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치바나노 카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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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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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다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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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슌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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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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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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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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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고 후


무라카미 후






레이제이 후


엔유 후






엔유 후


이치조 후






산조 후


고이치조 후


고스자쿠 후






고스자쿠 후


고레이제이 후






고산조 후


시라카와 후


호리카와 후






호리카와 후


도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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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라카와 후


니조 후






니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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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리카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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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즈노오 후


고코묘 후


고사이 후


레이겐 후






레이겐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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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미카도 후






사쿠라마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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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모조노 후






고카쿠 후


닌코 후






고메이 후


메이지 후




근현대


메이지 후


다이쇼 후


쇼와 후


아키히토 후






나루히토 후






파일:Empress_Danrin.jpg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橘 嘉智子 / 檀林皇后
786 ~ 850 (향년 64세)

헤이안 시대 초중기의 황후. 52대 사가 덴노의 황후이자 54대 닌묘 덴노의 어머니. 시호는 단린 황후(檀林皇后).

역대 황후 중 유일한 타치바나 가문 출신이었다.


2. 생애[편집]


타치바나노 모로에의 아들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 721~757)의 손녀이자 타치바나노 키요토모(橘清友, 758~789)의 딸이다.

자식으로는 훗날 닌묘 덴노로 즉위하는 차남 마사라 친왕(正良親王)과 마사코 내친왕(正子内親王, 810~879), 히데라 친왕(秀良親王, 817~895), 히데코 내친왕(秀子内親王, ?~850), 토시코 내친왕(俊子内親王, ?~826), 5녀인 요시코 내친왕(芳子内親王, ?~839), 시게코 내친왕(繁子 内親王, ?~865)이 있었다. 사가 덴노의 아내들 중 가장 많은 자식들을 낳았던 것으로 보아 금슬은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타카츠 내친왕이 폐비된 탓인지 사가 덴노의 장남인 나리요시 친왕(業良親王)은 즉위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타치바나노 키요토모(橘 淸友)는 777년에 발해에서 사신으로 온 사도몽(史都蒙)으로부터 관상을 본 적이 있는데, 사도몽은 "자손 중에서 귀한 사람이 나올 것이나, 당신 자신에게 그 복이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딸 카치코가 황후가 되고 그 소생이 닌묘 덴노로 즉위한 것과는 달리 키요토모는 32세에 병사함으로서 사도몽의 예언은 맞아 떨어졌다.[1]


3. 기타[편집]


단림황후라는 시호는 그녀가 단림사[2]를 건립한 데서 유래했다.

그림만 봐서는 잘 부각이 안 되지만 단림황후는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던 것으로 유명해 승려신관들조차 그 용모를 보고 제대로 수행에 정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유일무이한 타치바나씨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움도 상당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야사이자 일화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타치바나노 카치코는 죽기 전에 자신의 시신을 땅에 묻지 말고,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버려서 썩어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제행무상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과정을 그린 그림이 '단림황후구상도(檀林皇后九相図)'.[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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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일화는 일본 소설 겐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고려인 관상가 대목의 모델이 되었다.[2] 교토 사가노에 있었던 선종의 사찰. 단림황후 사후 급격히 쇠락하여 이치죠 덴노 시기 즈음에 폐사(廢寺)되어 없어졌다.[3] 여기에서 이 구상도를 관람할 수 있으나 다소 불쾌할 수 있으니 주의. 교고쿠 나츠히코항설백물어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인 '가타비라가쓰지'는 이 일화에서 등장하는 단림황후의 시신을 버렸다는 교토의 지명을 소개하고 그것을 모티브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세한 사항은 구상도 문서 참조.