일으키면서, 야나기와 오가사와라마저 대량실점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알몬테 등 외국인 선수[20]들마저 부진하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초고속으로 30패를 찍을 것이라면서 걱정하는 중.

5월 30일 소프트뱅크와의 교류전에서 패하며 결국 30패를 찍었다.

6월에도 타선은 여전히 차도가 없어 오노 유다이, 야나기 유야, 타카하시 히로토[21], 오가사와라 신노스케 등이 QS, QS+를 기록해도 투수진의 패전과 ND만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며, 한미일 프로야구 최초로 선발 로테이션 전원이 윤석민상에 거론되고 있다. 팬들은 그의 사퇴를 외치고 있으며, 득점지원이 지나치게 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주니치 투수를 다룬 기사들에는 응원팀이 어디든 대동단결하여 주니치 투수들을 위로하는 댓글로 넘쳐나고 있다. 그나마 요코하마에서 데려온 호소카와 세이야가 맹타를 휘두르면서 주니치 타선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게 팬들에게는 위안거리.

교류전 기간 동안 덕아웃에서 쓰레기통을 걷어차는 모습이 포착되어[22], 킥보스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생겼다.[23] 그래도 이 해 같이 망한 야쿠르트가 최하위권을 돌다 보니 어쩌다가 하루씩 야쿠르트를 밀어내고 최하위 탈출을 하긴 했으나 7월 이후로는 완전히 최하위에 처박혔고 8월 들어 와장창 무너지고 있다.

8월 23일 오후에는 감독이 "쌀밥먹지 말라고 밥솥을 치워버렸다(...)"는 기사가 올라오며 일본 야구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24] 찌라시 황색언론으로 유명한 zakzak발이긴 하지만 무려 구단 공식으로 올라온 경기 시작 전 원진 영상 중에 "오늘 식당에 들어갈 때 쌀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쌀밥 클럽(米米CLUB)'[25]이 아니라 '밥없는 클럽(米なしCLUB)'이니 (오늘의 구호는) '밥 없는 클럽'으로 갑시다."라고 말하는 것[26]이 있어 기사의 신빙성을 증폭시켰다(...) 이로써 주니치는 일본제국(中日本帝国)이라는 별명이 또 하나 붙었다.[27] 안그래도 최근에 츄니치 도라곤즈를 줄인 '츄니도라(チュニドラ)'가 어감이 멍청해보인다는 이유[28]로 주니치의 멸칭으로 자리잡았는데 불명예스러운 기록과 별명을 만들어가는 대단한 선배(...)

사실 저 쌀을 뺀 것은 타츠나미 본인이 겪은 실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현역 시절 메이지 진구 구장 원정 경기에서 타츠나미가 벤치 뒤에 양손에 주먹밥을 쥐고 뺨을 부풀렸는데, 당시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이를 보고 격분한 것. 얻어맞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호시노는 당분간 구장에 밥 제공을 끊어버리고 바나나 등만 줬던 적이 있었다. # 이 때문에 호시노 센이치가 한 행동을 따라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덤으로 이 쇼와를 넘어 다이쇼, 메이지 시대까지 소환되는 초유의 꼰대력 무브로 인해 타츠나미가 프로 데뷔 직후에 찍은 SSK 야구용품 CM[29]이 재발굴되고, 아베 토시키가 준수한 성적을 내고도 오프시즌에 트레이드된 것이 사실은 친가가 쌀집을 하기 때문이었다는 네타가 돌았다. 시즌 종료 이후엔 하술할 벌투 사태의 피해자이자 시즌 종료 후 방출된 콘도 렌이 좋아하는 우마무스메 경주마로 라이스 샤워를 꼽으며, 야마이 다이스케의 조언으로 우카이 코스케가 캠프에 즉석밥을 가져가고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한 쿠사카 쇼가 간식으로 주먹밥을 먹으면서 10kg을 찌우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또다시 네타화되었다(...).[30] 그러나 후에 밝혀진 진실에 따르면 이나무라 아미가 타츠나미 본인에게 알아본 바에 따르면, 경기 전 투수들이 경기 1시간 전 규동 등을 만들어 먹어서 그러면 몸이 안 움직인다고 주의시켰더니 말을 안 들어서 밥을 치웠다고 하며, 경기 종료 이후에는 제대로 밥을 제공해 줬다고 한다.

같은 날 교세라 돔 오사카 한신전 원정에서, 전날 세운 1959년 이후 64년만의 원정 최다 연패 기록을 넘어 원정 14연패라는 구단 최악의 신기록을 달성한데 이어 3실점 이상 경기 17연패 및 최근 1승 30패라는 말하기도 참혹한 수준의 기록을 경신해나가는 위엄을 보였다. 이런 끔찍한 기록을 달성하고도 경기 후 인터뷰에서 "프로의 집단인데 한심하다"라며 끝까지 선수탓만 하는 추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8월 25일 요코하마 홈경기에는 2020년 육성 1위로 뽑은 콘도 렌을 9회에 패전처리로 올려 62구[31]를 던지게 하는 벌투를 선보이며 주니치 팬은 물론이요 요코하마 팬들에게까지 비판을 받았다. 오죽했으면 상대팀 요코하마 팬들도 콘도가 사구를 던지자 오히려 안타깝게 여겼다. 18-2라는 처참한 점수차로 대패하면서 역대 나고야 돔 한 경기 최다 실점 신기록 2위를 달성했다. 여기에다가 전년도에 이은 이번 년도에도 요코하마 상대 열세 확정. 그리고 이 벌투 사건은 다음 날 한국 언론에까지 기사로 올라왔다. 이날 상대팀 선발투수였던 트레버 바우어마저 보다못해 격려의 메세지를 남길 정도였다.

9월에는 아예 10일에 선발 로테이션 4명 전원이 10패를 찍는 등[32] 상황은 더 나빠져서, 타츠나미 사퇴해(立浪辞めろ)가 일본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오르는 등 팬들의 민심은 점차 험악해져만 가고 있다.

현역 드래프트로 건져온 호소카와 세이야가 자리를 제대로 잡은게 올해 최대의 수확이고 트레이드 건도 그나마 성공한 사례는 우사미 신고, 사이토 코키 정도 뿐이다. 그나마 와쿠이-아베 트레이드는 초반만 해도 아베가 삽을 푸는 바람에 중반 이후로 아베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33] 와쿠이는 타선지원 결핍으로 결국 패작만 해서 체감상으로는 주니치가 망한 것 같지만 WAR 0.3vsWAR 2.0으로 와쿠이가 일단 더 팀에 요긴하긴 했다. 다만 와쿠이는 에이징 커브가 온 것이 확실해 보여서 장기적으론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인 게 변수. 마지막으로 스나다-쿄다 트레이드는 플래툰으로라도 1군 스타팅 라인업에 자주 선 쿄다에 비해 스나다는 그냥 망했어요 수준이라 재평가 그런 거 없이 그냥 실패한 트레이드다.

거기다 9월 15일, 구단 측에서 내년까지 타츠나미 감독을 유임시킬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팬들 반응은 그야말로 대경실색.#상혼을 담아 부를 때 빼고는점잖고 구단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주니치 팬들조차 참지 못하고 구단과 타츠나미 비판에 열을 올렸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오가사와라 신노스케도 소식을 접하고 새벽에 자신의 X(트위터)계정에다가 대놓고 "으~음 (うーん。)"이라고 썼다가 지워버리는 해프닝까지 있었을 정도였다.'지움당한' 것은 아니겠지?

그러다가 시즌 극후반에 팀이 승수를 챙기고 야쿠르트가 패를 쌓으면서 5위에 부상, 2년 연속 최하위를 면할 좋은 기회가 생겨났다. 하지만 시즌 최종전에서 요미우리에 패배하며 자력으로 5위를 확정 지을 기회를 날렸고 결국 야쿠르트와 한신의 맞대결 결과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는 운명에 처했다. 그리고 한신이 야쿠르트에게 끝내기 희생 플라이를 맞고 지면서 주니치는 2년 연속 최하위를 면하지 못했다.

일본 인터넷상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까인 감독인데[34], 심지어 해외에까지 잘 알려진 모양인지 카메룬에 사는 유튜버에게 타츠나미는 아프리카로 망명하지 않겠는가? 소리를 들었다(...).


5. 기타[편집]



  • 화려한 선수 실적과는 별개로 사생활 면에서는 주간지를 통해 야쿠자와의 연관설, 성추문 문제가 여러 번 보도된 적이 있는 등 다소 논란이 있었다. 선수 은퇴 후 2022년까지 주니치에 지도자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로 ‘보수적인 성향의 주니치 프런트가 타츠나미로 인해 구단 이미지가 추락하는 것을 우려하여 복귀를 강력 반대했기 때문이다’라는 카더라가 유력한 설로 돌아다녔을 정도.

  • 위에 적혀 있는 영 좋지 못한 소문이 도는 사생활이나, 똥군기로 악명 높던 PL학원고등학교 출신이란 점 때문에 일본 야구 커뮤니티에선 타츠나미가 언급될 때마다 관련 태그나 댓글로 대단한 ○○[35]야쿠자가 거의 따라붙으며, 관련 밈으로 타츠나미에 대해 어떤 언급이 나오든 야쿠자가 관련인물을 입막음으로 사살하는 것처럼 타츠나미가 아예 자신에 관한 언급 자체를 못하도록 댓글을 단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인다는 네타[36]까지 있다(...).



6. 관련 문서[편집]


[1] 태어난건 스이타시지만 자라는건 인근의 셋츠시에서 성장했다.[2] 선수겸임.[3] 정확히는 '제3대' 미스터 드래곤즈이다. 초대는 니시자와 미치오, 2대는 타카기 모리미치.[4] 이후 스즈키 테츠는 사회인야구 소속으로 1988 서울 올림픽에 출장하여 은메달을 건 뒤 1989년 드래프트 2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지만 프로에서는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히로시마 트레이드-세이부 재복귀의 우여곡절을 거쳐 1997년을 끝으로 은퇴했다.[5] 주니치에게 타츠나미의 교섭권을 내준 난카이는 대체 1위 지명으로 사회인야구팀 혼다기연 쿠마모토 소속 투수 요시다 토요히코를 지명했는데, 비록 타츠나미만큼의 성적을 내진 못했지만 이쪽도 신인 시즌부터 주전으로 자리잡아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호크스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로 활약했고, 이후 한신-킨테츠-라쿠텐 3구단에서 중간계투로 활약하다 2007년 은퇴했다. 은퇴 당시에는 난카이 호크스 최후의 투수이자 난카이 시절 1군 출장 경험이 있었던 마지막 현역 선수이기도 했다.(호크스 최후의 선수 자체는 타자였던 오미치 노리요시가 마지막이지만, 오미치는 난카이 시절 1군 출장 경험이 없었다.)[6] 이 해에 수비율 0.997을 기록했지만 골든글러브는 한신 타이거스와다 유타카가 가져간다.[7] 이러한 수비방식이 96년 여타 주니치 내야진의 불안함과 더해져 선동렬의 .382라는 충격적인 BABIP수치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8] 일단 사유는 타츠나미의 고질적인 어깨 부상으로 인해 송구능력에 불안이 생기면서였다.[9] 단 이것은 리그 우승 프리미엄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게 중론. 멀리 갈 것도 없이 요미우리 자이언츠고쿠보 히로키타율 .314 41홈런 96타점, 야쿠르트 스왈로즈이와무라 아키노리타율 .300, 44홈런 103타점의 괴물 성적을 냈지만 타츠나미의 우승 프리미엄에 밀려 베스트나인에 선정되지 못했다. 희한한 것은 그럼에도 수비를 평가하는 골든글러브는 이와무라가 가져갔다는 것. 이 해는 리그 전반적으로 타고투저 경향이 강해 강타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넓은 홈구장에서 수비적인 야구를 했던 주니치가 우승을 차지해 주전 1루수였던 와타나베 히로유키가 규정타석에 미달한 채 타율 .286, 2홈런 22타점으로 1루수로썬 너무 빈약한 타격성적을 기록했던 1루를 뺀 모든 내야 포지션(3루 타츠나미, 유격 이바타 히로카즈, 2루 아라키 마사히로-그렉 라로카 공동수상.)의 베스트나인을 가져갔다. 게다가 그 1루마저도 와타나베가 1루수 사상 첫 규정타석 미달 골든글러브 수상 기록을 세웠다. 해당 포지션의 강타자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일수도.[10] 특히 야나기 유야가 똥 씹은 표정으로 타츠나미를 바라보는 짤은 5ch에서 하나의 네타거리가 되었다.[11] 1989년생 노망주 아베 토시키가 주전이다. 언제라도 에이징 커브 걱정을 해야 할 때.[12] 타츠나미 본인이 현역일 때 뛰던 후쿠도메 코스케가 직전 시즌까지 준주전으로 뛰었다.[13] 감독 본인은 싸우는 사람의 얼굴 표정이 아니라는 이유를 댔다. 상황 설명. 정작 교류전까지 시즌 무안타에 그치던 후쿠도메 코스케나믿후믿을 과하게 시전한 게 함정이었지만. 그리고 이 인터뷰와 스프링캠프 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금지한 전례 덕분에 이후 주니치 선수단이 단체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거나, 타츠나미가 특정 선수를 중용하는 건에 대해 싸우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라는 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시즌 후 교다 요타는 요코하마로 트레이드되었다.[14] 여기에는 나카무라 코치가 지나치게 거포 육성에만 신경쓰는 걸 못마땅해서라는 소리가 있다.출처[15] 12승 6패. 한신 구단 역대 교류전 최고 성적 기록이다.[16] 9승 9패. 최근 3번의 교류전 동안 모두 5할 이상에 성공했다.[17] 키요미야 코타로 외에도 마츠모토 고, 만나미 츄세이 등 그동안 기회를 받지 못하던 백업 선수들이나 유망주들을 밀어줬고, 비록 시즌 성적 자체는 투수진의 부진으로 9년 만의 최하위로 떨어지고 주니치보다 더욱 나빴지만 적어도 공격력은 궤멸 수준이었던 2021년보다 괜찮아졌다.[18] 참고로 개인 기록 1위가 팀 전체 기록을 추월한 사례가 도루에서 나왔는데, 도루왕 치카모토 코지는 30도루를 기록하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팀 도루수인 26개를 넘었다. 그래도 카프는 점수라도 잘 냈다[19] 7회까지 이미 120구를 던지며 1실점으로 승리요건을 만들어놓은 상황이었다. 결국 나카타 쇼에게 2타점 3루타를 얻어맞으면서 패전 위기에 몰렸었다.[20] 알몬테는 결국 2군으로 내려가 버렸다.[21] 주니치스포츠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의 멘탈 관리법으로 게이오기주쿠대학 불합격 통지서를 보고 있다고 하는데 6월 초까지 득점지원이 고작 6점일 정도로 더 악몽같은 상황이 2023년 시즌에 펼쳐지고 있다(...).[22] 6월 16일 닛폰햄과의 홈경기때 일어난 일로, 1:1 동점 상황 + 2사 1, 3루 상태에서 1루 주자 카미카와바타와, 3루 주자 만나미 츄세이가 더블 스틸을 시도했다. 그런데 카미카와바타가 뛰려다가 넘어져버리는 바람에 오가사와라는 그 곳에 신경 쓰느라 홈으로 가는 만나미에게 공을 던지지 못했고 그 사이에 만나미는 빠르게 홈에 들어왔다. 카미카와바타는 결국 2루로 가다가 아웃됐지만 만나미가 홈베이스를 밟은 게 먼저라 득점이 인정되어 역전당했고 쓰레기통을 찬 씬은 그 직후에 발생했다. 그리고 이 때 만나미가 얻은 점수는 결승점.[23] 이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신조 츠요시 감독이 취임 첫 해 등록명으로 사용했던 빅보스를 비튼 표현이다. 덕아웃에서 화를 못참고 기물을 파괴하는 건 스승인 호시노 센이치를 연상케 한다. 닮아도 이런 것만 닮는다[24] 원래는 투수와 스태프를 포함 구단 전 인원에 밥 제공이 중단되었으나 투수진은 외국인 클로저 라이델 마르티네스가 총대를 매고 항의해 밥 제공이 재개되었다는 내용, 익명의 주니치 관계자가 이 사태를 "쌀 소동"에 비유한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인터넷 야구팬들은 '레이와쌀 소동'(令和の米騒動)이라고 많이들 부르게 된다.[25] 일본의 록밴드 이름인데 밥을 먹을 수 없는 현실을 자조하는 다쟈레이다.[26] 설명하자면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원정 구장에서 홈구장으로 돌아와 쌀밥을 먹을 수 없다는 얘기이다(...)[27] 일제 미화같은 것이 아니고 병사들에게 밥도 제대로 안 먹이면서 정신론만 내세우는 것을 비꼬는 것이다. 누가 생각난다면 그게 맞다(...)[28]중2병을 연상케하는 어감이다.[29] '겨우 야구로 밥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쌀밥을 먹는 타츠나미의 모습이 그려진다.[30] 우카이는 기숙사 밥을 먹고 우버이츠로 야식을 시켜먹을 정도로 식사량이 많다.[31] NPB 역대 1이닝 최다 투구수 2위이다.[32] 이 정도면 전원이 윤석민상 후보에 들어간다. 야나기 유야타카하시 히로토는 평균자책점이 2점대 초~중반인데도 10패를 찍었으며, 특히 오가사와라 신노스케는 평균자책점이 3점대 초반대이지만 타츠나미의 어이없는 투수 교체 타이밍으로 6~8회 실점이 많았는데다, 개막전부터 145구 혹사를 당하는 등 가장 험한 꼴을 당하며 10패를 찍었다. 코어 내야수 아베 토시키를 내주고 데려온 와쿠이 히데아키그냥 못해서(...) 전반기에만 10패를 찍었으며 안그래도 어려운 구단 살림에 페이롤만 잡아먹는 괴물이 되었다. 근데 총 13패를 거둔 와쿠이의 시즌 최종 평균자책점은 3.97로(21경기 111이닝 동안 거두었다.), 투고인 일본리그 특성상 썩 잘한 것은 아니지만 4-5선발급은 충분히 되었다. 강팀 선발이라면 저정도 성적으로도 시즌 10승을 거두는 판이니 와쿠이는 그냥 에이징 커브를 맞은 상황에서 자기 할 만큼 했는데 팀 성적이 막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33] 애초에 초반부에는 라쿠텐 타선 전원이 물빠따였고 거기에 아베도 똑같이 물빠따였을 뿐이었다. 다만 아베는 워낙 타격부진이 심해서 7월 이전엔 1군과 2군을 오갔다가 8월부터 원래 폼을 되찾으며 라쿠텐의 상승세를 이끌었다.[34] 신조 츠요시는 그래도 만나미 츄세이를 리그 최고의 타자로 키워냈으며, 악플로부터 앞장서서 선수를 보호하려고 하여 선수관리 면에서 호평을 들었다.[35] 같은 학교나 팀 후배들이 인터뷰에서 타츠나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대단한 선배님(素晴らしい先輩)라고 언급한 것이 그 유래. 보통은 선배님을 빼고 다른 관용구를 붙이는데 이 중 야쿠자가 적잖은 수를 차지한다(...)[36] 이 네타의 경우, 십중팔구 대댓으로 격발음(일명 "팡(パァーン)")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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